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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초 님의 서재입니다.

전상에의 아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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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살초
작품등록일 :
2013.02.26 17:49
최근연재일 :
2013.08.28 22:45
연재수 :
104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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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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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1
글자수 :
65,449

작성
13.02.26 1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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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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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글자
11쪽

빙의

DUMMY

최소의 인원만이 남아있던 세레디에 성은 성벽을 사방에서 둘러싼 로미니의 군대에 의해 오래 버티지 못하고 함락되었다. 로미니 왕국의 선봉대는 사면에서 성벽을 타고 올랐고, 성안 곳곳에서 새빨간 화염이 치솟았다.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아 세레디에의 성문이 무기력하게 내려졌다.

"슈아죌 경, 함락된 모양입니다."

슈아죌의 왼편에 있던 기사 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슈아죌은 고개를 끄덕이곤 도개교를 건너 입성하는 지휘관들의 모습을 응시했다.

"뻔뻔하게도 고개를 빳빳이 들고 입성하는군. 손가락 하나 까딱 않던 자들이."

"예?"

슈아죌의 음성은 낮고 빨랐기에 기사는 그가 중얼거린 말을 듣지 못하고 되물었다. 그러나 슈아죌은 입을 그대로 다물었다. 지휘관들이 모두 입성한 뒤에도 슈아죌이 움직일 생각을 않자 그 기사가 슈아죌에게 일렀다.

"지휘관들의 입성이 끝났습니다. 입장하지 않으십니까?"

"가야지."

슈아죌은 짧게 대답하곤 말의 방향을 돌려 기사들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자, 입성한다! 입성 전 마지막으로 권고하건데, 약탈·방화·살인을 금하고 민가에 끼치는 그 어떠한 피해 또한 금한다. 특히 전시강간은 군법에 따라 즉결 처형하겠다. 절대. 다시 강조하지. 절대! 기사도에 어긋나는 경거망동을 자제하고 병사들을 단속하라."

기사들은 우렁차게 대답했다. 그들도 이 전쟁이 단순한 침략전쟁이 아닌 전략적 요충지를 점거하고 장기적으로 활용하려는 왕국의 의도를 알고 있을 테니 그들은 걱정하지 않는다. 아무리 각 영지에서 차출된 귀족들 소속의 어중이떠중이 들이라 해도 기사란 이름은 그리 가볍지 않으니까.

다만 걱정거리는 병사들이다. 일 년간 지속된 전투로 욕구를 표출하지 못하고 쌓인 병사들에게 승전지에서의 침략을 일절 자제시킨다면 그들의 불만이 끓어오를 게 분명하다. 지역민들의 반발을 사지 않도록 병사들을 자제시키는 건 기사들의 몫이다.

슈아죌은 말을 몰아 성 안으로 들어섰다. 성문을 가로지르는 도개교 앞에는 적장들의 목이 대롱대롱 걸려 있었고 골목에는 여기저기 숨어서 고개만 빠끔히 내민 영지민들이 두려움 가득한 얼굴로 행렬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아마 그들은 기사단의 행렬이 지나간 뒤 적병들이 들이닥쳤을 때 시작될 약탈을 벌써부터 지레 염려하고 있으리라.

"나이트 미하일."

슈아죌은 이전부터 눈여겨 두었던 어린 기사를 호명했다. 십칠 혹은 십팔 세가량 되 보이는 이 앳된 소년 기사는 집결한 기사들 중에서도 드물게 예와 실력을 모두 겸비한 기사였다.

"예."

"기사들을 지휘하여 들어오는 병사들이 소란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해."

"예."

갑작스런 중책에 당황할 법도 하건만 미하일은 가타부타 토를 달지 않고 시원스레 대답했다. 슈아죌은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이고 지휘관들이 모여 있을 영주성으로 말을 몰았다.

만약 지금 거울이 있어 제 표정을 볼 수 있다면 도살자의 끌려가는 돼지의 안색이 꼭 이럴지도. 정말 가고 싶지 않다. 지휘관이라는 이름 뿐. 허명을 달고 막상 전쟁에선 칼자루 한 번 쥐는 법 없으면서 전쟁에 대한 공로와 전리품은 모두 긁어가려는 자들. 생각만 해도 구역질이 날 것 같다. 기사들을 대표하는 위치만 아니었어도 그들과 또다시 대면하는 일은 없었을 텐데.

"놔! 천한 것들이 어디에 감히 손을 대느냐!"

