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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ya 님의 서재입니다.

촉법소년은 보호받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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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ya
작품등록일 :
2023.12.25 04:33
최근연재일 :
2024.06.27 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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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0,447

작성
24.02.19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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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46화. 따뜻한 자본주의

DUMMY

“넘어온 곳이나 말해. 나도 얼른 돌아가야 하니까.”

“아, 네. 저기 구석 담벼락이에요.”


그 말대로 유난히 그늘지고 낡은 곳이 있었다.

나무 덕분에 적당히 시야가 가려지기도 했다.


“끝이네. 이제 볼 일 없지?”

“네···.”

“친구랑 사이좋게 지내고.”


다시 돌아가야 한다.

학생은 다시 얼굴이 어두워졌다.

정말 학교로 돌아가기 싫을 터였다.

더군다나 앞으로 지낼 시간 동안···.


“저기···, 그 돈 정말 아무 대가도 없이 주실 건가요?”


돈은 받는 편이 좋았다.

동급생은 빌린다는 말로, 계속 돈을 뺏어갈 터였다.

그러다 줄 돈이 없다고 하면 이번처럼 식당에 두고 가거나, 때릴지도 모르지.


“필요 없다고 하지 않았어?”

“그냥 찝찝했던 것뿐이라···.”

“흐음.”

“안 될까요?”


간절한 목소리다.

당장 내일부터 걱정될 터였다.

돈을 빌리는 것뿐만 아니라, 계속 쓰게 만들려고 들 텐데 어떻게 버틸 수 있을까?


녹호는 그 절박함을 무심히 관찰했다.

크게 동정심을 느끼는 표정은 아니었다.

별 관심조차 없어 보였다.


“가, 갚을게요!”


다급해진 사람은 학생이었다.


“어떻게?”

“명함 주시면 언젠가는···.”

“그건 너 혼자 좋을 방식 아닌가?”

“네?”


담담한 목소리지만 부정적인 속뜻.

그렇기에 학생은 더욱 불안해 보였다.


“갚는다는 건 상황이 좋아져야 가능한 일이지. 삥 뜯길 돈 받아 가는 처지에, 그럴 기대가 있어?”

“그건···.”

“그리고 명함을 받아간다? 상황이 좋아지든 말든 너만 입을 싹 닦으면 될 일이잖아? 내가 유리해질 조건이 아니야. 너 혼자 양심의 가책을 덜고자 하는 짓이지.”


맞는 말이다.

그렇게 하더라도, 갚고 말고는 이 여학생 양심에 달렸다.

녹호로서는 아무런 이득이 없었다.

그저 자기 개인정보를 넘기는 일일 뿐.


“앞으로는 협상할 때 좀 더 제대로 된 걸 준비하도록 해. 네가 손해를 안 보는 게 아니라, 상대에게 이득이 가는 조건을 말이야.”


녹호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지갑을 꺼내 들었다.

그다음, 명함 하나를 지폐 다발로 감싸서 학생에게 내밀었다.


“가, 감사합니다···.”

“감사할 필요 어디 있어? 어차피 갚을 생각이잖아?”

“네···.”


그렇게 툭 건네주고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돌아간다.

몇십만 원 따위, 애당초 관심도 가지 않을 금액이었다.

그저 많고 많은 종이 뭉텅이를 건네줬을 뿐이겠지.


어느덧 학교에서 멀어진 발걸음.

녹호는 갑자기 발을 멈추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아직 파란색이 선명한 대낮이었다.


“장현묘라···.”


깨끗한 청색 아래, 아버지의 이름을 스산하게 불렀다.



***


서울 한복판.

텅 빈 건물 안을 녹호가 둘러보았다.

새롭게 차릴 카페이기라도 한 듯, 손님은 한 명도 없었다.

하지만 고급스러운 인테리어는 넋을 놓고 봐도 될 정도였다.

녹호 역시 한참 감상에 빠져있는 와중, 옆에서 딴지를 거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키는 대로 하긴 했는데, 너무 허전하지 않아?”


다름 아닌 인영이었다.

