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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얼 님의 서재입니다.

나쁜 놈 그보다 더 나쁜 놈.

웹소설 > 자유연재 > 현대판타지, 전쟁·밀리터리

업경대
작품등록일 :
2022.12.20 19:18
최근연재일 :
2023.04.07 1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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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16 1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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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23화.

DUMMY

기술력이 부족한 한국의 조선소에서는 고속정조차 이제 막 제작하는 단계였다.


하다못해 고속정에 달 레이더는 고사하고 중기관총을 비롯해 어뢰발사관 하나까지도 수입을 해다 달아야 할 판이다.


다이너마이트조차 이제 막 만들어 내기 시작했으니, 그 정도로 외국에 비해 아직은 기술수준이 형편 없이 뒤떨어져 있었다.


고위급 해군 장교들은 자신들에게 돌아오는 비난을 감수하기 어려웠다.

이런 상황에 뭐로 밤바다를 지키란 얘기냐.


애꿎은 해군을 탓해본들 소용없는 일이란 걸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김정필 역시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지금도 만약을 위해 비상을 풀지 않고 있는 중이니 곧 찾아낼 수 있을 겁니다."


"잠수함까지 동원했을 정도면 한두 놈이 침투한 게 아니란 말인데.. 도대체 빨갱이들이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 걸까?"


김정필의 질문을 듣고 있으면서도 답답한 침묵이 계속됐다.

밑에 놈을 갈군다고 해서 해답이 나올 리 없는 일이다.


------


강호는 자인의 간호를 받으며 수련에 몰두하고 있었다.

전문가가 쏜 것도 아닌 허접한 권총에 맞은 것은 자신이 수련에 등한시한 결과란 생각에서다.

다시 한 번 자신이 놓친 것은 없는지 글귀를 파고들었다.


글귀에 집중할수록 신기하게 다른 세상을 보여주었다.


인지 범위가 넓어진 건가?

주방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마침 차를 가져오는 것 같군. 발자국 소리에 집중이 깨졌다.

문이 열리고 찻잔을 든 자인이 들어섰다.


"영감님은 나가셨나 봐?"


"네, 그만큼 일이 바쁘신가 봐요."


삽을 꽂았다는 말은 들었지만, 아직 구경도 가보질 못했다.


"그럼 영감님은 초리가 모시고 간 건가?"


"네, 그런데 철구라는 좋은 이름을 두고 왜 초리라고 불러요?"


"어? 어.. 그런 게 있어. 초리도 걔 이름이야."


"초리가 이름이라고요?"


"그래."


커피를 젓는 손가락이 유난히 가늘다는 생각이 들었다.


"쯧, 너무 약해."


"뭐가요? 커피가요?"


"어? 아냐, 아무것도."


"호호호, 가끔가다 뜬금없는 말도 잘하시고."


살짝 이까지 드러내고 웃는 자인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강호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도대체 내 말의 어디가 우습다는 거지?


가까이 지내다 보니 자연스럽게 말은 트게 되었지만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게 여자란 생물이었다.


자신이 혼자 갈 수 있는 붕대도 시간만 되면 어디서든 귀신같이 나타나 꼼꼼하게 갈아주었다.

사양을 해도 못들은 척 막무가내였다.


이젠 상처가 다 아물었는대도 말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시간만 되면 기다려지는 건 무슨 이유 때문인지 자신도 몰랐다.

그저 팔만 내 맡길 뿐.


"어르신을 따라 현장 일을 하실 건가요?"


"모르겠어.. 철거 일 같은 건 해봤지만 다른 건 아무것도 아는 게 없으니.. 그렇다고 이렇게 공밥이나 축 내고 있는 것도 싫고.. 그만 떠날 때가 됐다는 생각이 들기도 들고."


"어떻게 그런 생각을.. 그렇다면, 공부를 시작해보시는 건 어때요?"


"흐흐흐,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내가 공부를..?"


"왜요? 못할 것 같아서요? 아니면 자신이 없어서요."


총 칼을 들고 사람 목이나 따던 손에 펜을 쥐라고?

그건 펜을 모독하는 짓이란 생각이 들었다.


속았다고 하지만 자신이 선택한 길이었다.

그래, 사람 죽이는 공부라면 자신 있지.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아무것도 모르는 여자에게 구구절절한 얘기를 하기는 싫었다.


수시로 변화하는 강호의 얼굴을 지켜보면서 자인은 자신이 봤던 강호의 순수한 내면을 되새겼다. 험한 생활을 하면서 별의 별 사람들에게서 숱한 유혹을 이겨냈던 자신이다. 그 많은 사람들 중에 이렇게 도자기 같이 투명할 정도로 하얀색을 본 적이 없었다.


꽃 같던 대학 신입생 시절 너무 아파 병원을 찾았지만 아무런 병명도 나오질 않았다.

그때부터 병원을 전전했지만 견디다 못해 결국 용하다고 소문난 점집을 찾았다.


