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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생금지님의 서재입니다.

비련의 시나리오 온라인:Slow fantas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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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생금지
작품등록일 :
2023.03.11 0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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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23 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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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20 1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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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쪽

82. 흑사의 죽음

DUMMY

푸욱,


하고 무른 푸딩 속에 들어가듯 번개의 성질을 품은 철검이 들어갔다. 뱀이 경악스러운 통증에 미쳐 날뛰기 전에, 제냐는 그대로 검병까지 뱀의 눈깔 안 쪽으로 찔러 넣으면서 그가 운용할 수 있는 모든 MP를 전 방향으로 폭사시켰다. 번개의 빛줄기와 기력의 칼날이 파편화되어 뱀의 눈 저 깊은 곳에서 날뛰었다.


더럽게-


시큰거리는 느낌이 뱀에게 격통과 함께 느껴졌다. 누군가 얼굴의 내면에서 코와 눈 근처를 주먹으로 미친듯이 때리는 것과 같은 감각이었다. 비유를 하자면 말이다. 뱀은 시리고 아프고 따가운 느낌을 한 번에 받았고, 또 얼굴 근처에서 폭발이 일어나면서 그 충격이 중요 장기 근처에까지 닿아 격통을 느낀다.


제냐는 그대로 뱀의 입이 벌리기 전에 그 입가의 피부를 한 번 쿵, 밟고 그대로 접착력을 해제하며 뛰었다. 옆으로 로켓처럼 쏘아져 날아간 제냐는 그대로 뒤로 제비를 돌아 흙바닥에 착지,


를 하기엔 관성이 많이 남아 있었다.


몇 바퀴 덤블링을 돈 뒤에야 멈춰설 수 있었고, 그대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었다. 뱀이 입을 쩌억 벌리며 괴성을 지르고 난동을 부렸다. 키야아아아아아아!


흑사에게도 피어 류의 스킬이 있었으나 제냐에게 통할 정도는 아니었다. 초보자 정도의 스킬과 레벨을 가진 이들이라면 통할 지도 몰랐다.


요동치는 뱀의 허리가 길다. 길게 늘어진 밧줄처럼 주변 지형을 바꾸고 난리를 부리는 흑사. 제냐의 입장에서 지면이 요동치는 것과 크게 다름이 없었다. 목숨이 언제 날아갈 지 모르는 줄넘기를 하는 것과도 비슷하다.


쿵, 쿵 하며 지면을 찍거나 여기저기서 뱀의 몸뚱이가 흔들리고 날아든다.


제냐는 그것들을 넘어 간다. 혹은 그 빈틈을 찾아 뱀의 몸 아래나 좁은 틈 사이로 피하거나 했다. 동체 시력이 필요한 일이었다. 뱀의 허리를 피하는 일은 말이다. 슈팅 게임의 플레이어가 된 것 마냥, 날아드는 탄알들을 피하듯 움직여야 했다.


뱀이 울부짖으면서 여기저기를 그 대가리로 처박았다. 아가리를 열고 숲의 흙바닥을 파헤치듯 씹고 뱉었다. 먹잇감, 즉 제냐를 찾고 있는 것이었다. 뱀에겐 불행하게도 제냐는 쉽게 당해주지 않는다. 뱀이 바닥 한 군데를 씹고 났을 땐 이미 제냐가 멀찌감치 달아난 뒤다.


지형, 전투를 치르는 필드가 유동적으로 춤추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으면서 제냐는 간신히 도망쳤다. 공터와 뱀의 난리를 피해 다시금 아직 멀쩡히 살아있는 나무들 틈새로 몸을 숨긴다.

인벤토리를 열어 철검 한 자루와, 손도끼를 꺼내 들었다. 검은 아홉 자루가 남아 있었다. 손도끼는 일곱 자루가 있었고. 이것들을 다 쓰고 나면, 숏소드나 단검을 챙겨둔 것을 가지고 뱀의 몸을 조각해야 했다.


혹은 멀리서 철시를 더 쏘아내든, 초상 스킬을 쓰던 말이다.


