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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 님의 서재입니다.

고월 아래 비는 거닐고

웹소설 > 자유연재 > 무협

무의
작품등록일 :
2022.10.31 23:54
최근연재일 :
2022.11.30 0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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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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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369

작성
22.11.19 2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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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유림(幻想流林) (2)

DUMMY

17화. 환상유림(幻想流林) (2)


모두들 숨을 죽였다.


평소, 대주는 말투가 퉁명스럽고 투박할지언정 진심으로 화를 내는 경우는 드물었다. 그는 기쁨(喜)과 즐거움(樂)을 잘 표출하지 않는 것처럼, 슬픔(哀)과 분노(怒) 역시 쉬이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대주의 얼굴 위로 드러난 것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만큼 선명한 분노였다.


‘대체 이게 어찌된 일이지?’


그를 따르던 네 사람 사이에 당혹스런 시선의 교환이 이루어졌다.


그들은 이 이야기의 결말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태사의 장자께선···.’


‘사십 년 전에 이미 돌아가시지 않았던가?’


그렇다. 태사는 사십 년 전 그의 큰아들을 잃었다.


대주의 말에 따르면 부주역마의 일지, 완성된 비방을 손에 넣고도 아들을 살리지 못한 것이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비사필생 소사명의 진단이 옳았고 부주역마의 비방이 틀리지 않은 이상, 결국 태사가 이곳 환상유림에서 원하던 약재들을 얻지 못했다는 뜻이다.


평범하게 생각한다면 그가 필요로 했던 약재가 이 숲에 모두 있지는 않았다, 정도가 될 터.


‘헌데 태사의 실패와 남궁극이 무슨 상관이지?’


그들의 대주는 오래 전부터, 그리고 지금 이 순간까지도 남궁극을 지독하리만치 증오하고 있었다.


여태까지 태사의 장자가 죽은 일과 남궁극을 향한 대주의 증오 사이에 연관관계가 있다고는 상상조차 못했던 바.


지금 그가 꺼낸 이야기의 흐름과 뿌리 깊은 분노를 보면, 태사가 그의 장자를 살리지 못한 원인이 남궁극이라는, 즉 남궁극이 아들을 살리려는 태사를 방해했기에 그의 장자가 죽었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러나 이 시점에 이르러 네 사람은 하나 같이 의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었다.


‘대체 어째서? 남궁극이 왜 그런 짓을 한단 말인가?’


그의 별호는 독정고검. 홀로 바르다(獨正)고까지 일컬어지는 이가 바로 남궁극이다.


남궁극이 외골수에 앞뒤가 꽉 막힌 사람이라 평하는 이는 있어도, 그가 정의롭지 않은 인간이라 말하는 이는 없다.


심지어 지금이라면 또 모를까, 사십 년 전의 태사는 명실상부 정도문파에 몸담은 정파의 일원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같은 정도 무림의 인사가 죽어가는 아들을 살리기 위해 갖은 위험을 무릅쓰고 있는 상황에서 훼방을 놓는다니?


그들은 열심히 머리를 굴렸지만 이야기의 비워진 공백을 적당히 메우고 넘어가기엔 빠진 조각들이 지나치게 많았다.


“허면··· 남궁극이 태사의 일을 방해한 것이겠습니까?


“그래.”


혹시나 하고 물어본 질문에 칼 같이 딱 자른 대답이 돌아온다. 장년인은 저도 모르게 침음을 흘렸다.


“어디 그뿐인가. 매년 나타나던 이 환상유림이 무려 사십여 성상(星霜) 동안 나타나지 않게 된 것 또한 그자의 만행으로 인한 것이니, 그 악덕이야말로 하늘을 찌르고 땅을 울릴 지경이다!”


대주의 움켜쥔 주먹 위로 핏줄이 불뚝 섰다. 새하얗게 변한 그 손은 안에 품은 힘이 버겁다는 듯 미미하게 떨린다.


평소 화내지 않던 이가 노한 때야말로 가장 무서운 순간이라 했던가.