무당이 될 팔자라고 했던 점쟁이의 말에 코웃음 치고 무당의 말을 따라 들어선 것이 기생의 길이었다.

부모님이 펄펄 뛰었지만 자신으로선 더 이상 선택할 여지가 없었다.


"양기가 넘치는 남자들 틈바구니에 끼어 살다 보면 신이 범접하진 못 할 거야. 그러니 선택은 자네의 자유야."


그래서 선택한 게 대원각 이었다. 무당이 되는 건 죽기보다 싫었으니까.

아무도 모르는 비밀이지만, 처음으로 자신이 사람의 내면을 들여다보게 된 것은 그때부터였다.


자신이 몸담고 있던 대원각을 드나드는 거의 모든 남자들은 검은색 아니면 기분 나쁠 정도로 검붉은 색을 지니고 있었다. 개중 몇 몇은 이도 저도 아닌 회색을 지니고 있었지만. 그마저도 흔하진 않았다.


시간이 지나자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색의 의미는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검은색에 가까운 색을 지녔던 사람들은 오래지 않아 좋지 않은 사연과 함께 신문지상에 또는TV안에 오르내리다 결국 교도소에 수감되고 말았으니까.

회색을 지닌 사람도 시간만 오래 걸렸을 뿐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색깔을 지니지 않은 사람은 강호가 처음이었다.


속을 알 수 없는 사람. 자인의 평가였다.


여길 떠나야 할까?

여기선 더 이상 내가 할 일이 없다.

권영감이 눈치를 주는 건 아니지만 진지하게 고민을 해야 할 시간이다.


자신과 작전 중에 죽어갔던 요원들의 위패를 모셨던 이름 모를 절이 떠올랐다.


"그래, 거기나 가볼까?"


가면 다시는 돌아와 질 것 같지 않았다.


"초리야 알아서 잘 살 것이고..."


전선과 가까운 그곳에 가서 사는 것도 그리 나쁘진 않을 거야.

어차피 산야를 헤매고 다녔던 몸이라 두려울 것은 없었다.


그래, 떠나자.


자리에서 일어나 장을 열고 주섬주섬 입고 다니던 옷가지를 가방에 담는 강호를 보던 자인은 깜짝 놀랐다.


"어딜 가시려고요?"


"그냥 답답해서 나가보려고."


"어르신한테 말도 없이요?"


"하하, 내 몸이 영감님 것도 아니고 무슨.."


어깨에 낡은 가방을 메고 휘적휘적 걸어 나가는 강호의 뒷모습을 보던 자인은 불길한 마음에 전화를 들었다.


마침 현장사무소에 있던 철구가 전화를 받았다.


"예, 장철굽니다."


-큰일 났어요.


응? 큰일이라니, 큰일 날게 뭐가 있지?


"무슨 일인데요?"


-강호씨가 집을 나갔어요.


집을 나가다니, 그럼 다쳤다고 사람이 집에만 있을까.


"어딜 갔는지 모르겠지만 곧 들어오지 않을까요?"


느긋한 초리의 대답에 답답해진 자인이 말을 더듬었다.


-아, 아니.. 그게.. 옷 가방을 들고 나간 사람이 금방 돌아올까요?


"어? 옷 가방을요?"


-네, 맞아요, 옷을 싸서 나갔다구요.


"어디로 갔는지는 모르시구요?"


-네, 말도 없이 나갔으니까요.


"아, 이 선배.. 역마살이 깨어난 모양이네."


자신은 그나마 기간이 짧아 다행이었다. 오랫동안 북쪽 땅을 헤매고 다니며 작전을 뛰었던 선배들은 진득하게 한 곳에 정착하지 못했다.


불안한 심리 때문에 한 달을 넘기기도 전에 떠돌아다니는 생활을 그치지 못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었다.


자신은 그저 그 사람들이 불안과 공포를 해소하지 못한 때문이라고 짐작할 뿐이다.


-네? 그게 무슨..말이죠?


"쩝... 그럴 일이 선배나 나에겐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하죠?


"지금은 그저 기다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뒤도 안 돌아다 보고 나갔는데 돌아오실까요?


"마음이 안정되면 절 찾아서라도 올 겁니다."


자신이 외로움에 염천교의 김상사를 찾아갔었 듯 강호도 그럴 것이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결국 좋은 꼴을 보지는 못했지만.


권영감도 강호가 아무런 말도 없이 떠났다는 말을 들었다.

밖으로 나서는 힘없이 처진 영감의 어깨가 어쩐지 좁아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쯧, 선배가 여러 사람 힘 빠지게 하는군."


영은사.

가운데 글자가 원인지 은인지 확실하진 않지만 희미하게 남아있는 절의 이름이다.


부처도 스님도 없는 절반 넘어 무너진 절이다. 강호는 이곳 대웅전으로 짐작되는 실내에 오래전 자신이 직접 깎은 영위를 네 점이나 벽에 걸어두고 있었다. 이름과 죽은 날짜만 기록돼 있는 신주다.


날짜를 보고 있노라면 그날의 기억이 생생하게 살아난다.

