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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에서 1호가 될 순 없어

웹소설 > 일반연재 > 대체역사

스페란자
작품등록일 :
2023.05.10 10:30
최근연재일 :
2023.05.21 18:04
연재수 :
15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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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79,171

작성
23.05.12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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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4화. 쇼타임(2)

DUMMY

불과 10분 전까지만 해도 새롭게 즉위한 왕에 대한 기대로 열광하던 수만 명의 시민.

그러나 그들은 이제 막 대관식을 치른 왕이 갑자기 입고 있던 걸 벗어던지며 팬티 바람에 왕관만 달랑 쓴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되자 경악했다.

그리고 이에 질세라 자신도 덩달아 걸치고 있던 값비싼 장신구를 내동댕이치는 왕비에 모두가 할 말을 잊고 서로의 눈치만 살폈다.

그러나 이렇게 무대는 마련됐고, 이제 주인공이 나서야 할 타이밍이었다.


“다시 묻겠다. 그대들의 왕이 이런 모습이라 부끄러운가?”


다시 한번 목소리를 높였으나 이번에도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오히려 나와 눈이 마주치자 모두가 내 시선을 피하기에 급급했다.

게다가 성당에서 나온, 소위 있는 놈들은 노골적으로 불쾌하다는 표정마저 지었다.


‘언제까지 그렇게 고상 떨 수 있는지 보자.’


이번 연극의 주연은 당연히 나다.

그리고 평민이 조연, 저들은 고작 엑스트라에 불과했다.

다시 시선을 평민들에게 돌려 찬찬히 그들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그럼 그대들 자신은 어떠한가? 다해진 옷, 홀쭉한 뺨과 앙상한 팔다리가 부끄럽지 않은가?”


그 말에 자신의 행색을 살펴보던 평민들이 힘없이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 있는 놈들은 그런 평민들을 비웃었다.

여전히 그들은 내가 든 칼의 칼끝이 어딜 향하는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하지만! 하지만 나는 그대들이 나의 국민이라는 게 부끄럽지 않다.”


이 말에 다시 고개를 든 평민들이 의아한 눈으로 벌거벗은 왕의 입을 주시했다.


“너희가 다 해진 옷을 입고 굶주리는 게 누구의 잘못인가? 너희가 게으름을 피웠나? 너희가 사치와 향락을 일삼았는가? 너희가 전쟁을 일으켰는가?”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어리둥절하던 것도 잠시, 점차 평민들의 눈에 억울함이 서렸다.

그리고 곧 그 억울함은 눈물로 화했다.


“그대들은 아침부터 밤까지 죽어라 일했다. 그렇게 번 돈으로 나라에 세금을 바쳤다. 교회에 십일조도 바쳤다. 그리고 이 땅에 전쟁이 나면 앞장서 싸웠다. 그런데도 그대들은 왜 헐벗고 굶주리는가!”


점차 시민들의 눈에 담긴 감정이 억울함에서 분노로 바뀌는 게 보였다.

그러자 그동안 그들을 비웃던 자들의 얼굴이 굳어졌다.


“내가 이렇게 벌거벗은 건 그대들에게 미안해서다. 그대들이 헐벗고 굶주리는 건 그대들의 잘못이 아니다. 그 책임은 오롯이 이 땅의 주인이자 그대들의 왕인 내게 있다.”


그러자 평민들의 눈에 서린 분노가 이내 눈물이 되어 흘러내렸다.


‘그동안 아무도 이렇게 이야기해주지 않았겠지. 모두가 가난과 굶주림은 너희가 못난 탓이라고 비웃기만 했을 테니.’


상황이 예상과 다르게 흘러가자 있는 놈들 중 눈치가 빠른 몇몇 놈은 얼굴에 초조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대주교, 앞으로 나오세요.”


다른 사제들과 함께 왕의 기행을 구경하던 대주교는 난데없는 왕의 호명에 어리둥절하다 앞으로 나와 내 앞에 섰다.


“부르셨습니까? 폐하.”

