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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흔] 님의 서재입니다.

흑운비사(黑雲秘事)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로맨스

[무흔]
작품등록일 :
2023.07.19 21:28
최근연재일 :
2023.08.16 08:00
연재수 :
21 회
조회수 :
1,103
추천수 :
16
글자수 :
94,212

작성
23.07.31 06:00
조회
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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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쪽

어린 약탈자들 (五)

DUMMY

삼백여 장은 족히 넘을 거리.

여진의 도적들도 그 옛날, 고구려의 그늘 아래 살았다고 하더니 맥궁(貊弓)을 썼다. 동물의 뿔로 만든 각궁(角弓). 그 맥궁이 뿜어내는 살은 허공을 빛처럼 날았다. 화살깃이 떨리며 짖어대는 울음소리는 가슴 속까지 서늘하게 만들었다.

쉬이익. 쉭.

한꺼번에 날아든 많은 화살들이 귓가를 스쳤다.

등 뒤를 살필 여유가 하나도 없었다. 잘 달리던 발끝마저 어지러울 뻔하였다.


무작정 공험진을 향해 뛰었다.

화살이 또 날아왔다.

퍼억.

옆애서 달리던 아이가 눈 위에 뒹굴었다.

퍼억.

또 다른 아이가 비명소리와 함께 쓰러졌다.

쓰러진 아이가 눈밭 위에서 버둥거렸지만 발을 멈출 아이들은 없었다.


이 공험진의 땅에서 살면서 이미 수없이 보고 겪었던 일이었다.

아이들은 어찌 달려야하는지도 본능적으로 너무나 잘 알았다.

어느 순간부터 아이들이 달리는 모습은 부채살과 같았다.

이렇게 뿔뿔히 흩어져 달아나는 것. 이 도주의 길에서 누군가는 죽겠지만 또 다른 누군가는 그 목숨을 댓가로 소중한 목숨을 이을 수 있을 터였다.

어느 방향이 더 나을 것도 없었다. 오늘같이 심각하게 위태로운 날에는 더욱 더 천운에 목숨을 맡길 뿐이었다.


헉헉.

가슴이 터질 듯 가빠 올랐다. 걷잡을 수 없이 뛰는 심장이 두 발을 잡으려고 하고 있지만 잠시라도 멈칫하면 안됐다.

어쩌면... 아무리 빨리 달린다고 해도 바짝 다가오는 도적들의 창칼에서 벗어나는 힘들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엄습하였다.

등 뒤에서는 도주를 하는 아이들의 헉헉대는 숨소리가 악착스럽게 따라왔다. 아이들의 가쁜 숨소리가 불현 듯 오히려 불안했다.

청유의 본능은 분명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이 도주의 무리에서 가장 앞에 서는 것. 오히려 화살의 과녁이 될 거라고 말이다.

눈동자가 흔드렸다. 그래. 사는 거는 운만으로 되는게 아니다. 청유는 어금니를 악물고는 달리던 속도를 조금씩 조금씩 줄였다.

청유의 곁으로 헉헉거리며 아이들이 하나둘 지나갔다. 청유의 눈에 보이는 아이들이 점점 많아졌다.


쉬이익. 쉭.

또 한 차례의 화살들이 귓가를 스치고 얼어붙은 땅에 박혔다.

헉.

청유 자신의 입에서 나는 소리가 아니었다. 훅 들이키며 짧게 새나온 단말마의 신음소리가 유난히 신경에 거슬렸다.

달리던 그대로 힐끗 눈동자만을 조금씩 이리저리 돌렸다.

서너 걸음의 앞. 몸을 들썩이며 내달리던 한 아이의 어깻죽지에 화살깃이 흔들리고 있었다.

일순 아이의 두 다리가 휘청거리며 허리가 꺾였다.

헌데 아이는 힘겹게 두 팔로 눈밭을 밀어 비실비실 무릎을 세웠다. 그리고는 두 발을 앞으로 비틀거리며 내딛기 시작하였다.

‘저런 멍청하기는. 저 걸음으로 어찌 달아나려고. 차라리. 차라리...’

청유는 내달리던 그대로 그 아이의 등을 덮쳤다.

퍼억.

마치 커다란 돌덩이처럼 청유와 아이는 하나가 되어 살얼음처럼 살짝 굳어 있었던 새하얀 눈밭 속으로 박혔다.

아이의 몸이 꿈틀거렸다. 어지간히 악착스러운 아이였다. 아이는 다시 몸을 세우려 두 팔로 땅을 밀었다.

청유는 숨을 거칠게 들이 내쉬고는 낮게 외쳤다.

“헉헉. 그대로 있어.”

아이는 일어서려고 여전히 버둥거렸다.

청유의 말은 아예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청유는 아이를 내리 눌렀다.

“그대로 있어. 죽지 않으려면. 헉헉.”

일순 몸이 굳은 듯 아이가 움직임을 멈추었다.


여전히 허공을 날으는 화살소리는 날카로웠다.

화살깃이 우는 소리가 지나간 자리에 도적들의 말발굽 소리가 한순간에 가까워졌다.

점차 다가오는 등 뒤의 말발굽 소리는 천근의 쇳덩이보다도 더 무거웠다. 삶과 죽음의 경계가 바로 이 산줄기 눈밭 위에 있었다.

움직이면 안되는데 몸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추위 때문인지 다가오는 죽음의 공포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청유는 이를 악물었다.


두두둑.

지축을 흔드는 듯 말발굽 소리들. 서서히 그렇게 서서히 다가서더니 바로 곁을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밑에 깔린 아이의 머리를 내리 누르고는 흰눈 속에 고개를 처박은 채 꼼짝을 하지 않았다.


