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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님의 서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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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작품등록일 :
2021.12.19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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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13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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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2.29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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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1쪽

우리는 가족입니다! (1)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지명, 상호, 단체, 사건 등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되고 창조된 허구입니다.




DUMMY

30일 조금 모자란 일수의 여름방학 기간 동안 학교장의 재량으로 일주일 정도 쉬게 하고, 나머지 기간은 보충수업이라는 명목으로 강제로 등교를 한다.


“드릴 말씀이 있어요.”

“......?”

“개학할 때까지 쉬었으면 해요.”


심영숙이 염려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보충수업 빠지면 다른 애들한테 뒤처지는 것 아니니?”


류지호는 내심 뜨끔했지만, 시침 뚝 떼고 당당하게 대답했다.


“선생님들도 방학 동안에는 수업을 그리 열심히 하지 않으세요. 진도 나가는 것도 아니고, 복습시키는 거라 빠져도 크게 지장 없어요.”


류민상이 따지지 않고 곧바로 승낙했다.


“그래라. 내가 학교에 전화해서 담임선생님한테 잘 말해주마.”

“감사해요 아버지. 대신 짬짬이 순호하고 아라 공부 좀 봐줄게요.”


류순호가 깜짝 놀라 물었다.


“형이?”

“너는 열심히는 하는데 핵심을 찾아내는 방법이 많이 미숙해. 과목별로 공부하는 방법의 기본을 잡아 줄게.”


류지호의 품에 안겨있던 류아라가 공부라는 말에 볼을 부풀이며 고민했다.

큰오빠와 시간을 보내는 것은 좋지만, 공부는 하기 싫었다.

류아라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물었다.


“큰오빠, 나도 해야 해?”

“아라는 구구단 먼저 다 외우고.”

“힝~”


류아라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그런 동생이 귀여워 류지호가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쓰담쓰담.


류지호의 손길을 즐기던 류아라가 심영숙을 향해 입을 열었다.


“엄마, 우리 외할머니 보러 안 가?”

“아빠가 휴가를 내야 가지.”

“아빠 휴가 언제 내?”

“다음주.”

“와! 그럼 우리 다음 주에 시골 가는 거야?”


류아라가 자리에서 일어서서 방방 뛰었다.


‘아... 외할아버지!’


류지호는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다.

몇 년 안에 외할아버지가 위암으로 돌아가신다는 사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이런 멍청이, 이걸 잊고 있었어!’


류지호는 입술을 깨물며 기억을 더듬었다.


[이년 만 더 일찍 발견했어도 몇 년 더 사실 수 있었는데....!]


어머니의 자책을 떠올릴 수 있었다.


"요즘도 외할아버지는 계속 약주 드세요?"

"하루가 멀다고 잡숫지."


류지호의 물음에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는 심영숙이다.


"어머니가 주선해서 건강진단 좀 받게 해드리시죠?"

"건강진단?"

"연세가 드시면 아무도 장담 못 하는 게 건강이잖아요.“

“지호가 장남은 장남인가 보구나.”


류민상이 대견하다는 듯 류지호의 어깨를 두드렸다.


“어른들 누구도 할아버지할머니 건강을 크게 신경을 안 쓰시는 것 같아요. 전 아무래도 마음에 걸리네요.”

“엄마가 미처 신경 못 쓰는 것까지 챙기는 걸 보니 우리 큰아들 아주 기특한걸."


심영숙이 흐뭇한 표정으로 말했다.

류민상이 아내에게 전에 없는 농담을 던졌다.


"여보, 가만 보면 우리 큰애가 좀 잘 낫지?"

"누가 낳았는데요?"


심영숙이 남편의 농에 맞장구를 쳐줬다.


"결론이 그렇게 되나? 하하하."

"호호호."


류지호는 애가 타서 죽겠는데, 부모님은 천하태평이다.


“이 참에 아버지 어머니도 보약 한 재씩 지어 드시는 건 어떠세요?”

“애가 우릴 아주 노인네로 아나봐? 엄마하고 아빠 아직 한창이야.”

“그래도 전 두 분이 그러시면 마음이 편할 것 같아요.”


류민상은 장남이 부쩍 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고, 화제를 돌렸다,


“보약은 나중에 먹는 걸로 하고, 여보 저녁부터 먹읍시다.”

