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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님의 서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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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작품등록일 :
2021.12.19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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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06 09:05
연재수 :
902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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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942
글자수 :
9,990,945

작성
21.12.21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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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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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8
글자
20쪽

Again 1987. (2)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지명, 상호, 단체, 사건 등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되고 창조된 허구입니다.




DUMMY

“좋은 하루 되십시오!”


1학년들이 방송실을 빠져나가는 선배들을 향해 구십도 인사했다.

신포고 방송부는 전통적인 엘리트 서클이다.

전통이란 미명 아래 군기가 센 편이다.

1학년은 일 년간 혹독하게 군기가 잡힌다.

매일 청소 상태를 점검 받고, 방송 장비를 광이 나게 닦고, 작은 문제가 없도록 정비해야만 한다.

전파사에 취직한 것도 아닌데.

특히 시험 성적이 떨어지게 되면 전교 석차에서 떨어진 만큼 소위 ‘성적 빠따’를 맞았다.

과거로 돌아오기 전 류지호는 사인방과 몰려다니며 놀기 바빠 성적이 떨어지면 떨어졌지 오르는 일이 없었다.

성적표가 나오는 날마다 다른 동기들에 비해 가장 많은 매를 맞아야했었다.


“애들아~”


반가움에 저절로 목소리가 밝아졌다.

친구끼리 친하게 지내다가도 연락이 뜸해지면 멀어지게 마련.

류지호는 영화판을 전전하다가 방송부 친구들과 자연스럽게 멀어졌었다.

영화 투자를 받아보려고 비굴하게 찾아갔다가 매몰차게 거절당했던 기억도 있었고, 모임의 회비가 부담스러워 바쁜 척 모임에 불참했던 기억도 있었다.

류지호는 괜한 자격지심에 방송부 출신들을 멀리했었던 것이 새삼 후회가 됐다.


“자식들~ 정말 오랜만이다.”

“뭐가 오랜만이야. 매일 보면서.”


자칭 타칭 방송부 멋쟁이 최원석이 어이없다는 투로 대꾸했다.

녀석은 날라리는 아니지만, 헤어스타일과 옷차림에 유난을 떨었다.

유명 브랜드 매장에 새로운 신제품이 진열되기가 무섭게 구매해 입고 다녔다.

유행을 타기 시작하는 스노우진을 입고 다니는 고등학생은 신포고에서 최원석이 유일했다.


“오늘도 형들한테 책잡히지 말고 잘해보자.”

“뭐래?”


방송부장을 맡고 있는 박상은이 류지호를 지그시 바라봤다.

그는 모든 일에 우선순위를 방송부 활동에 두고 있는 책임감 있는 친구였다.

성격이 원만해 방송부뿐만 아니라 친하게 지는 동급생이 많았다.


“잘해보자는데.... 뭐가 이상해?”


김석민이 요상한 물건을 본다는 표정으로 비아냥거렸다.


“너 이런 성격 아니잖아?”


전교 수석으로 신포고에 입학한 김석민이다.

평소 쌀쌀 맞은 태도와 업신여기는 말투로 오해를 많이 샀다.

천성이 냉소적이라 친한 사이가 아니라면 김석민을 재수 없게 여기곤 했다.


“내 성격이 어땠는데?”

“몰라서 물어?”

“.....?”

“내성적이면서 뭔가 있는 듯 없는 듯한 존재.”

“야! 내가 존재감이 왜 없어?”


비수처럼 꽂히는 말에 류지호가 버럭 성질을 부렸다.

실제 졸업 후에 류지호가 방송부였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동창이 많았다.

그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학생이었으니까.

사인방 친구들과만 어울리며 아웃사이더로 겉돌았고, 학교 밖에서는 반쯤 날라리 행세를 하고 다니긴 했었다.

사인방 친구들이 저마다 개성이 강한 탓에 별 볼일 없던 류지호까지 날라리처럼 비춰지곤 했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키가 작은 이철웅이 끼어들었다.


“거봐~ 평소 안내던 성을 내잖아.”

“키는 내가 너보다 한 뼘이 더 커. 존재감이 없긴 왜 없어!”

