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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d님의 서재입니다.

아비는 회귀를 반복한다

웹소설 > 작가연재 > 무협, 퓨전

corvette
작품등록일 :
2023.05.12 01:45
최근연재일 :
2023.06.14 12:00
연재수 :
35 회
조회수 :
22,601
추천수 :
898
글자수 :
241,982

작성
23.05.30 0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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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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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1쪽

20화

DUMMY

박효을 수사가 우릴 안내한 곳은 진입로 인근의 한 가옥이었다. 박효을 수사가 먼저 앞장서서 안으로 들어서자 안에 있던 사람들이 그를 보고 공손히 인사를 올렸다.


그러나 박효을 수사는 그들의 인사를 본체만체 하며 아예 없는 사람 취급할 뿐이었는데, 입고 있는 복장도 그렇고, 그들은 아무래도 수선자가 아니라 박씨가문에서 일하는 시종들인 듯했다.


아무튼 그리 응접실에 도착하여 시종들이 내어오는 차와 다과를 앞에 깔아두고서야 박효을 수사는 빙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안 그래도 이맘때쯤이면 견옹 노야께서 찾아오실 거라 생각은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딱 오늘일 줄은 몰랐던 탓에 미숙한 아이를 배치해두어 실례를 범했군요.”


“허허. 괜찮소. 게다가 따져본다면 그 젊은 수사가 말했던 것이 정론은 정론이니, 기백도 있고 강단도 있어 보이는 훌륭한 청년수사였소.”


“하하하.”


그렇게 견옹과 박효을 수사는 서로 적당히 잡담을 나누며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그런 다음에 먼저 본론을 꺼낸 건 견옹이었다.


“그나저나 내 지금껏 백두에 몇 차례 들린 바가 있었으나 이번과 같은 경우는 처음이구려. 대체 어떤 연유로 무림인들의 입산을 제한한 것이오?”


“아, 그건 앞서 권 수사가 말씀드렸다시피, 올해부터 본 가문이 백년대계에 돌입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정확히 말씀드리자면 아직까진 대계에 진입한 것이 아니라 십년지계의 소계(小計)들을 여럿 시작한 상황인데, 그 계획들 중에 백두의 영기를 보존하는 것이 포함되었던 탓입니다.”


“흠. 그렇소?”


“예. 그리고 이러한 결정은 아마 향후 100년 이상 꾸준히 지속될 것이니, 가문 내에서도 적절한 방안을 빨리 확립하여 백두를 찾는 무인들과의 무의미한 마찰을 최소화시키려고 하는 중입니다.”


그러자 얘기를 듣던 견옹은 잠시 생각하는 기색을 내보이더니 한 마디 툭 내뱉었다.


“그러면. 웬 폭군 한 마리가 백두산엘 기어들어왔다는 소문과는 아무래도 별 상관이 없는가보오?”


“아, 역시. 노야라면 당연히 그 소문도 들으셨을 거라 생각했습니다만···. 혹여 견옹 노야께선 그것을 이유로 본 가문이 백두의 출입을 제한했다고 오해하신 것입니까?”


“음, 부정하진 않겠소.”


그러자 박효을 수사가 씁쓸하게 웃더니 고개를 저었다.


“···허나 그렇진 않습니다. 어쩌면 노야께서 그런 오해를 하실 수도 있다는 생각은 했으나 이리 직접 듣게 되니 조금은 서운하군요.”


“그러나 시기가 너무 공교롭긴 했소.”


“저 역시 그렇게 생각은 합니다. 때마침 중화땅에서 폭군 한 놈이 도망쳐왔고, 그에 맞추어 마치 놈을 추적자들로부터 보호하기라도 하듯 박씨가문이 백두의 출입을 제한했으니.