“얼른 저녁 차릴게요.”


류지호는 심영숙이 차려 준 이른 저녁을 먹고 방으로 들어갔다.

책상에 앉은 류지호는 신효정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딸을 구해준 사람한테 사기 칠 일은 없을 테고, 뭐가 뭔지 도통 의도를 모르겠어. 그냥 자기들 마음 편하자고 보상금을 기를 쓰고 주려는 건가? 아니면 우리를 못 믿어서? 나중에 들러붙어 귀찮게 할까봐 초장에 깔끔하게 정리하려고?”


류지호가 보기에 파커 사람들이 사기꾼이나 나쁜 사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다.

자신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대단한 사람들인 것 같다.

저기 63빌딩 꼭대기만큼 높은 위치의 상류층 사람들 것이 확실했다.

그런 사람들이 자신을 잘 봤단다.

내심 기분이 좋긴 했다.

한편으로 선진국 국민이 후진국 고등학생을 후원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현재 대한민국은 개발도상국이다.

교통사고 건이 아니더라도 후원 받는 것이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다만 류지호는 G7급 국가 위상을 보여주던 시기를 경험해봤다는 사실.


“에이, 지금 생각해 봐야 답도 없고, 나중에 신변호사를 만나서 진지하게 대화를 나눠보면 답이 나오겠지.”


류지호는 한껏 기지개를 켜고, 방안을 둘러봤다.

며칠을 비웠음에도 먼지 하나 없이 깨끗했다.

어머니가 청소를 해놓은 모양이다.


드르륵.


류지호는 책상 서랍에서 마이마이를 꺼냈다.

습관처럼 AFKN 라디오를 틀었다.

FM 채널인 Eagle FM은 중간에 삽입되는 짤막한 뉴스나 광고 빼고는 전부 최신 팝음악만 방송했다.

Thunder AM은 컨트리 음악을 틀어주거나 미국 라디오 방송을 중계해줘서 류지호가 영어공부를 하는데 큰 도움이 되고 있었다.


‘확실히 쉽게 귀가 열리고, 영어 말문이 트이는 건 아니야.’


류지호는 파커 가족과 대화가 통하지 않는 것이 너무 답답했다.

영어수업도 열심히 듣고, 성문종합영어도 열심히 보고 있다.

학력고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독해다.

그래서 류지호도 영어 단어와 숙어를 암기하는데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팝 앨범의 속지 가사를 달달 외우고, AFKN 라디오도 매일 듣는다.

듣기·말하기·쓰기를 열심히 한다고 했지만, 발음만큼은 자신 할 수 없다.

겁을 먹지 않을 정도.

아직은 딱 그 정도 수준이다.


‘학교에서 배우는 것으로는 부족한데 방법이 없을까?’


미드를 구할 수만 있으면 영어회화에 많은 도움이 될 텐데.

물론 AFKN을 보면 된다.


‘후우. TV는 안방에 있잖아.'


영어공부를 한답시고, TV를 자신의 방으로 옮겨올 순 없다.

뉴스와 드라마 시청으로 하루의 피로를 푸는 것이 부모님의 유일한 낙이다.

류지호는 그 낙을 빼앗는 짓은 하고 싶지 않았다.


‘앞으로 일기를 영어로 쓰고, 영자신문이나 잡지도 구해서 읽어보는 거야. 혼자라도 영어로 말하는 습관을 들여 보자.’


류지호는 영어공부를 시작으로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다.


❉ ❉ ❉


아버지가 학교에 전화를 걸어 보충수업 면제를 받았다.

따라서 류지호는 시간을 좀 더 알차게 쓸 수가 있게 되었다.

먼저 태권도장부터 나갔다.


“어! 혹시 관장님 아닌가?”


넝마주의 꼴을 한 노인이 태권도장 근처를 어슬렁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용연태권도장의 홍 관장이다.

그는 망태기를 매고 넝마집게로 쓰레기를 줍고 있다.

저 모습을 두고 누구는 궁상이라고 했고, 누구는 봉사활동이라고 했다.

홍 관장 본인은 그저 늙은이 소일거리라는 말로 둘러대곤 했다.


“관장님!”