“키만 크면 뭐하냐. 비쩍 말라서 비실비실 해가지고는. 멸치대가리 같은 놈아.”


이철웅은 운동신경이 뛰어났다.

키가 작았지만, 농구서클에서 끊임없이 러브콜을 보낼 정도로 농구 실력이 탁월했다.

방송부 활동 외에 다른 서클 활동을 금지하는 선배들 때문에 좋아하는 농구와 축구를 할 수 없다고 항상 투덜거렸다.


“아침부터 열 내지 말자. 조회시간 다가온다.”


박상은이 주의를 환기시키고는 먼저 방송실을 나갔다.


“철웅아~ 나 몇 반이냐?”

“5반이잖아.”

"알려줘서 고맙다."


혼자 남은 류지호는 기억을 더듬어 자신이 주로 쓰던 사물함을 열어보았다.


“윽! 냄새.....”


곰팡이 냄새인지 썩은 냄새인지.

정체 모를 불쾌한 냄새가 훅하고 코를 찔렀다.

방송부는 사물함 덕택에 유도복이나 체육복을 구입하지 않아도 됐다.

선배들이 졸업하면서 놔두고 간 빨지 않은 체육복과 유도복, 교련복들이 사물함에 가득했다.

치수가 맞은 옷을 아무나 가져다 입어도 누가 뭐라 하지 않았다.

사물함 덕분에 선배들에게 교과서와 참고서를 손쉽게 물려받을 수 있는 장점도 있었다.


“언제 날 잡아서 빨래라도 하든지 해야지...”


전에는 빨래는커녕, 사물함의 각종 옷들에 관심이 전혀 없었다.

심지어 죽기 직전의 반지하방은 쓰레기장을 방불케 할 정도였다.

그 만큼 게으르고 무신경했던 류지호다.

그런데 빨래를 하겠단다.

실제 실행에 옮길지 지켜볼 일이다.

마지막으로 방송실을 나선 류지호가 알려준 대로 5반 교실을 찾아 걸음을 옮겼다.


드르륵!


류지호가 뒷문을 열고 교실로 들어왔다.

흰색과 회색.

마치 교실이 감옥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59명의 사내 녀석들이 책상을 차지하고 다닥다닥 붙어 앉아있다.

오전 수업은 운동부도 예외 없이 의무적으로 들어와야 했다.

따라서 배드민턴부까지 출석을 한 상태다.

솔직히 류지호는 누가 배드민턴부인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자신의 자리... 기억나지 않았다.

2분단 중간쯤의 비어 있는 자리를 발견했다.

류지호는 최대한 태연하게 빈자리로 걸어가 앉았다.

방송부가 교실에 가장 늦게 들어온다.

비어있는 자리가 자신의 자리일 확률이 백퍼센트다.

류지호의 짝은 안경을 쓴 통통한 체격의 친구였다.

학교 배지 아래로 플라스틱 명찰에 강용석이라 적혀있다.

류지호가 기억하기로 녀석은 소위 노는 학생이었다.

천성은 착했다.

녀석은 공부하는 급우들과 날라리 사이에서 두루두루 친하게 지냈다.

재주라면 재주다.

어려서부터 처세술에 일찍 눈을 떴다고 볼 수도 있고.


“용석아.”

“.....응?”


강용석이 알고 있는 류지호는 내성적인 편이라 먼저 말을 거는 경우가 별로 없었다.

류지호가 갑자기 강용석의 옷에 코를 대고 냄새를 맡아보았다.


“왜, 왜 이래?”


화들짝 놀란 강용석이 류지호의 머리를 밀쳤다.


“인마, 담배 좀 작작 펴. 뼈 삭아.”


류지호는 진심을 담아 충고했다.


“이 븅이.... 뭐래?”


강용석은 어이가 없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류지호는 급우들을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교실을 둘러본 류지호가 가볍게 미간을 구겼다.

다시 고개를 강용석에게 돌렸다.


“또 왜?”


어딘지 평소와 다른 류지호의 행동에 강용석이 슬쩍 짜증이 치밀었다.

