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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캇트 님의 서재입니다.

죽은 자의 왕

웹소설 > 작가연재 > 퓨전, 대체역사

루이캇트
작품등록일 :
2019.01.16 14:24
최근연재일 :
2019.04.09 2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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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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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2.02 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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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쪽

에프탈로 향하다

DUMMY

그로부터 약 닷새 뒤 우리는 스라카 지방을 갓 벗어나 눈보라 치는 에피쿠나 산맥을 힘겹게 넘고 있었다. 고된 산행에 허덕이는 내 무거운 짐 속에는 크피르 공주의 유골함이 소중하게 실려 있었는데 모두에게 리더란 명목으로 반쯤 강제로 떠맡겨진 것이었다.

허벅지까지 푹푹 빠지는 눈은 지금도 내 온 몸 위로 차곡차곡 쌓였다. 그 체감 무게는 마치 두꺼운 베이컨을 초당 한 줄씩 내 어깨와 머리에 끊임없이 늘어놓는 수준이었다. 세상에 몸에 쌓인 눈이 이처럼 무거운 줄은 처음 실감했다.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온몸이 얼어붙을 맹추위와 지금도 무서운 기세로 쏟아지는 함박눈이 마치 악마의 농간처럼 느껴졌다.

입김이 곧바로 서리로 입가에 치덕치덕 달라붙는 극저온의 가파른 산을 오르며 나 이외에 32인을 가파른 산등성이에서 차례로 밀어버리고픈 위험천만한 충동을 초당 12회씩 느끼는 중이었다.

그러지 않은 것은 순전히 내가 혼자이기 때문이었다. 절대 그럴 마음이 없어서가 아니다. 저절로 이가 갈리는 순간이었다.

물론 공주의 죽음은 슬픈 일이다. 하지만 그녀의 유골함을 굳이 친언니에게 직접 돌려줘야 한다는 건 내게 있어 전혀 상식 밖의 사건이었다.

정작 사이좋은 친언니라는 시피르 공주도 그런 류의 기대는 전혀 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그게 에프탈 인의 전형적인 사고방식이니까.

대륙 7웅 중 냉혹한 군사문화가 사회전반에 뿌리내린 에프탈 인들 중에서도 너 참 성격 담백하다는 판정을 받았던 나였다. 말이 좋아 담백하다는 표현이지 개인주의가 팽배한 에프탈에서 그 정도면 정이 메마른 거의 인간실격에 가까운 수준이었다.

옛 기억을 털어내고 잠깐 걸음을 멈춘 다음 어렵게 등 뒤를 돌아보았다. 설인인지 인간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눈에 삼켜진 형체가 앞의 발자국을 따라 뒤뚱뒤뚱 걷고 있었다.

과연 살아서 이 산을 넘을 수 있을 것인가?

그 물음은 이틀 뒤 산을 완전히 넘은 다음에야 해소되었다. 우리가 반대편 마을에 도착하자마자 날씨가 깨끗하게 개었고 햇빛마저 쨍쨍했다.

산골마을 사람들은 우리가 나타나자 처음에는 경계했고 나중에는 헛고생 제대로 했다며 비웃었다.

우리는 거의 전원 걸린 발의 동상을 치료하며 한동안 산골마을에서 요양했다. 그러는 동안 우리 일행이 쫓기듯 에피쿠나 산맥을 넘도록 원인제공을 한 롭과 엘로코 형제는 자신들의 부상은 내버려둔 채로 부지런히 동료들을 돌봤다.

우리 중 간부급인 얀과 만프레드는 죄책감을 안고 내내 쩔쩔매는 그 둘이 무척 귀여운 듯 잘 대해줬지만 사실 내게는 원수나 다름없는 녀석들이었다.

공주가 죽자마자 압도적인 전력의 토그람 군은 다 이긴 전투를 방치하고 후퇴해버렸다. 뭔가 공화국과 사전 물밑교섭이 있지 않고선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덕분에 절대 다수의 토그람 군에게 발각 직전 간신히 목숨을 건진 우리들은 전선 전체에 사지 멀쩡히 살아남은 건 오로지 우리밖에 없다는 사실에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일행들에게 우선 한 곳에 뭉쳐 숨을 것을 주문했다. 혹시라도 멀쩡히 살아남은 우리의 존재가 누군가의 심기를 거슬릴 수도 있다는 내 의견에 다들 묵묵히 공감의 뜻을 표했다.