서류를 뒤적거리면서, 이게 맞는가 인상을 찌푸린다.


“장사는 시작도 전인데 손님부터 찾으면 어떻게 해?”

“지금은 완벽하다? 겉보기만 그런 거 아닐까?”

“목적은 충족했어. 완벽하게.”


녹호는 그 찌푸린 얼굴을 보고선, 손가락으로 주변을 가리켰다.


“우리가 기술이 있어, 뭐가 있어? 결국 사람 장사잖아? 그럼 예쁘고 멋있는 게 최고지.”

“그건 그렇지만···.”

“봐봐, 이 돈을 때려 부은 꼴을.”


앞서 언급했듯, 인테리어는 호화롭기 그지없었다.

북유럽 스타일이라고 할까?

하얀색을 주요 색상으로 정한 듯이 깨끗하다.

의자는 아예 푹신한 소파형이었으며, 그 위에 얇은 천을 덮어 더욱 청결한 느낌을 준다.

테이블마다 거리는 공간 효율성을 신경도 안 쓴 듯이 널찍했고, 하나하나 넓이도 넉넉하기 그지없었다.


“한 번 앉으면 몇 시간이든 쉬고 싶을 걸?”

“그래서 문제잖아! 매출은 신경 안 써?!”


인영이 이렇게 화를 내는 이유도 이래서였다.


“흐음?”

“사업이라는 게 경제성이 중요한 거지, 손님을 받기만 하면 뭐해! 보내서 자리를 만들어야 다음 사람을 받을 거 아냐?”

“흐음.”

“수용한계가 있다고! 오래 붙잡아둘 생각이면 공간을 훨씬 늘려야 한다니까? 테이블을 더 들이거나 위층까지 카페로 만들거나!”

“흐으음.”

“야, 이 개색···!”


참지 못한 반응에 녹호가 웃음을 툭 터뜨렸다.

처음부터 놀리려던 의도인 모양이다.

물론, 계속 장난만 칠 수는 없겠지.


“그래, 손님 회전 중요하지. 사람을 들이려면 그만큼 나가야 해. 그래야 균형이 유지되니까.”


필요한 호응을 내뱉기 시작했다.


“잘 아네, 그리고 그 회전율이 매출 직결 사항이야.”

“회사만 그럴까? 사실 어디에서든 다 통용되는 말이야. 더 많이 들어오면 더 많이 내보내야지. 그게 안 되면 규모를 늘려야 해. 안 그러면 넘치니까.”

“그렇게 똑똑한 놈이 왜 이따위 전술로 들이받는 건데?”


거칠긴 해도 핵심에 다가서는 질문.

녹호는 편안한 얼굴로 그 답을 내뱉었다.


“난 전술을 짠 적 없어. 전략을 전달했을 뿐이지.”

“···뭐?”


전술, 전략.

그 두 가지는 다른 법이다.

전술은 국소적인 대신 세밀했다.

전문가에 요구되는 면모를 보여주기도 한다.

그 반면, 전략은 훨씬 큰 시야각에서 따져야 했다.


“인영아, 돈이 많다는 건 뭘까?”

“뜬금없이 무슨 소리야?”

“말해 봐, 평소 생각하던 대로.”


그렇기에 전술가에게 전략을 설명하기는 어려운 면이 존재했다.

녹호는 아예 시간을 들이려는 듯, 적당한 자리에 털썩 앉았다.

인영 역시 마찬가지로 그 앞까지 의자를 끌어서 눈높이를 맞췄다.


“그야, 선택지가 많다는 거지? 먹고 살 걱정이 없으니까 시간도 많고, 돈에 구애받지 않고 뭔가를 살 수도 있고.”

“그리고?”

“훨씬 과감한 투자가 가능하지. 그럼 더 큰 수익을 얻게 될 거야. 왜, 적게 가는 길일수록 자원이 많이 남는 법이잖아?”


조리 있는 설명이다.

실제로 세상은 그런 식으로 돌아가고 있지.

녹호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입을 열었다.


“한 가지는 확실하게 말해줄게. 없이 사는 것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살아.”


인영이 두 눈을 깜빡였다.

