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icya 님의 서재입니다.

촉법소년은 보호받아야 한다

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icya
작품등록일 :
2023.12.25 04:33
최근연재일 :
2024.06.27 14:52
연재수 :
120 회
조회수 :
5,904
추천수 :
72
글자수 :
650,447

작성
24.02.13 15:10
조회
30
추천
1
글자
12쪽

42화. 절연

DUMMY

서주가 몸을 움츠렸다.

생각지도 못했던 상황에 완전히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그리고 이를 바라보는 시선은 한결 더 차가워졌다.


녹호는 어마어마한 재산을 가지고 있었다.

동시에 계속 예현과 계속 면담을 요구해왔지.

오늘 만남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사명감만 불타올랐던 탓에 그 사실을 떠올리지 못했다.


‘사람을 벌하는 건 악함이 아니라 멍청함이다.’


녹호가 말버릇처럼 했던 소리다.

그리고 그 말은 서주에게 정확히 들어맞았다.

순진했지만, 그래서 더 쉽게 홀렸다.

유일하게 남은 가족에게 상처를 주고 밀어냈으며, 미래를 대비하지도 못했다.

그토록 기대해온 오늘은 완전한 실패에 성큼 다가섰다.


“사업 얘기나 하지.”

“아, 사업···.”

“이쪽은 제안할 테니까 넌 닥치고 머리나 끄덕여. 사람 귀찮게 하지 말고.”

“아까도 말했지만 그건···.”

“물밑에서 얘기가 지나갔어. 후원금 명목으로 교회 확장을 지원해주겠다고. 이제 와서 말을 바꿀 셈이야?”


차가움과 사나움이 공존하는 말투.

그건 서주를 한결 더 움츠러들게 했다.


“못 들은 모양이네. 하긴, 그럴 만하지. 얼마나 믿음이 안 갔으면.”

“드, 들었어요!”

“그랬으면서 이따위로 나서?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한 번 밀린 기세는 계속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필요한 정보가 제때 기억나지 않겠지.

설령 떠올린다고 하더라도 입을 열기 망설여질 테고.


필요한 지식도 없고, 자신감도 모자랐다.

상황마저 불리했으며, 녹호는 배후에서 이미 모든 걸 결정한 후였다.

그런데 어떻게 상황을 가져올 수 있을까?

당연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 커피나 주문하고 와. 적당히 아무거나.”


녹호가 카드를 툭 던지면서 말했다.

동등한 입장이라고는 생각도 할 수 없는 태도다.


“······.”


아니, 실제로도 그랬다.

이미 무게추가 심각하게 기운 상태다.

이렇게 무례하게 군다고 해도, 서주는 반항 한 번 하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다.

지금처럼.


“사업 파트너가 저 모양이라니. 참 속 터지는 일이야?”

“그러게. 가족이었던 내가 다 민망하네.”

“‘이었던’?”

“이젠 아니야, 가족.”


녹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흐뭇하다거나 그런 기색은 아니었다.

그저 알겠다는 듯한 반응이다.


“정말 그렇다면 제대로 해 봐. 이 쉬운 일에 내가 직접 나서야겠어?”

“알겠···, 잠깐.”


커다란 손이 기다란 허벅지 위를 덮었다.

인영은 갑자기 눈을 크게 뜨더니 굵직한 손목을 붙잡았다.

이게 무슨 짓이냐는 듯, 일이 벌어지는 곳과 얼굴을 번갈아서 바라보았다.

하지만 손길은 그러거나 말거나 다리 밑으로 쑤욱 들어갔다.


“여긴 사람 많아! 이런 건 나중에 둘이 있을 때 해!”


조그마한 목소리가 고함을 질러댔다.

인영은 얼굴이 새빨개져서는 몸을 움츠렸다.

머리로는 팔뚝을 꾹 누른다.


“무슨 소리야?”


녹호는 시큰둥한 표정을 지으며 붙잡은 다리를 들어 올렸다.