그런데 류지호의 표정이 좀 이상했다.

류지호는 감회에 젖은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아니다. 일 년 동안 잘 지내보자.”

“응?”

“잘 지내보자고.”


강용석이 미친놈 본다는 듯 머리에 검지를 대고 빙글빙글 돌렸다.


드르륵 탕!


담임 연정훈.

영어 과목을 담당했다.

교편을 잡고 처음으로 발령 받은 학교가 신포고다.

초임교사여서 인지 매사의 의욕적이고, 열정적이다.

형처럼 때론 선배처럼.

학생들과 격의 없이 지내던 담임으로 기억했다.

류지호에게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학창시절 선생님이다.


“차렷! 경례!”

“안녕하세요!”

“그래, 안녕이다.”


연정훈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학생들의 인사를 받아줬다.

출석부를 꺼내 한 명 한 명 이름을 호명하며 출석을 확인했다.


‘저 놈은 도서부, 저 놈은 중창단, 저 놈은 별로 안 친했고...’


류지호는 호명되는 이름과 급우들의 얼굴을 대조하며 기억을 더듬었다.


“아침 조회는 별다른 사항은 없고, 특별히 할 말도 없고 말이지. 가만있어 보자~ 다음 주가 시험인 건 다들 알지?“


우우우.


급우들의 야유가 터져 나왔다.

류지호는 뒤통수를 시원하게 후려 맞은 듯 멍한 눈으로 담임을 바라봤다.


“이번 시험 우리 반이 1학년 꼴지 한다? 어떻게 될지 알거라 믿는다. 선생님이 초임인데 니들이 협조 좀 해줘라. 그래 줄 거지?”

“봐서요.”

“꼴찌하면 빠따 치실 거예요?”


급우들이 격의 없이 연정훈과 대화했다.


“나도 니들 때리기 싫어 인석들아~ 그러니까 알아서 열심히 공부 해.”


우우우~


“그럼 선생님들 말 잘 듣고 졸지 말고 수업 잘 듣길 바란다. 오늘도 수고!“


류지호는 멍하니 교실을 빠져나가는 담임의 등을 바라봤다.


‘....망했다!‘


류지호는 갑자기 머리가 아팠다.


‘하필 시험이라니....’


류지호는 비록 삼류감독일지언정 교양이 부족한 사람은 아니었다.

시나리오를 기획하고, 직접 쓰려면 나름 관련분야 공부와 취재를 해야 했고, 영화 소재를 찾기 위해 신문도 열심히 읽었다.

그런 과정 속에서 류지호는 잡학지식과 시사상식에 능한 편이었다.

국영수와 관계가 없는 부분에서 강하단 소리다.


‘고등학교 1학년 수준이면 어느 정도인거야?’


류지호는 황급히 교과서와 참고서를 꺼내 책상 위에 펼쳐 놨다.

수학 교과서를 펼쳐보았다.

방정식과 그래프, 함수로 도배되어있는 교과서를 보고 있으니 숨이 턱 막혔다.


‘학기 초라 진도는 많이 안 나갔을 거야.’


일단 자신의 수준을 확인하기 위해 참고서의 문제를 풀어보았다.

영어는 문법이 허술했고, 국어는 조금만 공부하면 나쁘지 않을 수준.


‘수학과 물리과목이 문제네.’


이 당시 영어와 국어는 꽤 성적이 좋았던 걸로 기억했다.

문과(충)로 사회에선 전혀 쓸모가 없었던 수학과 과학이 가장 큰 문제다.


‘이번 중간고사에서 수학은 일단 포기.’


류지호는 코앞에 닥친 시험에 관해 깔끔하게 결론 냈다.

당장 안 되는 것에 매달리다간 모든 걸 망쳐버릴 것 같으니까.


❉ ❉ ❉


아침조회를 시작으로 류지호의 고등학교 생활이 다시 시작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학창시절로 돌아가면 정말 공부를 열심히 하겠노라고.

물론 공부가 제일 쉬웠다고 말하는 사람은 그럴 수도 있다.

류지호에게 수업시간은 고문과 다를 것이 없었다.