이윽고 전선에 재투입된 공화국군이 부상의 경중을 무시하고 우군인 용병임에도 모조리 사살해버리는 충격적인 장면을 목도하면서 우리의 우려가 단지 기우로 끝나지 않음을 알았다.

그리고 이 사건에 연관된 각국이 크피르 공주의 죽음에 에프탈의 팔라딘이 직접적으로 관련된 것을 필사적으로 숨기려 한다는 인상을 강하게 받았다. 그것은 신분을 알 수 없는 복장의 남자들이 팔라딘의 시신을 비밀리에 인도받는 장면에서 더욱 확실해졌다.

우리가 용병 근거지가 아니라 공화국 군 관할의 폐급 창고에 숨은 것은 좋은 판단이었다. 이곳은 사방에 도망칠 통로가 있고 작은 통기구로 바깥을 몰래 내다보기 좋았다. 밤이 되면 대충 아는 루트로 도주하기로 하고 불침번을 정한 다음 다들 한숨 눈을 붙였다.

하지만 일견 완벽할 줄 알았던 내 계획에도 문제는 있었다. 하필 안전핀이 뽑힌 시한폭탄이 우리들 속에 숨어있다는 걸 몰랐던 게 내 패착이었다.

한낮이 되어 공화국군 소속 노무자들이 몰려와 전장의 뒷정리가 한창일 때였다. 하필이면 우리가 숨은 폐급 창고 앞에서 현지 공화국군 사단장과 레빌 여단장이 따로 비밀회동을 가졌다. 그 장면을 마침 불침번이던 두 형제가 엿들었고 공주의 목숨 값으로 챙길 비밀수당 얘기로 서로 희희낙락하는 지저분한 장면에 그만 분통이 터진 두 열혈 형제는 화를 참지 못하고 숨겨진 대전차총으로 정통으로 쏴버렸다.

철판으로 만든 전차를 상대하라 만든 흉악한 물건이다. 당연히 피륙으로 이뤄진 인간은 지근거리에선 관통이 아니라 그야말로 두 동강이 나버렸다.

일을 저지르고 그제야 덜컥 겁이 난 둘은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던 우리들을 들쑤셔 깨웠고 그제야 우리는 꿀맛같이 잠들어 있던 동안 잠재적인 제거대상에서 공공의 범죄자로 이동한 것을 뒤늦게 알아챘다.

그 뒤로는 일사천리였다. 폐급 창고에서 조금 떨어진 지하에는 공화국군의 무기창고가 있었고 막대한 총포탄과 폭약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원래의 경우라면 실화나 적에게 탈취될 가능성에 대비해 후방에서 필요량의 보급을 지속적으로 해줘야 했지만 비용문제와 본국과 멀리 동떨어진 지리상의 난맥으로 한꺼번에 적재해놓은 경우였다.

우선 참호재건을 하던 군속 노무자들을 습격해 옷과 신분증을 강탈했다. 그리고 아무도 지키는 이가 없는 무기창고에 잠입해 시한장치를 만든 다음 폭발을 기다렸다.

약 오 분 후 참호선 중심부에 위치한 무기창고가 대폭발을 일으켰다. 한낮임에도 화광이 충천했고 지축이 어긋나지 않았나 의심 갈 정도의 대규모 진동이 일어나 온통 사방에는 겁먹은 울부짖음과 절규만이 울려 퍼졌다.

그 틈을 타 우리도 비명을 지르며 후방으로 줄달음쳤다. 아무도 의심하거나 붙잡지 않았다. 다들 도망가느라 열심이었기 때문이었다.

도중 낯익은 정치장교 얼굴을 얼핏 본 것 같지만 그는 날 보곤 슬쩍 외면해버렸다. 그렇게 우리는 폭발에 놀라 후방으로 미친 듯이 질주하는 마차 두어 대에 올라타 반항하는 마부를 길가에 던져버린 다음 화물을 확인할 틈도 없이 그대로 달렸다.

나중에 으슥한 숲속 외길에서 마차의 화물을 돌아보니 거기엔 공주의 시신이 실려 있었다. 여러 병사들의 시신 위에 무성의하게 던져진 채 매장지로 향하는 중이었다. 그때 우리들의 마음이 하나로 일치했다.

공주의 시신을 우리가 직접 화장해 주자고.