“지호냐?”

“쓰레기를 줍더라도 좀... 넝마처럼 그게 뭐예요?”

“뭐가 어때서?”

“날도 더운데 해나 떨어지고 주우시지.... 망태기 주세요. 제가 맬게요.”

“일 없다. 도장 가는 길이냐?”

“네.”

“고통사고 당했다며?”

“타박상하고 살갗 까진 거 말고는 크게 다친 데는 없어요.”

“그럼 다행이고. 혹시 모르니까. 당분간 가볍게 몸만 풀어. 무리하지 말고.”

“네!”


류지호는 홍 관장이 놓치고 지나가는 쓰레기를 얼른 주워 망태기에 넣었다.


“우찬이는 도장에 잘 나와요?”

“어제부터 파란띠 맬 걸... 아마.”


용연태권도장은 흰띠, 노란띠, 파란띠, 빨간띠, 품띠 또는 검은띠의 순서로 띠를 바꾼다.

고우찬이 파란띠를 맨다는 것은 5급에 올라섰다는 의미다.


“오오~ 잘하면 저랑 같이 승단시험 볼 수 있겠네요.”

“우찬이 그 놈이 허우대 값은 한다. 공부 머리는 없어도 몸 쓰는 건 너보다 낫더라.”

“그럼요! “


류지호는 겨울방학 즈음으로 해서 태권도 2단 승단시험을 볼 예정이다.

고우찬이 이대로만 열심히 해준다면 함께 승단시험을 치룰 수 있을 것 같았다.


‘유도도 은근히 쓸모가 많을 것 같고.’


뭐든 배워두면 다 써먹게 돼 있다.


‘내가 그래도 우찬이보다 먹은 태권도 짬밥 수가 있는데 따라잡히면 쪽팔린 거지.’


류지호는 남은 방학 동안 태권도와 함께 유도 또한 조금 더 시간을 투자하기로 마음먹었다.


✻ ✻ ✻


1호선 전철이 지나가는 배다리 육교 옆 골목으로 류지호가 들어섰다.

헌책방 골목으로 유명한 배다리란 지역이다.

한미서림이니 대창서림이니 하는 서림(書林)이라는 간판의 헌책방이 골목 양편으로 줄줄이 늘어서 있다.

이 골목에는 일반 책들뿐만 아니라 다양한 종류의 국내외 잡지도 있고, 소설, 전문서적, 전공서적, 종교관련 서적 등 모든 종류의 책들을 구할 수가 있다.

보통 시중가보다 30~40% 정도 저렴하지만, 서적의 희귀성, 출판시기, 보존 상태에 따라 그 가격은 천차만별이다.

이 지역에 헌책방들이 들어선 이유는 아픈 역사와 관계가 있다.

해방 직후 일본인들이 부피와 무게가 나가는 책들을 고물상에 헐값에 팔고 떠났다.

그 책들이 배다리시장으로 흘러들어와 헌책을 파는 노점이 생겼다.

한국전쟁이 터지고 월남한 이들이 궁여지책으로 가지고 있던 헌책을 이곳에서 내다팔면서 본격적으로 헌책방 거리가 형성되었다.

10년 전만 해도 서울의 청계천, 부산의 보수동과 함께 전국 3대 헌책방 거리로 손꼽혔던 곳이 배다리 헌책방 거리다.

류지호는 입구 쪽에 위치한 책방에 들어갔다.

앞쪽에 보물섬, 어깨동무, 새소년 등의 소년지들이 보였다.

잠시 감회에 젖어 소년지를 들춰보는데 주인아저씨가 다가왔다.


“학생, 찾는 책 있어?”

“영어 잡지는 어디 있지요?”

“...저쪽에.”


주인아저씨가 가리킨 방향에 해외 주간지가 탑처럼 쌓여있다.

류지호가 타임지를 한 권 꺼내 페이지를 넘겨봤다.


“고등학생이지?”

“신포고 다닙니다.”

“우등생인가 보구만.”

“그 정도는 아닙니다. 혹시 사진 잡지나 웨딩 잡지도 있을까요?”

“사진 잡지는 몇 권 있을 걸? 많이 사면 어깨동무 부록 한권 껴줄게.”