일단 수업시간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죽을 맛이었다.


‘젠장! 이 상태로 시험은 어떻게 치르지?‘


수업시간에 딴 짓을 하거나 꾸벅꾸벅 졸고 있는 급우들의 모습이 보였다.

남의 일 같지가 않았다.

암기가 필요한 과목은 닥치고 외우면 어찌어찌 해 볼만 했다.

국영수 과목이 문제다.

고등학교 1학년 수준이라 하더라도 류지호가 하도 오래 전에 배운 것들이다.

일주일이란 시간 동안 해결할 방법이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특히 수학은 체질에 안 맞아.’


문과 계통을 지망한다 하더라도 서울 소재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서는 수학 성적도 중요했다.


“2x+3y+4i-3x+2yi=0을 만족하는 x,y를 구하라는 문제를 풀어보자. 일단 좌변을 실수 부분과 허수부분으로 정리해 볼 수....”


수학교사는 칠판에 판서를 해가며 열정적으로 문제를 풀었다.


‘하암!’


수학 강의가 굉장히 심오한 클래식 자장가처럼 들렸다.

듣고 있으면 금방 잠에 들 것만 같은 자장가.

저절로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그러면 안 된다고 참아야 한다고, 졸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써보았지만.

결국 졸음을 이기지 못했다.

류지호의 고개가 꾸벅꾸벅 끄덕여졌다.


“방송부!”


수학교사의 호통소리가 들려왔다.

강용석이 류지호의 옆구리를 툭하고 건드렸다.


“왜?”


강용석이 눈짓으로 교탁을 가리켰다.

류지호의 눈에 칠판 앞에서 화난 표정을 짓고 있는 수학교사가 들어왔다.


“아~ 미안합니다. 제가 잠시 생각할 것이 있어서......”

“킥킥.”


류지호가 어른 투의 말을 하자 주변에서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 자식 봐라? 지금 선생님하고 장난해?”


수학 교사가 팔을 걷어붙이고 당장에라도 달려올 것처럼 씩씩거렸다.

류지호는 굳이 반항적인 태도를 보이려고 한 것은 아니다.


‘아차, 나도 모르게.....’


류지호는 쓴웃음을 지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죄송합니다, 선생님. 다시는 졸지 않고 수업에 집중하겠습니다. 이번 한번만 넘어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다시 한 번 정중히 사과드립니다.”


류지호는 허리까지 숙여가며 사과했다.


“......?”


수학교사는 처음에는 류지호가 자신을 놀리는 줄 알았다.

하지만 사과하는 류지호의 눈을 보고, 진심이 담겨있다는 걸 알았다.

모질지 못한 성격도 있지만, 의젓하게 허리까지 굽혀가며 사죄하는 류지호에게 수학교사는 더 이상 화를 내지 못했다.


“흠흠. 앉아라.”


류지호는 다시 한 번 허리를 숙여 보였다.


“다시 또 졸면 그때는 복도로 내보낼 거야”

“예!”


다시 수업이 재개되었다.

류지호는 졸음을 참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렇게 1교시가 끝났다.

류지호는 교실을 빠져나와 터덜터덜 매점으로 향했다.

매점 판매대에 길게 늘어선 줄 사이에 황재정이 서있었다.

류지호는 바지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뺐다.

손바닥 안에는 100원 짜리 동전 몇 개가 있을 뿐.

류지호의 일주일 용돈은 천원이다.

100원 짜리 동전을 다시 호주머니에 넣어두고, 그대로 몸을 돌려 매점 밖으로 나왔다.

황재정이 빵과 우유를 들고 류지호의 곁으로 다가왔다.


“넌 빵 안 먹으니까 내가 다 먹는다?”


류지호는 입이 매우 짧았다.

그래야 하는데.

류지호가 우유를 빼앗아 벌컥벌컥 마셨다.


“어? 뭐야.... 너 우유 안 먹잖아?”


류지호가 입가에 묻은 우유를 소매로 훔치고 입을 열었다.


“수업 받는 게 원래 이렇게 힘든 거였냐?”

“당연하지. 말해 뭐해?”

