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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바사 님의 서재입니다.

령능력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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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바사
작품등록일 :
2020.03.12 17:28
최근연재일 :
2020.06.17 2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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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3 2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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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쪽

46화 헤지펀드(14)

DUMMY

46화 헤지펀드(14)



***



27일의 12회차.


삐삑- 철컥!


“열렸습니다.”

“진입해.”


끼익-

김소영의 집 현관문이 열렸다.


“박 검사님, 집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뭐야? 집안에 꽁꽁 숨어 있을 거라더니. 아무튼 싸그리 뒤져봐.”


박상기 검사는 신경질적으로 명령을 내리고는 휴대폰을 들어 전화를 걸었다.


“야, 건호야. 없는데? 집에 있을 거라며? 기껏 영장 받아 왔더니.”

[...역시 도망쳤군요. 언제 나갔는지는 혹시 알 수 있겠습니까?]

“글쎄... 압수수색 인원으로만 와서. 과학반은 따로 안 데려 왔는데?”

[알겠습니다. 그럼 박 검사님은 할 일만 해주십시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 그럼.”


뚝-


“뭐야 대체. 일처리를 어떻게 하는 거야? 나 이대로 계속 진행해도 되나?”


박상기는 인상을 쓴 채 휴대폰을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UR펀드 고객으로 있던 김민철 KBC방송국장과 우동식 조선문화예술재단 이사장의 고소로 인해 영장을 발부받은 것 까진 좋았는데, 정작 타겟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UR매니지먼트 회사에도 보내놓긴 했지만, 아마 별다른 성과는 없을 것이다.


“시작할 때만 해도 다 해놓은 밥상에 숟가락만 올리면 될 줄 알았는데. 왕건호 이거 폼만 잡을 줄 알지. 개코도 없는 거 아닌가 모르겠네.”

“박 검사님. 그럼 어떻게 하죠?”

“일단 컴퓨터랑 문서들 위주로 챙겨놔. 어쩔 수 없잖아?”


쯧- 박상기는 혀를 차고는 그대로 몸을 돌려 현관을 빠져나갔다.



***



“역시 왕건호는 방송, 연예계, 문화예술, 이런 쪽과 관계를 맺고 있어.”

“하필 소영 씨 고객도 그 쪽이 많았죠?”

“응. 서인혁 씨랑 연결되고부터 어쩌다 보니, 그쪽 고객들 요청이 많았지.”


은설희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안나영을 향해 물었다.


“쿨링문이라는 클럽에 대해서 어떻게 보세요?”

“아마, 그들만의 사교모임의 장소가 아닐까? 이야기만 들어봐서는.”


안나영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잘 모르겠다는 듯 손짓을 했다.



강북 약화동 쪽 만제호텔.

유현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김소영과 함께 아파트에서 나왔다.

감시하는 인원은 이미 견시우 쪽에 처리한 덕분에, 은밀히 이곳 호텔로 오게 되었다.

체크인은 은설희의 이름으로.

검찰이 쳐들어오는 건 조직이 쳐들어오는 것 보다 상황이 훨씬 좋지 않았다.

나름 구실을 갖고 적법절차에 맞게 들어오면, 비록 그 절차가 꾸며낸 것이라 한들 저항할 명분이 없다.


‘이게 권력자와의 싸움이라는 건가?’


수단은 무엇이든 사용할 수 있다.

폭력은 물론, 재력, 인맥, 무엇이든.


“내가 본 바로는, 쿨링문은 일종의 접대 장소 같아. 사장은 다른 사람이지만, 직접 관리하는 쪽은 금사자파 쪽 조직이었어. 여러 가지 비합법 약도 굴러다녔고.”


김소영이 계속해서 기억을 더듬어 안에서 본 배경을 묘사했다.


“...그럼, 아마 연예계 쪽의 모임 주최 장소 같은 곳인가 보네요.”


은설희의 말에 김소영은 고개를 끄덕인다.


“응. 아마 그럴 거야. 아마 성접대 같은 것도 이뤄지지 않을까? 왕건호가 노리고 있는 게 뭔지는 좀 알 거 같아. 인맥의 중심이 되고 싶은 거겠지.”

“그리고 거기에 소영 씨의 능력을 갖게 되면, 계획의 완성이 되는 거네요. 미려그룹이라는 배경으로 경제권 인사들을, 쿨링문을 배경으로 문화예술 인사들을, 그리고 정치권 인사들까지 포섭하는... 이건 그냥 놔둘 순 없겠는데?”


