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너울2 님의 서재입니다.

나이 90만 먹은 수행자는 은퇴하고 싶다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판타지

너울2
작품등록일 :
2023.05.10 10:29
최근연재일 :
2023.05.12 18:10
연재수 :
8 회
조회수 :
461
추천수 :
8
글자수 :
45,115

작성
23.05.10 10:32
조회
107
추천
1
글자
8쪽

부화식

DUMMY

머리도, 가슴도, 그리고 팔과 다리까지도 어둠으로 휘감아 뒤집어쓴 사내가 허공을 부여잡고 무언가를 빼냈다. 곡괭이 모양의 극(戟)이 그 손에 잡혀 대지를 쪼개버릴 기세를 내뿜었다.

그 흉흉한 안광이 번뜩이지 않았더라면, 그 검은 사람의 형상은 어둠이나 그림자와 분간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본 부회주가 있지 말아야 할 곳에 왔습니까? 할 말이 있으시다면 나와서 하시지요. 흑현제, 이 자정인과 정말로 손속을 겨루고 싶습니까?


그가 대치하고 있는 인간은 뽀얗고 부드러운 살결을 가진 어린 사내아이다. 물론, 실제 나이는 그다지 어리지 않은 것을 넘어 이 미궁의 살아있는 화석이나 다름없다.


그는 다짜고짜 무기부터 꺼내드는 그림자를 보고 다소 당황한 표정을 지었지만, 바로 다음 순간 오히려 인상을 일그러뜨리며 큰소리를 치기 시작했다.


“하, 정말로 배짱이 대단하십니다. 확실히 저번에 손속을 겨루었을 때는 제 쪽이 열세이기는 했지요. 그때는 본제가 당신의 전초극(戰超戟)에 맞먹을 만한 물건을 제련하지 못했으니까요. 허나 지금도 상황이 같으리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당신이 독해담(毒海潭)을 제련하는 데 성공했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걸 믿고 저와 다시 한 번 겨뤄보겠다 이겁니까?

“좋지요. 하지 못할 것도 없습니다. 아직도 나를 하수로 본다면 오늘 큰 코 다치게 될 겁니다. 어디 이 독해담의 위력이 어떤지나 한번 시험해봅시다.”


사내아이가 허공을 짚자, 허공에서 독수가 콸콸 쏟아졌다. 만독(萬毒)의 정수를 36가지나 혼합해 만들어낸 독의 연못이 지금 이 자리에서 실체화되려고 하자, 뿜어지는 독기만으로도 주변 사물들이 녹아내려 무너졌다.


용해되는 사물들을 양분삼아 삼키며, 혀를 낼름거리는 독룡의 형상이 튀어나와 이빨을 드러냈다. 이에 검은 그림자가 눈썹을 꿈틀거린 순간, 갑자기 팔 하나가 불쑥 튀어나왔다.

뜬금없이 나타난 그 하얀 팔이 독룡의 목을 붙잡고, 그대로 쥐어뜯었다. 뽑힌 머리가 비명을 지르며 그 팔을 깨물었으나, 사내는 파리를 잡는 것처럼 그 머리를 눌러 으깼다.


“두 분 다 여기까지만 하시지요. 경사를 축하하러 모인 자리에서 서로 의가 상하실 생각이십니까. 두 분이 진심으로 맞붙으면, 이 백룡궁도 부서지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회주님.

“계면상회 회주!”


허공을 격하고 나타난 중년의 사내를 본 흑현제가 대번에 경계하는 기색을 드러내며 물러섰다. 그의 속마음은 참으로 착잡했다. 그가 계면상회 부회주에게는 시비를 걸 수 있어도, 저 회주에게는 어림도 없다.


이미 90만년을 살아온 저 노괴는 자신이 건드릴 수 있는 상대도 아니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기세가 죽은 소년을 향해, 이성일이 가볍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폐하께서 본 상회의 부회주에게 불만이 있다면 그건 회주인 제 책임이기도 하지요. 이렇게 합시다. 흑현제께서 제게 세 번의 공격을 하시지요. 피하지도, 반격하지도 않은 채 그대로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럼 화가 조금은 풀리시지 않겠습니까.”

“됐습니다. 그래봐야 제 체면만 깎일 뿐 아니겠습니까. 독해담이 현묘한 보물이기는 하나, 혼돈법체(混沌法體)를 대성한 회주의 앞에 내놓을 만한 물건은 아닐 테니까요.”


사내아이는 풀이 죽은 기색으로 물러났다. 세 번은 개뿔, 아흔 번을 연달아 공격해도 이성일에게 생채기 하나 입힐 자신이 없었다.

명목상으로는 자신과 같은 수행 7성이라고 하나, 수행 8성의 선배들조차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는 저 노괴는 실력으로만 따지면 자신을 가벼이 압도한다.


지금도 보라. 독해담의 독기를 쐬이고도 끄떡도 하지 않는다. 저자가 익힌 혼돈법체라는 신통은 상성이라는 것이 없는 진정한 무결(無缺)의 신통이라, 그 어떤 악독한 기운도 연화해 자신의 것으로 삼켜버린다. 독공을 사용하는 자신으로서는 꿈에라도 나올까 두려운 상대다.