“차라리 검정고시 볼까?”

“띨빡아, 그냥 잠이나 처자. 개소리 말고.”


황재정이 퉁명스럽게 말하고, 류지호의 손에 들린 우유를 빼앗았다.


“띨빡이란 말도 참 오랜만에 듣네.”


류지호가 중얼거렸다.

띨빡은 바보와 비슷한 뜻으로 어벙하고 순진한 사람을 낮춰 부르는 은어다.


“지호야, 뛰어!”

“.....?”

“곧 종친다.”


류지호는 종소리와 함께 교실의 자신의 자리로 돌아왔다.

쉽게 적응하리라 기대하지 않았지만, 쉽지 않다.


수업이 계속되었다.

수업이라도 재미가 있으면 어떻게 집중을 해 보겠는데, 교사들은 농담 하나 없이 우직하게 수업을 진행했다.

오전 수업이 어떻게 흘러가는 지도 모르게 정신없이 지나갔다.


딩동댕~


점심시간이 되자, 류지호는 배고픔도 잊은 채 책상에 널브러졌다.


“미치겠다.”


강용석이 류지호의 어깨를 흔들어댔다.


“방송실 안가?”

“응?”

“방송실. 인마!”

“아! 맞다! 점심방송!”


때마침 교실 스피커에서 SPBS 시그널 음악이 흘러나왔다.


[여기는 신포고등학교 교육방송국입니다. S.P.B.S!]


류지호는 잠시 넋을 놓고 칠판 왼쪽 상단 벽면에 달려있는 나무로 만든 조악한 스피커를 바라봤다.


“방송부 땡땡이치는 거야?”


강용석이 도시락을 까먹으며 물었다.

홀린 듯 교실 스피커를 바라보던 류지호가 번쩍 정신을 차렸다.


“밥 맛있게 먹어라.”


우당탕탕!


류지호는 의자를 박차고 교실을 뛰쳐나갔다.


드르륵!


류지호가 숨을 헐떡거리며 방송실로 들어왔다.

이제 막 점심방송을 시작한 2학년 선배들의 표정이 싸늘했다.

류지호는 얼른 안쪽으로 들어와 넙죽 허리를 숙여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빠져가지고...”

“이따 방송 끝나고 보자.”

“방송중이야. 한눈팔지 말고 집중해.”


2학년 선배들이 류지호를 쳐다보며 한마디씩 하자, 한수호가 주의를 줬다.

류지호는 눈치껏 1학년들이 서있는 곳으로 재빨리 끼어들었다.


“왜 늦었어?”


박상은이 류지호에게 바짝 다가와 속삭였다.


‘쉿.’


류지호는 검지를 입술에 대고 박상은에게 조용히 하라는 시늉을 해보였다.

류지호의 눈에 방송부들의 점심방송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왼손과 오른손 동시에 믹서의 볼륨을 조절하는 기술이 있다.

양손의 속도를 달리 해야 하는 경우 의외로 쉽지 않다.

그리고 앞 음악의 볼륨과 뒤에 따라올 음악을 믹스 시킬 때도 연습이 좀 필요했다.

큐(CUE) 사인 넣기라든지, 시그널 음악 디졸브(dissolve) 시키는 요령이라든지, LP판 교체와 턴테이블 바늘 놓은 위치 잡기라든지, 마이크와 오디오믹서 등 장비 관리 요령 등등.

1학년들은 한 학기 동안 선배들의 서브를 보며 여러 가지 기술을 배운다.

다른 학교 방송부가 2학년을 중심으로 점심방송을 하는 것과 달리 신포고는 1학년을 한 학기 동안 속성으로 교육시켜 바로 실전에 투입시킨다.


‘훈련시간이 짧아서 우리 아나운서 수준은 다른 학교와 비교해 정말 형편없지.’


때문에 선배들도 방송부 기본업무에서 실수가 생기면 구박을 해도, 점심방송 대본의 질이나 아나운싱에 대해서는 관대했다.

류지호는 믹서콘솔에 앉아있는 2학년 엔지니어 선배를 쳐다봤다.


