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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월 아래 비는 거닐고

웹소설 > 자유연재 > 무협

무의
작품등록일 :
2022.10.31 23:54
최근연재일 :
2022.11.30 0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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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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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3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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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1.08 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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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남궁세가의 의뢰 (2)

DUMMY

7화. 남궁세가의 의뢰 (2)


“조부님, 저는 꼭 답을 들어야겠습니다.”


반듯한 이마를 감싼 주름 한 점 없는 옥색의 영웅건. 그 아래 자리한 청수한 눈매는 더없이 또렷하다.


이어지는 콧대와 입매, 그리고 매끄럽게 떨어지는 턱과 목의 선은 예스런 칼날의 유려함을 닮았다.


관옥(冠玉) 같은 사내란 이런 이를 일컬음인가. 절로 감탄사가 나올 만큼 헌앙한 풍채의 사내, 대 남궁세가의 적자 남궁휘(南宮輝)는 짙게 드리운 주렴(珠簾) 너머를 향해 말했다.


“어찌하여 화아, 그 아이가 그토록 먼 길을 떠나야 했던 것입니까? 만약 그 일이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면, 어찌 그 먼 길을 세가의 깃발조차 올리지 않은 채 한낱 낭인들 몇 만을 호위 삼아 떠나보내셨단 말입니까?”


“···너답지 않구나.”


석양을 닮은 영롱한 등색(橙色)의 주렴 너머로 지극히 쇠한 듯 거칠어진 음성이 들려왔다.


사흘 밤낮 동안 입 한 번 열지 않아야 겨우 나올 법한 악성(惡聲). 주름진 낯에 악만이 남아 추하게 일그러진, 곧 세상을 떠날 듯한 추레한 몰골의 노인을 연상시키는 목소리다.


하지만 남궁휘의 머릿속에 떠오른 모습은 그렇지 않았다.


뇌리에 새긴 듯 또렷이 그려지는 형상. 그것은 파란의 세월조차 굽히지 못한 너른 등이었고, 남궁의 이름을 짊어진 드넓은 어깨였으며, 만상(萬狀)을 해치고 굽히는 창칼 같은 광음(光陰)조차 버텨낸 백발백염(白髮白髥)의 거인이었다.


저 주황빛 주렴 너머에 있는 이야말로 남궁세가의 가장 큰 어른. 현 남궁세가주 창궁협객 남궁정의 부친이자 남궁휘 자신의 조부인 남궁세가의 태상가주, 독정고검(獨正孤劍) 남궁극(南宮極)인 것이다.


세상의 그 누구보다 존경하는 위인이 바로 자신의 조부라는 사실을 남궁휘는 철이 든 그 순간부터, 아니, 그보다 더 어렸던 시절부터 자랑스레 여겨왔다. 그 사실이 제 인생에 있어 가장 큰 행운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그리고 제 조부의 말이라면 팥으로 메주를 쑨다 해도 두말없이 믿고 따랐을 만큼.


하지만 이번 일만큼은 도저히 이해할 수도, 수긍할 수도 없었기에 그는 결국 이 자리에 서고야 말았다.


“가는 데만 석 달이 걸리는 장정(長程)입니다! 그 약한 아이를 어찌!”


남궁휘는 애타게 외쳤지만 그의 조부는 답을 주지 않았다. 그저, 주렴 뒤에서 냉랭히 침묵했을 뿐이다.


남궁휘는 어깨를 짓누르는 중압감에 입이 말라오는 것을 느꼈다.


무형의 기세를 뿜어낸 것도, 하다못해 건방지다 일갈한 것도 아닐진대. 그저 상대가 그의 조부, 남궁세가의 태상가주 독정고검 남궁극이기에 이렇다 할 기색 한 줌 스미지 않은 침묵조차 더없이 무겁게 느껴졌다.

그럼에도 남궁휘는 다시 입을 연다. 존경해마지 않는 조부의 뜻이라면 한 점 의문조차 품지 않고 따라왔던 그가 이렇듯 따로 독대까지 청했을 땐 그만한 각오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루 이틀도 아닌 석 달입니다. 그 긴 시간 동안 화아 곁을 지켜줄 호위가 고작 다섯 명의 낭인이라니요. 세가의 무인들이 어디가 부족해서 낭인 따위를 호위로 붙이신단 말입니까? 조부님, 차라리 지금이라도 제가-”


“나가거라.”


순간 남궁휘의 혀가 돌로 변한 듯 우뚝 굳어버렸다. 마른침을 삼키는 목구멍이 한없이 거북스럽다.


하지만 이대로 물러간다면 자신이 그토록 막고 싶었던 일이 예정대로 이루어질 것임을 알았기에, 그는 굳은 혀를 가까스로 다시 움직였다.