안나영도 중얼거리며 함께 추리를 하고 있었다.


“안 형사님이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없을 거예요. 어쨌거나 겉으로 보기엔 철저하게 합법적인 클럽인걸요. 그런 부분에선 아마 틈이 없을 거라고 봐요.”

“그리고 안 형사님? 이쪽에서 얻은 정보로만 움직이면 안 된다는 거 기억하시죠? 알고는 계시되, 절대 공개하면 안 돼요. 소영 씨에 대한 건.”


김소영과 은설희의 말에 안나영은 주먹을 꽉 쥐었다.


“알아요. 하지만, 만약 이번 일을 해결하려면 이쪽을 최대한 이용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긴 해요. 왕건호의 유일한 약점이잖아요?”

“아마도요. 특히 인맥을 흩어버릴 수 있으면 우리도 대등한 상태에서 교섭이 가능해요. 견시우의 목적은 소영 씨가 어느 쪽으로도 넘어가지 않는 것이니까, 여전히 기대할 수 있고.”

“...저기 그런데요.”


유현이 처음으로 입을 열자 세 사람의 이목이 집중됐다.


“우리는 왕건호가 뭘 원하는지 정확히 모르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교섭을 하죠?”

“응? 그러니까 예지능력이잖아.”


은설희가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보는 것을 애써 무시하고, 유현은 말을 이었다.


“아뇨, 그러니까 예지능력으로 뭘 원하는 거냐 이거죠. 애초에 선배가 말했듯이, 왕건호가 여기에 끼어든 건 구웅재 아저씨랑 트러블이 있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고 했잖아요? 그래서 삼안건설을 추적하고, 그 다음에 UR매니지먼트로... 그러니까 예지능력은 나중에 알게 된 거고, 원하는 것이 그 연장선에 있는 것 아닐까 해서요. 게다가 그게 목적이라면 소영 누나를 해치면 안 되는데, 실제론 죽는 경우도 있었죠? 검찰을 동원하는 것도 그렇죠. 잘못하면 검찰 쪽으로 넘어가게 될 텐데.”

“...어, 그게...”


은설희는 고개를 갸웃했다.

뭔가 놓친 것이 있는 느낌과 동시에, 실마리가 잡힐 듯한 느낌이 함께.


“혹시, 소영 누나가 구웅재 측에서 있는 게 가장 거슬리는 거 아닐까요? 예지능력을 가질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게 안 된다면 최소한 구웅재나 삼안건설 측에 남겨서도 안 된다. 이런 가설이라면 지금까지의 행보도 이해가 되죠.”

“아하! 그렇네!”


은설희가 짝- 하고 손뼉을 쳤다.


“그럼 소영 씨가 앞으로 양측 모두에게 관계될 일이 없다는 점을 어필하면, 왕건호 쪽에서도 더 이상 터치하지 않을 지도 몰라.”

“물론 왕건호 쪽에 얕보여서도 안 되겠죠. 교섭할 여지가 있으려면 우리가 쉽게 당하지 않는다는 것도 보여줘야 해요. 포기하는 쪽이 훨씬 이득이 될 거라는 점요.”

“응, 그것도 지금까진 성공적이었으니까. 아무튼 제법이야? 유현 주제에. 유현 주제에.”


에잇- 에잇- 유현은 다리를 걷어차는 은설희를 무시하며 김소영에게 말했다.


“그럼 왕건호에게 연락할 방법은 없을까요?”

“지금은 없어. 누굴 거치지 않는 한은...”

“일단 연락할 방법부터 찾아봐야겠네요. 그래도 여기 위치는 알리고 싶진 않은데...”

“응? 지금 왕건호는 미려그룹에 소속되어 있을 거 아냐? 차라리 회사로 연락해보는 건 어때?”


안나영이 별 생각 없이 툭 던진 말에 유현은 다시 생각에 잠겼다.


“이것도 전부 가능성의 문제니까요. 그래도 가능하면... 최대한 리셋하지 않는 쪽으로 신중하게 결정했으면 해요. 한 번 리셋 할 때 마다 부담이 너무 크니까.”

“내 걱정은 하지 마. 이제 생각보다 견딜 만 해. 갈등하던 부분이 사라져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헤헤... 지금은 희망이 있다고 생각하니, 리셋할 때도 마냥 고통스럽진 않아.”