류지호는 잡지를 뒤져 사진잡지 한권을 골랐다.


“정말 서림(書林)이란 말이 딱 들어맞는 곳이야.”


책과 글이 모여 이루어진 숲이라는 뜻이 담긴 서림(書林).

류지호는 배다리 헌책방 골목의 서점들이 문자 그대로 온갖 종류의 책과 언어들로 가득한 책의 숲, 진정한 서림이라고 생각했다.


“다른 곳도 둘러보고 올게요.”


주인아저씨가 의뭉스럽게 말했다.


“다른 데 가봐야 다 거기서 거기야.”


류지호는 다른 헌책방들도 돌아보며 영문 잡지와 해외 웨딩관련 잡지를 골라 구매했다.

배다리 헌책방 골목을 빠져나온 류지호가 동인천으로 향했다.

용동마루턱은 동인천과 신포동을 경계 짓는 기준이었다.

신포동과 경동은 어른들의 유흥가고, 인현동은 학생들의 천국이랄 수 있다.

특히 인현동은 인천이 원조라고 할 수 있는 쫄면이 대표 메뉴인 ‘당’자 돌림의 분식집이 한집 걸러 하나씩 있다.

류지호가 맛나당 간판이 걸린 분식집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떡볶이와 오뎅, 순대를 샀다.

이미 보충수업은 끝났을 시간이다.

적어도 두 사람은 방송실에 남아 있을 터.

예상대로 박상은과 김석민이 방송실에 남아서 공부 삼매경에 빠져있었다.


“이렇게 막 싸돌아다녀도 괜찮아? 다 나은 거야?”


박상은이 류지호의 몸을 꼼꼼히 살펴보며 물었다.


“괜찮으니까 돌아다니겠지.”


김석민이 특유의 까질한 말투로 친근함을 표했다.


“크게 다치지 않아서 천만다행이다. 우리가 얼마나 걱정했다고.”

“선생들한테는 비밀이다.”

“왜?”

“교통사고 핑계로 보충수업 빠지거든.”


두 친구는 별로 부러워하는 눈치가 아니다.

학교만큼 공부하기 좋은 환경도 없었으니까.


“혹시 몰라서 분식집에서 뭐 좀 사왔어. 먹고 해.”


두 친구는 류지호가 사온 간식거리를 열렬히 환영했다.

두 친구가 간식을 먹기 시작하자, 류지호는 방해하지 않기 위해 조용히 캐비닛으로 움직였다.

캐비닛을 열어 VHS 테이프들을 뽑아 살펴보았다.

다양한 학교행사들과 작년 방송제 촬영 테이프를 확인했다.


‘학교 소개, 방송부 소개는 이것들을 짜깁기 하면 뭔가 나오기는 하겠는걸. 우리가 부담 없이 찍을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무모한 도전> 같은 걸 해볼까?“


류지호는 조용히 방송실 곳곳의 사물함들을 열어 비디오카메라의 상태를 확인하고, 썬건 라이트, VCR 등을 꼼꼼히 살펴보았다.

방송실을 분주히 돌아다니며 뭔가를 확인하고 있는 류지호를 지켜보던 박상은이 입을 열었다.


“나하고 석민이하고 사물함 정리는 매일 빼먹지 않고 잘 해놨으니까 확인 안 해도 돼.”

“다른 것 좀 확인하려고 하는 거니까, 신경 쓰지 말고 먹기나 해.”


류지호는 활짝 열어놓은 캐비닛을 다시 닫고는 테이블로 돌아왔다.

테이블 위에 놓여있는 연습장을 끌어와 볼펜으로 끼적끼적 생각나는 대로 적기 시작했다.


‘일단 뮤비, 학교 소개, 방송부 소개, 축전.... 또 뭐가 있을까?’


류지호가 심각한 표정으로 연습장에 낙서하듯 끼적이자, 김석민이 입을 뗐다.


“공부하게? 참고서 빌려줄까?”

“아냐. 나 신경 쓰지 말고... 아니다. 난 이만 가봐야겠어.”


류지호는 두 친구에게 인사하고 방송실을 나왔다.

내친김에 유도장도 확인했지만, 운동하는 학생은 아무도 없었다.

학교를 빠져 나가는 류지호의 머릿속에는 온통 방송제 생각으로 가득 찼다.

