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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슈라: 쓰레기와 별

문드러진 정의

웹소설 > 일반연재 > 대체역사, 판타지

바슈라
작품등록일 :
2021.02.16 16:05
최근연재일 :
2021.06.22 14:35
연재수 :
20 회
조회수 :
1,263
추천수 :
8
글자수 :
89,710

작성
21.04.23 16:03
조회
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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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글자
10쪽

ep4. 엔리코(完)

DUMMY

언제 소란이 있었냐는 양 바깥은 고요했다. 이따금씩 몇 무리들이 억지로 깔깔거리는 게 겨우 그 고요를 깨뜨렸다. 페인트가 벗겨져가는 벤치에 요엘이 심드렁하니 앉아있었다. 그녀에게 물기가 송글송글 맺힌 아이스커피 컵이 슬쩍 다가왔다.


"아메리카노 좋아하는 분은 처음 보네요!"


커피컵을 내밀며 알렉시프는 환하게 웃었다. 그 웃음의 의미를 알기에 요엘은 기꺼이 받아들며 빨대를 물었다.


"아메리카노 파는 별종 취급받더라고."


"맞아요! 뭣하러 그런 밍밍한 걸 먹냐고 하더라구요!"


"그 옅은 탄 맛이 좋은 건데 말이야!"

"이야, 아메리카노에 대해 뭣 좀 아시는군요?"

"알다마다! 에스프레소는 양도 적잖아!"


연이어 터져나오는 말문에 둘은 잠깐 숨을 골랐다. 그러다 서로 마주보는 모양에 둘 다 피실 웃어버리고 말았다.


"교회에서 보내신 건가요?"

"반은 맞고 반은 틀려. 도망치게?"


알렉시프는 고개를 저었다. 그 모습은 요엘에게 꽤나 생경했다.


"아가씨한테 도망쳐도 교회는 절 어떻게든 죽일 거에요. 혹시 신자십니까?"


"아니. 일로 온 거야."


팔짱을 끼고 그녀는 홀스터에 꽂힌 총을 매만졌다. 굳이 이런 소리를 하고 있을 이유는 없으니 보는 눈이 없는 지금이 적기였다.


"어찌됐건 절 죽이려 오신 분이군요."


그 낯은 죽을 사람치곤 평온했다. 무릎에 짚은 손이 잘게 떨리고 있었지만. 요엘의 손은 그때에도 그립을 매만지고 있었다. 그와 마찬가지와 평온한 듯한 낯으로 요엘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이단자는 매드 사이언티스트 같은 줄 알았어."

"누가 저보고 그러던가요?"

"...개인적인 소감이야."


그 말과 함께 요엘이 총을 꺼내 그에게 겨눴다. 참새가 날아와 짹짹거린대도 이상하지 않을 고요가 그들 사이에 풍겼다.


"이럴 땐 신자보다 불신자가 낫네요."


불을 뿜지 않는 총이 신기한 양 알렉시프가 말했다. 제 몸의 떨림이 멈추지 않아서인지 제 바지를 살짝 움켜쥐었다. 일반인치곤 죽음에 의연하지만... 역시 죽음은 누구에게나 두렵게 다가오기 마련이다. 그 모습을 보고 요엘이 물었다.


"지금 쏴야해?"

"아아뇨. 고마워서 그래요."


갸웃거리는 그녀의 시선을 향하며 알렉시프는 겨우 떨림을 멈추어냈다.


"이단자라 하면 신자들은 말도 안 섞고 도망치거든요."

"솔직히 그쪽이 이단자란 기분은 안드는 걸."

"정확하게는 이단자로 몰렸거든요."


총을 집어넣진 않았지만 요엘이 총구를 슬쩍 내렸다. 왜냐하면... 본인도 잘 몰랐다. 단지 교회 놈들이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아서일까.


"넌 축복받았네. 난 교회를 싫어하는 인간이거든."


"그래서 그런 걸까요? 성모님께서 절 불쌍히 보셨나봐요."



만일 그녀도 신자였다면 주저없이 총을 쏘았을 것이다. '이단자' 따위의 낙인은 의외로 인간의 이성을 흐리게 하기 딱 좋았다. 이 알렉시프란 인간이 이단자건 아니건 그것은 행운일 것이다.


적어도


"자기 유언 같은 걸 들어줄, 마피아를 만났으니."


"마피아...카모라 아니면 아르젠팔토라시겠군요."


"앙드라게타는 후보에도 안 올랐네. 그 치들은 경박하긴 하지."


방아쇠를 당기지 못할 만큼 이 자는 쓸모있는 것이 아니다. 카모라의 목줄을 움켜쥘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돈이 많은 것도 아니다. 잘생겼다 해도 그건 마피아가 써먹을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신부님의 부정을 보았습니다."