그러나 노야. 생각해보십시오. 아무리 박씨가문이 중화땅의 수도가문들과의 사이가 험악하다고는 하나, 그들로부터 천박한 폭군 한 마리를 지켜줄 이유나 의리 따윈 없는 것입니다. 물론 그 폭군이 중화국의 수선자들을 잡아먹고 몸 멀쩡히 내뺀 것은 내심 고소한 심정이긴 하나 단지 그 뿐. 본 가문은 현재 준비 중인 대계를 신경 쓰기만으로도 벅찬 상황입니다.”


“으음. 그렇다면 혹여 본노가 백두를 오르며 그 폭군의 흔적을 추적해보아도 괜찮겠소?”


“아, 그건 좀···. 노야. 말씀드렸다시피 박씨가문은 현재 백년대계를 수립하여 준비하는 중이라···. 되도록이면 등산 중에도 본가에서 안내해드리는 경로만을 따라 올라주실 것을 부탁드리는 바입니다.”


“으음. 알겠소. 수도가문의 백년대계라 함은 실로 중한 일이니.”


대화가 그리 흐르자 견옹도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더 이상 박효을 수사를 압박하지 않았다.


결국 그리 대화는 흐지부지 끝나고, 견옹과 박효을 수사는 적당히 가식적으로 인사를 나눈 뒤 헤어졌다.


그리 다시 머무르던 객잔으로 돌아온 다음에야 용운령이 한숨을 푹 내쉬며 투덜거렸다.


“스승님. 확실합니다. 박씨가문이 현재 그 노흉이란 폭군을 보호하고 있습니다. 그게 아니고서야 등산로까지 제한할 이유는 없는 것이죠. 우리가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놈의 은신처라도 찾아낼까봐 그러는 거겠죠.”


“그러나 박효을 수사의 말마따나 박씨가문이 구태여 폭군 따위를 보호해줄 이유나 의리가 없음도 사실이다. 아마 이 사태엔 표면적으로 드러난 것 외에도 다른 복잡한 일들도 엮였을 터. 괜히 더 깊게 파고들었다간 이 동이땅의 수도세가 한 곳과 완전히 적대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쩝, 하고 혀를 찬 견옹이 이내 껄껄 웃으며 말했다.


“그러나 어쩌면 차라리 다행일지도 모른다. 비록 우리가 직접 그 폭군놈을 확인하진 못했으나, 놈도 어지간히 다급했는지 저쪽의 범 아가리에서 이쪽의 범 아가리로 도망친 셈이렷다. 놈이 아무리 흉포한 성정을 가졌더라도 현재로선 수도가문의 본진에 갇힌 셈이니 엉뚱한 짓은 함부로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긴 합니다만···.”


용운령은 어쩐지 아쉬운 기색을 내비치고 있었는데, 나는 이내 그 까닭이 무엇인지 짐작해낼 수 있었다.


“혹시 용운령 사형께선 그 폭군 놈에게서 십이지류의 무공에 대한 정보를 캐내실 작정이셨습니까?”


내가 짐작했던 질문을 하자 역시 용운령이 고개를 끄덕이는 거였다.


“그래. 소문으로 듣기에 그 노흉이란 놈은 이름이 알려진 것만 해도 십 수 년이 훌쩍 넘었다. 그만큼을 살아왔으니, 놈은 필시 수도공법을 익혔든, 아니면 자신의 무공을 잊지 않았든 할 것이다. 그런 게 아니고서야 수선자들을 잡아먹으면서 살아남기란 요원한 법이니까.”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그리고 내가 직접 목격한 노흉의 모습을 되새겨보면, 놈은 수선자들이 사용하는 수도공법보다는 무공에 가까운 움직임을 보였으므로 자신의 무공을 잊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은 상태였다.


“껄껄. 오늘만 일이겠느냐? 십이지류에 관해선 언제고 또 다른 소식이 들려오겠지. 그리고 너희들은 당장엔 노흉이 걱정일 게 아니니, 사흘 후엔 백두산 천지를 향해 등반을 시작할 것이니라.”