“머리 망가져. 팔에서 떼.”

“···어?”

“허리 펴고 고개 똑바로 들고.”


그렇게 짐짝처럼 들어 올리고선, 다른 허벅지 위에 얹어두었다.

다리를 꼬고 앉은 자세를 만들기 위해서.

여기서 멈추지 않고 인영의 손목을 잡고서 무릎 위에 둔다.


“둘이 있을 때 뭘 하고 싶다고?”

“아니, 그게···.”

“나중에 둘이 있을 때 들어보자. 도대체 뭐를 해도 되는지.”


녹호는 이젠 손끝을 인영의 가슴 위에 얹었다.

잠깐 움찔하지만, 신경도 쓰지 않고 꾸욱 누른다.

완전히 등받이에 기대도록.


꼬아둔 다리.

무릎 위에 얹은 손.

완전히 기댄 등.

녹호가 원하던, 거만하기 그지없는 자세다.


“온다.”

“알았어.”


서주가 두 사람이 있는 테이블로 걸어오고 있다.

두 손에는 쟁반을 들고 오는데, 아마 주문한 뒤 음료가 완성될 때까지 기다린 모양이다.

아마 녹호 때문에 그랬겠지.

잠시라도 떨어져 있고 싶어서.


“아메리카노랑 치즈케이크로 통일했는데···.”


그렇게 돌아왔을 때, 인영은 표정을 바꿔 들었다.

턱을 약간 올리고 감정을 지웠다.

대충 포개둔 손은 깍지를 끼웠고 어깨에는 한결 힘을 뺐다.

오만하고 고고하게.


연극이라도 하듯, 상황에 들어가자마자 분위기가 변했다.

꼭 도도한 집고양이가 손님맞이를 하는 것처럼도 보였다.

녹호도 그 모습을 힐끗 보더니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하아···.”


서주가 작은 한숨을 내쉬며 쟁반을 내려두었다.

아메리카노와 치즈 케이크를 각자 앞에 하나씩 밀었다.

마치 종업원이라도 된 듯이.


높낮이 차이가 이렇게나 컸다.

한쪽은 자신을 높이기에 여념이 없고, 반대쪽은 저절로 고개를 숙이고 있다니.

결과는 보지 않아도 뻔했다.


“헌금 70퍼센트를 받아 가는 대신, 차등해서 포인트를 제공할 거예요. 법인에서 운영할 헬스장, 네일샵, 음식점에서 쓸 수 있는.”


인영은 얇게 뜬 눈으로 조건을 내세웠다.

헌금의 70퍼센트를 뜯어가겠다는 말.

자금 운용을 못 할 정도로 가져가겠다는 뜻이다.

서주 역시 이게 과한 조건이라는 사실은 쉽사리 알아챌 수 있었다.


“야, 그건 도둑놈 심보···”

“밥그릇에.”


하지만 대꾸도 하기 전에, 인영이 말을 끊었다.


“주는 대로만 받아먹으세요.”

“너, 너···!”

“말 짧게 하지 마시고요. 지금 이모, 조카로 보는 거 아니잖아요. 이젠 가족도 아니고요.”


서주는 그 선언에 도끼눈을 뜨고 노려보았다.

이쪽도 인영을 원망하기는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그런 원수가 자신을 깔아뭉개려고 한다면 분노가 치솟을 수밖에 없겠지.


“이건 부당계약이야!”

“틀린 말은 아니죠, 이쪽이 밑지는 계약이니까.”

“뭐?”

“그쪽은 귀중한 교세 확장 기회를 얻지만, 여긴 이분께서 이미 썩어나시는 돈을 버실 뿐이거든요. 그런데도 못 알아처드시면, 뭐.”


인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계약, 없던 걸로 하죠. 어차피 교회는 많으니까.”


녹호 역시 따라서 일어나 당장이라도 나갈 듯한 몸동작을 취했다.

마치 유흥이 끝났다는 듯이.