좀처럼 희로애락을 내비치지 않던 대주가 격분하자 그의 전신에서 미처 갈무리하지 못한 무형의 기세가 줄기줄기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 감정의 흔들림이 어찌나 격렬했는지, 그의 신체 내부에 고여 있던 강대한 진기마저 밖으로 흘러나올 듯 요동치는 상황.


대경한 장년인이 황급히 부르짖었다.


“대주! 진정하십시오. 마음을 다스리셔야 합니다!”


“······!”


그야말로 다급한 외침.


그 일갈이 대주를 오랜 악몽의 늪에서 끌어올렸다.


“···아.”


꿈속에서 깨어나는 듯 몽롱하게까지 들리는 탄식이 메마른 입술을 적셨다. 마치 현실을 잊고 있던 이가 자신의 처지를 한 발 늦게 자각하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잠시 고개를 숙인 채 침묵하던 대주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가 조금 이성을 잃었구나.”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을 부술 듯 격렬하게 움켜쥐어졌던 주먹이 천천히 풀어지고, 등골을 저릿하게 만들던 기세 또한 서서히 잦아든다.


어느새 평소의 무뚝뚝한 사내로 돌아온 대주가 나직하게 말했다.


“미안하군. 나답지 않게 너무 감정적이 되었다.”


“아닙니다, 대주. 그저 제가 노파심에 괜한 소리를 한 것뿐입니다.”


“아니, 잘한 일이다. 자칫하면 내가 먼저 자멸할 뻔했구나.”


대주는 순순히 수긍했지만 조금 전까지와 달리 그들 사이엔 다소 어색한 기류가 감돌았다.


그 불편한 공기를 깨뜨리기 위함일까. 여태 침묵한 채 대주와 장년인의 이야기를 듣던 이가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대주. 정말 이 숲에선 진기의 사용이 불가한 것이겠습니까?”


그렇다. 조금 전 장년인이 화급한 어조로 대주를 일깨운 이유. 그것은 바로 통제를 잃은 진기가 요동치며 외부로 새어나오려 했기 때문이다.


비록 그들 모두가 그 이유를 알지 못했지만 숲에 들어오기 전 대주가 반드시 지켜야할 사항 중 하나로 진기의 방출을 손에 꼽았던 바.


대주가 말한 일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 여긴 장년인은 대주가 스스로 말한 금기를 어기지 않도록 도운 것이다.


“체내의 진기를 살펴보면 방출이 불가능한 것은 아닐진대, 어찌 그러한 명을 내리신 것인지 그 연유를 여쭤도 될 지요.”


본래 대주는 명령을 내릴 때 이유를 설명하지 않는다.


수하들에게 있어 그는 경외와 공포, 그리고 신뢰의 대상이었으니 대주가 그 어떤 명령을 내리든 수하들은 그의 지시를 의심 없이 이행했고, 설령 의심을 품었다 한들 이유를 물을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그야말로 철저한 상명하복(上命下服).


하지만 지금 그를 따르는 네 사람은 휘하의 수하들 중에서도 상당한 고참급이었고, 그와 함께 한 세월이 긴 만큼 비교적 발언이 자유로운 편이었기에 대주 또한 이번만큼은 순순히 대답을 해주었다.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 가능은 하다. 특히 체내에서 육신을 활성화시키는 용도로는 얼마든지 가능하지. 다만 진기를 외부로 발해서는 안 될 뿐이다.”


대주는 손톱에 깊게 찔려 핏방울이 맺힌 자신의 손바닥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비단 강기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검기나 권기 같이 체외로 진기를 내뿜는 모든 행위가 마찬가지이니, 그런 짓을 했다간 냄새를 맡은 벌레들에게 뜯어 먹혀 처참하게 죽을 것이다!”


“벌레라하심은···?”


