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무흔] 님의 서재입니다.

흑운비사(黑雲秘事)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로맨스

[무흔]
작품등록일 :
2023.07.19 21:28
최근연재일 :
2023.08.16 08:00
연재수 :
21 회
조회수 :
1,105
추천수 :
16
글자수 :
94,212

작성
23.08.14 08:00
조회
33
추천
0
글자
9쪽

입산 (五)

DUMMY

술시(戌時)가 되자, 수석사범은 아이들을 단상 아래로 다시 불러 모았다. 수석사범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아이들에게는 마치 우레처럼 들렸다. 모이라는 짧은 한마디에 아이들은, 땅바닥에 푹 꺼져있던 몸을 귀신같이 순식간에 일으켰다.

수석사범은 단상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잠시 눈치만 살피던 아이들은, 단상 밑에서 눈을 부라리는 사범들의 사나운 눈빛을 보고서야 서 있던 그 자리에 재빨리 주저앉아 수석사범과 똑같은 모습으로 다리를 꼬았다.

수석사범은 차분한 목소리로 숨 쉬는 법을 설명하였다. 그리고는 하찮아 보이는 호흡법이 온몸에 덕지덕지 붙어있는 고통을 줄여주고 앞으로 줄기차게 닥칠 고된 수련과 살행 속에서 목숨을 지켜줄 거라는 말을 마지막에 덧붙였다.

“호흡하는 방법을 잘 들었느냐? 목구멍에 밥덩이라도 집어넣으려면 내일은 오늘보다 더 빨리 달려야 할 것이다. 지금 배우는 숨 쉬는 방법을 잘 기억하거라. 그리고 잠들기 전까지 계속 반복해야 한다. 얼마나 제대로 숨을 쉬었느냐에 따라 내일 아침 너희들의 몸이 달라질 것이다. 제대로 숨을 쉬는 것. 그것만이 너희들을 지켜줄 것이다. 너희들의 목숨도.”

한순간 아이들의 머릿속에는, 흔들리는 다리를 주체하지 못하고 절벽 아래로 떨어져 죽은 아이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수석사범의 말은 진심이었다.

오늘, 굳어진 다리를 풀지 못하고 내일, 뱃속에 밥 한 덩이를 넣지 못하면 오늘 죽은 아이들과 똑같은 신세가 될 게 뻔했다.

아이들은 진저리를 쳤다.

그래, 내일은 무엇이라도 먹어야 했다. 배를 비운 채 또 하루를 위태로운 절벽 위를 달리는 것은 저승길을 향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결단코 그렇게 허무하게 죽을 수는 없었다. 그러니,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오직 할 수 있는 일은 잠들기 전까지 수석사범이 가르쳐준 대로 숨을 계속 쉬는 것뿐이었다.

아이들은 가부좌를 튼 허벅지에서 올라오는 틍증마저 잊은 채 호흡법을 따라했다.


또 하루가 시작되었다.

신기하였다. 텅 빈 창자를 쥐어짜는 허기는 어쩔 수 없었지만 아랫배에 조금이나마 따스한 기운이 희미하게 모이는 기분이었다. 달리는 발걸음도 잠시동안 가볍게 느껴졌다.

여지없이 선두에 섰던 사범은 공터를 벗어나 산기슭 절벽을 향해 달려나갔다.

아침 햇볕이 산봉우리 위로 올라섰다. 차가운 절벽에 매달리고 가파른 산길을 달리기 시작한 지, 반 시진이 지나자, 흔들리는 두 발은 어제와 똑같았다.

흔들거리며 뒤처지는 아이들의 몸뚱이 위에 여지없이 사범들의 몽둥이가 떨어졌다. 잘못 맞아 그냥 스치기만 해도 그 고통은 내장을 뒤흔들고 폐부를 갈기갈기 찢었다. 온몸의 근육은 제멋대로 꿈틀거리며 뭉쳐졌다.

심장이 터질 듯 아우성을 쳤고 더 이상은 결코 움직여지지 않으리라 여겼던 아이들의 팔다리도 사범들이 전해준 고통으로 저절로 움직였다.

아이들의 머릿속에는 오직 한 생각이었다. 오늘도 어제처럼 굶을 수는 없었다. 어제에 이어 오늘 하루를 더 굶는 것. 그것은 죽음을 의미하였다.


청유는 견딜 만하였다.

이렇게 힘겹게 발을 옮기는 것. 이번이 처음도 아니질 않던가.

게다가 지난 밤 수석사범이 알려준 대로 호흡법은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아랫배에 희미하게 모여있는 기운을 그의 말대로 이리저리 밀었다.