이대로 헤어진다면 모든 상황은 종료되겠지.


그렇기에 급해진 건 서주였다.

반드시 계약을 성사시켜야 했고, 이를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었다.

자존심 따위는 얼마든지 구겨도 됐다.

목사를 위해서, 동시에 자신의 있을 자리를 위해서.


“자, 잠깐.”

“······.”

“잠깐만 따로 얘기 좀 해요! 저기요!”


처음엔 녹호를 향해 소리쳤다.

무슨 짓을 당할지 모른다고는 하지만, 지금껏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이번에도 잘 넘어가지 않을까 하는, 아무 근거 없는 기대로 불렀겠지.


하지만 커다란 몸뚱이는 계속 나아갔다.

이전에 가했던 위협 따윈 무색하게, 정말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는다.

멈춰도 큰 이익이 없기 때문에 그런 걸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제 서주는 흥미조차 가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


“인영아, 잠깐만 멈춰 봐! 내가···, 내가 잘못했어!”


그러자 잡을 곳은 한 곳뿐이었다.

바로, 가족.

다행인지 불행인지, 인영은 그 말을 듣고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뭐가요.”


나가던 중, 고개만 살짝 돌린 모습.

고아했던 얼굴은 다소 경직되어 있었다.


“그때 뺨 때린 거, 화내고 사라지라고 한 거, 뒤에서 욕하고 다닌 거···.”

“······.”

“그리고 반말···. 그래요, 협상 자린데 반말한 것도 다 미안해요. 그러니까···.”


그건 기다란 손가락이 주먹을 쥐었다.

입술이 살짝 깨물렸고, 몸은 티 나지 않을 만큼 얕게 떨렸다.


“용서해주세요···. 부탁드려요. 아까 그 조건이라도 좋으니까, 제발···.”


서주는 이를 눈치채지 못하고 가까이 다가갔다.

무릎을 꿇고서, 떨리는 주먹을 공손히 붙잡았다.

비굴하게 또, 절박하게.


“제발···.”


인영이 두 눈을 감았다.

자기를 함부로 대한 이모를 무릎 꿇렸다.

불안에 떨게 했고 사과까지 들었다.

나름의 복수를 이뤄내고 말았다.


지금 그 감정은 어떨까?

통쾌함일까, 아니면 분노일까?

거칠어진 숨을 내쉬며 가방에서 갈색 종이봉투를 꺼냈다.


“···사인.”


울렁거리는 목소리와 함께 내밀었다.

계약하고 싶다면, 지금이라도 당장 받으라는 듯이.



***


다음날.

서주가 종이봉투 하나를 품에 안고 교회 앞에서 쪼그려 앉아있었다.

마치 보물이라도 되는 듯 소중히 품었고, 동시에 달궈진 쇳덩이라도 되는 듯 괴로운 표정이었다.

당연했다.

얻어야 할 결과물이었지만, 내용물은 형편없었으니.


“잘 끝내고 왔니?”


그런 서주 위로 그림자가 드리웠다.

예현이었다.


“목사님···. 제가···. 제가···.”

“그래, 다 안단다. 만족스럽지 못하겠지.”


서주가 울면서 예현의 품으로 뛰쳐 들었다.

몸을 바들바들 떠는 모습이, 기다리는 동안 얼마나 불안했는지 보였다.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잘해야 하는데···. 걔보다 더 잘해야 하는데···.”


인영이 목사에게 다가갈까 걱정하고 두려워했지.

뺨을 때리고 원망을 쏟으며 쫓아내기까지 했다.

그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


하지만 빼앗은 역할을 제대로 수행했는가?

그건 아니었다.

교회에 불리한 계약을 했고, 상대방에게 목숨줄을 쥐여준 꼴이 됐다.

이제 저쪽에서 행패를 부린다고 해도, 얌전히 당해줄 수밖에 없었다.


“괜찮단다, 서주야.”

