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랄프C
작품등록일 :
2018.04.09 10:17
최근연재일 :
2018.09.18 22:44
연재수 :
63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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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0,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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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5.29 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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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쪽

제1부 루프아티스트 - 57. 절박함

DUMMY

한울은 재갈을 입에 문 채로 경악했다. 살아 있는 사람의 브레인스캔을 시도한다니. 불법은 물론이고 반인륜적인 일이다. 성공 가능성이 희박할 뿐만 아니라 스캔 중에 브레인에 가해지는 엄청난 스트레스 때문에 피스캔자는 대부분 사망한다. 때문에 피스캔자의 심정지 이후 뇌가 기능을 멈추기 전 단 몇 분간, 그것도 극히 일부의 경우에 한해서만 스캔이 허가된다. 게다가, 루프 진입 상태에서 무슨 재주로 브레인스캔을 하겠다는 것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너무 걱정하진 마세요. 루프 밖에서는 현기준 박사님이 준비하고 계시니까요. 네, 상무님의 주치의. 그분요.”


윤시연은 플레이트 위에서 여전히 발버둥치고 있는 미정 앞에 서서 그녀를 내려다보며 서늘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계속해나갔다. 한울은 윤시연의 시선이 미정을 향하자 소매에 숨겨 놓았던 황전길의 메스를 꺼내 등 뒤로 두 손을 묶은 줄을 살살 끊기 시작했다. 조금만 삐끗해도 손목의 동맥이 날아갈 수 있었으므로 엄청나게 신경이 쓰였다.


“파생 의식 제거 시술······. 네, 구한울 경위님께서 방금 참관하신 그 시술요.”


이 말을 하며 윤시연은 한울 쪽을 바라보며 생긋 웃었다. 한울은 메스를 움직이던 손을 멈췄다. 이마에서 식은땀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그 시술을 시도하다가, 재미있는 현상, 정확히 말하면 버그를 발견했어요. 스피릿이 루프를 떠난 상태에서 엑싯이 지연될 때······ 루프 스냅샷 백업이 동시에 진행되면서, 휴먼 스피릿이 백업되고 마는. 아시죠? 인간일 경우 스피릿 백업이란 본질적으로 브레인스캔인 것. 제가 직접 그 버그를 체험했다니까요. 저는 디폴트에 빠졌다가 심정지가 와서 죽을 뻔 했고, 파생의식인 그 아이는 스피릿 백업 후 복원되어 다시 살아나는 행운을 누렸죠. 아녜요, 구한울 경위님. 두 분이 목격했던 교통사고 이전, 그 아이가 처음 당한 교통사고 얘기예요.”


솔직히 한울은 무슨 소린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윤시연의 시선이 다시 류미정 쪽으로 돌아갔다. 류미정에게나 통할 얘기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류미정도 아까처럼은 저항하지 않는 것이 귀를 기울이고 있는 듯 했다. 어쨌든 잘된 일이었다. 한울은 다시 메스를 움직였다. 굵은 줄의 올이 조금씩 끊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너무 이상한 일이라 해당 기능을 개발한 외주업체에 비밀리에 물어봤죠. 순순히 자기네 오류임을 시인하더군요. 본질적으로는 브레인스캔이라는 위험한 프로세스를 스피릿 백업이라는 일반 기능 개발에 응용한 마인드테크의 잘못인데도요.”


그래, 그런 것 같다. 마인드테크의 잘못이라는 데 동의.


“일단 함구하라고 했어요. 시스켈레톤 요구를 어떻게 해결할까 고민하던 차에.”


윤시연은 허리를 굽히더니 미소를 짓고 미정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제가 써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상무님의 브레인스캔을, 스피릿 백업을 통해 조용히 처리할 수 있지 않을까. 아시다시피, 대놓고 상무님의 브레인스캔을 하겠다고 하면, 좀 시끄러울 거잖아요? 특히, 미진 부사장님께서 가만히 안 있으시겠죠.”


그러더니 다시 허리를 펴고 똑바로 서서 미정을 내려다보았다.


“그렇다고 스피릿 백업 과정이 덜 고통스럽다거나 한 것은 아니예요. 본질적으로 브레인스캔인 것은 마찬가지니까요. 최적의 엑싯 지연과 백업 진행 시간을 계산해 놓긴 했는데······ 잘 모르겠어요. 저도 위험해요. 그 아이처럼 잘 살아날 수 있을지······. 혹시 돌아가시더라도, 제가 노력했다는 사실만은 알아주세요. 저 사실 상무님, 많이 좋아하거든요.”