숲속에서 땔감을 모아 네모반듯한 제단을 만들고 공주의 시신을 올려놓았다. 그리고 불을 피운 다음 멀찍이서 반나절 간 차분히 지켜보았다.

나중에 불길이 잦아든 다음 식은 재를 긁어모으자 그 안에 공주 소유의 팬던트만이 원형 그대로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명색이 에프탈 출신인 나는 그 펜던트의 정체를 한 눈에 알아보았다.

왕가의 소유물인 이 펜던트에는 초대 국왕에게서 부여된 명칭이 있다. 달의 파편, 명실상부한 에프탈 왕가의 일원임을 나타내며 고귀함과 품격의 상징으로 대륙에 널리 알려진 귀물이었지만 단명한 불쌍한 공주에게는 무거운 족쇄에 지나지 않았을 터였다.

그 반나절 동안 얀과 만프레드는 병사들과 계속 쑥덕대더니 나에게 대표로 몰려왔다.

“ 작전관 님. 아니 이제 부대가 없어졌으니 뭐라 호칭하면 될까요? ”

나는 군화 끈을 고쳐 매며 말했다.

“ 글쎄올시다. 부대가 공중 분해된 상황이니 이제 상관도 아니고 만프레드 씨와는 아예 별개 부대 출신이니 이제와 새삼스럽게 호칭을 따지기보다는 각자 제 갈 길로 가는 게 낫지 않겠소? ”

“ 그럴 수는 없습니다. 이대로 흩어지면 우리는 놈들에게 포착되어 각자 사냥당하는 신세가 될 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함께 움직이는 편이 좋지 않겠습니까? ”

“ 함께 움직이면 서른 세 명이나 되는 대인원이 타인의 눈에 띄지 않는다고 생각하나? ”

내 냉철한 대답에 순간 말이 막힌 둘은 잠시 시선을 교환했다.

“ 하지만 여기 모인 병사들은 대부분 집도 뭣도 없는 부랑자 신세인 자들이 대부분입니다. 당장 움직일 여비조차 없는 건 고사하고 현재 공화국 경내에 있으니 어떻게든 함께 몸을 빼내야하지 않겠습니까? 그때까지는 같이 움직이시죠. ”

“ 그게 맞는 것 같습니다. 얀의 말대로 하시죠. ”

나는 가만히 한숨을 토해냈다. 혼자 움직인다면 훨씬 은밀히 외국으로 도주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짐 덩어리들을 데리고 다닌다면 분명 남의 시선을 끌어 신고당하는 건 그저 시간문제였다.

“ 재차 말하지만 우리는 현재 너무 많은 인원이 함께 있소. 남의 이목을 끌지 않고 무사히 도망치려면 인원이 최대한 소수정예로 움직이는 편이 낫다는 말이오. 그러니 각기 마음이 맞는 사람끼리 짝을 지어 조를 짜시오. 이건 떠나기 전 내 마지막 충고요. ”

“ 그럼 이제부터 혼자 움직이겠다는 말씀이십니까? ”“ 내 의향을 묻는다면 그렇소. ”

멱살이라도 잡으며 크게 화낼 줄 알았는데 얀과 만프레드는 의외로 잠잠했다. 다만 은연중에 풍기는 실망스럽다는 분위기만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하지만 별 연관도 없는 이들을 살리기 위해 내가 죽기보다 고단한 길을 걷는 건 절대 사양이었다.

나는 힘주어 일어섰다. 그리고 숲의 바깥을 가늠해 걷기 시작했다. 역시나 예상대로 그들은 내 뒤를 쫓아오기 시작했다.

얀과 만프레드가 어디로 갈 거냐고 캐묻지 않은 것은 예상 외였지만 무슨 속셈인지 몰라도 난 충분히 이들을 따돌릴 자신이 있었다.

정확히는 그런 복안이 서 있었다. 내게는 쓰러뜨린 팔라딘에게서 몰래 빼낸 문스톤 세 개가 있었다. 초보자는 어디 있는지조차 모르지만 내게는 식은 죽 먹기보다 쉬운 일이었다.

그 세 개를 팬던트에 꿰어 목에 걸고 다니면 놀라울 정도로 활력이 솟는다. 단 그걸 믿고 너무 무리하면 문스톤의 에너지에 더해 몸에 있는 체력을 쥐어짜내는 것이기에 나중에 후유증이 한꺼번에 와서 잘못하면 과로사하는 경우도 생긴다.