류지호는 이대로 평범한 방송제를 두고 보아야 하는지 생각해보았다.


‘만약 방송제 사이즈가 커진다면, 앞으로 모든 것들이 뒤죽박죽이 되진 않을까....?’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라도 간다는 속담이 있다.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라는 말이 아니다.

말과 행동을 신중히 하라는 의미다.

방송제의 스케일을 키우는 것이 과연 경거망동이고 허튼짓일까.


‘아이를 구해준 것만으로 어쩌면 미래가 엉망진창이 될지도 모르지.’


고등학생 방송제 수준의 동영상을 찍는 것은 류지호에게 식은 죽 먹기보다 쉽다.

따라서 당장 뭔가 결정을 내릴 필요는 없다.

판만 벌어지면 이 시대 고등학생들로서는 생각지도 못했던 이벤트를 만들어낼 자신이 있으니까.


✻ ✻ ✻


보충수업을 받지 않게 되자 당연히 개인 시간이 많아졌다.

새벽에 일어나 어김없이 고우찬과 신문을 돌렸다.

고우찬이 등교하면 홀로 수봉산에 올라 복식호흡을 했다.

식구들과 아침을 먹은 후엔 동생들의 공부를 봐줬다.

그리고 2학기에 배우게 될 교과서 내용을 예습했다.

오후에는 용연태권도장에서 유단자 품새인 고려, 금강을 수련했다.

2단 승단심사에는 태극 1장에서 태극 8장 중 하나의 품새와 고려 품새를 시연하고, 겨루기를 기본으로 심사를 한다.

격파나 개인 특기도 자신이 있으면 선택해서 펼칠 수는 있지만, 대부분의 지역협회 주관 승단시험에서는 보기 쉽지 않다.


빡!


고우찬의 시원한 발차기가 꽂힌 미트에서 묵직한 소리가 터졌다.


“으아!”


고우찬의 기합소리가 도장을 쩌렁쩌렁 울렸다.

태권도를 할 때마다 정신이 맑아지고, 긍정적인 에너지가 분출된다.

뭔가 안에 묵직하게 들어있는 돌덩이가 깨져나가는 것 같다고 할까.


빠박! 빡!


고우찬은 미트를 찰 때 터지는 시원한 소리가 너무 좋았다.


꿀꺽.


류지호가 땀으로 빠져나간 수분을 보충했다.

고우찬도 물통을 가져와 곁에서 함께 마셨다.


“자영이 누나 기억해?”

“라이프 롤라장 추자영?”

“그래.”

“아직도 그 누나 짝사랑 하냐?”


류지호는 내심 안도감이 들었다.

자꾸 뭔가 어긋나는 것 같아 머릿속이 복잡했는데, 첫사랑은 다행히 존재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렇다고 추자영이 사무치게 그립거나 한 것은 아니고.


“신이 내 인생을 편집이라도 하나? 왜 이렇게 뒤죽박죽이지?”

“뭐가 뒤죽박죽이야? 추자영이?”

“아냐, 아무것도.”

“걔 칠공주파 대장이래. 면도칼을 껌처럼 씹고 다닌다더라. 신경 꺼.”


고우찬이 이 말을 남기고, 홍사범에게 돌아가 다시 미트 차기에 열중했다.


팡!팡!팡!


류지호는 고우찬의 호쾌한 발차기를 지켜보며 생각에 잠겼다.


‘후회란 놈은 아무리 빨리 한다고 해도 영원히 한 발 늦을 수밖에 없는 법.’


그저 주어진 것에 맞춰 살아간다면 삶이 나아질 리가 없다.

아무것도 해보지도 않고 후회하느니, 깨지더라도 도전해야 했다.

그것이 두 번째로 얻게 된 삶과 기회를 대하는 올바른 자세다.


‘일단 방송제부터....!’


비디오 영상으로 꾸며졌던 기억 속의 방송제.

또한 그간 망설였던 문제도 더 이상 고민하지 않기로 했다.

기억 속에 남아있는 지식을 이용하는 문제 같은 것들.

그로 인해 발생할 다른 누군가의 손해도 개의치 않을 작정이다.

그것으로 가족과 자신의 인연들이 행복해진다면.