“그래도요.”

“니가, 그리고 여기 모두가 해결해 줄 거잖아? 믿고 있어. 나도 최선을 다할 테니까.”


김소영이 찡긋- 윙크를 하며 유현의 어깨를 툭 두드렸다.

은설희도 어깨를 쭉 펴며 힘차게 말했다.


“좋아! 그럼 교섭은 내게 맡겨. 어차피 소영 씨의 보호는 현이 너밖에 할 수 없으니까. 니가 직접 나서는 건 위험하고.”

“선배도 그럼 정체가 노출되는 건데. 이 타이밍에 괜찮을까요?”

“시간을 더 끌수록 되돌리기 힘들어져. 왕건호도 시간이 지날수록 포기하기 힘들어질 거야.”

“매몰비용... 말이죠?”

“그게 무슨 말인 진 몰라도, 암튼 손해를 많이 볼수록 집착하게 되잖아? 그 전에 끝내자.”


유현은 피식 웃었다.

은설희에게는 딱히 이론이 필요 없다.

영술을 연구할 때도, 알고 있는 지식보다 경험을 우선시 하며 이론에 의지하지 않고 오히려 이론을 창조해낸다.

그리고 항상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생각으로 결론을 이끌어 낸다.

그래서 의지가 된다.


“그럼 무슨 일이 있으면 연락 줘요.”

“응.”


안나영도 조금 머뭇거리다가 말을 꺼냈다.


“요즘 팀장님이 날 보는 눈빛이, 조금 의심스러워하는 느낌이야. 아무래도 내가 말을 못하니까. 물론 개인적으로 팀장님은 믿고 있지만, 약속은 약속이니까. 앞으론 행동에 제약이 있을지도 몰라. 그러니까, 자발적으로 도와주긴 힘들 거야. 급할 땐 내게 연락을 줘.”

“네. 알겠어요. 안 형사님.”

“그럼.”


은설희와 안나영은 함께 문을 나섰다.

유현은 김소영에게 확인 받듯이 물었다.


“오늘이 12회차라고 했지? 여기 있는 동안엔 움직이지 않아도 될까?”

“다른 호텔도 가봤지만, 사실 습격 자체는 없었어. 그보단 마포에서 가깝고, 남쪽에선 먼 곳으로 고르는 편이 좋다고 해서 온 거지. 현금을 미리 인출해 두는 것도 큰일이었고. 이제 곧 계좌가 동결될 테니까.”

“ ...5만 원 권 지폐가 나와서 정말 다행이야.”

“응. 그리고 마지막으로 리셋 했던 이유는, 회사로 찾아갔을 때 만난 서인혁 씨가 쿨링문에 대해 이야기했었기 때문에... 그걸 구실로 왕건호 씨에게 접근해보라고 했던 거니까.”


그 말에 유현은 품고 있던 의문이 생각났다.


“그러고 보니 서인혁이라는 사람은 대체 정체가 뭘까? 마치 누나의 예지를 알고 있다는 듯이... 그렇다고 왕건호나 견시우와 접점이 있는 것 같지도 않고.”

“그 사람이 맡긴 금액이 400억이야. 누가 그 정도 돈을 한 번에 맡기겠어? 조그만 신생 회사 펀드에... 결국 정산 금액만 1000억 가까이 되니까. 어쩌면 눈치 채고 있을지도.”

“그래?”


유현은 뭔가 기묘한 느낌이 들었다.

진심으로 믿지 않는다면, 그런 큰돈을 맡길 수는 없다.

돈의 단위가 달라지면, 돈은 용도가 바뀐다.

단순한 생명의 돈에서, 지위나 권력의 돈으로, 혹은 하고 싶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꿈의 돈으로.

용도가 달라지는 것이다.


“...설마 영술사인가?”


하지만 딱히 김소영에게 집착하고 있는 느낌은 아니다.

그 영문을 알 수 없는 행동들이 어떤 결론도 내릴 수 없게 만들었다.


“...응? 현아 왜?”

“아니. 그냥... 아무튼 설희 선배도 더 이상의 정보는 필요 없다고 했으니. 오늘은 여기서 지내자. 교섭을 잘 해내길 믿어야지.”

“응. 그래... 아, 그럼 난 샤워 좀 할게. 아침에 씻지도 못해서 너무 갑갑해.”