그러니 너무 미련하게 굴지 않고 적당히 저들을 거리를 두고 떨어뜨릴 속셈이었다. 하지만 내가 생각 못한 맹점이 하나 있었으니 저들은 마차를 몰고 내 뒤를 쫓았던 것이었다.

나는 한숨을 재차 내쉬고는 마차가 갈 수 없는 길로 진로를 잡았다. 그러자 그들은 마차를 버리고 내 뒤를 쫓았다.

나는 멈췄다. 그리고 그들이 내 뒤를 따라잡도록 기다렸다. 하지만 얀과 만프레드를 위시한 인원들은 멀찍이서 내가 움직이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다 참다못한 내가 뒤쫓으면 재빨리 도망쳤다.

그러한 무언의 실랑이는 사흘낮밤을 계속됐다. 마침내 지쳐버린 내가 손을 들었다. 거친 황야 한복판에서 도대체 무슨 짓을 하는지 머리가 돌 정도였다.

반나절 한 자리에 멈춰 계속 기다리자 마침내 얀과 만프레드가 사절로 나를 찾아왔다.

“ 그래. 댁들이 이겼소. 대체 내게 뭘 바라는 거요? ”

“ 우리는 리더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당신은 우릴 필요로 하지 않는군요. 그게 우리가 가진 문제점입니다. ”

“ 난 혼자 살아남기에도 벅차오. 댁들까지 챙길 여유는 없소. ”

“ 우리끼리 대화를 나눠봤습니다. 우리 욕심으로 당신에게 너무 큰 부담을 지우는 게 아닌가 하고요. 그래서 마침내 절충점을 찾았지요. 여기 불쌍한 공주님이 죽기 직전까지 못내 그리워하던 언니 분께 데려다주기로요. 그리고 각자 살 길을 찾아보자 뭐 그런 거지요. ”

나는 콧방귀를 뀌었다.

“ 자랑은 아니지만 난 에프탈에서 수배자 명단에 올라 있소. 적전도주죄로 군법으로 총살감이지. 그런데 나보고 거길 가자고? ”

전혀 예상 밖이었는지 얀과 만프레드는 주춤했다.

“ 그건 몰랐군요. 하지만 저희를 떼어내려면 그 수밖에는 없을 겁니다. 그때까지 진드기처럼 달라붙을 테니까요. ”

나는 만프레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 당신 그새 처음 본 이미지와 많이 달라졌구만. ”

“ 삼십 년 넘는 군 생활 중 믿을만한 상관을 찾기 그리 쉽지 않다는 게 제가 뼈저리게 깨달은 진리 중 하나죠. 당신은 뒤따를 보람이 있을 것 같습니다. ”

“ 방금 내가 한 얘기 못 들었소. 적전 도주죄로 사형감이란 거? ”

“ 꼭 그래야만 할 이유가 있었겠죠. 어제 전투에서 보여준 당신의 지혜와 무용은 누구도 믿지 못할 수준이었습니다. 그러니 과거 문제가 있었다면 당신이 아니라 세상이었겠죠. ”

나는 피식 웃었다.

“ 너무 과대평가하는군. ”

만프레드는 낮지만 힘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 그렇다면 당신께서 다시 수정시켜 주십시오. 우리가 가진 눈을. ”

“ 실망해도 난 모르오. ”

나는 다시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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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혹한의 땅 윌로나에 도착하다 +10 19.04.09 686 25 17쪽
14 시피르 공주 +4 19.02.24 676 28 13쪽
13 옛 인연 +5 19.02.21 669 30 14쪽
» 에프탈로 향하다 +6 19.02.02 862 36 13쪽
11 운명의 수레바퀴가 돌다 +8 19.01.31 832 32 13쪽
10 팔라딘 +2 19.01.29 882 30 12쪽
9 야간전 +1 19.01.28 842 33 13쪽
8 첫 전투의 승전보 +4 19.01.26 1,013 29 14쪽
7 암살자 +2 19.01.26 873 30 12쪽
6 참호에 갇히다 +6 19.01.25 962 23 11쪽
5 장군의 역습 +2 19.01.24 1,094 23 12쪽
4 철의 거인 +1 19.01.23 1,153 35 13쪽
3 에프탈의 공주 +1 19.01.22 1,425 36 13쪽
2 최전방 +7 19.01.18 2,219 41 14쪽
1 프롤로그 +11 19.01.16 3,523 46 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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