바랄 것이 없으니까.


“자, 힘내자! 파이팅!”


류지호는 정신이 번쩍 들 정도로 두 손바닥으로 자신의 뺨을 때렸다.

그리고 몸통보호구를 착용한 홍사범에게 뛰어갔다.


“아자!”


퍽!


홍사범이 대주는 몸통보호구에 류지호는 힘찬 돌려차기를 날렸다.

그 광경을 지켜보는 고우찬이 착 가라앉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네가 아무리 친구라도.... 운동은 질 수 없지.”


공부는 녀석을 이길 자신이 없다.

몸 쓰는 것까지 지는 건 용납할 수 없다.

약속겨루기 하는 류지호를 지켜보며 고우찬이 호승심을 일으켰다.


✻ ✻ ✻


동인천이 피서를 떠나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동인천에서 버스를 타야 월미도, 송도유원지, 을왕리로 놀러갈 수 있기 때문이다.

행락객들 사이에 휴가 나온 해병대원들이 간간이 보였다.

백령도에서 근무하는 해병대원은 휴가를 가려면 일단 동인천역으로 나온 후에 각자의 고향으로 흩어졌다.

해병대원들 사이에는 같은 날 외박이나 휴가 나온 장병끼리 가까운 스튜디오에서 사진을 찍는 전통이 있었다.

동인천역 부근에는 성신카메라, 제일카메라, 현대카메라, 김씨카메라 등 대여섯 개의 사진관련 스튜디오가 있을 만큼 사진 관련 장사는 재미 좀 보는 사업이었다.

또한 피서철에는 행락객들이 필름을 사기 위해 사진관 앞에 길게 줄을 섰다.

특히 80년대에 들어서며 고등학교마다 사진반이 생기면서 가게 안에는 카메라를 멘 고등학생들로 늘 북적거렸다.

류지호가 인파를 헤치고, 성신카메라로 들어갔다.


“사장님, 코닥 36매짜리 ISO 100 네 롤 주세요.”


필름 한통은 24매와 36매가 있었고, ISO는 사진감도의 표준규격이다.

야외촬영에는 일반적으로 ISO 100을, 밝은 실내에서는 ISO 200~400을, 어두운 실내에서는 ISO 800을 사용했다.

이 당시에 고등학교 사진부 사이에서 뜬금없는 속설이 유행했다.

미국제품 이스트만 필름을 인화하면 백인피부에 알맞은 톤이라 할 수 있는 노란색기가 돌고, 빛과 함께 했을 때 보다 따스한 느낌이 들고, 반면에 일본제품인 퓨지 필름은 다소 푸른색기가 돈다는 속설이다.

이들 브랜드의 색감은 백인과 황인종의 피부톤과 아무 상관이 없다.

퓨지 필름은 푸른색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엄밀히 말하면 녹색에 가깝다.

이스트만의 브랜드 컬러가 노란색이기는 하지만, 이는 철저하게 마케팅에서 비롯된 인식 때문이다.

이스트만 필름은 노란기와 함께 붉은색도 표현력이 좋다.


“필름 끼울 줄 알아?”

“할 줄 알아요.”


필름을 받아 든 류지호가 가방에서 칸논(Kwanon) 아날로그 카메라를 꺼냈다.

김준우에게 빌린 카메라다.

불안함에 망설이는 김준우 앞에서 류지호가 직접 수동카메라를 다루는 모습을 보여줬다.

김준우는 류지호가 능숙하게 카메라를 다루는 걸 보고 흔쾌히 카메라 가방과 17-50mm 줌렌즈까지 빌려줬다.


딸깍.


류지호는 카메라 상단의 불룩 튀어나온 리와인딩 레버를 당겼다.

카메라 후면의 덮개를 열고, 필름을 넣었다.

리와인딩 레버를 눌러 필름을 고정시키고, 필름을 스프로켓(필름 감는 부분)에 맞춰 깊숙이 밀어 넣었다.


끼릭끼릭.


필름 구멍을 톱니에 정확히 일치시키고, 와인딩 레버(필름 커트 넘기는 장치)를 돌려 톱니와 필름 구멍을 완전히 맞췄다.