그리 견옹이 말하자 백희아가 한숨을 푹 내쉬었고, 용운령도 기운을 차린 듯 활기차게 웃었다.


“하긴! 어쨌든 기왕에 백두를 들렀으니 유람 한 번 신나게 즐겨야겠지요!”


그리하여 우리는 3일을 쉬며 등산준비를 마친 후 다시금 산맥로 입구로 향했다.


“오셨군요, 노야.”


3일 전엔 무인들이 잔뜩 몰려와 시끌시끌했던 산맥로 입구였으나 이젠 한산하기 짝이 없어 권명규 수사만이 홀로 서서 시간을 때우고 있었다.


그가 미리 준비해둔 목패를 우리 일행들에게 모두 나눠준 뒤 말했다.


“현재 박씨가문이 대계를 준비하느라 전반적으로 꽤나 예민한 상황입니다. 모쪼록 그 점을 염두에 두시어 후배들을 배려해 주십사 부탁드립니다.”


권명규 수사는 그리 말하며 조금 송구한 듯한 기색을 내보였는데, 그 처지를 잘 모르는 내가 보더라도 흡사 박씨가문과 견옹 사이에 끼어서 혼자 고생하고 있는 듯한 모양새였다.


“껄껄. 내 권 수사가 얼마나 고생하는지 잘 알고 있음세. 박효을 수사에게도 친절히 설명을 들었으니 내 그에 따라 아무런 문제도 일으키지 않고 얌전히 등산만 하겠네.”


“감사합니다···!”


그러며 권명규 수사는 우리의 모습이 시야에 닿을 때까지 이쪽을 바라봐주며 환송을 해주었는데 나는 그 모습이 어쩐지 이상하여 물었다.


“그런데 저 권명규 수사라는 분도 연기기 중후기급이라면 매우 대단한 사람이 아닙니까? 그런데 스승님께는 마치 까마득한 선배라도 모시듯 깍듯하여 어쩔 줄을 모르는군요.”


그러자 백희아 사저가 괜히 제 콧대를 으쓱대며 말하는 거였다.


“흥! 너 바보야? 우리 스승님께선 축기경의 수선자들과도 동수 혹은 그 윗줄로 대접받는다고! 연기기 수준에서 보자면 까마득한 선배님이나 다름이 없는 거야!”


요 며칠간 산행을 앞두고 기운이 없던 백희아 사저는, 오늘 아침에야 어쩐지 혼자 제 뺨을 짝 치더니 정신을 차리고 평소의 모습으로 되돌아와 있었다.


아무튼 오랜만에 사저의 땍땍거리는 목소리를 들으니 나도 조금은 힘이 나는 듯하여 기운차게 걸음을 옮겼으나···.


“자 이제부터 백두를 오른다.”


등산로의 초입에 들어서자마자 나는 무언가가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어억···!? 어어억···?”


마치 온 전신이 육중한 바위에 눌리는 듯한 압력감.


그러나 다만 머리 위쪽 방향에서만 내리찍는 것이 아니라, 나를 압박하는 힘은 온 사방에서, 내 움직임에 정확히 반(反) 하는 방향으로 작용하는 듯했다.


하여 고작 단 한 걸음을 옮길 적에도 온 몸에 힘을 끌어올리며 억지로 뻗어야 했으니, 나는 비로소 백희아 사저가 그간 왜 그토록 징징대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산.


참으로 중(重)했다.


***


“끄억···. 흐어어억···.”


“꺄흑···. 끄헤에엑···.”


나와 백희아 사저는 누가 누구랄 것도 없이 비슷한 괴성을 흘리며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리고 저만치 앞선 곳, 이제 바야흐로 천지가 펼쳐지는 백두산의 정상 초입에서 용운령 사형이 우릴 기다리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여! 사매! 사제! 얼른들 올라오라고! 천지 부근부터는 더 이상 천기의 짓누름이 없으니 참으로 움직일만하단다!”