쉬는 날이기에 망정이었다. 전투가 길어질 것 같았다. 아마 이번에 뱀을 잡지 않고 넘어갔다가 다른 날 다시 온다면, 뱀 역시 상처를 회복하고 HP역시 차올라 있을 테다. 먹잇감을 잡아 먹고 충분히 잠을 자고 쉬며 둥지에서 제 몸을 살핀다면 체력 역시 회복되게 되어 있었다.


질질 끌어봐야 좋을 게 없었다. 가급적이면 이번 한 번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임하는 게 좋다.


제냐는 적당한 나무를 골라 다시 올랐다. 철검과 도끼를 허리에 찬 벨트에 걸었다. 소드 홀더가 두 세개 있었고, 크게 규격을 벗어나지 않는다면 거기에 걸고 다닐 수 있게끔 되어 있다.

지루하지만 일단 화살을 더 쏘아내기로 한다. 뱀이 지랄을 할 때 근처에 다가가봤자 좋을 게 없었다.


인벤토리에서 장궁을 꺼내어 철시를 메기자 가상의 궤적이 붉은 점선으로 눈 앞에 그려진다. 요동치는 뱀의 몸뚱이 중 적당한 부분을 노리고 화살을 놓았다.


*


오랜 시간이 걸려서, 철시를 다 사용했다. 뱀의 몸 이곳저곳에는 제냐가 날려낸 화살들이 박혀 있었다.


피가 흐르는 곳도 있었고, 멎은 자리도 있었다. 뱀의 전체 HP로 보자면 얼마나 깎인 걸까. 제냐는 비어버린 전통을 여기저기에 적당히 버렸다. 화살이 사라진 이상 장궁도 쓸모가 없었다. 철검 중 다섯 자루를 써먹었다. 손도끼는 전부 사용했고.


뱀은 가죽 여기저기가 벗겨져 있었다. 가죽 아래, 살의 일정 층에 도달하면 강도가 기하급수적으로 높아지는 구간이 있었다. 고도의 강함을 자랑하는 몬스터들은 보통 MP를 체내에 품고 있는 경우가 많았는데, 흑사 역시 그럴 지 모른다.


그 겉면만을 깎아낸다 하더라도 전부 벗겨버리고 나면 아마 흑사로서도 견디기 어려운 손상일 테다.


흑사의 대가리는 제냐가 먹인 공격의 흔적들이 여기저기 남아 있었다. 파이어 볼을 응용한 불길의 인챈트나, 썬더 인챈트로 무기를 갉아 먹으며 때려야만 공격이 박혔다. 뱀의 몸 이곳저곳을 쑤시고 베고 돌아다니다가 비스트 슬레이어와 발톱 대거 역시 간신히 발견했다.


뱀의 몸 안쪽으로 파고 들었던 것이 아주 약간 튀어나와 있었고, 제냐의 기력에 호응하듯 반응하며 공명하기에 겨우 찾아낼 수 있었다. 그 근처를 지나는 제냐의 기감에 아주 익숙한 질감이 느껴져서 멈추어 서고 뽑아낼 수 있었다.


다행히 뱀의 표피 안쪽에 있어서 흑사가 갖은 지랄을 다 하는 동안에도 검이 특별히 더 상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나름대로 값비싼 금액을 치르고 강화를 한 아이템이다보니 아까울 뻔했다.


흑사와 드잡이질을 한 지 꼬박 여섯 시간 정도가 지났다. 게임도 이 정도로 하다 보면 지겨울 법도 했다. 제냐는 슬슬 쉬고 싶었지만, 정확히 언제 끝날 것인가 알 수 없었다.


흑사는 양 눈을 잃었다. 뱀은 몇 번 더 트위스트를 했고, 미친 회전은 어느새 제법 넓은 공터를 몇 개 더 만들었다.