윤시연이 말을 마치더니 미정을 일으켜 세웠다. 한 손으로 미정의 목을 감고, 다른 손으로는 옆구리에 총을 찌르고 천천히 문 쪽으로 끌고 갔다. 한울은 줄을 끊고 있는 메스의 속도를 더욱 빨리 했다.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하면서도 잘 끊어지지 않았다. 입안이 마르기 시작했다.


윤시연이 류미정을 문 바로 안쪽에 세우고, 자신은 문 바깥으로 한 걸음 정도 나가 섰다. 무슨 수작이지, 생각할 때 손목을 묶었던 줄이 마침내 끊어졌다. 그 순간 윤시연도 류미정의 뒤편에서 말을 이었다.


“자, 잠깐만 여기 서세요. 총은 등 뒤에 있으니까 조심하시구요. 저는 약간 떨어질게요. 됐어요. 경위님, 다 끝났죠? 그거 이리 주세요.”


한울은 소스라치게 놀라 잡고 있던 메스를 떨어뜨렸다. 얼마 안 되는 높이지만 메스가 바닥에 떨어지며 찰캉, 소리를 냈다. 한울은 윤시연 쪽을 노려보며 천천히 일어섰다.


“네, 그거 말이예요. 저랑 바꿔요.”


윤시연이 이 말을 하자마자 메스가 솟아올라 미정 쪽으로 날아가더니 미정의 목을 감고 있는 윤시연의 손에 쥐어졌다. 메스를 잡자 마자 윤시연은 들고 있던 권총을 한울 쪽으로 던졌다.


“그거 필요하시죠? 쓰세요.”


한울은 당혹스러움에 말을 잃고 엉거주춤 서 있었다. 말을 해 보려 했지만, 아직도 꽉 물려 있는 재갈 때문에 입가에 침만 고일 뿐이었다. 그제서야 재갈을 풀어 던져 버렸다.


“일단 먼저 상무님을 쏴서 강제 엑싯 과정을 시작하고······.”


윤시연이 어디서 잡아 뜯었는지, 들쭉날쭉하고 푸석해진 류미정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엑싯이 완료되기 전에 상무님의 스피릿 백업이 진행되게 하려면 이 루프가 종료되어야 해요. 그러자면 제가 죽어야 되고요. 즉, 우리 둘 다 죽어야 돼요. 스피릿 백업이 완료되고 루프가 재시작된 이후에 전 백업 스피릿으로 살아나고, 상무님은 그대로 엑싯하시고······. 최적화된 타이밍이 정말 중요해요. 자, 시간 없으니, 빨리 잡고 겨누세요.”


갑자기 권총이 날아올라 한울의 오른손에 쥐어졌다. 한울의 입이 천천히 벌어졌다. 기가 막혀 총을 잡은 손이 떨려 오기 시작했다. 류미정이 비로소 다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읍, 읍, 소리를 내는 와중에도 한울을 보며 쉴 새 없이 눈을 깜박거린다. 가만, 류미정이 이러는 것을 본 적 있는데. 어디서였더라.


“알아들으신 거예요? 한 방에 우리 둘 다 죽어야 해요. 카페에서 황전길, 아니 정인철 박사님께서 처리하신 것 보셨죠? 그때처럼요. 순서만 바꿔서. 상무님 먼저, 그 다음 즉시 저.”


한울은 총을 든 손을 늘어뜨린 채 꼼짝도 못 한채 눈만 껌벅거릴 수밖에 없었다. 눈을 감을 때마다 눈가에 눈물과 땀이 섞인 이물질의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눈을 가로막는 눈꺼풀에 잔영처럼 떠오르는······ 글자. 글자들. 그래, 류미정 경장이 응급실 침상에서 남자친구와 수다 떨고 있었다고 말했을 때. 그녀는 눈을 감고······.


— 자기, 계속 깜박거려! 윤시연이 눈치채지 못하게.


눈을 감은 순간, 류미정의 메시지를 구성하는 글자들이 머리 속을 가득 채웠다.


“경위님, 안 쏘시면 이 메스로 상무님의 목을 그을 거예요. 그럼 미정 상무님은 아무 의미 없이 죽게 돼요.”


— 프로젝트 언디파인드 마인드넷은 마인드루프 네트워크와 독립적이야. 방 안에서도 지금처럼 통신할 수 있어! 자기랑, 나랑, 이진수랑.


“총을 드세요! 정말 미정 상무님을 그냥 죽게 하고 싶어요?”


— 자기, 윤시연 말대로 해. 쏘자마자 이진수가 날 소환하게 하면 돼. 자기가 할 수 있는 최대한 빨리.


한울은 마른침을 억지로 꿀꺽 삼키고 총을 들었다. 혹시라도 윤시연을 쏠 틈이 있나 찾아보았지만, 류미정의 몸 뒤로 완벽하게 숨어 있었다. 도발을 해 볼 필요가 있었다.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지? 남의 목숨을 담보로 해서 눈을 떠야만 하나?”