용운령 사형은 그리 우리를 놀리듯 말하곤 혼자 가볍게 체조를 하면서 놀기 시작했다.


그에 나와 백희아 사저는 안간힘을 쓰며 재차 앞으로 걸음을 내딛었는데, 거기엔 어느 정도 서로를 향한 호승심이 존재하고 있었다.


당초 나와 백희아 사저는 또래부터가 비슷했고, 내공의 양 또한 큰 차이가 나지 않았다.


그런 탓인지 함께 여행을 하게 된 이후로 백희아 사저는 은근히 내게 자신이 손윗사람이란 걸 보여주려고 티를 내곤 했는데, 처음에야 그런 사제의 어린아이 같은 행동이 내게도 퍽 귀여워보였으나, 그게 여적껏 반복되니 나도 어쩐지 되바라진 마음이 조금씩 생겨나는 거였다.


그러나 본래라면 이는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니, 이제 겨우 갓 14살이 된 사저라면 몰라도 나는 전생들을 통틀어 이미 정신적으로는 마흔살을 훌쩍 넘게 살아왔던 것이다.


그런데도 어쩐지 나 또한 어린애 치기어린 마음이 샘솟는 걸 보면 회귀로 인해 육체가 어려진 것이 내 정신에도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치는 듯하였다.


혹은 그런 게 아니라 그저 이 백두라는 땅이 이토록 가혹하여 사람의 정신을 온전치 못하게 만드는 것일 수도 있는 일이었고.


자그마치 칠주야!


칠주야 동안을 우린 꼬박 산행을 해왔던 것이다.


그냥 산을 오르며 노숙하는 것도 여간히 체력을 빨아먹는 일이 아니었으니, 하물며 천기로 내공을 짓눌러버리는 백두산에서 그러자니 그야말로 죽을 지경이었다.


그나마 밤이 될 적엔 견옹 스승님과 용운령 사제가 힘들어하는 우리를 위해 손수 잠자리도 준비해주어 다행이었으니, 그럼에도 잠자는 것조차 버겁고 쉽지가 않았다.


아무튼 그런 여정의 끝이 이제 바로 코앞에 당도했으니, 나와 희아 사제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백두산 천지에 당도했다.


그리 언덕 끝에 올라 이제 고개 아래로 쭉 펼쳐지는 내리막길 저 너머로 드넓게 펼쳐진 백두산 천지(天池)의 모습을 보자니, 그 순간 마치 어떠한 큰 깨달음이라도 얻은 것 마냥 정신이 청명해졌다.


“아···!”


“와···!”


나와 백희아 사저는 그리 천지의 풍경을 보며 감탄을 내뱉었으니, 비록 때가 맞지 않아 쌓인 눈이 아직 덜 녹았으나, 그럼에도 천지간에 깃든 생명이 소록소록 솟아오르는 것이 참으로 아름다웠던 것이다.


털썩!


그리고서 나와 사저가 동시에 바닥에 쓰러지자 용운령 사형이 키득거리며 다가와서는 우리들에게 약과를 하나씩 건넸다.


“자. 먹고들 힘내.”


나와 사저는 우물거리며 약과를 받아먹었다. 기진맥진한 채로 하늘과 가까운 땅에 누워 하늘을 올려다보니 또 색다른 기분이 있었다.


“···참으로 높은 곳에 올랐으나 그럼에도 하늘은 여전히 높기만 하군요.”


“그래. 그렇기에 백두등봉이 참으로 도움이 되는 것이다. 어느새 기고만장해진 마음에 겸손함을 되돌려주며, 또 한 편으론 천기의 압박을 통해 느슨한 정신과 육체, 내공 모두를 견고히 뭉쳐주기까지 하지. 우룡 사제. 올라오면서 온 전신이 압박을 받는 듯한 기분을 느꼈었지?”


용운령 사형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담 지금 다시 내공을 운용해본다면 지상에 있었을 적과는 조금 다른 기분이 들 거야. 한 번 해봐.”