한 무더기의 말발굽 소리가 거칠게 곁을 지났다.

말발굽 소리가 저만큼 앞으로 지나갔을 때 즈음. 나지막한 하얀 눈의 웅덩이에서 밖의 동정을 살피기 위해 고개를 내미는 산짐승처럼 청유는 조심스럽게 목을 뺐다.

저 앞 산줄기를 따라 오르는 아이들을 따라 도적들은 여전히 화살을 날리며 말고삐를 흔들고 있었다.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 주위를 살폈다.

얕은 신음소리를 내며 숨을 죽이고 있는 아이의 뒷덜미를 잡았다. 그리고는 서너 장 밖 한 곳을 가리켰다.

“저리로 뛰어들어.”


역시 흰 눈으로 덮여진 반 장(丈) 깊이의 바위틈이었다.

몸을 낮추고 그 틈 속으로 몸을 구겨 넣었다.

“헉헉.”

이제야 곁의 아이가 거칠게 내쉬는 일그러진 숨소리가 귀에 들렸다.

고개를 돌렸다.

아이의 얼굴보다는 어깻죽지를 꿰고 있는 화살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겉옷을 따라 앞뒤로 길게 핏줄기가 이어져 있었다. 저리 화살에 꿴 채로 몸을 움직인 것이 용하기는 하였다. 삐쭉 튀어나온 화살이 눈에 거슬렸지만 도적 떼들의 뒷모습이 뻔히 보이는 곳에서 당장 해줄 것은 없었다.

바위틈으로 반쯤 머리를 내밀며 등을 보이고 있는 도적들을 쳐다보았다.

도적들은 먼저 달아난 아이들을 끈질기게 쫓아 산줄기를 따라 오르고 있었다.


청유는 바위틈에 몸을 숨긴 채 이 절박한 상황을 빠르게 따져보았다. 굳이 고민을 오래할 필요가 없었다.

저 도적의 무리들은 내달린 아이들의 목숨줄을 모두 끊어 놓든지 아니면 공험진에서 마주 달려나오는 고려 기마군의 출현으로 뒤쫓는 것을 포기하든지. 오래지 않아 추격의 길을 되돌려 다시 이곳을 지나 북쪽 오랑캐들의 소굴로 되돌아 갈 것은 뻔하였다. 아직은 이 바위틈을 나서면 안되었다.

청유는 고통으로 힘겨워하는 아이의 등을 두드리며 좁다란 바위틈으로 몸을 더욱 밀어넣었다.


공험진에서 쫓겨온 도적들이 북쪽 산줄기 너머로 다시 사라졌다.

그런대로 따스했던 햇볕은 살을 에는 바람에 싸늘하였고 산그늘은 기슭을 따라 반대편 산줄기를 기어오르고 있었다.

청유는 숨죽여 숨어있던 바위틈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끄응.

그제야 신음소리를 내뱉는 아이에게 신경이 쓰였다. 아이의 등에 부르르 떨고 있는 화살깃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화살에 뚫려 흘렸던 핏줄기는 이미 시커멓게 굳어 피떡이었다.

아이를 데리고 공험진으로 돌아가려면 화살을 뽑아야 했다.

잠시 화살을 쏘아보던 청유가 옷자락의 아랫단을 부욱 찢었다. 길게 찢은 옷단을 둘둘 만 옷뭉치를 아이의 입에 들이밀었다.

의아한 표정으로 뻔히 쳐다보는 아이의 검은 눈동자가 의외로 맑았다.

“돌아가려면 화살을 먼저 뽑아야 한다.”

화살을 뽑는다는 말에도 아이의 눈빛은 그대로였다.

“아플거야. 하지만... 참아.”

짐짓 흔들린 아이의 눈빛. 아이가 아래턱을 실룩이며 그대로 눈을 감았다.

아이의 등줄기에 남아있는 화살깃이 바람에 흔들렸다. 화살깃을 감싸고 화살대 위에 양손의 엄지손가락 끝을 서로 맞대어 나란히 붙잡았다.

팔뚝에 들어가는 힘을 잠시 멈칫거리는 것. 오히려 아이에게는 더 고통이었다.

순식간에 힘을 주어 힘껏 화살대를 꺾었다.

뚝.

화살깃이 꺾여져 나갔다. 잠시의 머뭇거림도 없이 아이의 어깨살을 뚫고 앞으로 삐쳐 나온 화살촉을 잡아 당겼다.

쑤욱하니 빠져나오는 화살대. 청유 자신의 몸이 저린 것처럼 시큰하였다.

“으으.”

아이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는 단지 낮은 신음소리였다.

둘둘 말려진 옷뭉치를 앙 다물고 아이는 아래턱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아이의 턱 앞으로 손을 내밀었다.

“뱉어. 옷.”


옷뭉치를 풀어 핏물이 번져오르는 아이의 어깻죽지를 단단히 묶었다.

에엥.

그제야 아이의 얼굴을 제대로 살필 수 있었다.

“너. 너... 계집애였어?”

두세 살은 앳되 보이는 여자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계집애가... 어떻게... 이 힘든 일을...”

아이가 식은 땀이 삐질삐질 흘러내리는 이마를 옷소매로 훔쳤다. 아이는 얼른 보기에도 나이차이를 느꼈는지 대뜸 오빠라고 불렀다.

“오빠. 계집애라고 하지 마. 내 이름은 여화(如花)야. 하아. 그리고 왜 이리 시체를 뒤지며 사냐고? 그 이유야 오빠하고 똑같아. 하아. 가만히 앉아서 굶어 죽을 수는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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