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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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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등록일 :
2022.05.13 09:55
최근연재일 :
2022.11.02 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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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7,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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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8.11 2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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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황제의 아들 83 시작도 전에 사라지는 것들

DUMMY

14.






대전 소속 시동 레비홀츠는 난감한 얼굴로 맞잡은 손가락을 꽉 움켜쥐었다. 이대로 입을 다물고 있으면 황제의 신경질이 친위병이나 시종시녀를 비롯해 조정 신료들에게까지 일파만파 퍼져나가리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선뜻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어찌 해야 하나. 그는 애꿎은 손톱만 만지작거리며 망설였다. 그가 무언가를 알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듯 슈레디안의 눈길이 레비홀츠 앞에서 멈추었다.


「친위대장이 어디 있는지 아느냐?」


자신에게 흔들림 없이 고정된 싸늘한 눈동자에 작살을 맞은 물고기처럼 레비홀츠는 숨을 멈추었다. 사실 소년은 이 아름다운 황제를 애틋해 하면서도 두려워하고 있었다. 사납게 몰아쳐와 아무 것도 남겨두지 않는 거친 태풍처럼, 그 무엇으로도 제어할 수 없는 황제의 잔혹한 성정은 소년의 마음속에 근원적인 공포를 심어놓았다.


처음 황실에 들어와 그 무엇과도 비할 수 없을 만큼 고혹적인 황제가 수려한 얼굴 가득 사특한 미소를 드리운 채 악의로 점철된 잔인한 명령을 내리는 것을 지켜보았을 때 소년이 느낀 충격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그 후유증 때문인지 한동안 레비홀츠는 슈레디안을 보기만 해도 등줄기에 오싹한 한기가 끼쳐오며 절로 사지가 후들거리는 것을 가누기 위해 고생 아닌 고생을 해야만 했다. 황실의 모든 것이 낯설고, 또 그 이상으로 황제에게 적응하기 어려웠던 그 시절, 레비홀츠는 늘 가시방석 같은 침대에서 흐느끼느라 기나긴 밤을 하얗게 지새우곤 했었다. 밝아오는 새벽빛이 두려워, 그로 인해 황제 앞에 마주서야 할 자신의 처지가 참혹해서 절로 눈시울이 젖어들었다.


그럴 때면 늘 봄볕 같이 온유한 성품의 옛 주인 에이반이 그리워 미칠 지경이었다. 에이반을 섬기며 안온하고 행복했던 시절의 기억이 가슴 속에서 허망하게 부서져 내릴 때면, 레비홀츠는 내심 자신을 이 무서운 황제 곁에 떨어뜨리고 간 옛 주인을 조금쯤 원망하는 마음을 품기도 했다. 아무도 거스를 수 없는 지엄한 황명이라고는 해도, 에이반은 제국 황제의 하나 뿐인 형 아니던가. 두고 가라는 황제의 말에 끝끝내 거역치 않고 그냥 물러간 것이 자신을 지켜주려는 의지가 없어서였던가 싶어 무던히도 서러웠다.