"고해성사야?"

"그렇다고, 할까요?"


웃는 척이라도 해보려 용을 쓰지만 그래도 울상에 가까웠다. 그 모습에 요엘은 목구멍 깊은 데서 뭔가 울컥 치밀어 올랐다.


"성가대 아이들에게 못된 짓을 하고 있었습니다. ...암암리에 그런 일이 있다곤 들었지만, 그게 제가 다니는 교회가 그랬을 거라곤 생각도 못했어요."

"너무 늦게 알았네."


닳고 닳은 시선이 알렉시프를 향해 안타까움을 지어내보였다. 정치인이 뇌물을 받아먹었단 일 만큼 신부, 수녀들의 추문도 나름 흔한 편이었기 때문이었다. 성가대 가운을 들췄을지 바지를 들췄을지는 물을 필요도 없었다.


"그리고 수석신부에게 갔을 테지."

"잘...아시네요."


그가 무슨 표정을 지었는지 이번에 요엘은 눈에 담지 않았다.


"처음엔 부정하시더군요. 그가 그럴 리 없다고요. ...전 그때 알아채진 못했어요, 사실 수석신부님도 알고 있는 일이라고..."


침묵이 뚝뚝 떨어졌다. 어디선가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지만 요엘은 그곳을 눈여겨보지 않았다.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았다.


이미 점심시간은 끝난 듯 그곳을 돌아다니는 무리는 없었다.


"그리고 미사시간에 절 지목하셨죠... 제가 신부의 흠을 들춰내려 한 이단자라고...노아의 흠을 떠벌린 함과 같다고."

"공개적으로 망신이라도 줬나봐. 그 자리에서 네가 본 것을 고해보라고 종용했으려나?"


추문이 교회에 흔할지언정 사람들이 태연할 수 있는 이유는 이것이었다. 알렉시프의 말을 듣고서야 요엘은 교회 놈들이 날카롭게 알 바 아니라고 하던 까닭을 알았다. 애당초 신자가 아니면 공감하지 않는 게 자기들 사정이니까.


"...혹시 저희 교회에 오셨어요?"

"나도 어릴 적에 세례는 받았어."

"아가씨만큼 세례명도 예뻤겠어요."


알렉시프 그 자신은 몰랐을 테지만, 그 말은 그도 모르게 요엘의 마음 한 켠을 찔렀다. 애써 감춰둔 소중한 기억들이 스멀스멀 새어나오고, 추억들에 목이 아리기 시작했다. 마피아건 시체건 모르고 살던 시절의 추억들.



"레아였어."


그래서 그만 쓸데없는 소리를 하고 만 것이었다.


"물론 신은 없다고 생각해."


그렇다 해도 토다는 이는 없었다. 젖은 눈을 알렉시프가 소매로 문댔다. 큰 키에 어울리지 않을, 강아지 같은 검은 눈이 자신을 내려다보는 것이 느껴졌다. 그나마 치켜든 총구는 이미 땅바닥을 바라본 지 오래고 여유로운 척 짓던 미소는 사라져 있었다.


"신이 있다고 생각하면 난...미쳤거든."


그 말을 마치고 요엘은 소리 죽여 탄식했다. 이것은 저 치가 잘못된 거야. 아니, 내가 쓸데없이 말을 너무 많이 했어. 묵직한 것이 제 가슴을 누르는 것 같았다. 이 자는 방아쇠를 당기지 못할 만큼 쓸모 있지 않아. 카모라의 목줄을 움켜쥘 수 있는 사람도 아니지, 그렇다고 돈이 많은 것도 아니야. 돈이 많았으면 벌써 이 빌어먹을 곳을 떴을 거야. 이딴 데서 죽음을 기다리지도 않았겠지. 설령 잘생겼지만 그건 마피아가 써먹을 게 아냐. 그렇지만...



바다처럼 넓은 하늘, 머리카락을 데우는 태양,

그 시절엔 그녀도 피나 시체를 두고 이야기 하지 않았다.

오늘 저녁은 무엇인지, 학교 밥은 맛없다니, 엄마의 외출금지는 너무 고리타분하다니 따위의 이야기들을 친구들끼리 툴툴거리며 나눴다.

에스프레소냐 아메리카노냐, 라자냐엔 소스를 찍어 먹어야 한다, 부어야 한다는 따위의 얘기들.


피비린내 나는 이야기가 아닌 지극히 평범한 대화를.


...아메리카노가 좋다니 따위는 집어치우고 바로 쏴버릴걸.