그러다 무슨 뜻인지 이해하고 인상을 찌푸렸다.


“야, 이 씨···.”

“하, 재밌어라.”

“장난칠 시간 없거든? 대학 다니랴 일하랴, 내가 얼마나 바쁜데!”


녹호는 편안한 웃음을 내비쳤다.

평소와는 달리, 어딘가 가벼워 보였다.

반쯤 업무에 가까운 상황인데도 말이다.


“빨리 말해. 그냥 한 소린 아닐 거잖아.”

“맞아. 인식 차이를 설명하려고 꺼낸 얘기지.”


미소를 가라앉히고 화두를 꺼내 들었다.


“난 지금도 돈이 많아. 그런데 왜 굳이 더 벌어야 해?”


인영은 그게 무슨 얘기냐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야···, 많아서 나쁠 건···.”

“뭐, 일단 그렇다고 치고. 왜 벌어야 하냐고. 시간까지 쓰면서.”


입을 닫고 고민을 시작했다.

막상 돈이 많은 상황을 상상하려고 하니, 그다지 떠오르는 게 없는 모양이다.


“음···, 더 많은 선택지? 그 정도밖에 안 떠오르는데?”

“오, 그래도 머리가 좀 돌아가네?”

“그럼! 내가 누군데!”

“물론, 정답은 아니야.”


인영이 주먹을 살짝 쥐었다가 풀었다.

장난도 계속되면 빡침이 되는 법이다.


“쌓인 돈이 어느 지점을 넘어서면, 더 번다고 딱히 변화는 없어. 통장도 안 보고 사는데, 뭐가 있겠어?”

“아, 그럼 답이 뭔데! 놀리지 말고 빨리 말해!”

“말할 것도 없어. 딱히 이유 없거든.”

“···뭐?”


가는 눈매가 짧게 떨렸다.

도대체 무슨 소릴 하는가 싶은 모양이다.


“취미라고, 굳이 따지면.”

“아니,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왜 말이 안 되는데?”

“돈이라고. 다들 이득이 있으니까 모으고 있겠지. 최소한 지금 생활을 유지하려고 한다든가. 안 그러면 왜 돈도 많은 인간이 아등바등 고생하면서 사는데?”


상식에 따른 반박이다.

더 많은 것을 가지려는 이유는 더 다양한 것을 누리기 위해서라고.

모두가 생각할 법한 답이다.


“나를 봐봐. 주식에 처박아두니까 배당금만으로도 먹고 살잖아?”

“그것도 언젠가는 끝이 나겠지. 화폐 가치는 의외로 빨리 떨어지는 법이잖아.”

“그렇지. 그래도 주가는 내버려 둬도 올라. 굳이 내가 버둥거리지 않아도, 알아서 나를 떠받쳐준다고.”


가만히 있으면 도태된다?

특이점을 넘어선 자본은 그따위 법칙마저 비웃을 정도다.

적당한 방식으로 내버려 둔다면, 알아서 스스로 증식한다.


“방금 말했지? 돈을 벌어야 최소한 지금 생활이 유지가 된다고.”

“응, 맞잖아?”

“아니, 이 정도 되면 오히려 반대야.”


하지만 특이점이 넘어선 자본이란, 또 다른 특이법칙에 구애받을 수밖에 없다.


“다 같이 멈춰 있어야지, 더 벌면 진짜 뒤지는 수가 있거든.”

“···뭐?”


녹호는 조소 비슷한 것을 입가에 걸고 있었다.


“돈, 그거 사실 종이 쪼가리거든. 아니면 컴퓨터에 찍힌 정전기쯤 되겠지.”

“뭐···, 엄밀히 따지면 그렇긴 하겠지. 근데···”

“진실이야. 다들 까먹고 있긴 하지만 말이야.”


그냥 물질로 따진다면 그랬다.

무인도에 통장과 지폐를 가져가면, 땔감으로밖에 못 쓰겠지.

돈은 문명이 있어야 의미가 있었다.

모두가 우러러본다고 해도, 본질은 도구일 뿐이다.