‘한수호 국장......’


한수호는 공부와 운동을 모두 잘하는 한마디로 잘난 인간이다.

가난한 집안 형편에도 불구하고 항상 구김살이 없었다.

신포고 방송부는 1학년 책임자는 부장, 2학년은 국장이라고 불렀다.

방송부가 아니라 방송국이라 스스로 칭하며 치기어린 프라이드를 뽐냈다.

3학년은 입시에 집중하기 위해 공식적으로 방송부활동에서 손을 뗀다.

한수호가 능숙하게 믹서를 조작해 음악과 멘트 볼륨을 조정했다.


[새 학기가 시작한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절반이 지났네요. 다음 주부터는 중간고사가 시작됩니다. 계절의 여왕이라는 5월을 우리는 교과서와 또 참고서와 씨름을 하며 보내야겠죠?]


방음 스튜디오 안에서 아나운서 파트의 오철규가 방송대본을 차분히 읽어 내려갔다.

학교가 규정한 스포츠 헤어스타일, 은테 안경에 모범생다운 튀지 않는 깔끔한 옷차림.

오철규는 김석민처럼 공부만 하는 모범생이다.

최고 명문 진학을 위해 공부에 올인하고 있었는데, 방송부 활동을 등한시 하면서도 후배들을 은근히 잘 챙겼다.


‘그러고 보면 방송부에는 잘난 인간들이 참 많았구나.’


신포고는 SKY 대학 진학률이 전국적으로 상위권이다.

따라서 나름 사회 지도층으로 진출한 졸업생 동문들이 많았다.

그런 잘나가는 졸업생 동문들이 모교에 많은 지원을 해줬는데, 방송실 역시 그 수혜를 입어 대학 방송국에 버금가는 시설을 자랑했다.

방송시설에 큰 비용이 들어간 탓에 툭하면 교감과 학생주임이 찾아와 방송실을 뒤집어 놓고는 했다.

방송부가 시설과 장비를 험하게 굴릴까봐서.


‘그저 꼬투리를 잡아 방송부 군기를 잡아보려는 수작으로 밖에는 안보였지.’


대부분의 교사들은 방송부에 관대한 편이다.

유독 교감과 학생주임만 방송부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다.

어쨌든 불시점검에서 담배가 적발되거나 금지곡 테이프, LP 백판이 발견되기라도 하면 입시공부로 바쁜 3학년까지 방송실로 불려와 매를 맞아야 했다.

압수당한 물건들은 채 한 달도 지나기도 전에 다시 채워졌다.

류지호는 그런 일이 매년 반복되었던 것으로 기억했다.

교감과 학생주임의 핍박 속에서도 선배들은 틈만 나면 방송부가 반항의 상징이 되어야 한다고 선동했다.

방송부는 대체적으로 모범생이면서도 반골기질이 충만한 학생이 많았다.

류지호가 기억을 떠올리는 사이 점심방송은 중반을 넘어가고 있다.

오철규가 선곡한 팝송들은 이 당시로서는 최신곡들이다.

방송실 앞에는 신청곡함이라고 해서 상자가 하나 놓여있다.

학생들은 종이에 신청곡을 적어 신청곡 상자에 넣거나, 반에 방송부가 있다면 직접 부탁하면 점심방송에서 틀어줬다.

학생들이 신청한 노래를 시중에서 구할 수 없을 때도 있다.

김광한의 ‘팝스 다이얼’ '별이 빛나는 밤에' 같은 라디오를 들으며 최신 팝송을 카세트테이프에 녹음해 점심방송에서 틀었다.

류지호가 기억을 더듬고 있는 사이 2학년들이 수상한 눈짓을 교환했다.

한수호가 류지호를 짓궂은 얼굴로 쳐다봤다.


“지호야, 방송실 문 잠가.”

“예?”

“방송실 문 걸어 잠그라고 쟈샤,”


류지호가 냉큼 방송실 문으로 달려갔다.


“잠갔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류지호는 별 생각이 없었다.


작가의말

반가운 닉네임이 많이 보이시네요. 다시 찾아와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행복한 하루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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