김소영은 욕실로 향하며 니트를 벗기 시작했다.

유현은 깜짝 놀라 뒤돌아섰다.


“어? 그, 그러세요. 난 잠시 나가 있을게.”

“뭘 매번 부끄러워하고 그래? 어휴. 그러니 여자친구도 없지.”

“그게 무슨 상관이야?”

“너무 쑥맥이면 자신감이 없어 보인다고. 좀 대범하고 자연스럽게 안 돼?”

“됐습니다. 뭐 이런 나라도 언젠가는 좋아해줄 사람이 생기겠지.”

유현이 현관으로 향하자, 김소영은 욕실 문을 닫다 말고 빼꼼 열어 얼굴을 내밀었다.

“아참, 너도 안 씻었잖아. 같이 샤워할까?”

“아, 그만 좀 놀려!”


유현이 버럭- 소리치자 김소영은 혀를 내밀고는 욕실 문을 닫았다.


“으, 밝아진 건 좋은데 긴장감이 너무 없어진 거 아냐?”


유현은 투덜거리며 현관을 나섰다.



***



“그러니까, 소영 씨는 이제 펀드에서도, 삼안건설에서도 손을 뗄 거예요. 더 이상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는 다는 거죠. 그러면 이제 그쪽에서도 노릴 이유가 없지 않아요?”

[...당신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 지 잘 모르겠군요.]

은설희는 이렇게 겉도는 이야기로 시작하는 것이 영 성미에 맞지 않았다.

“으음... 왕건호 씨, 아니 왕 상무님이라고 해야 되나요?”

[호칭이야 마음대로 해도 되지만, 제가 어떤 여자를 노린다던가, 그런 이야기를 함부로 하진 말아줬으면 좋겠군요. 명예훼손으로 고소당하고 싶다면 모르겠지만.]

“...뭐 좋아요. 아무래도 전화상으론 좀 그렇죠? 좀 전에 말한 건 다 잊어요. 그냥 왕 상무님과 비즈니스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연락했다. 이건 어떤가요?”

[어떤 비즈니스인지에 따라서 시간을 낼 수 있을지 어떨지. 모르셨다면 말씀드립니다만, 저는 아주 바쁜 사람입니다.]


은설희는 웃음이 새어나오는 것을 겨우 억눌렀다.

당연히 즐겁다거나, 재밌기 때문에 나오는 웃음이 아니다.

반대로 엄청난 짜증이 솟구치고 있었다.

한계까지 속을 긁어놓을 수 있는 족속들.

예전 구웅재와 처음 이야기할 때도 느꼈지만, 이런 족속들은 자신이 그 누구보다도 한없이 유리한 곳에 서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처음엔 그저 현실 감각이 떨어지는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것과는 전혀 달랐다. 단지 그들은 어떤 상황에 처해있더라도 자신이 상황을 주도할 수 있다고 믿고 있을 뿐이다.

결과적으로 실패가 눈앞에 닥치기 전 까지.

마치 죽음을 목전에 두고도 결사항전을 벌이는 전사들처럼.

죽기 전에는 죽지 않는다.

그 기묘한 분위기가 그들을 평범하지 않은 사람으로 만들어 주는 것이다.


‘마음 같아서는 통화해서 즐거웠고 다시는 보지 말자고 해주고 싶지만...’


은설희는 일어나는 욕구를 참고는 마음을 가다듬었다.

교섭은 이쪽에서도 꼭 필요하다.


‘휘둘리지 말자. 목적만 생각하면 돼.’


그 아슬아슬한 한계선을 너무나도 잘 파악하고 있기에, 그들은 마음을 건드린다.


“알겠어요. 왕 상무님, 혹시 쿨링문이라는 클럽 이름 들어보셨어요?”


이쪽에서도 패를 갖고 있다.

은설희는 왕건호의 반응을 살피기 위해서 쿨링문의 이름을 꺼냈다.


[...글쎄요. 클럽이라니. 미려그룹에선 전혀 취급하는 업종이 아닙니다만.]

“그렇죠. 그러니까 한 번 생각해볼 여지가 있지 않겠어요? 아직 누구에게도 이야기 한 적도 없어요. 어느 모 건설사 쪽에도 얘기한 적 없고. 우리만 알고 있는 이야기인거죠.”