처음으로 작전을 같이 뛰었던 선배는 유난히 정이 많았다.


작전을 마치고 넘어오는 길에 마주친 적의 사격에 관통상을 입고 쓰러진 선배는 쓰러진 채로 악착같이 자신에게 남아있는 총탄을 쏘아 대며 도망가라 소리쳤다.


"난 틀렸어. 도망가. 늦기 전에 얼른 튀어."


타타탕. 타탕. 카카카캉.

지금도 생생하게 선배가 적을 향해 쏴 대던 총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크크큭, 이 새꺄! 무사히 살아나가거든 밥이나 한 그릇 챙겨서 상에 올려주라."


돌아서서 달려가는 한강에게 남긴 말이다.

자신은 선배 덕에 무사할 수 있었다.

밥, 밥, 밥이라는 말이 쟁쟁하게 귀에 울렸다.


멍하니 신주를 쳐다보고 있던 강호는 부엌으로 들어갔다.

준비해온 쌀로 밥이라도 지어 영위 앞에 차려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식은 밥도 제대로 못 먹고 풀뿌리만 씹어 먹다 죽은 귀신들.. 따뜻한 밥이라도 줘야지.

상도 없는 맨 바닥에 밥 네 덩이만 나뭇잎 위에 놓여 있었다.


"많이 드시오."


밥이 식어갈 때쯤 강호는 그 밥을 꾸역꾸역 먹어 치웠다.

그날부터 날짜를 잊어버리고 낮이면 사냥을 밤이면 글귀수련에 매달렸다.

그렇게 매일같이 산을 쏘다니다 수색정찰을 나선 군인들에게 몇 번인가 검문도 당했지만 주민등록증을 지니고 요양 차 왔다고 핑계를 댄 덕분에 무사히 넘어갈 수 있었다.


이렇게 검문이 심했던 적이 있었나 싶은 생각에 뭔가 사건이 터졌다는 걸 알았다.

영감은 괜찮을까? 초리가 있으니 괜찮을 거라 생각했지만 가슴 한구석에 왠지 모를 불안감이 생겨나고 안정이 돼질 않았다.


"왜 이러는 거지? 정말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 아닐까?"


결국 강호는 산을 내려갈 결심을 하고 길을 나섰다.


서울로 들어가는 길목마다 설치되 있는 바리게이트와 무장군경들이 일의 엄중함을 말해주고 있었다. 버스는 툭하면 멈춰 서서 검문을 받아야 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터진 건가? 이 불안한 감정은 또 뭐고.

초인종을 누르는 손이 어색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기다렸다는 듯 문이 열리고 자인이 튀어나와 허리를 붙잡고 매달렸다.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강호의 말에 당황한 자인이 뒤로 물러나며 얼굴을 붉혔다.

자신의 행동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아, 아니요. 얼른 들어가요."


"아무 일 없다는 것 치곤 군경이 많이 깔려있던데?"


"아, 무장한 공비가 출몰했다는 것 같았어요."


"공비가?"


그게 무슨 말인지 금방 이해가 돼질 않았다.


그게 무슨.. 아, 그래 공비. 공비라면 유격대다.


또 뭔 짓을 했기에 떼거지로 넘어왔다는 거지? 정부의 행태를 알기에 의심부터 들었다.

못 잡았기에 군경이 깔려있는 거겠지.


"약 삼십 명 정도가 넘어 왔다고 하는데, 교전을 벌여 다섯 명밖에 못 잡았다고 해요."


들을수록 이상했다.


"어디서 교전을 했답니까?"


"남산에서요."


남산이라면 중정이 있는 곳이다.

이건 뭔가 이상한 걸?


빨갱이 놈들이 군사시설도 아닌 그곳을 노릴 이유가 없었다.


"뭔가 다른 소식은 없는 겁니까?"


"그런 일엔 아는 게 없어서..."


아, 그렇지. 물어보는 대상이 잘못됐다.


"뉴스에 나왔습니까?"


"네, 딱 한번 나왔었어요. 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쳤다고.."


허, 뉴스통제까지? 이거 보통일이 아니구나.

그렇게 짐작할 수 있었다.


자인의 연락을 받은 권영감과 초리가 집으로 달려왔다.

권영감은 그새 부쩍 늙어보였다.


거참, 밥도 제대로 못 먹고 다니시나?

한국인은 밥심으로 산다는 걸 알면서.


초리는 아는 게 있을까 싶어 물어보았다.


"하도 이상해서 산에서 내려오긴 했다만,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넌 아냐?"


강호의 물음에 초리의 얼굴이 심각하게 굳었다.


"내가 짐작하기론 이건 북한 놈들 짓이 아니라는 거요. 아무리 봐도 그놈들 스타일이 아니거든."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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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25화. 23.01.19 263 8 12쪽
24 24화. 23.01.18 261 9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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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21화. 23.01.13 269 9 12쪽
20 20화. 23.01.12 278 9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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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13화. 23.01.04 293 9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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