그 때, 슈아죌은 귀를 찌르고 들어오는 거슬릴 정도로 높은 음색의 목소리에 인상을 찡그리며 시선을 돌렸다. 영지 소속 귀족으로 추정되는 여성이 병사들에게 포박되어 영주성으로 끌려가는 중이었다. 그녀는 여전히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며 곧 한 줌 재가 되어 사그라질 자존심을 내세우고 있었다.

그녀는 전쟁에 참여했다가 붙잡힌 다른 귀족들과 마찬가지로 로미니의 수도로 소통된 다음 양국 협상의 재료가 될 것이다. 혹여 양국 간의 협상이 결렬되기라도 할지면 죽거나 노예가 되어 비참한 삶을 이어나갈 것이다. 슈아죌은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르는 그녀의 자존심을 향해 비웃음을 선물했다.

국가에 충성하는 귀족이 포로로 잡히기 전 자결하지 않는 것은 귀족의 수치라고 생각하는 그이기에, 슈아죌은 포로 따위에 인정을 줄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특히 여자라면 더더욱. 비단 그가 여자라면 심각한 기피감과 회의감을 느끼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 쓸데없이 콧대 높고 오만한 귀족 여성들이 전패하고 몰락하는 순간 겪어야 하는 일들이 얼마나 비참한지 잘 알기에 차라리 죽음과 명예를 택하는 걸 당연시할 뿐.

슈아죌은 귀족 여인, 아니 귀족이었던 포로로부터 시선을 거두었다. 어서 전후보고를 마무리 짓고 수도로 돌아가 기사단 생활을 계속하고 싶다. 그는 말의 옆구리를 차 속도를 높였고 곧 내성에 당도했다.

"지휘관들께서 모여계신 곳은 삼층 전당입니다. 다들 기다리고 계십니다."

내성의 성문을 지키던 병사가 그에게 공손이 설명했다. 슈아죌은 고개를 끄덕이곤 빠른 걸음으로 성 안을 휙휙 걸었다. 성이 내부는 군데군데 피로 얼룩져 마지막 혈전을 짐작케 했고, 그는 불쾌한 피냄새를 내뿜는 시신들을 피해서 삼층 회의장의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장 안에는 긴 타원형 탁자와 탁자에 둘러앉은 귀족 지휘관들이 있었다.

얼굴만 봐도 짜증이 치밀어 오르는 군.

"오. 슈아죌 경. 기다리고 있었소. 어서 앉으시오."

이번 전투의 총 지휘관, 굳이 지적하자면 이번 전투로 인해 가장 많은 것을 남겨먹을 수 있는 인물인 헤랄드 백작이 그를 반갑게 맞이했다. 하지만 그의 반가움이 단지 가식일 뿐이라는 건 세 살배기 어린아이도 쉬 느낄 수 있으리라. 심지어 다른 귀족들은 드러내고 그에게 적개심을 내보이고 있었다.

이 적개심이 그들의 밥그릇에 대한 욕심이란 걸 아는 슈아죌은 차라리 이번 전투에서 대패해 이 쓰레기들의 목을 전부 잘라버리는 게 전반적인 전쟁에 더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진지한 고민을 했다.

"기사들을 정비하느라 늦었습니다."

슈아죌은 간단히 목례하고 회의장 가장 끄트머리의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쩍 하품을 했다.

"왜 그리 먼 곳에 앉으시오, 슈아죌 경? 이번 승리의 일등공신인 그대는 당연히 상석으로 와야지."

"직분이 낮은 제가 어찌 상석에 앉겠습니까. 전장이 아닌 다른 곳에서는 절 추켜세우실 필요 없으니, 여기로도 족합니다."

그의 말에 귀족들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교활하고 비겁한 자들 같으니. 저들도 데려온 기사들을 통해 자신의 활약상을 들었을 테고 혹여 그들의 공이 가로채여질까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사실 가로챌 공이랄 만한 것도 없음에도. 하지만 어찌됐든 상관없다. 공을 세우려고 전장에 나온 것이 아니고 단지 폐하의 명예 따라 전투를 끝내기 위해 파견된 것뿐이었으니.

"하지만 장군, 제 기사들이 승리에 아주 혁혁한-"

"기사들을 안 데려온 귀족들이 있는가? 토 달지 말게."

"그래도 이백 골드는 너무 합니다. 전쟁을 준비할 때 소요한 군자금보다 적습니다!"