눈을 잃은 뱀이었지만 여전히 감각은 예민했다. 기감과 촉각, 후각과 청각이 사람의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눈이 없어도 전투에 임하며 제냐를 찾아와 치는 속도나 방향의 정확성은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제냐가 살아남은 것은 순전히 그가 여태 잘 피했기 때문이었다.


손에는 비스트 슬레이어와 대거가 들려 있다.


“카아악.”


뱀이 가래를 뱉듯 침을 토해냈다. 공터의 한 자리에 서서 뱀을 노려보던 제냐는 냉큼 피했고, 그 자리에 독액이 섞인 침이 날아와 묻는다. 그대로 있었다면 사람 한 명 정도는 그대로 집어삼킬 양의 침이 그를 녹였을 것이다. 곧바로 녹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HP포션을 들이키며 그대로 도시까지 도망쳐 뛰어가야 했으리라.


제냐는 아직 회복 계열의 스킬을 익히지 못했다. 다른 직종을 선택한 이들이 나중에 회복 스킬을 익히려면 제법 까다로운 면이 있었다. 치료사 계열의 술사들은 배타적인 면이 있어 자신들의 커뮤니티 외부의 인사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것이다.


결국 이미 스킬을 익히고 있는 누군가에게 가서 전수받는 형태가 가장 흔한 스킬 획득의 경로인데, 그런 면에 있어서 멀티 클래스를 가지며 동시에 치료술사까지 겸하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또 치료술 역시 어느 정도 경지에 오르지 않는다면 그냥 HP포션이나 다른 약재 따위를 현장에서 사용하는 게 더 나았고 말이다. 급박한 전투 상황에서 나오는 응급 환자들을 제대로 치료할 수 있을 정도의 치료사는 꽤 수준이 높은 것이었다.

로웰 드버가 테이머로서의 기술만을 갈고 닦았던 것처럼, 괜히 한 종류의 기술 계통만을 깊이 파는 자들이 있는 게 아니었다. 치료술 역시 오랜 시간과 경험이 필요한 일이었고.


아마 플레이 타임이 누적되고 경험치가 쌓여서, 제냐의 능력 자체가 더욱 깊어지고 역량의 폭이 넓어진다면 모르겠으나 아직까지 치료술까지 손을 뻗기에는 애매한 점이 있었다.


옆으로 황급히 뛰어 피한 제냐는 그대로 날아오는 뱀의 대가리에 기겁하며 앞으로 대시를 했다. 상부에서 빠르게 다가오는 대각선 하향의 공격이었고, 그 아래에 틈이 있어 빠르게 들어간 것이다. 조금이라도 늦으면 결국 뱀의 몸에 깔리지만 다행히 늦지는 않았다.


쿵! 하고 흙바닥을 다시금 뒤엎는 뱀이다. 제냐는 뱀의 목덜미 아래 즈음을 비스트 슬레이어로 길게 갈라내며 뛰었다. 촤아악, 하는 소리와 함께 우둘투둘하게 있던 검은 비늘들이 튿어져 나왔다. 그 아래의 가죽이 열리고 피도 쏟아진다. 얕은 상처는 생각보다 뱀에게 그리 큰 일이 아니었지만, 결국 사소한 것이 누적되어 큰 피해를 만드는 법이다.


제냐는 성실하고 또 지겹게 한 걸음 한 걸음을 나아갔다.


뱀의 목덜미 아래를 달려가다가, 그대로 천장이 떨어져내리려 하자 옆으로 피했다. 땅을 박차며 한 바퀴 굴러 멀찍이 달아났고, 그 즉시 뱀의 몸뚱이가 바닥을 때린다. 쿵, 하는 소리와 밀려나는 공기, 흙더미가 피부를 때린다.


퉷, 입 안에 들어오는 흙을 뱉어내면서 제냐는 다시 위로 뛰었다.


뱀의 등줄기 위에 다시 탄다.