“헌데... 회주가 이곳에는 무슨 일입니까.”

“잊으셨을지도 모르겠지만, 저는 계면상회의 회주이면서도 귀 족의 객경 태상장로이기도 하지요. 이곳에 찾아올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아니, 그런 이야기가 아니라! 회주와 같은 분이 굳이 이런 작은 행사에 참석할 이유가 있나 해서 여쭤보는 겁니다. 오해는 하지 마시지요!”


그래서 저 노괴물의 원한을 사면 후환이 무궁하다. 자신은 결코 그런 결과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사내아이는 손사래를 치며 변명을 덧붙였다.


그는 용족이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종족이라고 생각하고, 다른 모든 종족을 은연중 멸시하지만, 차별도 상대를 봐가면서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성일은 그가 아직 알이었을 때도 미궁의 최고 거물이었고, 지금도 그렇다.


“백현제가 알을 가졌다니, 같은 칠현제인 저희로서는 찾아오지 않을 수 없지요. 어쨌거나 그게 그동안의 관례였으니까요. 하지만 회주께서는 그런 관례로부터 자유로우실 텐데, 굳이 알에서 꼬마아이가 태어나는 것을 보러 여기까지 발걸음하셨습니까?”

“그러면 안 되는 이유는 없으니까요.”


그래서 그가 그렇게 일축하자, 사내아이는 더 캐묻지 못했다. 사내아이는 물론 미궁에서 가장 강대한 종족 중 하나인 용족의 황제지만, 이 미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직함이 아니라 수행이다. 수행에서 밀리면 직급이 아무리 높아도 의미가 없다.


눈앞의 저 사람은 고작 상단 주인이지만, 미궁 어떤 종족의 지도자를 만나도 공손한 예우를 받는다. 용족의 칠현제도 이 남자의 표정이 변하면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다.


그래도 사내아이의 얼굴에 서린 불만스러운 기색을 읽었는지, 이성일이 말을 덧붙였다. 저 흑현제도 계면상회의 손님 중 하나로, 정말로 관계가 틀어지면 고객 하나를 잃어버리는 셈이다. 그러니 어느 정도 체면을 보아줄 필요는 있었다.


“백현제께서는 미궁의 아홉 태양 중 한 분인 용신의 직계혈육이 아닙니까. 마침 그분과 거래할 일이 있어 이곳으로 왔으니, 겸사로 들려본 것일 뿐입니다.”

“그분과 거래를 할 일이 있으시다고요?”

“저번에 선배님이 찾으시던 무량옥고(無量玉膏)가 마침 본 회주의 손에 들어왔기에, 한 병 정도 판매하기로 이미 이야기를 다 끝냈습니다. 이미 약속까지 다 잡았고요.”

“무량옥고! 정말 그 천혜의 영약을 가지고 계신단 말입니까?”


눈이 커진 사내아이가 씁쓸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실력이 아니라 재력으로 비교해도, 그는 절대 저 사내를 따라잡지 못할 것이다. 계면상회는 사실상 전 미궁을 상대로 장사를 하고, 매 순간 천문학적인 수익을 벌어들이니까.


“미궁에 명망이 높으신 여러 선배님들을 뵈어 영광일 따름입니다. 세 분 다 안으로 들어오시지요. 드높은 분들을 위해 마련된 공간이 있습니다.”


그러니 이번 부화식을 주관하는 황실 집사는 말할 것도 없었다. 이 노인도 용족 내부에서 신분과 지위가 낮은 용은 아니지만, 여기에는 수행 7성 선배가 무려 세 분이나 계셨다.

그러니 입 안의 혀처럼 고분고분, 안쪽으로 들어올 것을 청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강자라면 아무런 세력도 없는 산수(散修)라고 해도 결코 쉬이 볼 수 없다. 미궁 제일의 종족을 ‘자부하는’ 용족이라고 해도 신경을 써서 접대하지 않을 수 없다.

다만, 지금까지는 이런 일이 없었다. 용족도 아니고 다른 종족의 거물들이 무슨 볼일이 있다고 남의 알에서 남의 새끼가 태어나는 거나 보려고 이런 곳까지 오겠는가.


그래서 이성일을 보는 그의 시선에는 이상한 기색이 감돌았다. 저분의 신분과 지위로 굳이 부화식을 보러 여기에 참석할 이유는 없을 텐데 말이다.

하지만 일단 온 손님을 그의 마음대로 쫒아낼 수야 없는 노릇이다. 모든 것은 여제 폐하가 알아서 결정할 것이니, 자신은 그저 사실만을 전달하면 그만이다.


작가의말

<미궁상식 #0>

연재는 매일 오후 6시 10분에 진행될 예정입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나이 90만 먹은 수행자는 은퇴하고 싶다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8 태뢰 +1 23.05.12 46 1 12쪽
7 팔각정 23.05.11 38 1 10쪽
6 태자의 오해 23.05.11 45 1 15쪽
5 노괴 23.05.10 53 0 14쪽
4 혼사 +1 23.05.10 57 1 16쪽
3 영신단 23.05.10 51 1 11쪽
2 이무기 23.05.10 64 2 14쪽
» 부화식 23.05.10 108 1 8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