“저들은 자신이 굶주리고 헐벗더라도 주님께 십일조를 바칩니다. 저들이 내는 십일조가 부족합니까?”

“.. 아니옵니다.”

“프랑스는 십일조와 교회 재산에 대한 조세를 거두지 않습니다. 이유를 알고 있습니까?”

“교회의 재산은 모두 주님의 것입니다. 어찌 주님의 것에 세금을..”

“틀렸습니다. 그대들이 세금을 내지 않는 건 그대들이 이 나라를 위해, 그리고 이 땅의 국민을 위해 주님께 기도를 올리기 때문입니다.”


대주교는 이 말에 불만이 있어 보였지만 단호한 내 표정을 보아서인지 항변하기보다는 침묵을 택했다.

어느새 시민들은 나와 대주교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런데 왜! 왜 이 땅에 가뭄이 닥쳐 국민이 고통받습니까? 혹 그대 같은 사제들의 기도가 절실하지 않았던 건 아닙니까? 그래서 주님께서 이 땅에 벌을 내리고 있는 건 아닙니까?”


예상치 못한 말에 당황한 대주교가 말문을 잃는 동안 시민들의 눈에는 다시 분노가 일렁였다.


“저, 폐하. 아니옵니다. 저희는 이 나라와 폐하를 위해 주님께 기도를 올립니다.”


내가 만약 여기서 사제의 불성실한 기도가 주님의 분노를 사 프랑스에 가뭄이 들었다고 시민들을 선동한다면 상황이 어떻게 흘러갈까 하는 생각도 잠깐 했다.


‘프랑스가 뒤집히겠지.’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대주교가 식은땀을 흘렸다.


“대주교.”

“예, 폐하.”

“우리 프랑스가, 주님의 자식인 프랑스 국민이 처해있는 상황이 어렵습니다. 그래서 그대에게 부탁할 것이 있습니다.”


내 입에서 나올 말이 뭔가 심상치 않음을 직감한 듯 대주교의 얼굴이 굳어졌다.


“상황이 좀 나아질 때까지 교회의 재산과 십일조에 대한 세금을 부과했으면 합니다”


순간 휘청거리는 대주교.

토지로만 전 국토의 10% 정도를 소유하고 있는 어마어마한 부를 가지고 있었던 교회.

그러니 만약 조세를 걷을 수만 있다면 어마어마한 조세 수입 증가가 이뤄질 것이었다.

더불어 자신들만 세금을 낸다는 것에 분노하는 평민들의 불만도 어느 정도는 줄어들 것이 확실했다.


"부탁합니다. 대주교."


일언지하에 내 제안을 거절하고 싶어 하는 기색의 대주교. 그러나 그는 이번에도 침묵했다.

그를 주시하는 수만 쌍의 눈이 이 제안을 거절하면 절대 가만있지 않겠다는 무언의 압박을 그에게 주고 있어서였다.

자칫 자신의 말 한마디에 자칫 프랑스 전역에서 사제를 표적으로 한 대규모 유혈사태가 발생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서였을까 그의 다리가 후들거렸다.


“.. 먼저 교황 성하의 재가가..”

“아니죠. 아닙니다. 나는 프랑스 내의 교회만을 말하는 겁니다. 그리고 혹여 이 일로 어떤 문제가 발생한다면 내가 직접 교황께 갈 겁니다.”


입술을 꽉 깨문 채 다시 고민에 빠진 대주교.

나는 그의 선택에 약간의 도움을 주고자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잘 생각하세요. 대주교의 말 한마디에 성난 시민의 분노가 어디로 향할 지를요.”


그 말에 자신을 매섭게 노려보는 수만 명을 본 대주교는 결국 고개를 떨궜다.


“받아들이겠습니다.”


대주교가 대답과 동시에 고개를 떨구자 우레와 같은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랭스에 도착하고 들었던 함성 중에 가장 큰 환호성.

물론 그의 목소리가 여기 모인 모두에게 들릴 만큼 크진 않았다.

그러나 대주교가 고개를 떨군 것의 의미만큼은 이 자리에 모인 모두가 알 수 있었다.