휴대폰 너머로 한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은설희는 빙긋 웃으며 다시 말했다.


“클럽이란 게, 단순히 노는 장소잖아요? 그래서 경찰에서도 딱히 관심 가질 이유도 없고. 아, 그러니까 단순하게 술 마시고 춤추는 곳이니까요. 괜찮지 않아요?”

[...새로운 사업아이템이라면, 이야기나 한 번 들어보겠습니다. 그럼 그 쿨링문이라는 곳에서 뵙죠. 마침 내일 저녁에는 시간이 비어 있습니다.]

“음, 그러지 마시고 오늘은 어때요? 제가 그쪽으로 찾아갈게요.”

[제게도 일정이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이야기라도 단순한 제안일 뿐인데, 제가 일정을 변경할 정도는 아닐 것 같군요.]


또, 근거 없는 허세.

하지만 이걸로도 충분하다.


“...좋아요. 그럼 내일 뵙는 걸로 알게요. 쿨링문에서.”

[알겠습니다.]


뚝-

통화를 종료하고 나니, 비로소 주변의 소음이 크게 다가온다.

은설희는 멀리 보이는 쿨링문의 입구를 바라보며 근처를 걸었다.


‘입구는 하나뿐인가? 조금 위험해 보이는데...’


지하로 이어지는 문.

교섭이 잘못될 경우엔 무사히 빠져나오기 힘들 것 같다.


‘그래도, 얘기가 통하지 않으면 여차하면 리셋 하면 되니까...’


은설희는 다시 휴대폰을 들어 유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현아? 왕건호 쪽이랑 연결 됐어. 내일 교섭할 거야. 그쪽도 이제 여유는 없다고 봐. 적당히 타협할 수 있을 것 같아.”

[잘됐네요. 그럼 오늘 일은 끝난 건가요?]

“응. 나도 이제 집으로 들어가는 중이야. 거기도 별일 없지?”

[네. 아무 일 없어요.]

“그래. 그럼 내일 봐.”


은설희는 전화를 끊고 도로를 둘러 봤다.


‘여기서 역까진 거리가 좀 있고. 택시를 타고 갈까?’


툭-


“아차.”


뒷걸음치다가 지나가던 행인과 부딪혔다.


“죄송합니...”


뒤를 돌아보며 사과하려던 은설희는 어둠속의 그 행인이 어딘가 익숙한 얼굴이라고 생각했다.

마치 연예인이라도 할 법한 샤기컷에 담담한 눈빛.

행인은 말없이 은설희를 응시하고 있었다.


‘어디서 봤더라? 극히 최근에 본 듯한 느낌이...’


그리고 순간 느껴지는 파동에 은설희는 이질적인 느낌을 받았다.


“어? 혹시 영술사?”



***



“하하. 그땐 나도 완전 음침한 애였어. 대학 졸업할 때 까지도. 학과 친구들도 나보고 완전 이상하다고, 왜 경영학, 회계학 공부는 안하고 차트만 쳐다보고 있냐고 말야.”

“실제로 차트 본다고 뭐 배울 수 있는 건 없지 않나?”

“아냐! 차트는 일종의 역사의 기록이라고! 그 별거 없어 보이는 단순한 선과 숫자의 조합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해석하는 거지. 그 당시 세워진 봉 하나와 거래량을 보면서, 그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자료를 찾아보면서, 아, 이래서 그랬구나. 사람들의 생각이 그렇게 교차했구나... 상상해보는 거야. 재밌지 않아?”


김소영은 붉게 상기된 얼굴로 계속해서 떠들었다.

테이블에는 간단한 안주거리와 빈 와인병 두 개가 덩그러니 놓여 있다.

유현은 심드렁하게 턱을 괴고는 후비적- 귀를 팠다.

한 잔 밖에 안 마셨지만, 술이 약한 탓에 얼굴색은 둘 다 별 차이가 없었다.


“그럼 그렇게 역사를 파헤쳤는데 왜 자살까지 하게 됐어?”

“...바보야. 아무리 역사를 공부해도, 그건 결국 지금의 재해석이야. 역사가 반복되는 이유가 뭔지 알아? 역사의 소용돌이 한가운데에 있는 사람은, 역사의 물결을 제대로 보기 힘들기 때문이거든.”

“뭐야 그건? 나무를 보고 숲을 보지 못한다, 그런 느낌인가?”