그렇게 길고긴 하루하루가 지나가면서, 레비홀츠 역시 자연스레 깨닫게 되었다. 슈레디안이 무섭기만 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그리고 황제의 잔혹성은 기실 그 무엇에도 기댈 수 없는 깊은 고독에서 기인한 것이라는 사실을. 오만하고 차가운 성품의 슈레디안이 제가 부리는 아랫것들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일 리가 만무했지만, 타인의 감정에 민감한 소년은 그다지 어렵지 않게 새로운 주인의 가슴에 들어찬 지독한 절망과 끔찍한 증오, 그리고 해소되지 않은 외로움을 읽어냈던 것이다. 한 번 연민을 품게 되자, 주인 없는 대전 내의 한 방을 줄기차게 드나드는 황제의 모습이 안식을 위해 성전과 성소를 찾는 길가의 지치고 고된 영혼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새로 대전 친위군으로 들어온 아펠레르를 수년간 황제만의 공간이었던 그 방으로 안내하라는 명령이 떨어졌을 때 의아한 한편으로 안도했던 레비홀츠였다. 황궁 내의 공간치고는 수수하고 평범했지만, 그저 바라보고 서있는 것만으로 안정이 되는 그 공간을 꼭 닮아 있는 남자를 대면하던 순간, 레비홀츠는 단번에 알아차렸다. 이 남자가 그 방의 본래 주인이었다는 것을. 그리고 소년은 때때로 자신의 머리칼 위에 머물던 슈레디안의 눈길과 미풍처럼 그 위를 스쳐가던 그 손길이 누구를 향한 그리움이었는지 역시도 깨닫게 되었다. 레비홀츠는 황제가 기다려 온 자가 강한 사람이라 기뻤다. 아니, 겉으로 드러난 강인함뿐만 아니라 스스로 중심을 잡고 있기에 절로 느껴져 오는 단단함을 지닌 자라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펠레르와 가까워지면서 흔들림 없는 굳건함이 진실이라는 것을 몇 번이나 배우고 느꼈기에 레비홀츠의 감격은 더 클 수 밖에 없었다. 자신에게 단 한 구석이나마 그와 닮은 점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오를 만큼, 레비홀츠는 그를 좋아하게 되고 또 의지하게 되었다. 그래서 레비홀츠는 저도 모르는 사이에 그에게 마음을 내어주고 말았을 황제를 가슴 속 깊이 이해했다.


「혹, 예배당에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물고 서있던 레비홀츠가 오랜 주저 끝에 어렵사리 대답했다. 노리고 있던 먹이를 낚아채듯이 슈레디안의 냉랭한 음성이 되돌아왔다.


「하, 예배당이라 했느냐?」


레비홀츠는 조심스레 고개를 들었다. 소년은 황제의 모습이 그 어느 때보다도 솔직해 보인다고 느꼈다. 여태까지 그 누구를 대하든 간에 속내를 거의 드러내지 않았던 슈레디안이었다. 그가 어떤 식으로든 저토록 직선적인 감정을 드러내는 것은 오직 한 사람을 대할 때뿐이었다. 슈레디안의 분노, 질투와 선망, 격정과 욕망, 그 모든 것들이 오로지 아펠레르를 향할 때에만 선명한 색채를 드리우곤 했었다. 레비홀츠는 안타까운 심정으로 슈레디안을 바라보았다. 아펠레르가 제 자신의 생명줄이기라도 하듯이 그에게 매달리는 황제나, 나날이 심해져 가는 황제의 집착에 고통 받고 있는 아펠레르나 애틋하고 안쓰러운 것은 매한가지였다. 이런 사람은 다시 없겠다 싶을 정도로 강건하고 순백한 사람이 온당치 못한 감정에 휘둘려 흔들리고 무너져 내리는 모습을 보는 것은 진정 괴로웠지만, 레비홀츠는 끝끝내 황제를 외면할 수는 없었다.


미안해요, 아펠레르님. 하지만 저 알아 버렸는걸요. 당신이 폐하께 어떤 존재인지 알았어요. 저나 지금 폐하 곁에 있는 수많은 총신들과 달리··· 당신만큼은 폐하께 대체물이 될 수가 없다는 것을. 폐하 주위의 수많은 거짓과 가짜 중에서 아펠레르님, 당신만이 유일한 진실이고 진짜라는 것을 이미 깨달아 버렸는데, 제가 어떻게 이 분을 모르는 척 하겠어요. 그러니 절 용서하지 마세요. 레비홀츠는 결심을 다잡듯 주먹을 불끈 쥐었다.