하지만 이런 자리엔 더 이상 못 있겠군. 더러운 귀족들의 논공행상을 듣고 있자니 뱃속에서 역겨움이 끓어올랐다. 슈아죌은 탁,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순간 귀족들의 시선들이 날아와 꽂혔다.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전투가 끝난 전장은 제가 있을 자리가 아니니, 이리스의 귀족들은 모두 제가 책임지고 포로의 신분으로 압송하겠습니다. 헤랄드 장군. 포로들을 압송하는데 필요한 인원 삼백을 데려가도 괜찮겠습니까?"

그의 갑작스런 행동이 이해되지 않는 헤랄드가 눈만 껌뻑거렸다. 귀족들이 아무리 평가절하를 시켜도 그의 공로는 부정할 수 없다. 질질 끌리던 전투가 그가 지원되자마자 조금씩 승기를 잡기 시작했으니. 헌데 공과 전리품을 분배하는 시점에서 발을 빼겠다니?

"제 몫은 계산할 필요 없습니다. 제 임무는 세레디에 성의 탈환까지이니. 다시 한 번 묻지요. 제너럴 헤랄드, 병력 요청을 허가하시겠습니까?"

"아, 아 물론이지. 원하는 대로 데려가게나. 헌데- 이 승리의 주역이 아무것도 필요 없다니. 과연 국왕폐하의 직속 기사든 달라도 뭔가 다른 건가. 문무를 겸비하고도 검소하기까지. 허허."

헤랄드 백작은 기분 좋음을 숨기지 않았다. 그의 얼굴에 '저 멍청한 기사 덕분에 수익이 늘겠군.' 정도의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게 표정으로 고스란히 드러났다.

"하지만 조금은 쉬었다 가는 게 어떻겠나? 자네도 병사들도 힘들 텐데."

헤랄드의 말에 슈아죌이 잠시 고민했다. 하긴, 이번만은 그의 말이 옳다. 전쟁을 끝낸 병사들에게 며칠 정도의 휴식은 주어야겠지.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사흘 후에 출발하겠습니다. 그 때 까지 포로들은 제가 관리하겠습니다."

"물론이네. 원칙대로 포로들은 폐하께 처분을 맡기려나 보군. 흠. 굳이 말이야."

그는 원칙이라는 말을 유난히 강조했다. 그것은 슈아죌에겐 마치 굳이 원칙대로만 할 필요는 없잖는가라고 들렸다. 그는 대답하지 않고 그대로 회의장을 빠져나왔다. 쾅, 문을 닫자마자 귀족들의 비웃음 소리가 들렸다. 인상을 찡그리고는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저런 자들을 상대하는 시간은 설령 일 초라도 아까웠다. 그는 경비병에게 포로들의 현재 처우를 물었다.

"포로들은 신분의 고하에 따라 고관들은 사 층에 일인 일실로, 하관들은 지하 감옥에 수감되어 있습니다. "

"포로들에게 신분의 고하라. 웃기는 일이군."

"그것이, 제너럴께서 신분이 높은 자들은 그 가문에서 목숨 값으로 많은 배상금을 뜯어낼 수 있으니 조심히 다루라고-"

쾅! 그 순간 슈아죌의 주먹이 벽을 강타했고, 경비병은 화들짝 놀라 주저앉았다. 그가 벽에서 손을 떼자 돌가루가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듣자니 귀가 썩어버릴 것 같군. 그만해라. 이제부터 포로들의 신변은 내게 넘어왔으니 사층과 지하에 있는 포로들의 인적사항을 상세히 조사해 곧바로 내 자리에 올려 두어라."

"네? 네! 커멘더님."

병사는 잔뜩 긴장한 채 대답했다. 슈아죌은 여전히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주저앉은 병사를 등 뒤로 한 채 빠른 걸음으로 성을 빠져나왔다.





작가의말

 제너럴(General) <-> 커멘더(commander)

 제너럴이란, 군대의 총 수장을 의미한다. 귀족들과 기사들, 병사들을 모두 지휘하고 작전의 최종적 결정을 내리는 인물로, 주로 군대의 가장 높은 귀족이 그 직책을 맞는다. 하지만 제너럴이 전장에 직접 나서는 일은 거의 없으며, 결재권자에 해당한다.

 커멘더란, 직접 전장에서 전두지휘를 하는 인물로 실질적인 지휘자에 해당한다. 전장의 승패는 모두 커멘더에게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고, 군의 커멘더끼리의 아레나(일기토)의 결과에 따라 군의 사기를 좌우하기도 한다. 주로 가장 실력이 뛰어난 기사가 그 역할을 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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