하여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 앉아 눈을 감고 명상했다. 그리곤 천천히 내공을 끌어올려 일주천을 돌렸는데, 어찌된 일인지 몸을 타고 주천하는 내공의 흐름이 이전보다 가느다란 느낌이 들면서도 오히려 세찬 느낌 또한 들었던 것이다.


마치 느긋하게 흐르던 너른 강줄기가 협곡에 들어서며 압축되어 물살이 빠르게 흐르는 것과도 비슷한 느낌이었는데, 그럼에도 내공은 격하거나 거세다기보단 차라리 압축되고 정제되어 단정해진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런 내 기분을 용운령이 한 마디로 정리해주었다.


“어때? 마치 내공이 한 차례 응축(凝縮)된 기분이 들지 않아?”


“아···!”


“본디 내공이란 흐름으로 뭉치어 억지로 붙잡아두는 기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스스로의 의지와 그 운행만으로는 내공을 제대로 응축하지 못하는 경우가 보통이지. 그러나 백두산을 등봉하는 과정에서, 천기가 짓누르는 힘에 의해 내공은 자연히 압축되고 정돈되어 이전보다 한 차례 견고해지기까지 한다.”


“아, 그러면 백두를 오르는 것 자체로 내공의 양이 상승되거나 하는 일은 없는 거로군요?”


“그래. 내공을 늘리고 싶거들랑 열심히 심법을 수련하든 아니면 영약이라도 먹든 해야지. 그러나 그리 얻게 된 내공을 정순하게 응축시켜주는 것이 바로 백두등봉의 효능이다. 그리고 이 효능이 최대한으로 효율을 발휘하기 위해선 매년 찾아오는 것보단 넉넉히 시간을 두고 3년에 한 번쯤 찾아오는 게 가장 합리적이지.”


“아···!”


“아무튼 이제 등봉을 했으니 산맥의 천기가 누그러지기 전까진 이곳에서 머무르며 수련하게 될 것이다. 무슨 말이냐면, 여태까지 나와 스승님이 사매와 사제의 이부자리와 식사를 마련해줬으니, 이제부턴 너희들이 스승님과 나를 모실 차례라는 거야.”


그렇게 우리는 백두산 천지에 머무르며 수련을 하게 되었다.


나는 평소엔 용운령 사형에게 검술을 배우다가 시간이 나거나 하면 백희아 사저와 함께 살림살이도 했는데, 설거지도 제대로 못하는 사저와 달리 나는 때때론 천지 인근에서 약초까지 찾아내 죽을 끓일 정도로 살림에 익숙한 편이었기에 가끔은 백희아 사저가 이런 내 손재주에 질투를 보이기도 했다.


“뭐야? 너 남자 아니야? 왜 그렇게 요리를 잘해? 흥!”


그러나 정작 무공 수련에 있어서는 딱히 이전과 달라진 게 없었는데, 백두등봉을 하며 한 차례 내공을 응축하여 정순하게 만들었음에도, 그와는 별개로 용운령의 검법의 묘리를 파악하는 건 여전히 불가능한 탓이었다.


그리하여 어쩐지 가슴이 답답할 적엔 나는 내가 제대로 하고 있는 게 맞는가 의심이 들기도 했다.


그도 그럴게 정작 백두산엘 오긴 왔으나 노흉은 박씨가문이 보호하고 있는 중이라 털끝도 건드리지 못하는 중이었고, 배우는 무공에서도 도저히 발전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나마 나는 대략 10년 뒤의 미래에 노흉이 강료와 함께 인형삼을 사냥하리란 정보를 알고 있었기에 큰 다급함은 없었다.


적어도 그 무렵까진 노흉이 평범한 백민들을 해치고 다니는 일은 없었으며, 오히려 강료와 나 같은 힘없는 존재들에게도 약속한 금은 꼬박꼬박 챙겨줄 정도의 도리는 보였음을 알고 있었던 탓이다.