‘그래도 도장은 확실히 찍어야지.’


자신이 저지른 일이 얼마나 큰일인지를 새삼 느끼며 비틀거리는 대주교의 한쪽 손을 잡고 번쩍 들어 올렸다.


“다들 대주교의 말을 들었는가? 신의 사자는 이 나라와 이 나라 국민의 어려움을 외면하지 않았다. 그러니 그대들 또한 주님의 은총이 다시 이 땅에 내려질 거란 걸 의심하지 말라!”


또다시 엄청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사방에 두 손을 붙잡고 기도를 올리는 사람,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부지기수였다.

그러나 이 연극의 클라이맥스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아직 잡아야 할 돼지 새끼가 한 마리 더 있으니까.’


축 처진 어깨로 비틀거리며 사제들이 모인 곳으로 되돌아가는 대주교를 보다 그 옆에서 당혹스러운 눈으로 나를 보던 귀족들과 눈이 마주쳤다.

그들을 향해 씨익 웃어주며 다시 주먹 쥔 손을 들어 올리자 언제 그랬냐는 듯 대중의 환호성이 뚝 끊겼다.

이미 시민들의 눈은 이 벌거벗은 왕이 다음에는 무엇을 또 보여줄지 하는 기대감으로 초롱초롱 빛나고 있었다.

긴장한 얼굴로 나를 응시하는 귀족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오를레앙 공작은 앞으로 나오라.”


그 말에 귀족들의 시선이 일제히 한 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한 거구의 남자가 무표정하게 걸어나왔다.


‘루이 필리프 이 멍청했던 새끼..’


프랑스 역사, 특히 프랑스혁명기를 공부하다보면 그 사람의 일생을 보는 것만으로 고구마 백 개를 먹은 듯한 답답함이 밀려오는 인물이 있다.

그리고 그중 가장 독보적인 인물이 루이 16세인 루이 오귀스트와 오를레앙 공작인 루이 필리프였다.

비록 다 망해가는 나라였지만, 단 한 번이라도 본인의 의지만 확고했다면 단두대에서 목이 잘리는 일은 결코 없었을 루이 16세.


‘그리고 자신이 왕이 될 생각에 왕정을 무너뜨리려는 프랑스혁명을 지원한 루이 필리프..’


더욱이 루이 필리프는 부르봉 왕가의 왕족으로 당시 왕위 계승 서열 1위에 프랑스에서 제일가는 부자였다.


‘프랑스 땅의 5%인가가 자기 영지라고 했었지.’


아흔아홉 가지를 가진 그가 왕위라는 가지지 못한 단 하나를 갖기 위해 한 짓거리가 혁명을 지원하는 거였다.

그래서 그는 혁명 이후 왕위에 올랐을까?

천만에, 그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혁명을 지원했고, 혁명 성공 후 루이 16세의 처형안에도 찬성표를 던져 그를 단두대에 세우는 데 성공했지만, 그 역시 얼마 후 단두대에서 목이 잘려 죽었다.


‘한마디로 삽질만 오지게 하다 자기 무덤 판 케이스지.’


아무튼, 미래에 단두대에서 머리가 댕강 잘릴 그가 거만한 표정으로 내 앞에 섰다.


“부르셨습니까? 폐하.”

“그대를 왜 불렀다고 생각합니까?”

“송구하오나 불가합니다.”


미리 철벽부터 치는 모습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래, 순순히 받아들일 거라는 기대는 1도 안 했다.’


앙시앵레짐이라 불리는 구체제에서 꿀을 빨며 어마어마한 부를 축적한 게 오를레앙 가문이었다.

그리고 정중한 말과는 다른 저 도발적인 눈빛을 보니 본인이 왕이 되지 못한 것에 대한 열등감도 엿보였다.

그러나 나 역시 순순히 물러날 생각은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여기는 나를 응원하는 수만 명이 모여있는 내 홈그라운드였다.


“무엇이 불가합니까?”