몸은 어제만큼 무겁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아우성치던 온몸의 근육까지 멀쩡해지지는 않았다. 반식경도 버티지 못하고 다리는 제멋대로 휘청거렸다. 거기에 허기, 이놈의 텅 빈 뱃속은 그 다리마저도 더욱 힘들게 만들었다.

오늘은 뭐라도 먹어야 했다.

사범을 따라 악착스럽게 절벽을 기어오르는 두 동생을 쳐다보며 이를 악물었다.

암벽으로 이어진 능선을 따라 산봉우리에 올랐다가 되돌아오는 길은 지루하도록 먼 길이었다. 허둥댄다고 될 일도 아니었다. 아니. 허둥대면 허둥댈수록 오히려 더욱 멀어질 길이었다.

청유는 두 동생을 앞으로 밀며 아이들의 속에 파묻혀 발을 번갈아 떼었다.


으아아.

기를 쓰는 비명소리가 절벽 위에 울렸다.

어제 이 절벽에서 들었던 비명과는 다른 종류의 소리였다. 잠시 멈칫한 청유는 소리가 들리는 쪽을 쳐다보았다. 아이 하나가 절벽 아래 삐쭉 튀어나온 바위 끝을 움켜쥐고 위태롭게 매달려 있었다.

아이는 몸을 흔들며 발 디딜 틈새를 발끝으로 더듬거리며 찾는 듯하였다. 계속 바둥거리며 악을 썼다. 아이의 발끝은 여전히 디딜 곳을 찾지 못하였다.

절벽을 따라 뛰고 있는 어느 아이도 절벽 끝을 향해 손을 내밀지 않았다. 아이들이 야박한 것도 아니었다. 아이들에게는 다른 누군가를 구할 여력은 없었다.

청유도 무심코 아이들을 따라 지나치려고 하였다.

숨을 가쁘게 내쉬며 슬쩍 주었던 눈길에 아이의 얼굴이 들어왔다. 아이의 잔뜩 일그러진 얼굴이 눈에 익었다.

이 산채에 도착했던 사흘 전. 막사 안에 들어섰던 청유 삼남매에게 자리를 내어주며 가볍지만 큰 호의를 보였던. 바로 그 아이였다.

청유는 의지와 상관없이 앞으로 내딛던 발끝이 주춤댔다. 청유의 시선은 여전히 아이의 얼굴에 꽂혀 있었다.

동정 때문이 아니었다. 공험진 북쪽 산줄기에서 오랑캐의 창칼에 죽었던 아이들의 얼굴이 겹쳐져서도 아니었다.

하필 이 광경에서 문득 떠오른 생각. 청유가 공험진의 그 빌어먹을 산줄기를 타며 스스로가 결심하였던, 은(恩)이든 원(怨)이든 받은 것은 반드시 그대로 돌려주겠다는 그 다짐이었다.

저 아이를 살려야 하나. 그대로 산봉우리를 향해 뛰어야 하나. 오늘은 늦지 않아야 등가죽에 들러붙은 배를 채울텐데... 청유의 뇌리는 복잡해지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도 어떻게 할 것인가를 결정을 하지 못한 머릿속과는 다르게 몸은 벌써 절벽 끝에 매달려 있는 아이를 향해 돌아섰다.


앞서 달리던 혁린는 갑자기 등뒤가 허전했다. 가끔씩 등을 밀어주던 청유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고개를 돌리니 저만큼 절벽 끝으로 다가서는 청유가 보였다. 혁린은 청유가 다가서는 절벽 끝으로 시선을 옮겼다.

쭉 흘러가던 시선이 멈춘 곳은 방금 전 자신이 지나쳤던 곳. 위태롭게 아이 하나가 매달려 있던 그 절벽이었다.

“형.”

청유는 우뚝 서 있는 혁린을 힐끔거리며 그냥 가라고 손짓을 하였다.

혁린은 그런 청유의 손짓을 보지않고 오히려 청유에게로 달라붙었다. 청유는 그런 혁린의 고집을 잘 아는지라 한순간 째려보고는 굳이 두 번 반복하지 않았다.

서둘러 절벽의 끝으로 다가갔다.

아이가 이를 악물고 마지막 힘을 쓰고 있었다.

순간 손가락 끝에 겨우 남아있던 그 힘마저 풀렸는지 아이의 발악하는 신음소리가 기다랗게 늘어졌다.

짧은 순간. 청유도 그 절체절명의 상황을 알아차렸다. 다급하게 달려들어 아이의 미끄러지는 두 손을 향해 몸을 날렸다.

