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랄프C
작품등록일 :
2018.04.09 10:17
최근연재일 :
2018.09.18 2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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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0,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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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5.10 2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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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루프아티스트 - 45. 소심한 AI의 사과법

DUMMY

미정은 진입소 큐비클을 나온 후 즉시 튜링 역 뒷편의 고속터미널로 향했다.


바디스캔을 새로 한 미정의 컨테이너는 긴 머리로 바뀌어 있었다. 완전 탈의 진입은 처음이라 살짝 걱정이 되었는데, 캡슐에서 나와 보니 몸에는 가죽 바이크 슈트가 입혀져 있었다. 스타일은 마음에 들었지만, 몸에 너무 딱 맞아 불편했다. 긴 머리는 머리끈을 조금 낮추어 질끈 동여 묶었다.


튜링 역 고속터미널은 마인드트레인이 커버하지 못하는 구세대 루프나 수많은 불법 루프를 연결하는 마인드 하이웨이를 건설, 모든 루프의 도달 가능성을 100%로 끌어 올리려는 야심찬 프로젝트의 시작점이었다.


그렇지만 플랫폼루프의 상업화가 빠른 속도로 진척되면서 플랫폼루프 유동인구는 증가한 반면, 플랫폼 루프에서 개인 루프로 혹은 개인 루프 간 이동 수요는 오히려 줄고 말았다.


개인 루프 간 연결의 사업성과 기대 수익이 불확실해지자, 마인드테크는 마인드 하이웨이 프로젝트를 재빨리 중단시켰다. 수많은 개인 루프 사이의 비포장 도로와 야산 지역, 그리고 튜링 역 고속터미널은 미완성 상태로 미사용 루프 공간 곳곳에 을씨년스럽게 방치되었다.


그래서 튜링 역 고속터미널을 관리하는 마인드테크 정규 직원은 없었다. 그나마 어렵게 섭외된 튜링 역 비상근 직원이 고맙게도 터미널까지 나와 이진수가 예약한 오토바이를 미정에게 인계하고, 굳게 닫혀 있던 바리케이트를 열어 주었다.


미정은 손목을 앞뒤로 꺾어 엔진을 공회전하며 직원에게 소리쳤다. 「여기까지 나와 줘서 고마워요! 급하게 부탁해서 미안해요!」


직원은 오토바이의 굉음 속에서도 깍듯이 인사하며 말했다. 「천만에요 고객님, 아니, 상무님! 고속터미널 관리는 저희 펜로즈 고객지원센터의 업무인걸요!」


그리고 급가속하여 출발하는 미정의 등 뒤에 대고 소리쳤다. 「마인드 하이웨이 프로젝트 부활, 지지 부탁드려요 상무님! 가시다 기름 꼭 채우시구요!」


‘하아······ 내가 무슨 힘이 있다고, 프로젝트 재개를 나한테까지 부탁하니.’


펜로즈 고객지원센터의 조직 사랑은 참으로 유별났다. AI 코어를 어떤 모델로 했길래 저 수많은 노드들이 하나가 되어 일사불란하게, 마치 사람같은 총체적인 조직력을 발휘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펜로즈 계단 조직구성법은 고객지원업무라는 한직으로 밀려나 와해될 뻔 했던 저 놀라운 조직을 다시 하나로 만들었다.


마인드테크식 용병술일까? 어쨌든 조직력을 유지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저 출중한 AI 조직의 잠재력이 전혀 발휘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직선 도로 구간에 접어들자, 미정은 헬멧 선바이저 디스플레이를 통해 마인드메시지를 보냈다.


— 아까운 일이야. 차라리 나한테 주지.


— 뭐가요?


— 펜로즈 고객지원센터 말이야. 저 훌륭한 AI 시스템이 사장 일보 직전에 있으니.


— 자원이 낭비되고 있는 건, 프로젝트 언디파인드 TFT 역시 마찬가지입니다만.


— 핏, 의료팀 빼면 너랑 나 둘 뿐인데. 낭비될 조직이나 있어?


— 다른 부서에 비해, 지속적으로 성과를 도출하는 업무가 없는 건 사실입니다.


— 그래서 진흥원 업무도 하잖아! 병실 안에서 행시 공부한다고 얼마나 힘들었는데!


— 진흥원 업무를 수주 프로젝트로 전환시킨다고 해도, 상무님 인건비도 채 못 건집니다. 그리고 행시는 저쪽 상무님께서······.


— 이게? 너까지 이쪽 저쪽 나눌래?


— 저쪽 상무님께서는 그래 달라고 하시던데요.


— 주치의가 그러지 말라고 하잖아! 걔는 자꾸 왜 그런대?