“귀족에게도 조세를 거두겠다는 말을 하려던 게 아니옵니까?”

“맞습니다. 그런데 그게 왜 불가합니까?”

“귀족에게는 귀족의 의무가 있습니다. 귀족은 조세를 내는 대신 그 의무를 이행하고 있습니다.”

“그 의무가 무엇입니까?”

“.. 귀족은 이 나라를 지키는 칼입니다.”


그의 말에 나도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그런 내 모습이 그의 신경을 건드렸는지 그가 발끈했다.


“무엇이 웃기십니까? 전쟁이 벌어질 때마다 저희는 가문의 재산을 이용해 병사를 무장시킬 뿐만 아니라 목숨을 걸고 전쟁에..”

“아니 아니, 공작은 안 웃깁니까? 칼이라 표현했는데 왜 그 칼은 매번 부러지기만 합니까? 북아메리카에서 부러지고, 인도에서도 부러지고. 대체 그 칼로 적은 언제 벱니까?”


노골적으로 귀족을 힐난하는 말에 필리프뿐만 아니라 귀족 모두의 얼굴이 붉어졌다.


“거기에는 왕실의 잘못도..”

“예 예, 압니다. 그래서 이렇게 발가벗고 시민들 앞에 선 거고요. 공작도 나처럼 벗어보는 건 어때요? 생각보다도 더 시원합니다.”


능청스러운 말에 대화를 듣고 있던 시민 사이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무표정했던 필리프의 얼굴도 어느새 상기되어있었다.


“폐하께서 자꾸 이렇게 저희를 핍박하면 왕실에도 좋을 게 없을 겁니다. 혹 왕실에 돈이 필요한 거라면 제가..”

“아뇨, 됐습니다. 그래서 왕족이자 이 나라 최고 부자인 오를레앙 공작은 이렇게 나라가 힘들고 시민들이 굶주려있음에도 귀족에 대한 과세는 받아들일 수 없다는 말이죠?”


마치 학생이 선생님께 고자질하듯 나는 프랑스 시민에게 필리프를 일러바쳤다.

그러자 자신을 주시하는 수만 개의 눈동자에 필리프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마음속으로나마 왕위를 노리는 그였기에 프랑스 인구 대부분을 차지하는 평민들에게 미움을 받는 건 분명 치명적이었다.


“만약 이 대화가 프랑스 전역으로 퍼져나간다면..”


상체를 살짝 숙여 그의 귓가에 속삭이자 그의 얼굴이 더욱 창백해졌다.


‘이제 막타를 칠 타이밍인가?’


간절한 눈으로 자신을 보는 평민들과 뒤에서 연신 고개를 좌우로 젓는 귀족 사이에서 흔들리는 필리프의 귓가에 다시 한번 속삭였다.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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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에서 1호가 될 순 없어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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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13화. 빈사의 사자상 +5 23.05.21 887 33 11쪽
14 12화. 혁명의 새싹 (2) +6 23.05.20 778 36 11쪽
13 11화. 혁명의 새싹 (1) +7 23.05.19 836 32 12쪽
12 10화. 역사적인 밤 +8 23.05.18 861 27 12쪽
11 9화. 강 건너 불구경 +8 23.05.17 888 38 11쪽
10 8화. 사위 사랑은 장모? +2 23.05.16 908 30 13쪽
9 7화. 내 사람을 얻다 +6 23.05.15 917 32 12쪽
8 마리아 안토니아 (외전) +6 23.05.14 974 33 10쪽
7 6화. 머니머니해도 머니 +9 23.05.14 958 34 12쪽
6 5화. 연극이 끝난 후 +7 23.05.13 1,014 34 13쪽
» 4화. 쇼타임(2) +10 23.05.12 1,102 37 12쪽
4 3화. 쇼타임(1) +6 23.05.11 1,124 35 12쪽
3 2화. 루이 오귀스트 +10 23.05.10 1,218 35 13쪽
2 1화. 마침표 +12 23.05.10 1,224 43 12쪽
1 0. 프롤로그 +10 23.05.10 1,402 37 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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