“조부님, 부디 재고해주십시오! 차라리 제가-”


“나는, 네게 나가라고 말했다. 남궁휘.”


노쇠한 음성. 그러나 거기에 깃든 웅혼한 내공은 그 자체로 엄청난 압력이었으니, 위태로이 휘청대던 남궁휘의 무릎은 결국 무자비하게 꺾이고 말았다.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어깨를 짓누르는 중압감을 견디며, 남궁휘는 휘황하게 빛나는 주렴을 애타는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조부님, 대체 왜···?’



***


“응? 저분도 같이 가는 거예요?”


적효단의 막내, 신비소연(迅飛素燕) 고도림(高島琳)이 힐끗 뒤편을 곁눈질하며 물었다.


“언니, 우리끼리 가는 거 아니었어요?”


혈미나찰(血眉羅刹) 야소명(夜小明) 또한 투덜거리듯 덧붙인다.


하지만 그들의 질문을 받은 적효단의 단주, 독안적효 남홍리(嵐弘利)는 대답하지 않았다.


질문은 갔는데 돌아오는 대답이 없다? 고도림과 야소명, 남홍리를 향해 의아한 시선을 돌렸던 두 여인은, 그녀의 얼굴을 마주 본 순간 공통된 합의에 도달했다.


‘오늘은 홍리 언니한테 말 걸지 말자.’


‘하루로는 안 돼. 사흘까진 피하자.’


그랬다. 딱딱하게 굳은 남홍리의 얼굴은 굳이 감 좋은 이가 아니더라도 ‘아, 저건 잘못 건드리면 뭔가 크게 잘못되겠구나.’하는 예감을 들게 만드는 종류의 것이었다.


남홍리와 함께 한 시간이 짧지 않았던 두 여인은 그것이 단순한 예감이 아니라 매우 높은 확률로 현실화되는 징조임을 몸으로 체득해 알고 있었을 뿐.


야소명은 큼,하는 헛기침과 함께 저 먼 산꼭대기 어딘가를 향해 눈길을 던졌고, 고도림은 고삐를 늦춰 보다 뒤편에서 따라오던 여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홍리 언니 왜 저래요?”


막내의 숨죽인 질문에 적효단의 최연장자이자 적효단의 부단주, 수명쌍검(守命雙劍) 홍유심(洪幽深)은 조금 난처한 듯한 웃음을 흘렸다.


“어제까지만 해도 기분 괜찮지 않았어요?”


재차 물어오는 고도림의 질문에 홍유심은 조금 곤혹스러워졌다.


어쨌거나 적효단의 부단주이자 최연장자인 그녀로선 ‘우리끼리 충분히 할 수 있다고 했는데도 의뢰주가 딴 사람을 억지로 끼워 넣은 탓에 열 받은 거란다.’라고 말하는 게 참, 쉽지가 않았다.


‘일이 꼬이긴 했지.’


홍유심은 한숨을 삼키며 생각했다.


일이란 게 순탄하려면 정말 더없이 순탄하다가도 꼬이려면 정말 한없이 꼬일 수 있구나. 그 사실을 재차 실감하며 홍유심은 저 뒤편에서 느릿느릿 따라오는 청년을 바라보았다.


‘곽후릉을 상대할 때 너무 피해가 컸어.’


이번 의뢰에 나선 적효단원은 단주인 남홍리와 부단주인 홍유심 자신, 그리고 야소명과 고도림까지 총 넷.


그 말인즉슨 총 여섯인 적효단원 중 두 사람이 금번 의뢰에서 빠졌다는 뜻이다.


본디 적효단은 개인 의뢰를 수주하기보다는 적효단 전원이 고용되는 것을 선호했고, 대부분의 의뢰를 그들 전원이 함께 수행해왔다. 이번 호위 의뢰 역시 원래대로라면 여섯이 전부 참가했을 터였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자매 중 두 사람은 곽후릉과의 일전에서 큰 부상을 입어 기식이 엄엄한 상태. 한동안 요양을 취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것이 모든 문제의 시발점이었다.


곽후릉의 수급을 베어 금편 백 닢이라는 막대한 액수의 보상금을 취했을지언정 그중 대부분이 부상자들의 치료비와 파손된 장비의 수선 및 신규 장비 구입비로 소모되고 말았으니까.


때문에 적효단 전력의 삼분지 일이 적지 않은 시간 동안 이탈하게 된 것은 물론이요, 그 막대한 보상에도 불구 적효단은 간만의 재정난이라는 실로 황당한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재정난이야말로 그들이 남궁세가의 의뢰를 거부하지 못한 이유였다.