카메라 후면 덮개를 덮고, 와인딩 레버를 몇 번 움직여 필름 카운터 ‘0‘에 맞추고, 필름 감도를 설정했다.


찰칵!


류지호는 셔터를 눌러 필름이 정상적으로 끼워진 것을 확인했다.

친구들이 이 모습을 봤다면, 못하는 게 뭐냐고 난리를 쳐댔을 확률이 높다.

공부면 공부, 운동이면 운동, 명언이면 명언, 스틸사진 촬영까지.

비디오촬영까지 능수능란하다는 걸 알면 더욱 놀라 자빠질 터.

다재다능함이 알려져 일대 여고생들 사이에서 류지호의 이름이 회자될 법도 했다.

그런 일 없다.

일단 소녀들이 좋아할 만한 외모가 아니다.

미팅도 단 한 번 밖에 하지 않았고, 태권도장과 집 그리고 학교만 왕복하고 있다.

아직은 주목받을 일이 없었다.

미팅 건만 빼고는.


작가의말

참고 : 칸논은 캐논으로 바뀌기 전 일본어 사명입니다. 현존하는 기업명은 대부분 바꿔서 표기할 예정입니다. 현재 사라졌거나 합병된 기업은 그대로 쓸 예정입니다. 유추가 쉽지 않을 것 같은 기업명이나 영화 제목은 작가의 말에서 따로 언급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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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사업으로 성공할 자신 있어요! (1) +14 22.01.12 10,358 208 24쪽
43 Carpe diem... (4) +12 22.01.11 9,992 210 19쪽
42 Carpe diem... (3) +14 22.01.11 9,942 223 18쪽
41 Carpe diem... (2) +12 22.01.10 10,090 231 20쪽
40 Carpe diem... (1) +12 22.01.10 10,453 219 20쪽
39 얘는 혼자 어디 딴 세상이라도 살다 왔나? +8 22.01.09 10,520 233 20쪽
38 연풍(戀風). +12 22.01.08 10,544 224 17쪽
37 영화밥 먹고 살 팔자... (6) +7 22.01.08 10,350 218 22쪽
36 영화밥 먹고 살 팔자... (5) +9 22.01.07 10,080 226 22쪽
35 영화밥 먹고 살 팔자... (4) +7 22.01.07 10,150 205 22쪽
34 영화밥 먹고 살 팔자... (3) +7 22.01.06 10,360 192 21쪽
33 영화밥 먹고 살 팔자... (2) +5 22.01.06 10,608 213 20쪽
32 영화밥 먹고 살 팔자... (1) +8 22.01.05 11,212 217 24쪽
31 급하게 먹는 밥은 체하는 법이다. +13 22.01.05 11,047 222 26쪽
30 필요한 초능력은 재력(財力). (4) +10 22.01.04 11,351 222 24쪽
29 필요한 초능력은 재력(財力). (3) +14 22.01.04 11,402 234 24쪽
28 필요한 초능력은 재력(財力). (2) +10 22.01.03 11,380 231 21쪽
27 필요한 초능력은 재력(財力). (1) +8 22.01.03 11,825 232 20쪽
26 블루오션인 건 확실해! +8 22.01.02 11,920 245 27쪽
25 오늘 넌 영화감독 같았어! (4) +12 22.01.01 11,443 255 20쪽
24 오늘 넌 영화감독 같았어! (3) +11 22.01.01 11,447 245 22쪽
23 오늘 넌 영화감독 같았어! (2) +8 21.12.31 11,725 231 16쪽
22 오늘 넌 영화감독 같았어! (1) +8 21.12.31 12,489 240 24쪽
21 우리는 가족입니다! (3) +13 21.12.30 12,379 256 24쪽
20 우리는 가족입니다! (2) +12 21.12.30 12,419 258 20쪽
» 우리는 가족입니다! (1) +11 21.12.29 13,185 236 21쪽
18 어떤 녀석인지 궁금해지네... (4) +10 21.12.29 13,158 260 23쪽
17 어떤 녀석인지 궁금해지네... (3) +13 21.12.28 13,121 263 16쪽
16 어떤 녀석인지 궁금해지네... (2) +7 21.12.28 13,513 243 18쪽
15 어떤 녀석인지 궁금해지네... (1) +6 21.12.27 14,048 271 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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