「예, 지금도 그곳에 있을지는 잘 모르겠사오나, 일과가 끝난 저녁이나 하루가 시작하는 새벽녘에 그곳에서 기도를 드리는 걸 몇 번이나 보았다는 사제들의 말을 들었습니다.」


겉으로는 거의 동요를 드러내지 않았지만, 슈레디안에게 불려갔다 올 때면 유난히도 창백한 안색을 하던 아펠레르의 기억을 떨쳐내듯이 레비홀츠는 말을 마쳤다. 주저를 담은 소년의 목소리가 잦아들기가 무섭게 슈레디안은 웃음기 실린 음성으로 되뇌었다.


「기도라, 재미있구나.」


스치듯이 소년의 까만 머리칼을 내려다보던 황제는 무얼 떠올렸는지 차갑게 코웃음을 치고는 고개를 돌려 의전 담당 시녀에게 옷을 가져오라 일렀다. 어깨 위에 망토를 걸친 슈레디안은 대전 시종장을 돌아봤다.


「앞장 서거라. 그리로 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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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 [3부] 황제의 아들 105 스스로 길을 열어 가는 사람 +1 22.11.02 45 2 19쪽
106 [2부의 종장이자 3부의 서장] 쏟아지는 빛 22.09.29 48 1 20쪽
105 [2부 완결] 황제의 아들 104 사나운 새벽 22.09.27 50 0 21쪽
104 [2부] 황제의 아들 103 사나운 새벽 22.09.26 41 1 10쪽
103 [2부] 황제의 아들 102 사나운 새벽 22.09.24 37 0 9쪽
102 [2부] 황제의 아들 101 사나운 새벽 22.09.23 53 0 10쪽
101 [2부] 황제의 아들 100 사나운 새벽 22.09.22 56 0 13쪽
100 [2부] 황제의 아들 99 사나운 새벽 22.09.21 44 0 7쪽
99 [2부] 황제의 아들 98 사나운 새벽 22.09.19 45 0 14쪽
98 [2부] 황제의 아들 97 사나운 새벽 22.09.18 47 0 12쪽
97 [2부] 황제의 아들 96 사나운 새벽 22.09.17 52 0 14쪽
96 [2부] 황제의 아들 95 사나운 새벽 22.09.15 48 0 9쪽
95 [2부] 황제의 아들 94 사나운 새벽 22.09.12 57 1 13쪽
94 [2부] 황제의 아들 93 사나운 새벽 22.09.08 67 0 12쪽
93 [2부] 황제의 아들 92 사나운 새벽 22.09.07 49 0 4쪽
92 [2부] 황제의 아들 91 사나운 새벽 22.09.06 58 0 10쪽
91 [2부] 황제의 아들 90 사나운 새벽 22.09.04 63 0 4쪽
90 [2부] 황제의 아들 89 사나운 새벽 22.09.02 45 0 6쪽
89 [2부] 황제의 아들 88 사나운 새벽 22.09.01 65 0 11쪽
88 [2부] 황제의 아들 87 사나운 새벽 22.08.31 55 1 10쪽
87 [2부] 황제의 아들 86 사나운 새벽 22.08.30 60 0 8쪽
86 [2부] 황제의 아들 85 시작도 전에 사라지는 것들 22.08.23 59 0 10쪽
85 [2부] 황제의 아들 84 시작도 전에 사라지는 것들 22.08.17 51 0 9쪽
» [2부] 황제의 아들 83 시작도 전에 사라지는 것들 22.08.11 62 0 7쪽
83 [2부] 황제의 아들 82 시작도 전에 사라지는 것들 22.08.09 88 0 11쪽
82 [2부] 황제의 아들 81 시작도 전에 사라지는 것들 22.08.08 66 0 16쪽
81 [2부] 황제의 아들 80 시작도 전에 사라지는 것들 22.08.05 78 0 16쪽
80 [2부] 황제의 아들 79 시작도 전에 사라지는 것들 22.08.01 53 0 7쪽
79 [2부] 황제의 아들 78 시작도 전에 사라지는 것들 22.07.30 48 0 16쪽
78 [2부] 황제의 아들 77 시작도 전에 사라지는 것들 22.07.22 77 0 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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