“그런데도 자본주의가 유지되는 이유? 그야, 간단해. 전부 지금 체제를 존중하고 있어서 그래.”

“자본주의에 존중? 뭔가 안 어울리는데?”

“동의어로 바꿔줘?”


녹호는 잠시 고민하다가 새로운 표현을 꺼냈다.


“존중···. 그래, ‘마지못해 받아들인다’고.”

“번역기 성능 좋은데?”


인영은 그 말을 듣자, 편안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역시 이쪽 머릿속도 꽃밭과는 거리가 멀었다.


“‘돈이면 다 된다.’, ‘돈만 있으면 친절이든 뭐든 다 살 수 있다.’, ‘돈이 전부가 아니라는 건 순진한 소리다.’···. 이렇게 존중이 사라진 사회에서 자본주의는 붕괴하고 말아.”

“번역기.”

“돈 없는 사람이 많아지면, 나도 혁명 당해서 뒤지는 수가 있다고.”

“역시 비싼 번역기라, 비싼 값을 하네?”


녹호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하긴, 지금껏 건네왔던 친절은 이러한 면을 엿본 탓일지도 몰랐다.

편하게 웃고 떠드는 친구가 필요해서.


“이해하기 쉬운 말로 해주자면 이래. ‘빈부격차가 커지면 자본가는 오히려 그 지위를 위협받는다.’”

“사회 전체 자본이 증식하면 당연히 물가는 오르니까. 노력해도 극복할 수 없으니까. 그래서 역설적으로 자본은 가치를 잃으니까?”

“맞아.”


얻을 수 없기에, 그리고 얻어도 의미 없는 금액이기에.

도리어 자본은 가치를 잃는다.

일하는 것보다 도둑질이 간단해진다.


그때부턴 오히려 돈은 증오의 대상이 된다.

포도는 먹지 못하는 순간, 신 포도가 되기 때문이다.

그 순간이 오면 자본의 가치는 급락하며, 자본가는 힘을 잃고 만다.


작가의말

경제학자는 차가운 머리를 가져야 한다. 하지만 따뜻한 가슴을 잃어서는 안 된다.

-위대한 경제학자, 엘프리드 마셜(Alfred Marshall)




부의 양극화는 사회 붕괴를 일으키는 요인 중 하나입니다.

지금도 세계에는 많은 경제학자들이 거장의 말을 가슴에 품고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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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61화. 불가해한 잘생김 24.02.27 22 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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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58화. 압도적인 잘생김 24.02.26 20 0 12쪽
57 57화. 법인 관리 24.02.25 19 0 12쪽
56 56화. 장천선 24.02.25 18 0 11쪽
55 55화. 재회 24.02.24 20 0 12쪽
54 54화. 성역 24.02.24 17 0 11쪽
53 53화. 성범죄자 목사 24.02.23 21 0 12쪽
52 52화. 타투도 패션? 24.02.23 17 0 12쪽
51 51화. 역겨움 24.02.22 20 0 13쪽
50 50화. 밥 +2 24.02.22 17 1 12쪽
49 49화. 보수적인 남자, 진보적인 여자 +1 24.02.21 22 1 12쪽
48 48화. 게으른 자살 +1 24.02.21 22 1 12쪽
47 47화. 혁명 마렵네 +1 24.02.20 25 1 12쪽
» 46화. 따뜻한 자본주의 +1 24.02.19 25 1 12쪽
45 45화. 따돌림 +1 24.02.16 25 1 12쪽
44 44화. 여고 앞 +1 24.02.15 34 1 13쪽
43 43화. 미련과 후련 +1 24.02.14 31 1 12쪽
42 42화. 절연 +1 24.02.13 31 1 12쪽
41 41화. 이간질 +1 24.02.12 31 1 12쪽
40 40화. 고양이 +1 24.02.09 34 1 12쪽
39 39화. 동료가 되어라 +1 24.02.08 37 1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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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37화. 정신 붕괴 +1 24.02.06 40 1 12쪽
36 36화. 끊긴 필름 +1 24.02.05 42 1 13쪽
35 35화. 선물 무더기 +1 24.02.02 40 1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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