“이 기괴한 숲에는 세상 천지에 찾아볼 수 없는 괴수들이 널려 있지. 부주역마의 일지에 따르면 이 환상유림에는 진기의 향기에 민감한 벌레가 무궁무진하다더군. 그와 동행했던 무사 하나가 나무를 베기 위해 검기를 뿜었다가 냄새를 맡고 몰려온 벌레들에게 당해 시신조차 남기지 못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때, 뒤따르던 이 중 하나가 탄성과도 같은 신음을 흘렸다.


“아···! 그렇다면 그 감색 머리 낭인을 크게 신경 쓸 필요 없다 하신 것도 설마···?”


“그래, 놈이 이 숲에 대해 알 리가 없지 않으냐. 싸움이 시작되면, 아니, 앞을 가로막는 장애물을 치우기 위해서라도 놈은 어떤 형식으로든 기를 발산할 터. 그때가 곧 놈이 죽는 순간일 것이며, 그곳이 바로 놈의 묏자리가 될 것이다!”


대주의 눈 위로 잔혹한 살기가 번뜩였다.


***


하지만 백산비의 생각을 대주가 알았더라면 그는 분명 실망했을 것이다.


대주의 예상과 달리 백산비는 섣부르게 진기를 뿜어댈 생각이 전혀 없었다.


굳이 그런 짓을 하지 않아도 장애물을 해쳐나가는 데 문제가 없기도 했거니와, 가진 지식이 실로 방대한 그는 이 숲을 처음 보자마자 숲을 이루는 수종(樹種)에 무언가 이상한 점이 있음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과하게 굵고, 지나치게 높은 이 나무들. 어찌 보아도 북방의 것이라 보기엔 너무 울창하지 않은가.


잠시 머릿속의 지식을 뒤지던 백산비는 이내 이 수종들이 새외의 서림(西林) 지역에서나 볼 수 있는 것들임을 눈치 챘고, 그때부터 사방의 모든 것들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의심은 허공을 가르고 날아가는 한 무리의 벌레를 목격한 순간 확신이 되었다.


‘금분신봉···!’


격렬한 진동음을 흘리며 날아가는 곤충. 성인 여성의 손바닥만 한 크기의 거대한 벌. 그 비행궤도에 금빛 가루가 반짝이는 것까지, 금분신봉임이 확실했다.


서림에서나 볼 수 있는 수종들로 이루어진 거대한 숲. 그리고 그 숲 안에는 극락도원에만 서식한다는 생물이 날아다니고 있다.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지만, 이미 그러한 비상식이 눈앞에 현현한 이상 이를 부정하는 것은 현실도피밖에 되지 않을지니.


구주종횡기 제3권의 한 문장이 그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숲속에 발들인 자, 스스로의 강함을 뽐내선 안 될 것이다. 이 숲에는 진기의 흐름에 민감한 생물들이 넘쳐흐르니, 섣불리 진기를 뿜었다가는 그 냄새를 맡고 몰려든 괴물들 앞에서 골편(骨片, 뼛조각)조차 추리지 못하리라.」


“이런.”


백산비의 시선에 옅은 염려의 기색이 어렸다.


***


“도착했네요.”


반쯤 포기한 심정이 되어 호위 대상이 이끄는 대로 향하기를 한참. 갑작스레 들려온 도착선언에 남홍리는 미간을 찌푸렸다.


아직 숲도 다 벗어나지 못했는데 무슨 도착이란 말인가?


그러나 심중의 상념으로부터 벗어나 눈앞의 광경을 직시한 순간, 그녀의 얼굴은 의심과 경악으로 물들었다.


“이게 대체 무슨···?”


넝쿨로 뒤덮여 한 번에 알아보지 못한 거대한 윤곽.


그 형상을 다 알 수 없어 용도와 목적을 짐작할 수 없을지언정, 그것은 너무나도 분명한 인공(人工)의 구조물이었다.


작가의말

읽어주신 분들 모두 감사합니다.

선작, 추천해주신 독자분들 모두 복 받으실 거예요 :)

남은 일요일, 즐거운 주말 보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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