“흐윽···, 흑···.”

“너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어린양이란다. 그런데 어찌 힐난할 수 있겠니?”


물론, 그 모든 게 착각에 불과했지만.


“제가···, 앞으로 더 잘할게요. 시키는 일은 뭐든지 최선을 다할게요···.”

“그래, 믿음직스럽구나.”


예현은 품에 있는 서주를 다독였다.


“안에 들어가서 몸을 녹이자꾸나. 겨울이라 춥단다.”


그렇게 두 사람은 교회로 들어갔다.

컴컴한 어둠 속으로.



***


서주와 계약하고 난 직후, 인영은 녹호를 따라 움직였다.


“어딜 가는···.”

“저기.”


천선분식.

도플갱어의 친어머니가 운영하는 곳이다.

계약을 진행했던 카페는 걸어서도 갈 수 있을 만큼 여기와 가까웠다.


“커피랑 케이크, 제대로 먹지도 못했잖아? 편안하게 먹으려면 여기가 낫지.”


녹호가 성큼 먼저 들어갔다.


“난 슬러시.”

“이 겨울에?”

“어. 먹고 싶은 거 골라서 아무렇게나 시켜.”


주문은 맡겨두고, 아무 자리에 가서 털썩 주저앉는다.

평소에도 그렇듯 자연스럽고 태연한 행동이었다.

인영은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다가 주문을 마치고 그 앞으로 갔다.


“시켰어요.”


자리에 앉으면서 하는 말.

녹호는 와락 인상을 찌푸렸다.


“···뭐야, 그 말투는?”


작가의말

한 가정을 파탄 내고 각각을 주워가는 인성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1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촉법소년은 보호받아야 한다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63 63화. 테러리스트 24.02.29 17 0 12쪽
62 62화. 불 필요한 건물 24.02.28 19 0 12쪽
61 61화. 불가해한 잘생김 24.02.27 22 0 12쪽
60 60화. 숨막히는 잘생김 24.02.27 24 1 12쪽
59 59화. 아득한 잘생김 24.02.26 21 0 11쪽
58 58화. 압도적인 잘생김 24.02.26 20 0 12쪽
57 57화. 법인 관리 24.02.25 19 0 12쪽
56 56화. 장천선 24.02.25 18 0 11쪽
55 55화. 재회 24.02.24 20 0 12쪽
54 54화. 성역 24.02.24 17 0 11쪽
53 53화. 성범죄자 목사 24.02.23 21 0 12쪽
52 52화. 타투도 패션? 24.02.23 17 0 12쪽
51 51화. 역겨움 24.02.22 20 0 13쪽
50 50화. 밥 +2 24.02.22 17 1 12쪽
49 49화. 보수적인 남자, 진보적인 여자 +1 24.02.21 22 1 12쪽
48 48화. 게으른 자살 +1 24.02.21 22 1 12쪽
47 47화. 혁명 마렵네 +1 24.02.20 25 1 12쪽
46 46화. 따뜻한 자본주의 +1 24.02.19 24 1 12쪽
45 45화. 따돌림 +1 24.02.16 25 1 12쪽
44 44화. 여고 앞 +1 24.02.15 34 1 13쪽
43 43화. 미련과 후련 +1 24.02.14 31 1 12쪽
» 42화. 절연 +1 24.02.13 31 1 12쪽
41 41화. 이간질 +1 24.02.12 31 1 12쪽
40 40화. 고양이 +1 24.02.09 34 1 12쪽
39 39화. 동료가 되어라 +1 24.02.08 37 1 12쪽
38 38화. 한강 다리 +2 24.02.07 38 1 13쪽
37 37화. 정신 붕괴 +1 24.02.06 40 1 12쪽
36 36화. 끊긴 필름 +1 24.02.05 42 1 13쪽
35 35화. 선물 무더기 +1 24.02.02 40 1 12쪽
34 34화. 인영이 주는 선물 +1 24.02.01 46 1 11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