불이 붙은 양 목이 뜨거웠다. 그렇다고 눈물따윈 메말랐기에 목메임은 더 뜨거웠다. 흐트러진 마음을 다잡으려 요엘은 총을 꽉 쥐었다. 그때 그가 요엘을 슬며시 끌어안았다.


"...미안해요. 전 그저,"


그가 말을 이으려 할때 요엘이 입을 틀어막았다. 숨 막힌 고기 같은 숨을 요엘이 헐떡였다.


이 자는 그저 허락없이 끌어안았다고 사과를 했겠지만, 요엘은 그 탓에 그의 옷깃을 잡아버렸다. 잠시간 다듬지 못한 숨이 그의 품에서 흩어졌다.


"절 놔달라고 해도 들어주지 않으시겠죠?"


그 말을 하면서 알렉시프의 눈이 흔들렸다. 옷깃을 붙잡은 손에 힘이 빠지면서 요엘이 무감각하게 말했다. 낯선 이, 그것도 곧 죽일 놈 품에서 숨을 몰아쉬던 것 치곤 태연했다. 아니, 스스로가 메마름을 가장하고 말했다.


"내가 풀어줘도, 네 교회에서 널 영원히 쫒을 걸."


그러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 가능성은 부러 말하지 않았다. 헛된 희망이기 때문이었다. 찰칵, 소리를 내며 총구가 알렉시프의 머리를 겨눴다. 그녀는 방아쇠에 걸린 손가락을 당겼다.





고요하던 사이프러스가 한번 흔들린 것 같았다. 새들이 앉아있을 법 했지만 새가 날아오른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다만 멀찌감치서 사람들이 창가를 내다보는 것이 보였다.


제 얼굴과 제 옷에 묻은 흔적도 생각하지 않고 요엘은 그 자리를 뛰쳐나갔다. 목격자가 무서운 건 아니다. 목격자가 있다한들 평범한 사람들이건 경찰이건 눈을 감는 세상이다. 그럼에도 그녀는 벽을 넘고 뛰쳐나갔다. 미리 약속한 데서 단테가 차를 세워뒀을 테고 그렇다면 새 옷으로도 갈아 입을 수 있으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계속 뛰었다.

뛸 수밖에 없었다.



* * * *



낡은 사옥에선 어울리지 않는 옷자락이 흩날렸다. 흔한 검은 바지가 아닌 검은색 수녀 모자를 낮게 흔들며 순순한 인상의 수녀가 사이프러스를 지나쳤다.


그녀가 걷길 멈춘 곳 멀찍이서 사람이 우글거리고 있었다. 그곳에서 수녀에게 익숙한 소리들이 들려왔다.


탄식,


“누가 이 대낮에...”


통곡.


“아...알렉 씨! 어째서 왜 이렇게...!”


분노,


“그, 그 여자가 같이 있었어! 그 여자...”


당혹.


“당장 경찰, 경찰...을 불러야 해...?”


그 소리들이 어우러져 만드는 곡에 수녀는 슬며시 웃었다.


“이 모든 것은 신의 뜻.”


그 소리와 함께 낮은 종소리가 멀찍이서 울려 왔다. 그 탓인지 입술에 그려진 미소가 발그랗게 달아올랐다. 그러다 이내 슬픈 낯이 그녀의 얼굴에 면사포처럼 드리워졌다. 수녀의 검은 구두가 걸음을 다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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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ep5. 숨은 살의(4) 21.05.05 54 1 9쪽
16 ep5. 숨은 살의(3) 21.05.02 38 0 7쪽
15 ep5. 숨은 살의(2) 21.04.30 34 1 8쪽
14 ep5. 숨은 살의(1) 21.04.26 30 1 8쪽
» ep4. 엔리코(完) 21.04.23 63 1 10쪽
12 ep4. 엔리코(1) 21.04.22 40 0 10쪽
11 ep3. 부식된 일상 (完) 21.04.04 68 0 10쪽
10 ep3. 부식된 일상(2) +2 21.03.26 43 0 12쪽
9 ep3. 부식된 일상 21.03.21 50 1 8쪽
8 ep2. Crimson diamond(完) 21.03.08 45 0 21쪽
7 ep2. Crimson diamond(3) +1 21.03.03 37 0 10쪽
6 ep2. Crimson diamond(2) 21.02.26 70 0 11쪽
5 ep2. Crimson diamond(1) +2 21.02.24 54 0 9쪽
4 ep1. 악덕의 소굴(完) +2 21.02.21 71 0 21쪽
3 ep1. 악덕의 소굴(3) 21.02.20 76 0 11쪽
2 ep1. 악덕의 소굴(2) +2 21.02.18 137 0 8쪽
1 ep1. 악덕의 소굴 +2 21.02.17 258 1 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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