“아니지! 나무 스스로는 숲을 못 본다고 하는 게 더 맞을 걸?”

“어쨌든 간에. 아, 알겠다. 바둑 두는 사람보다 훈수 두는 사람이 더 잘 보는 것과 비슷하겠네.”


이기겠다는 욕망이 앞서기에, 국면을 의도대로 끌고 가려는 목적이 있기에 전체를 보기가 힘들다.

주식에서는 돈이 걸렸으니, 더욱 힘들겠지.


“현이 너 바둑 둘 줄 알아?”

“조금은... 어릴 땐 사범님들이랑 두면서 놀기도 했으니까.”

“좋겠다. 나도 한 번 배워보고 싶었는데. 맞아! 나 좀 가르쳐 줘.”

“누구 가르칠 정도는 아니고... 배워 보지 그랬어?”

“근데 어려워서. 결국 조금 배우다가 알까기만 하고 놀았지.”

“하하하. 나도 알까기 많이 했어. 바둑도 알까기 하다가 배웠는데.”


김소영은 잔을 비우고는 다시 와인을 따랐다.


“아, 이야기가 또 샜네. 아무튼 아무튼. 들어봐. 근데 너 역사라는 건 승자에 의해서 쓰인다는 이야기 들어 봤지?”

“음... 또 역사야. 역사는 승자가 아니라 루저들이 좋아한다고 알고 있었는데.”

“뭐야, 그거 농담? 어휴... 아무튼 차트도 마찬가지야. 결국 차트를 조종하는 사람들은 따로 있었어. 아주 신중하면서도 치밀하게, 승자들이 역사를 만들어. 그리고 역사의 물결에 따라 차트를 그리지. 그러면 나 같은 사람들은 그 물결을 타다가 흘러가는 거야. 나는 승자가 아니었거든.”

“이제 좀 그만 마셔. 취한 거 같은데.”


김소영은 그 말에도 아랑곳 않고 와인을 한 모금 더 마셨다.


“후우... 무슨 이야기 했더라. 그래 뭐 지금이야 눈도 수술하면서 안경도 벗었고, 치아도 교정하고... 어때? 지금은 꽤 봐줄만하지 않아?”

“뭐, 그렇게 말해도 누나 옛날 모습 나는 모르고. 그리고 성형한 거 아니면 옛날에도 예뻤을 거 같은데.”

“진짜? 하하하. 칭찬해줘도 아무것도 없어.”

“별로 칭찬하려고 한 건 아닌데... 근데 왜 남자친구가 없었어?”

“아, 그게 젤 처음 나온 말이었구나. 맞아 맞아. 아, 나는 사실, 연상은 전혀 안 맞아서. 근데 나한테 관심 가졌던 남자들은 전부 선배라던가, 교수님이라던가... 그런 사람들이라.”

“...교수님?”

“푸핫- 맞아. 있었지. 아, 그런데 결국 나는 연하가 취향이라서. 아무래도 그때는 범죄였지. 무슨 말인지 알겠어? 너는 이제 성년이지만 너보다 연하는...”

“아, 됐네요. 그러니까 쇼타 취향이었단 거 아냐?”

“...어? 아네?”

“그래도 나도 만화동아리 부원이다 보니까. 이래저래 들은 건... 아니 이렇게 말하니까 무슨 변태집단 같잖아.”

“뭐, 나도 지식은 그쪽이니까. 오히려 욕망을 충실하게 표현할 수 있는 매체다 보니 그런 용어도 훨씬 자유롭게 나왔다고 생각해! 아무튼 난 쇼타는 아냐! 그냥 연하 취향일 뿐.”

“굳이 변명 안 해도 된다고 봅니다만...”


별로 순서도 의미도 없는 이야기.

호텔 객실은 척 보기에도 너무 호화롭게 꾸며져 있어서 마치 MT온 것 마냥 들뜨게 되었으리라.

유현도 잔에 남은 마지막 한 모금을 입에 털어 넣었다.


“그래서, 원래 대구까지 도망갔을 때 영근이를 보고 조금. 마음이 싱숭생숭 했었지.”

“어, 맞아. 영근이도 약간 그런 느낌이었어.”

“뭐, 결국은 아무 일도 없었지만... 그래서 아마 날 피했을 거야. 내가 좀 헷갈리게 만들었으니까. 조금 미안하기도 해.”