지금 당장이야 곽후릉을 추살하여 받은 보상금으로 돈 나갈 구멍들을 급히 막아뒀다지만, 만에 하나 부상자들의 상세가 악화된다거나 하는 예상 밖의 돌발 상황이 발생할 경우 이를 감당할 여윳돈이 없었던 것이다.


물론 그건 남궁세가의 의뢰를 거절하지 못했을 이유일 뿐, 저 초짜 낭인이자 생면부지의 인간을 동료로서 받아들여야 했던 이유는 아니다.


하소정이 찾아와 적효단에게 의뢰서를 내밀었을 때, 남홍리는 내심 기뻐하는 와중에도 이렇게 생각했다.


무슨 왕족도 아니고 원수가 수두룩한 강호의 인물도 아닌, 그저 적당히 평범한 가문의 적당히 평범한 소저 하나를 집까지 호위하는 일이다. 적효단원 넷이면 차고도 넘치지 않은가!


그것이 남홍리의 생각이었고, 홍유심 역시 어느 정도 동의를 하는 바였다.


하지만 의뢰주의 대리인, 하소정이 바로 이 지점에서 문제를 제기했다.


온전한 적효단이라면 모르되, 전력의 삼분지 일이 빠진 이상 추가적인 인원 보충이 필요하다고.


원래 같았으면 그럼 다른 낭인대나 알아보시라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을 남홍리였으나 당장 자매 중 두 사람이 생사의 기로에 서 있는 상황이었다. 그 와중에 낭인대의 여유자금은 바닥을 보이고 있으니 그녀 또한 어쩔 도리가 없었다.


남궁세가가 제시한 돈은, 거절하기엔 너무 많은 액수였다.


그 결과가 바로 이것.


저 자존심 강한 독안적효 남홍리가 고작 일개 소저의 호위 임무에 적효단 외의 인물을 받아들인 데에는 이러한 배경이 있었음이다.


“찜찜하네요. 저도 우리끼리만 가는 게 좋긴 한데··· 아, 홍리 언니 성격에 이거 괜찮은 거 맞나.”


고도림이 푸념처럼 중얼거렸다.


“이미 벌써 둘이 한 판한 거 아니에요?”


역시 함께한 세월이 무섭긴 한가 보다. 홍유심은 고도림이 때려 맞춘 진실에 뜨끔하는 심정이 되었다.


“아이 진짜. 앞으로 석 달을 같이 다녀야 하는데 이렇게 불편해서 어떡해요.”


칭얼거리는 막내의 말에 맏언니는 내심 동의를 표했다.


어쩌면 정말 석 달 동안 둘이 한마디 말도 섞지 않는 것이 아닐까, 그런 불길한 생각이 홍유심과 고도림의 뇌리를 스쳤다.


‘설마, 그 정도는 아니겠지.’


***


그리고 그들이 걱정은 현실이 되었다.


아무 사건 없이 관도(官道)만 따라가면 되었던 두 달간의 여정 동안 홍유심, 야소명, 고도림 세 사람은 백산비와 조금씩 말을 텄지만 남홍리만큼은 그와 단 한마디 말조차 섞지 않았다.


적효단원들은 물론 호위 대상인 운리화와 그녀의 두 시비마저도 그들 간의 냉랭한 분위기를 풀어보려 수시로 애썼으나 독기 가득한 남홍리와 여유작작한 백산비에겐 그 무엇도 무용했음이다.


하지만 그들의 여정이 약 보름 가량 남았을 무렵, 갑작스레 닥쳐온 하나의 재난이 그들 간의 냉랭한 침묵을 깨어버렸다.


“제길, 서둘러!”


찢어지는 고성. 쏟아지는 화살의 폭우 속에서 남홍리가 악을 썼다.


“정 무사, 마차를 지켜!!”


작가의말

항상 읽어주시는 분들께 감사드리며, 혹 괜찮으시다면 그 어떤 것도 좋으니 피드백을 남겨주실 수 있으실지 조심스레 부탁드려 봅니다. 오타든, 어색한 표현이든, 글을 읽으시면서 느낀 아쉬운 점이든 어떤 것도 감사히 받겠습니다.


선작, 추천해주시는 분들께는 언제나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독자일 땐 몰랐는데, 조회수와 선작수, 추천수까지 그 숫자 하나하나가 무척 신경 쓰이고, 또 많은 격려가 되네요. 항상 좋은 일만 있으실 겁니다! 적게 일하고 많이 버세요!


날이 차가워지는데 감기 조심하세요. :)


* 지금은 계속 12시~13시경에 글이 올라가고 있는데, 혹시 언제쯤 올리는 게 더 낫겠다 하는 시간대가 있으면 추천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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