비스트 슬레이어에 다시금 기력의 칼날과 번개가 솟구쳤다. 쾅! 폭음과 함께 길게 이미 베어냈던 가죽 위를 잘라냈다. 여전히 어느 부분 이상 들어가면 칼이 먹히지 않는 구간이 있었다. 제냐는 순식간에 두, 세 번 이상을 기력술로 칼날을 감싼 채 베어봤다. 긁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캉, 캉캉캉! 하고 마치 금속성의 무언가를 칼로 때리듯한 소리가 난다.


제냐는 끊임없이 긁어대면서 그것을 파헤쳤다. 이내 뱀이 다시 꿈틀거렸다. 그 단단한 부위는 흑사에게도 상당히 거슬리는 구간인 모양이었다. 제냐는 다시금 다른 부위의 살들을 정육점의 칼잡이가 된 마냥 거침없이 잘라내며 달린다.


*


3시간이 더 지났다. 흑사의 대가리 근처 등줄기는 거진 가죽이 벗겨져 너덜너덜해졌다. 흑사도 깨나 지친 모양이다.


그 몸통 내부의 핵심 장기들까지 파헤치지는 못했지만 표피의 거죽과 살들이 많이 망가졌으니, 피도 흘렸고 또 피부가 벗겨져 고통스럽기도 하리라.


이쑤시개나 비슷한 크기의 철검으로 많이도 갉아냈다.


제냐 역시 마셨던 푸른 물약의 수분기를 땀 따위로 전부 배출해내고, 다시 마시고를 반복했다. HP역시 한 두 번 흑사의 몸짓에 얻어맞아 날아가느라 닳았다.


24,000정도. 전투 중에 정확히 인터페이스를 켜서 1의 자리까지 확인하지는 않았지만 대략적으로 파악한 바로는 그러했다. 치명상이 없더라도 반절 이하로 떨어지면 슬슬 고비였고, 휴식이 필요한 지경이었다. 상처와 함께 HP가 대폭 깎인다면 순식간에 더 떨어지는 것을 막을 수 없어 금방 게임 오버에 이를 테다. 제냐는 다행히 제 몸을 잘 보호하며 굴러서 포션으로 회복 가능한 수준의 페이스로 HP를 잃었다.

그의 HP총량이 30,000언저리였다. 15,000근처까지 간다면 슬슬 흑사의 사냥을 포기하고 발을 뺄 때다.


MP는 4천에서 5천 정도를 왔다갔다 하고 있었다. 계속해서 소모하고 있었고, 위장이 빌 때마다 푸른 물약을 들이키고 있었으니 말이다. 인벤토리에 남은 것들도 이제 많지는 않았다. 대략 3, 4번 정도 MP를 모두 소모하고 나면 그 때가 마지막이다. 제냐의 MP가 9,912였으니 거진 3만에서 4만 정도가 여유분이며 마지막으로 회복되어 얻는 9,912는 회복할 길이 없는 최종 MP이리라.


적잖이 운동이 되었다. MP는 포션으로 회복한다고 하지만 캐릭터의 피로도 자체는 누적이 된다. 초인적인 운동 신경과 근력을 가지고 있어도 힘든 것은 힘든 것이었다. 장기화되면서 처음과 달리 캐릭터의 반응이 조금 굼뜬 것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극한의 상황에서 계속되는 전투와 움직임은 캐릭터에게 상당한 부하를 가한다. 그리고 현실이 아닌 콘란드 대륙에서 캐릭터, 제냐의 신체는 초인적이다. 일반적인 힘만이 아니라 그것이 품고 있는 유전자적 가능성이 가히 초월적이었다. 그러니, 이런 식으로 다소 버거운 훈련을 하더라도 결국 살아만 남는다면 스텟 성장의 자양분이 될 뿐이다.


만일 이번에 흑사를 죽이지 못하더라도 이런 짓거리를 몇 번 반복하면 안정적으로 잡아 죽일 수 있게 될 테다.


카득!


제냐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많이 느려진 흑사의 몸 위로 올라가 그 가죽을 갉아냈다. 후두두, 흑요석을 닮은 검은 비늘이 허공으로 흩어진다. 피가 튀지만 제냐의 시각에는 빛의 입자로 보인다.