— ‘걔’라는 단어 사용에 비추어, 상무님 역시 나누고 계신 걸로 해석됩니다.


— 이씨, 그게 아니라······!


— 어쨌든, 프로젝트 언디파인드 TFT는 부서 KPI(Key Performance Indicator, 핵심성과지표)에 한참 못 미치는 실적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인드테크 제1의 코스트센터입니다.


이진수의 마인드메시지는 담담했다. 짜증이 날 대로 난 미정은 선바이저를 신경질적으로, 탁 소리가 나게 위로 올려 버리고 눈을 크게 떴다. 달리는 오토바이의 속도가 만들어낸 세찬 바람이 선바이저 안으로 들이쳐 미정의 눈에 부딪치며 그새 각막에 차오른 수분을 날려 버렸다.


팀원까지 빈정거리는 조직의 리더라니. AI인 이진수가 실제로 빈정거린 것이라고는 믿지 않았지만, 미정은 스스로가 한심스러웠다.


‘젠장, 수술을 받는 게 아니었어.’


이식 수술을 받은 후부터 모든 게 꼬여 버리기 시작했다. 현기증과 환상이 찾아왔고, 결국 조현병 진단을 받았다. 마인드테크 경영진은 정신병을 앓고 있는 새파란 젊은 임원을 그냥 두지 않았다. 회사 내에서 항상 미정의 편이었던 허무한도 지병으로 모든 직책에서 물러나 잠적, 그녀의 곁에는 아무도 없을 때였다.


법적으로만 자매인 언니 류미진까지 미정의 반대편에 섰다. 그런데도 무슨 생각인지 막판에 명맥만 유지하고 있던 프로젝트 언디파인드를 부활, 스스로에 대한 치료를 미정에게 미션으로 주며 팀을 맡겼다. 사실상 해고에 가까운 좌천이었지만, 그나마 회사에 남겨 준 것을 고마워해야 할지도 몰랐다. 실세였던 류미진조차 이 타협안을 밀어붙이며 많은 적을 만들어, 결국 회장 비서실장 직에서 물러나고 말았다. 당시는 회장 부재로 이미 비서실이 유명무실해진 상태긴 했지만.


그러면, 이식 수술을 받지 않는 게 방법이었을까? 절대로 아니다. 수술을 받지 않았다면, 그들은 끝까지 미정을 인간으로 인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루프 안에서만 업무를 수행할 수 있는 유령 임원. 어찌 보면 회사에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도 당연했다.


‘뭐, 내가 원한 일이기도 했으니까.’


확신했던 것은 아니다. 그저 막연하게, 원래대로 돌아가고 싶었을 뿐이다. 그러려면 뇌가 필요했다.


— 상무님.


이진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디서 들리는 거지? 목소리는 윤시연 행사 때의 안내방송처럼 미정의 머리 속으로부터 울리고 있었다.


「뭐야, 어디서 말하고 있는 거야?」


— 윤시연 수석이 행사 때 사용한 마인드 브로드캐스팅을 코드화 해서 만들어 봤습니다. 텍스트 메시지는 계속 안 보고 계셔서.


「오토바이 운전하면서 메시지 보내기 귀찮아서 끊었어. 왜 근데?」


— 상무님 감정 상태 수치가 불안해져서요. 괜찮으신 겁니까? 조금 전 저와 나눈 대화 때문인가요?


「뭐야, 말은 뱉어 놓고 뒤늦게 민망해진 거니? 참 자상한 AI셔 진짜.」


— 감정 시뮬레이션을 해 보면 상무님 말씀대로의 결과가 나옵니다만. 어쨌든 상무님 감정 상태 수치가 불안정해진 근거 데이터를 수집해 놓아야 해서요.


「그래, 너 때문이야. 감정도 없는 네 독한 말 때문에 맘상해서 울 뻔했다구! 이제 됐니?」


— 피드백 감사합니다. 감정 수치 변화량 및 그 근거 데이터 입력되었습니다. 향후 현기준 박사님의 처방에 반영됩니다. 그리고.


「또 뭐?」


— 해당 대화의 수사적 표현 및 주제에 대한 접근 경로를 좀더 최적화할까요? 상무님의 감정 상태 변화량을 최소화하는 조건으로요.


미정은 이진수가 알아채지 못하도록 소리를 죽여 피식 웃었다. 이런 게 AI의 사과일까? 만약 이진수가 사람이었다면, 어떤 방식이었을까? 그래도 별로 다르진 않았겠지. 스피릿 시절의 그는 어땠을까. 아주 완고하고, 고집 세고, 감정 표현에 서툰 중년 남자가 떠올랐다. 아냐 아냐, AI에 대한 편견일 뿐이야. 미정은 짐짓 살짝 고개를 흔들었다.