터억.

겨우 청유의 손아귀에 아이의 손목이 잡혔다.

하지만 절벽 끝으로 날아든 청유의 몸은 한 순간. 아이의 몸무게를 이기지 못하게 줄줄 절벽 위에서 밀렸다.

절벽 끝에 엎드려있는 청유에게 다가가던 혁린은 머리털이 쭈뼛 섰다. 밀려가는 청유를 보며 뭐라도 해야했다. 다리는 더욱 헝크러졌다. 다리보다도 두 팔을 먼저 앞으로 쭉 뻗었다. 이렇게 팔이 짧은 줄 처음으로 알았다.

몸이 앞으로 쏠렸다. 쓰러지는 와중에 혁린은 발끝으로 땅을 힘껏 찼다. 겨우 허공으로 몸이 떴다.

잘하면 날 것도 같았는데 몸은 금방 땅바닥에 떨어졌다. 그렇게 길지도 않은 몸인데 머리, 몸통 그리고 팔다리가 따로 놀았다.

철푸덕. 배가 먼저 땅바닥을 때렸고 그 다음에 얼굴과 팔다리가 땅에서 번갈아 덜컹거렸다. 땅바닥에 부딪힌 얼굴은 멍하였고 눈앞에는 수없이 많은 별들이 번쩍거렸다.

손 끝에 뭔가가 걸렸다. 잡히는대로 꽉 움켜쥐었다. 청유의 옷자락이었다.

절벽 위를 미끄러지던 청유의 몸뚱이가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진 혁린까지 끌었다. 셋으로 굴비처럼 엮여진 아이들은 절벽 위에 아직도 달라붙지 못하고 질질 밀렸다.

“오빠!”

혁린의 뒤에서 날카로운 여화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뒤이어 무너지듯 절벽 끝으로 몸을 날린 여화도 멈칫멈칫 버둥거리는 혁린의 두 다리를 꽉 잡았다. 한순간에 혁린의 발목이 무거워졌다.

보이지 않게 절벽 끝으로 밀리던 겨우 그 자리에 멈췄다.


따악.

청유 삼남매의 등에 사범들이 휘두르른 몽둥이가 여지없이 떨어졌다.

우욱. 욱.

등줄기를 따라 몸을 뒤트는 고통이 온몸에 찌르르 퍼졌다.


누구도 두 손에 움켜쥐고 있는 것을 놓지 않았다.

따악. 딱.

또 한 차례의 몽둥이 세례가 삼남매의 몸에 쏟아졌다.

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사범의 모진 욕설이 터져 나왔다.

“이 새끼들아. 잡고있는 손을 놓아라. 하찮은 동정심이 필요없는 게 살수란 말이다. 그래서 오늘도 또 굶기로 작정한 거냐? 오늘까지 굶고 버틸 수 있을 것 같더냐?”

따악. 딱.

눈앞이 아찔하고 온몸의 근육이 뒤틀렸다. 삼남매는 뼈마디를 파고드는 고통을 참으며 이를 악물었다.

사범들이 더는 귀찮은 듯 몽둥이 타작을 멈추었다.

“마음대로 하거라. 죽든 살든.”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흑운비사(黑雲秘事)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21 입산 (七) 23.08.16 56 1 17쪽
20 입산 (六) 23.08.15 38 0 10쪽
» 입산 (五) 23.08.14 34 0 9쪽
18 입산 (四) 23.08.13 43 0 11쪽
17 입산 (三) 23.08.12 42 0 9쪽
16 입산 (二) 23.08.11 43 1 10쪽
15 입산 (一) 23.08.10 44 0 10쪽
14 조우 (七) 23.08.09 41 0 12쪽
13 조우 (六) 23.08.08 50 1 10쪽
12 조우 (五) 23.08.07 39 1 9쪽
11 조우 (四) 23.08.06 48 1 11쪽
10 조우 (三) 23.08.05 47 1 10쪽
9 조우 (二) 23.08.04 43 1 8쪽
8 조우 (一) 23.08.03 50 1 9쪽
7 어린 약탈자들 (七) 23.08.02 55 1 7쪽
6 어린 약탈자들 (六) 23.08.01 50 1 9쪽
5 어린 약탈자들 (五) 23.07.31 49 1 9쪽
4 어린 약탈자들 (四) 23.07.30 58 1 9쪽
3 어린 약탈자들 (三) 23.07.29 60 1 9쪽
2 어린 약탈자들 (二) 23.07.28 67 2 11쪽
1 어린 약탈자들 (一) 23.07.27 149 1 11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