어느새 검던 흑사의 몸 전체에 총천연색으로 빛나는 구역이 많이 늘어났다. 제냐는 어둔 부분을 완전히 없애기라도 하겠다는 듯, 비스트 슬레이어를 휘두른다.


*


쿵!


하는 묵직한 소리와 함께 뱀이 그 대가리를 결국 땅에 뉘였다.


“하아아아아아.”


제냐 킴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장장, 반나절에 걸친 짓거리였다. 흑사는 질기고 지독했다. 생명력의 근원처럼 군다. 남다른 생명력의 내력이 대체 어디에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 아주 길고 긴 몸뚱이의 대부분을 비스트 슬레이어가 도륙하고 나서야 힘이 빠졌고, 마지막에 느려진 흑사의 머리에 마지막 남은 MP들을 쏟아냈어야 했다.


흑사의 눈은 눈꺼풀이 없었다. 제냐의 시선으로는 그저 밝은 빛을 토해내고 있는 눈구멍이다. 그곳이 그나마 흑사의 대가리에서 가장 연약한 부위였고, 그 구멍을 통해서 온갖 스킬들과 기력술을 쏟아냈어야만 했다.


흑사는 그간 흘린 피와 대가리에 몰려 있는 내부 장기의 파손으로 결국 무너졌다.


제냐로서는 최후의 일격을 몇 번이나 날렸고, 그러고도 움직임을 멈추지 않은 채 느릿하게 그를 따라오다가, 마지막에 제 풀에 지쳐서 쓰러진 것이다. 경이로운 생명력이다. 100,000이 넘은 HP의 저력을 본 것 같다.


흑사처럼 거대한 몸뚱이를 지니고 있지 않아서, 아마 인간형의 플레이어들에게는 이것보다 덜한 효과이겠지만. 어쨌든 HP가 높은 체력 위주의 플레이어들, 혹은 고수들은 이토록이나 비인간적인 생명력을 보일 확률이 높았다.


사지 중 어느 한 구석이 잘려나가도, 멀쩡하게 전투를 이어나간다거나, 신체 장기의 일부분이 훼손되어도 멀쩡히 걸어서 움직인다거나 말이다.


당장 제냐만 하더라도 포션류를 잔뜩 복용하고 도핑Doping하면 비슷한 짓거리를 할 수 있었다. 맨몸으로는 아직 부족하다. 신체의 상당 부분이 훼손된다거나 사지 중 한 쪽이 날아가면 당장 전투력 저하가 일어날 테다. 비단 사라진 신체 부위가 없어서만이 아니라 신체 전반적인 기능이 떨어지는 것이다.

그게 아주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고 또 현실적인 현상이었지만 어지간한 게임들에선 육체의 유기성을 대단히 무시하는 게 일반적인 행태였다. 표현하기 까다로운 부분이기도 하고.


고등 생명체인 인간의 움직임과 그 생명력을 프로그램으로 제대로 구현한다는 게 어디 가당키나 한 일인가.

정교하게 만들어진 게임들이라 하더라도 정해진 프로그램 데이터에 따라서 몇 가지 결과들을 확률적으로 도출하는 게 전부일 테지만, 비련의 시나리오는 마치 현실에 가까운 다양한 변수와 변화들을 보여준다.


방대한 양의 정보를 다룰 수 있는 초인공지능의 기능이었지만, 플레이어들은 그저 그런 시스템이 있겠거니, 짐작만 할 뿐이었다.


“후아.”


제냐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뱉어냈다.


아프지 않은 구석이 없었다.


캐릭터가 느끼는 통감 자체는 사용자인 김서원에게 그다지 전해지지 않았다. 그러나, 캐릭터가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는 것 자체는 알 수 있다. 훨씬 둔감하게 느껴지는 통각이나 제대로 움직여지지 않는 팔다리, 말단, 그리고 상당량 깎여 있는 HP의 수치가 그 증거였다.