‘노흉이 그토록 흉포해진 건 아마도 청이가 11살이 되었을 쯤 무렵부터 시작된 대기근 탓이 클 터.’


오히려 그보다 나는 다른 문제도 존재하고 있음을 떠올렸는데 그것은 바로 벽산단의 맹휘였다.


두 번째 인생에서 나는 사전에 벽산단의 습격을 황대감께 알렸고, 또한 습격이 있던 당일에도 맹휘를 뒤에서 도끼로 후려치어 황대감댁을 지켜냈던 것이다.


그러나 이번 생에서 나는 회귀를 겪은 바로 다음 날, 황대감댁이 있는 벽산 일대에서 도주하여 수도성으로 향했었다.


그러니 내가 무언가 행동을 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4년 뒤 황대감댁은 벽산단의 습격에 또 한 번 무너질 터였다.


‘그걸 막기 위해서라도 한 번쯤은 대감댁에 돌아갈 필요성이 있다.’


그리고 그렇게 대감댁에 돌아갈 적에, 나는 그들에게 전생보단 좀 더 큰 도움이 되고픈 마음도 있었던 것이다.


아니, 그보다는 죽은 청이에게 당당할 수 있는 실력을 갖추고 싶다는 게 내 솔직한 본심이었다.


아비가 삼류무인이 되었다는 말에 내심 실망하던 어린 청이의 모습.


그런 추억이 아직도 남아있는 고을에 들릴 적에, 나는 최소한 이류의 경지에 오른 당당한 모습으로 개선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러나 그런 내 욕심과는 달리 내 검술실력은 도저히 잘 늘어나지가 않았으니, 급기야 나는 장작을 팰 때 도끼질이 차라리 내 검술 실력보다 훨씬 빨리 늘어난다는 기분을 느꼈다.


하여 그러한 심정을 용운령 사형에게 털어놓았더니 용운령 사형은 어이없게도 날 위로하기는커녕 오히려 자기 눈에도 딱 그렇게 보인다며 이리 말하는 거였다.


“어쩌면 사제는 그냥 검에 재능이 없는 것일지도 몰라. 지금까지 내가 지켜본 바, 사제는 능수능란하며 다채롭고 화려하기보다는 차라리 우직하고 직선적이며 올곧은 면모가 강하니, 도끼질을 할 때도 보면, 대충 하는 것처럼 보여도 늘 정확히 같은 자리만을 후려치니 두꺼운 나무마저 금방 쓰러트릴 수가 있는 것이야. 그러나 그건 검법에는 알맞지 않은 조예이니, 본디 검법이란 양면의 날을 능란하게 다루어, 한 번 휘두를 적에도 수십 수백 번의 변초가 섞여듦이 기본인 무기술이다.”


“사형. 그게 위로라고 하시는 말입니까?”


“하하! 그보다는 조언이지! 음, 아무튼 아무리 그래도 내가 익힌 검술을 그 도끼로 펼친다는 건 좀 터무니없는 소리 같고···. 음.”


그리 무언가 고심하는 기색이던 용운령 사형은 이내 빙긋 웃더니 내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얌전히 며칠만 기다려 봐.”


그러고서 용운령 사형은 그 길로 스승님께 들러 무어라 몇 마디 말을 하더니 훌러덩 산길을 타고 내려가 버렸다.


그리곤 약속했던 대로 며칠 뒤 다시 천지에 올랐는데, 그 품에는 내려갈 적과 달리 길쭉한 막대 비슷한 무언가가 들려 있었다.


“자. 받아라.”


내가 그걸 받아서 겉을 두른 천을 끌러내자 이내 그 안에 든 것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이건···!”