“지금은 훌륭한 과수원, 아니 바람둥이니까 누나도 별로 신경 안 써도 돼.”

“그래? 하하. 정말 많이 컸어. 남자애들은 어느 순간 보면 금방 어른이 되어버리니까.”


그렇게 말하며 유현을 바라보는 김소영의 아련한 눈빛은 상당히 고혹적이어서, 유현은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들떴다.


“...어, 맞다. 선배 집에 잘 들어갔는지 연락해 봐야 하는데.”


유현은 허둥지둥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거기엔 이미 한참 전에 ‘나 집에 도착했어’ 라는 은설희의 문자가 와 있었다.

순간 휴대폰을 든 유현의 손 위로, 김소영이 손을 얹어 감싸 쥐었다.


“...어! 누나? 아니 누님?”

“뭐야. 왜 놀라고 그래. 연락 왔어?”

“어어... 집에 잘 들어갔다고.”

“잘 됐네.”


어색한 침묵의 시간.

유현은 잠시 침을 꿀꺽 삼켰다.


“아, 좀 덥네. 창문 좀 열어도 돼?”

“현아, 나도 더워.”


후- 하고 입김을 토하며 김소영이 유현을 지긋이 바라봤다.

유현은 그 눈빛과 입술을 보며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다.


“어, 저기... 그러니까.”

“너, 설희 좋아하니?”


뜬금없는 질문.


“아... 그러게...요. 좋아한다고 해야 하나? 첨엔 반했다고 해도 맞지만.”

“아니면 초등학교 동창 아영인가? 걔 좋아하니?”

“......”


이건 틀림없이 입 가벼운 놈의 소행이다. 과수원의 주인 녀석...


“나도, 최근 한 달 반 동안 참 좋았어. 원래는 리셋이 참 싫었거든. 그거 알아? 되살아나는 거든, 꿈이든, 뭐든 간에... 같은 시간을 공유할 수 없다는 건, 추억을 공유할 수 없다는 건, 정말 슬픈 일이거든.”

“......”

“난 너 여러 가지 모습을 다 알아. 같은 꿈을 꾸더라도 반응이 늘 달라. 이야기하는 것도 달라. 하지만 너는 이제 겨우 4일 동안 나랑 같이 보낸 거지. 기억은 온전히 나의 몫이고. 니가 좋아하는 사람 이야기를 꺼낸 것도 너는 전혀 기억하지도 못하고.”

“......”


아, 입 가벼운 놈은 나였나?


“그래도, 즐거웠어. 참, 웃기지. 이런 상황인데도... 그래도, 고마워 현아. 네 덕분이야. 나도... 덕분에 니가...”

“누나...”


음냐- 김소영은 서서히, 그대로 탁자에 엎어져 잠이 들었다.


“...어, 누나?”


유현은 멍하니 그 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퍼뜩 정신이 들었다.

쿵쾅거리던 심장이 서서히 가라앉는다.


‘와, 내가 무슨 생각 한 거야?’


유현은 고개를 휘휘 젓고는, 김소영의 어깨를 툭툭 쳤다.


“...냐.”


시간이 벌써 11시에 가깝다.

그러고 보니, 잠을 못 견딘다고 했지.

술까지 마셨으니 그만큼 더 일찍 잠이 온 모양이다.

유현은 휴- 한숨을 내쉬고는 김소영은 안아 들고 침대로 옮겼다.

그대로 조심스럽게 놓고는 이불을 덮어 준다.


“이제 내일인가... 내일로 끝났으면 좋겠네.”


피곤이 몰려온다.

유현도 조금 일찍 잠들기로 마음먹었다.



***



그리고 28일의 ?회차.


유현은 자신의 몸을 흔들어 깨우는 느낌에 눈을 떴다.

거기엔 김소영의 파리한 얼굴이 있었다.


“어, 누나...? 잘 잤어?”


부스스- 눈을 비비는 유현에게 김소영이 쥐어짜듯 말을 꺼냈다.


“진정하고 잘 들어, 현아. 지금 설희가 왕건호에게 잡혀 있어... 인질로.”

“...네?”


깜짝 놀라는 유현에게 김소영이 눈을 떨며 말을 잇는다.


“지금... 미안 오차가 있을 수 있어. 아마 86회차 일거야...”


유현은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아차릴 수가 없었다.



***


작가의말

재밌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헤지펀드 편도 끝을 향해 가네요.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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