당장 적당한 히어로 무비에 나와도 될 정도의 신체 능력을 갖춘 제냐였지만 그런 몸뚱이가 이토록 피로감을 호소할 정도였으니 상당한 아비규환을 이겨낸 셈이다. 흑사 사냥은.


인벤토리를 열어 HP포션을 들이켰다. 당장 떨어지는 눈에 보이는 외상은 없었지만 혹시나 몰라서였다. 그 외에 스테미나 포션이나 고통을 경감시켜주는(사용자는 느끼지 못하지만 캐릭터가 고통으로 인해 반응이 늦어지는 것을 막아준다)포션, 회복력을 높여 추후 HP회복에 걸리는 휴식 시간을 줄여주는 포션 따위를 삼켰다.


MP포션도 역시 마찬가지다. 그가 당장 서 있는 곳은 어둠숲이었고, 아직 사르삿 도의 시내가 아니었다. 돌아가는 길에 어떤 몬스터를 마주쳐도 이상하지 않았다.

애초에 솔로 플레잉이라는 건 이 거대한 세계에서 위험을 담보로 하는 일이었고 말이다. 그 정신나간 여자처럼, 언제 또 불의의 습격이 있을 지도 몰랐다.

수많은 플레이어들이 동시에 상호작용을 하고 있으니만큼, 괴랄한 육성로를 선택해 플레잉을 하는 인간들은 같은 유저들의 적이 얼마든지 될 수 있었다.


거기다가 다른 NPC들 역시 자신의 사정들에 따라 얼마든지 플레이어를 괴롭힐 수도 있었고.


조심하지 않으면 게임 오버를 당하는 일을 피할 수 없다. 비련의 시나리오 온라인은 본질적으로 서바이벌 게임이었으니까 말이다.


제냐가 알기로, 현재 플레이를 하고 있는 유저들의 수는 10억 명 정도였다. 그간 많은 숫자가 줄었다. 그가 플레이를 처음 시작할 때 본 수가 12억 명이었으니까. 실상 줄어든 약 2억 명보다 더 많은 숫자가 죽었으리라. 제냐처럼 새롭게 들어오는 플레이어들의 숫자가 더해지니까.


말도 안 되는 숫자가 죽어 나갔다. 아니, 게임 오버를 당했다. 아마 대개 초보자 구간에서 버티지 못하고 쓸려나갔을 확률이 높다.


고작해야 1년이 안 되는 기간이었는데, 그만한 수의 유저들이 게임 오버를 당하다니. 극악한 확률이 아닐 수 없었다. 제냐로서는 제법 운이 좋은 점도 있었다. 중부 대륙이 아닌 다른 스타팅 포인트에서, 거대한 전쟁이라도 일어났고 또 그 근처가 초보자들이 모여 있는 존Zone이라 대거 죽어나갔을 확률도 있었다.


제냐가 전 대륙적인 소식에 그다지 밝지 못하기에 알 수는 없었지만, 제법 가능성 높은 시나리오였다.

그도 아니라면 어느 플레이어의 이벤트 조건 달성으로 대대적인 역병의 발생이라거나, 몬스터 아웃 브레이크가 생겨나 거대한 도시 침공이 있었다거나.

어느 쪽이든 그럴싸한 이야기다.


다행히 산슈카 왕국은 아직까지 그런 일이 없었다. 게임의 시스템 자체가 그런 대규모 재난을 유도하고 있지 않다면 소수의 플레이어가 아무리 발악을 해도 잘 일어나지 않을 일일텐데, 상당히 악취미적으로 설계된 난이도라고 할 수 있었다.


어떤 플레이어들이 몇 개의 난관을 뚫고 선택지에 다가갔을 때, 아주 작은 변화만으로도 큰 결과를 도출해낼 수 있게끔, 도미노처럼 퀘스트 시나리오를 미리 설정해둔 것이다.


어지간해선, 수많은 사람들에게 동시에 영향을 미치는 거대한 일이라는 게 그리 쉽게 일어나지 않는 법이었으니 말이다. 지독하게 애를 쓰고 의도에 의도를 더한 계획의 실행자들조차 번번히 실패를 하는 것이 일반적인 일이었다.