“도(刀)다. 사제는 검보다는 도끼가 적성에 맞는 듯하나, 그럼에도 내가 익힌 검술을 배우고 싶어 하니 그에 절충되는 것이 무엇이 있는가 조금 고민해봤지. 본디 도라는 것은 외날이므로 도끼를 닮았으며, 그 휘두름에 있어서도 변화보단 일참(一斬)이니, 느껴지는 무게감 또한 검보다 중(重)한 편이나 그럼에도 검술과 맥통(脈通)하는 무기인 바, 사제에게 딱 어울릴 듯하여 하나 구해다왔다.”


그에 나는 감격하고 고마운 마음에 조금 눈물이 흐를 뻔했는데, 그러자 옆에서 백희아 사제가 키득대며 놀리는 거였다.


“꺄하하! 너 대체 얼마나 기쁜 거야?”


그러나 나로선 살면서 이런 식으로 선물을 받아본 적이 처음이었던 것이다!


비록 전생에 황대감께 성읍내 자가를 선물받기도 했고, 전훈 소협에게 심법서를 받기도 했으나 그것은 어찌 보면 내 공(功)에 대한 보답이었으니, 그러나 지금 내가 용운령에게 받은 도는, 순전히 내가 안쓰러워 용운령이 자기 마음으로 선물해준 거였다.


하여 나는 어쩐지 미안한 기분마저 들어 작게 중얼거렸다.


“···혹여 제가 도에도조차 재능이 없어, 이리 구해오신 것이 아깝게 낭비만 된다면···.”


그러나 용운령 사제는 그저 하하 웃으면서 대답할 뿐이었다.


“하하! 우룡 넌 내 형제이지 않느냐? 비록 같은 부모를 두진 않았으나 같은 스승을 섬기게 되었으니 넌 내 친형제와도 다름이 없다! 그러니 그깟 도 한 자루에 아깝니 어쩌니 할 계제조차도 아니지.”


그러면서 용운령 사제는 품에서 뭔가를 뒤적거리더니 이번엔 백희아 사제에게 불쑥 내밀었는데, 그건 다름 아닌 달콤한 과자였다.


“아앗!”


“작은 동생 하나만 챙겼다간 큰 동생이 삐질까 염려하여 이 오라비가 사소하게 챙겨왔노라! 하하하!”


그리 말하며 흐뭇하게 웃는 용운령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필시 나는 전생에 가정을 통째로 잃었을 터인데.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내 곁엔 또 다른 가족이 이미 생겨나있었던 것이다.


견옹 스승님은 어쩌면 내 할아버지이며.


백희아 사저는 성질 급한 손윗누이.


용운령 사형은 때로는 철딱서니 없는 형 같으나, 때로는 마치 푸근한 아버지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내가 이러한 평온을 즐겨도 되는 것인가?’


문득 그런 의문이 들었기에 나는 고개를 휘휘 저었다. 그리곤 용운령 사형에게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잘 쓰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사형.”


그리고 그날부터 나는 검 대신 도를 수련했고, 얼마 뒤 처음으로 용운령의 검법을 내 나름대로 펼쳐 보이는 데 성공하였다.


“···사제. 방금 그거 뭐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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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22화 +2 23.05.31 485 24 20쪽
21 21화 +2 23.05.31 495 25 13쪽
» 20화 +1 23.05.30 548 25 21쪽
19 19화 +1 23.05.29 582 26 16쪽
18 18화 +2 23.05.28 614 30 16쪽
17 17화 +3 23.05.27 660 27 15쪽
16 16화 +4 23.05.26 677 28 16쪽
15 15화 23.05.25 727 31 17쪽
14 14화 +1 23.05.24 748 30 20쪽
13 13화 23.05.23 768 32 15쪽
12 12화 +3 23.05.22 789 35 15쪽
11 11화 +4 23.05.21 792 29 16쪽
10 10화 +4 23.05.20 802 27 15쪽
9 9화 +1 23.05.19 787 27 13쪽
8 8화 23.05.18 802 28 14쪽
7 7화 23.05.17 842 30 14쪽
6 6화 23.05.16 868 28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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