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어떤 인연(2)
우리가 헤어지고 내가 집에 온 시각은 밤 10시 10분 쯔음이었다.
난 간단하게 샤워를 하고 화장품을 바르려고 화장대 앞에 앉았다.
그 때 드르륵 소리와 함께 핸드폰이 울렸다. 지은이였다.
난 스피커폰으로 받고는 화장품을 바르며 말했다.
“지은이? 너 남자친구랑 있는 거 아니었어?”
그러자 지은이가 말했다.
- 야, 너 아직도 삐졌냐?
“응? 삐지기는.”
난 조금 뾰롱통한 목소리로 대답했지만 지은이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러다 지은이가 굉장히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 너 그 남자랑 데이트한 거 맞지, 그지?
“데이트?”
웬 데이트?
하지만 왠지 그 말에 기분이 슬 좋아지는 나를 느껴버렸다. 나 왜 이래······
- 그 남자가 너한테 관심 있는 거 같아 가지고 이 언니가 의리 있게 피해줬지. 오늘 남자친구랑 약속 없었어.
역시 그랬구나. 어쩐지. 이중약속을 잡을 애가 아닌데.
“데이트는 아니었고 그냥 되게 편하게 둘이 술 한 잔 했어. 재미있더라고, 사람이.”
- 그게 데이트지! 그리고 너 그런 타입 좋아하잖아. 나를 좋아하는 걸 보면 알 수 있지.
지은이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러면서 그녀는 덧붙였다.
- 사람 괜찮아 보이던데. 마음에 들면 잡아.
“아니야, 그런 사이도 아니고. 나 그 사람 전화번호도 몰라. 둘이 실컷 재미있게 놀았는데 둘 다 아무도 안 물어봤어.”
지은이는 의문스럽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 그래? 관심 있어 보였는데 너한테. 너도 관심 있어 보였고. 너가 먼저 물어보지 그랬어?
“그 사람 원래 친화력이 엄청 좋은 거 같아. 근데 뭔가 부담스러울까봐 못 물어봤어.”
- 이 답답아! 그럼 그 사람 어떻게 만날 건데? 혹시 너 실수한 거 있어?
“아니야, 진짜 실수 안 했어. 그 정도로 마시지도 않았고. 그런데 그 사람이 술값도 냈는데 어떻게 갚지?”
- 그 사람이 술값도 냈다고? 그럼 더더욱 물어봤어야지!
지은이는 혀를 끌끌 찼다.
"하지만......"
- 이궁, 알았다. 나 끊는......
그 때 전화를 끓으려고 하던 지은이가 갑자기 물었다.
- 아, 맞다! 그런데 둘이 무슨 인연이 있다고 막 그러던데 그게 뭐야? 이 중요한 걸 안 물어볼 뻔 했네!
나는 자초지종을 이야기했다.
지은이는 한참을 듣더니 자신이 더욱 분노하며 소리치듯 말했다.
- 와, 그 여자 뭐야? 개목줄 풀어놓고 그 딴 식으로 행동했다고? 내가 거기 있었으면 확 물어버리는 건데! 개 말고 사람한테 물려봤냐고, 그 여자!
그리고 끝에 지은이는 이렇게 덧붙였다.
- 야, 그리고 너! 그 망실이인 실망이인지 그 여자 조심해. 뭔가 난 촉이 안 좋다.
"알았어. 하지만 아닐 수도 있으니까."
내가 이렇게 말하자 지은이는 한숨을 폭 내쉬더니 말했다.
- 알았다고. 하지만 조심해라, 너. 나 촉 좋은 거 알지?
그녀는 전화를 먼저 끊었다.
난 끊어진 전화기를 한참 동안 쳐다보았다.
그 다음날이었다.
“와 진짜······ 이거 뭐야? 토할 거 같아!”
나는 나도 모르게 입으로 욕지거리를 뱉으며 컴퓨터 자판을 미친 듯이 두들겨 댔다.
식물에 관련된 번역이라며 스페인어에서 한국어로 가는 번역을 받았는데 이게 정말 환장할 노릇이었다.
식물에 대한 백과사전이라고 하고 분량도 꽤 되어 돈을 꽤 주길래 받은 것이 화근이었다.
식물 관련 번역을 처음이라서 당연히 엄청 검색하고 공부할 각오를 안 한 건 아니었으나 난생 처음 보는 단어들이 나를 아연하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넘길 때마다 새로운 단어들이 안녕!하며 튀어나오는데......
스페인어 사전을 찾아봐도 나오는 단어는 거의 0에 수렴했다.
그래서 이 단어들을 영단어로 찾은 후 다시 한국어로 검색하는 일을 계속 거쳐야 했다.
진짜 이 과정이 정말 토할 것 같아서 나는 나도 모르게 헛구역질까지 하고 말았다.
하도 힘들어서 밥맛까지 뚝 떨어질 지경이었다.
그 때 띠링 소리와 함께 메시지가 떠올랐다.
- 모르는 단어들과 지식들이 쌓이면서 지력이 3 오릅니다.
- 구역질을 참으며 일하고 있기에 정신력이 2 오릅니다.
그리고 나는 그렇게 단어를 찾다가 갑자기 좋은 생각을 떠올렸다.
바로 나만의 단어집을 만드는 것이었다.
메모장을 펼치고 얼른 단어집을 만들며 일을 하기 시작했다.
혹시나 식물 관련 번역 일이 또 들어올지도 모르지 않는가?
물론 지금으로써는 받고 싶은 생각이 들까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혹시나 모르는 거였다.