‘아빠, 얘 자꾸 아빠를 닮아가요. 일부러 그렇게 만든 거예요?’


AI를 만들기 훨씬 전부터, AI 만큼이나 감정 표현에 서툴렀던 중년 남자. 아버지 류준의 기억 때문에 또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다시 고개를, 이번엔 조금 더 크게 흔들었다. 이진수는 아빠가 만든 게 아냐. 단지 스피릿을 버린 그가 ‘있을 곳’을 제공해 줬을 뿐이지. 크게 한숨을 한 번 쉰 후, 눈을 크게 떠 들이치는 차가운 바람에 다시 눈을 맡겼다.


「알아서 해.」 한참만에 미정이 불쑥 대답했다. 이진수는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즉시 말을 이었다.


— 알겠습니다. 대화 인터페이스 표현 및 주제 최적화 설정되었습니다. 그런데, 조금 전 상무님 감정 상태 수치가 다시 빠른 속도로 안정화 된 것이 감지되었습니다. 그 요인이 조금 애매한데요. 제가 최적화를 제안한 것이 원인일까요? 이후 말씀 없으실 때 손수 안정화를 시도하신 겁니까? 아주 흥미로운 현상입니다.


「아, 몰라! 왜 또 수다쟁이가 되서 난리야.」


눈물이 흘렀다 마른 자리가 당겨 얼굴이 간지러웠다. 긁지는 못하고, 미정은 괜시리 오른손을 세게 꺾어 오토바이의 속도를 더욱 높였다. 바람 소리, 엔진 소리가 뒤섞여 시끄러웠지만 ‘10킬로미터 전방, 주유소에 꼭 들르셔야 합니다’ 라며 소리치는 이진수의 목소리만은 지워지지 않고 머리 속에서부터 또렷이 울리며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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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외전 단편 <영감을 찾아서> 1화 18.09.16 423 0 12쪽
60 제1부 루프아티스트 - 60. 에필로그 +4 18.06.06 424 4 6쪽
59 제1부 루프아티스트 - 59. 진짜의 조건(1부 최종화) +6 18.06.04 523 3 15쪽
58 제1부 루프아티스트 - 58. 적합성 테스트 +2 18.06.01 458 3 13쪽
57 제1부 루프아티스트 - 57. 절박함 +6 18.05.29 465 3 9쪽
56 제1부 루프아티스트 - 56. 댓가 +2 18.05.28 481 2 9쪽
55 제1부 루프아티스트 - 55. 시맨틱 락 (Semantic Lock) +6 18.05.25 470 5 9쪽
54 제1부 루프아티스트 - 54. 고백 (2) +6 18.05.23 555 5 12쪽
53 제1부 루프아티스트 - 53. 고백 (1) +2 18.05.22 450 4 13쪽
52 제1부 루프아티스트 - 52. 시립병원 (2) +3 18.05.21 488 5 9쪽
51 제1부 루프아티스트 - 51. 시립병원 (1) +5 18.05.18 552 5 12쪽
50 제1부 루프아티스트 - 50. 따끔한 맛 (2) +4 18.05.17 534 3 12쪽
49 제1부 루프아티스트 - 49. 따끔한 맛 (1) +10 18.05.16 512 5 9쪽
48 제1부 루프아티스트 - 48. 강제 회수 +7 18.05.15 479 7 7쪽
47 제1부 루프아티스트 - 47. 자매 +2 18.05.14 487 6 9쪽
46 제1부 루프아티스트 - 46. 주유소 +5 18.05.11 537 7 12쪽
» 제1부 루프아티스트 - 45. 소심한 AI의 사과법 +6 18.05.10 591 4 9쪽
44 제1부 루프아티스트 - 44. 황전길 +6 18.05.09 574 3 8쪽
43 제1부 루프아티스트 - 43. 프로젝트 언디파인드 +2 18.05.09 576 4 8쪽
42 제1부 루프아티스트 - 42. 루프 안의 유령 +3 18.05.08 589 4 11쪽
41 제1부 루프아티스트 - 41. 각성전환 +2 18.05.06 573 4 7쪽
40 제1부 루프아티스트 - 40. 두 약속 +1 18.05.05 576 4 10쪽
39 제1부 루프아티스트 - 39. 빛의 여제(5) : 퇴직의 변(辯) +2 18.05.04 669 3 9쪽
38 제1부 루프아티스트 - 38. 빛의 여제(4) : 루프 디자인 실습 +3 18.05.03 606 4 11쪽
37 제1부 루프아티스트 - 37. 빛의 여제(3) : 장사인의 통찰 +2 18.05.02 631 6 13쪽
36 제1부 루프아티스트 - 36. 빛의 여제(2) +2 18.05.01 596 5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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