반나절이 지났고, 어느새 밝던 아침은 저녁이 되었다. 새벽녘에 시작한 게임을 저녁 때까지 붙잡고 있는 셈이다. 오늘 하루를 날렸다. 과연 그만한 가치가 있었는가. 제냐는 인터페이스를 켜서 남은 HP를 확인했다.


18,001/30,890.

MP는 6,110/9,912였다. HP는 더 이상 떨어지지도 않고 변함이 없었으나 MP는 천천히 차오르고 있었다. MP포션을 마신 데다가 아무런 스킬도 활용하고 있지 않았으니.


절반 이하라면 컨디션이 급격히 나빠지기 시작할 테다. 10,000이하가 된다면 전투가 가능할 지 몰랐고. 지금 가장 중요한 일은 뱀의 사체로부터 전리품을 빠르게 얻고, 무엇과도 마주치지 않고 사르삿으로 조용히 귀환하는 일이었다.


제냐가 포션 류를 들이키고, 붕대와 약재 따위를 꺼내 당장 눈에 보이는 곳에 감았다. 뼈마디가 후들거리지만 부러진 곳은 없는 것 같았다. 금이 간 곳도··· 아마 없는 듯했고.

체력과 MP는 상호 교환이 가능한 수치였다. 강력한 충격을 받을 때 기력술을 익혔다는 전제 하에 해당 부위를 강화해 데미지를 최소화 할 수 있었으니까.

흑사와의 난전 중에 그만큼 치명상을 입지 않았다는 건 제냐의 집중력이 끊어지지 않고 오랜 시간 팽팽한 상태를 유지했다는 말이다.


집중력의 깊이와 유지 시간은 좋은 운동 선수나, 혹은 프로 게이머의 자질이기도 하다. 제냐는 랭커들과 견줄 수 있을만한, 쓸만한 피지컬을 보유한 셈이었다. 비련의 시나리오의 유저로서.


여기저기 결리고 쑤시는 부위에 가루약으로 조제된 외상약들을 뿌리고 그 위에 붕대를 감았다. 약들은 몸 내부에 침투해서 회복을 도울 것이다. 적절한 약재의 도움을 얻고, 안정적으로 몸을 뉘여 푹 쉬는 게 가장 빠른 회복법이겠지만 당장에 조금이라도 효과를 볼 수 있을 테다.


어둑한 밤 하늘.


어둠숲은 그 이름 그대로 어두운 하늘 아래에서 더욱 짙은 그림자 속에 물들었다. 여기저기 안개가 끼어 있고, 흉흉한 침엽수가 한가득 서 있어 하늘을 가리운다. 지금 제냐가 서 있는 곳은 초토화된 공터였고, 덕분에 하늘만은 가림 없이 제대로 잘 보이고 있었지만은.

max-saeling-ef0sXQtnCYU-unsplash.jpg


작가의말

매 단어에 메타포를 심는 것도 지겨운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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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99. 3대1(3) 23.10.04 27 3 24쪽
99 98. 3대1(2) 23.10.02 31 3 26쪽
98 97. 3대1 23.10.01 32 3 17쪽
97 96. 습격 23.09.28 33 3 15쪽
96 95. 이모저모 23.09.27 31 3 27쪽
95 94. 수습 23.09.27 25 3 17쪽
94 93. 연전連戰 23.09.26 29 3 15쪽
93 92. 파이어 볼, 궁술 23.09.26 26 3 24쪽
92 91. 김세인 23.09.25 32 3 29쪽
91 90. 각자의 싸움 23.09.24 31 3 24쪽
90 89. 틈새 23.09.24 27 3 34쪽
89 88. 포격 23.09.24 25 3 25쪽
88 87. 레드 오크 부락 23.09.22 27 3 20쪽
87 86. 주변인들 23.09.22 29 3 19쪽
86 85. 검은 비검飛劍 23.09.22 34 3 30쪽
85 84. 단테스 무기상점 23.09.22 27 3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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