현대에서는 돈이 필요하니까.
- 미래를 생각하여 기지를 발휘해 일을 처리하고 있기에 모든 능력치가 1씩 오릅니다.
오, 이런 행운이! 나는 기분이 매우 좋아졌다.
그런데 내 지력은 다른 것보다 한껏 높은 걸까?
그 때 내 물음에 답해주기라도 하듯 시스템이 메시지를 띄었다.
- 지력은 추리력, 관찰력, 판단력 등의 능력과 함께 언어 능력과 무척 관련이 높습니다. 지력이 높을 수록 언어 능력이 올라가게 됩니다.
오······ 그런 거였나? 이걸 왜 지금에서야 알려주는 거야?
- 물어본 적이 없잖아요?
어후, 깜짝이야.
가끔 이런 대답까지 하는 시스템은 정말 놀라운 존재였다.
어찌되었건 앞으로 지력도 좀 높여줘야겠는데?
내 번역일에 더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쨌든 나는 이 일에 매달려 금요일 밤 늦게까지 매달려 일을 했다.
하지만 이 일만큼이나 복잡하고 힘든 일이 보드게임 모임 안에서 나에게 펼쳐질 줄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그 주의 토요일에도 나는 보드게임 모임에 있었다.
우선은 이 모임이 - 지금까지 가졌던 모든 모임들 중에서는 - 내 인생에서 가장 편한 곳이 되어버리기도 했고 사람들도 나름 나에게 많은 관심을 가지지 않아서 좋았다.
서로 많은 수다를 떨기보다는 게임에 열중하는 모습들이 나에게는 도리어 큰 위안이 되었달까.
“오! 안녕하세요, 비다로까 님!”
오늘 와있던 사람들은 모임장 님과 간디 님, 박살공주 님이었다.
그리고 그 남자가 있었다!
내가 잘못 봤나 했지만 분명 그 남자였다.
“오! 안녕하세요! 우리 또 만났네요?”
그가 무척 쾌활하게 다가오며 인사했다.
“아······ 안녕하세요.”
나는 나도 모르게 약간 목소리를 떨며 대답했다.
여기서 만날 줄이야!!
이 사람도 보드게임을 할 줄이야!!
“네가 비다로까 님이랑 어떻게 알아?”
모임장 님이 궁금한 듯 묻자 그가 대답했다.
“우리가 좀 많이 특별한 인연이 있지.”
그의 말투에는 장난기가 그득그득 묻어있었고 사람들은 우리 둘을 완전히 호기심에 찬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는 심지어 그렇게 말하며 내 옆에 풀썩 앉아버렸다.
사람들은 그를 '구름이'라고 부르고 있었는데 톡에서 '구름위의보드게임'이라는 닉네임이 있었던 게 기억이 났다.
그게 이 사람이었나 보다.
나는 그에게 가까이 몸을 숙이며 속삭였다.
"진짜 만났네요?"
나는 진짜에 완전 힘을 주었다.
"그러게요."
그는 빙긋 웃었다.
"보드게임한다는 얘기는 안 했잖아요?"
"당신도 안 해놓고선. 저도 진짜 이런 데서 마주칠 줄은 몰랐네요?"
그는 빙글빙글 웃었다.
"그럼 그 얘기 들을 수 있는 거 맞죠? 진짜 만났으니까. 오늘 저녁에 어때요?"
"와, 이 아가씨 끈질기시네? 아니면 눈치가 없는 건가?"
그런데 그 말이 진짜 하나도 기분 나쁘게 들리지 않았다.
그에게는 그런 능력이 있었다.
"저 원래 눈치 없단 말 옛날부터 많이 들었어요. 그런 공격 안 통해요."
- 정신력이 1 오릅니다.
내가 일부러 좀 새침하게 대답하자 그는 눈을 가리고 작은 목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알겠어요. 얘기해 줄게요. 이따 저녁에."
"이번에는 제가 쏠 거에요. 전 빚지고는 못 살아요."
"알겠습니다. 진짜 쏘세요. 이번에는 저도 좀 얻어먹어 봅시다."
그 때 간디 님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오, 뭐예요? 둘이 무슨 얘기 하는 건데요? 왜 둘만 속닥거리지?"
내가 살짝 당황하고 있던 그 때 모임장님이 그 사이를 쓱 비집고 들어왔다.
“비다로까 님 오셨으니까 ‘오○레앙’ 어때요? 백빌딩 게임의 진수인데. 규칙도 쉬워서 재미있을 거에요.”
와, 모임장님 센스!
모임장님은 역시 빛!
난 어차피 어떤 게임인지를 몰랐기에 그냥 좋다고 대답하며 얼른 자리에 앉았다.
그나저나 백빌딩은 뭘까??
새 게임을 배운다니 두근두근해!
그 때 박살공주 님이 말했다.
"이 게임 4명까지 밖에 안 되는데 누가 빠지지?"
모임장님이 말했다.
"내가 빠질 거야. 나 오늘 뭐 좀 처리해야 할 게 있어서. 규칙만 설명해주고 저는 할일 좀 할게요. 괜찮죠? 아, 간디. 너 몇 번 해봤으니까 게임할 때 에러플하는 거 있으면 네가 잡아줘."
"오케이!"
그러고 보니 들어올 때 노트북이 있어서 뭐지 했는데 모임장님 꺼였나 보다.
그 때 또 아지트 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들어왔다.
- 작가의말
우욱, 뭔가 토하고 싶다고 생각할 정도로 집중한 적 있으세요? 진짜 죽을 맛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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