“당연하죠! 전 눈을 뜨기 위해 이미 제 목숨의 일부를 지불했어요. 남의 목숨이라고 못 걸겠어요? 상무님. 죄송해요. 상무님한테 개인적인 유감은 없어요.”


“그런, 말도 안되는······. 류미정에게 무슨 잘못이 있는데?”


“말씀드렸잖아요. 상무님한테 개인적인 감정은 없어요. 마인드테크와 프로젝트 언디파인드, 시스켈레톤 간의 악연일 뿐이죠. 제 책임은 아니라구요!”


“그럼 다른 방법을 찾아! 엉뚱한 사람 희생시키지 말고!”


윤시연의 한숨 소리가 들렸다. 숨결이 목덜미에 닿았는지 류미정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 모든 일에 책임이 있는 어떤 분이 하신 말씀이 있어요.”


더욱 서늘해진 목소리로 윤시연이 말했다.


“목숨을 걸 수 있을 정도로 절박한 순간에 최고의 능력이 발휘된다. 따라서 최고의 리더십은.”


미정의 눈동자가 동그란 모양으로 커졌다. 눈동자가 떨리고 있음을 먼발치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다른 자를 절박함에 빠뜨리는 것이다.”


윤시연이 쥐고 있는 메스가 미정의 목을 가로로 지나갔다. 미정의 눈이 스르르 감겼다. 그녀의 새하얀 목에 너무나도 어울리는 새빨간 피가 주르륵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방아쇠를 당겼다. 총알이 총열을 빠져나와 미정과 윤시연 쪽으로 맹렬히, 미친 듯 날아갔다. 한울의 절박함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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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외전 단편 <영감을 찾아서> 2화 18.09.17 201 0 17쪽
61 외전 단편 <영감을 찾아서> 1화 18.09.16 423 0 12쪽
60 제1부 루프아티스트 - 60. 에필로그 +4 18.06.06 424 4 6쪽
59 제1부 루프아티스트 - 59. 진짜의 조건(1부 최종화) +6 18.06.04 523 3 15쪽
58 제1부 루프아티스트 - 58. 적합성 테스트 +2 18.06.01 458 3 13쪽
» 제1부 루프아티스트 - 57. 절박함 +6 18.05.29 465 3 9쪽
56 제1부 루프아티스트 - 56. 댓가 +2 18.05.28 481 2 9쪽
55 제1부 루프아티스트 - 55. 시맨틱 락 (Semantic Lock) +6 18.05.25 470 5 9쪽
54 제1부 루프아티스트 - 54. 고백 (2) +6 18.05.23 555 5 12쪽
53 제1부 루프아티스트 - 53. 고백 (1) +2 18.05.22 449 4 13쪽
52 제1부 루프아티스트 - 52. 시립병원 (2) +3 18.05.21 488 5 9쪽
51 제1부 루프아티스트 - 51. 시립병원 (1) +5 18.05.18 552 5 12쪽
50 제1부 루프아티스트 - 50. 따끔한 맛 (2) +4 18.05.17 534 3 12쪽
49 제1부 루프아티스트 - 49. 따끔한 맛 (1) +10 18.05.16 512 5 9쪽
48 제1부 루프아티스트 - 48. 강제 회수 +7 18.05.15 479 7 7쪽
47 제1부 루프아티스트 - 47. 자매 +2 18.05.14 487 6 9쪽
46 제1부 루프아티스트 - 46. 주유소 +5 18.05.11 537 7 12쪽
45 제1부 루프아티스트 - 45. 소심한 AI의 사과법 +6 18.05.10 590 4 9쪽
44 제1부 루프아티스트 - 44. 황전길 +6 18.05.09 574 3 8쪽
43 제1부 루프아티스트 - 43. 프로젝트 언디파인드 +2 18.05.09 576 4 8쪽
42 제1부 루프아티스트 - 42. 루프 안의 유령 +3 18.05.08 588 4 11쪽
41 제1부 루프아티스트 - 41. 각성전환 +2 18.05.06 573 4 7쪽
40 제1부 루프아티스트 - 40. 두 약속 +1 18.05.05 576 4 10쪽
39 제1부 루프아티스트 - 39. 빛의 여제(5) : 퇴직의 변(辯) +2 18.05.04 669 3 9쪽
38 제1부 루프아티스트 - 38. 빛의 여제(4) : 루프 디자인 실습 +3 18.05.03 606 4 11쪽
37 제1부 루프아티스트 - 37. 빛의 여제(3) : 장사인의 통찰 +2 18.05.02 631 6 13쪽
36 제1부 루프아티스트 - 36. 빛의 여제(2) +2 18.05.01 596 5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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