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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흔] 님의 서재입니다.

흑운비사(黑雲秘事)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로맨스

[무흔]
작품등록일 :
2023.07.19 21:28
최근연재일 :
2023.08.16 08:00
연재수 :
21 회
조회수 :
1,104
추천수 :
16
글자수 :
94,212

작성
23.08.03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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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쪽

조우 (一)

DUMMY

저잣거리에서 흘려들은 오늘이 며칠이니 절기는 어떻느니 그런 말들은 공험진의 고아들에게는 아무런 쓰잘데기도 없는 소리였다.

사람들은 저 남쪽 산너머에 분명 봄이 왔다고 호들갑을 떨고 있었지만 공험진의 산기슭은 시리도록 하얗게 빛났다. 들판에 쌓인 흰눈을 파봐도 뱃속을 채울 새파란 새싹은 하나도 손 끝에 걸리지 않았다.

이 공험진의 땅에서는 봄이 여전히 멀었다.


아침 햇볕이 거적문 틈을 높게 뚫고 들어오자 청유 삼남매는 집앞에 나와 나란히 앉았다.

한지붕(?) 아래 기거하며 같이 먹고 자며 지낸 시간이 겨우 두어 달 남짓이었지만 벌써 셋은 앉고 일어나는 모습까지 닮아 있었다.

고아 신세로 전락한 사연은 얼추 비슷하였다. 그것도 꽤나 어릴 적 일이라 남아있는 기억의 흔적도 희미한 것도 흡사하였다.

시간이 더욱 흘러 그 희미한 기억조차 지워지면 애당초 친남매라고 해도 곧이곧대로 믿을만 하였다.


계집애라 그런지 여화는 한시도 말을 멈추지 않았다.

여화가 떠들어대는 말은 딱히 줄거리도 없었다. 혀 끝에 올려지는 이야기꺼리도 시냇가 자갈밭의 돌멩이처럼 이리저리 사정없이 튀었다. 저잣거리 좌판에 깔려 있는 곱상한 댕기끈을 얘기하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공험진 성벽 밑에서 벌어졌던 피튀기는 싸움질을 얘기했다.

집앞에 나와 앉은지 한 시진은 되었는데. 아니.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생기가 도는 듯 여전히 여화는 조잘거리고 있다.

청유도 혁린도 그런 여화를 신기하게 쳐다보았다.

너무나 오랜 시간을 같은 자세로 듣는 게 힘겨웠던지 혁린이 기어코 먼저 투덜거렸다.

“여화야. 너, 입 안 아프냐?”

“입이 왜 아퍼? 몸 쓰는 것도 아닌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렇게 쉬지 않고 떠들면...”

이야기가 끊겨 빈정이 상했는지 여화가 말꼬리를 올렸다.

“오빠. 당장 뭐 할 일도 없잖아.”

“그렇기는 하지만... 아. 아니지.”

여화의 표독스러운 표정도 제법 귀여웠다. 하지만 말빨로 여화를 이기기는 건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꼬투리를 잡히지 않는 게 상책이었다. 혁린은 갑자기 무슨 중요한 일이라도 떠오른 듯 얼른 청유에게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형.”

청유라고 혁린의 속셈을 모르지 않았다. 싱글벙글 얼굴을 펴며 맞장구를 쳤다.

“왜?”

“음. 그러니까. 음. 그렇지. 이제 슬슬 나가봐야 되지 않을까?”


청유는 집안 가장 깊은 구석에 짱박아 놓은 주머니를 떠올렸다. 하기야 기껏해야 이틀을 넘기지 못할 양식이었다.

사람이란 참으로 요상하였다. 두 동생을 만나기 전까지만해도 하루의 끼닛거리만 있어도 세상 부러울 게 없었는데, 지금은 이틀씩이나 버틸 넉넉한(?) 주머니도 너무 허기져 보였다. 자고로 기운이라는 게 두둑한 뱃속에서 나온다고 하더니, 잠시 떠오른 홀쭉한 주머니만으로도 팔다리의 힘이 쑥 빠져나갔다.

조금 전만 하더라도 그렇게 매섭지 않던 바람이 마치 겨울의 마지막 발악인 것처럼 들판을 쓸고와 헐렁한 옷깃 사이를 차갑게 비집고 들어왔다.

갑자기 귓불이 얼얼하고 등골이 시렸다.

대답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혁린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가야겠지.”

혁린은 마치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바로 엉덩이를 툭툭 털며 일어났다.


며칠 만에 나와보는 성벽 아래는 분위기가 묘하였다.

성벽 아래 맨땅에도 위아래가 있었다. 셋이 성벽 아래에 모습을 보이자 햇볕 따뜻한 자리에 옹기종기 모여 있던 아이들이 슬금슬금 자리를 비켜주었다.

왜 이러냐고 묻는 청유의 눈빛에 아이들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아마도 거렁뱅이 아이들의 왕초와 같이 군림하던 풍팔이 청유 삼남매에게 아작이 났다는 소문이 공험진 아이들의 귀에 쫙 퍼진 모양이다.

그 중 상석이랄 수 있는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아이가 눈치를 보며 몸을 일으킨다.

“그냥 있어.”

청유는 그 아이의 앞을 지나 늘상 앉았던 자리로 그대로 향하였다.

아이가 옮기려던 발을 멈췄다.

“왜? 여기가... 그래도 제일 좋은 자리인데.”

“아니. 됐어.”

아이가 멈칫거리며 청유의 표정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그래도 돼?”

“거기는 원래 니 자리잖아.”

여전히 시퍼런 멍이 눈두덩에 선명한 청유는 아이를 돌아보며 씨익 웃었다.

엉덩이를 붙이기에 푸근하고 유난히 바람도 피해가는 곳이 있기는 하였다. 하지만 몸이 익숙한 곳만큼 편한 곳은 없었다.

청유는 엉거주춤 서 있는 아이들을 지나 늘 혼자 앉아 있었던 곳에 자리를 잡자 아이들도 하나둘 흩어졌다.

어딘지 모르게 어색했던 분위기는 차츰 풀렸다. 아직 추위가 물러나지 않은 공험진의 성벽에는 바람이 휭하니 불었다.


어제도 그제도 그러했던 것처럼 오늘도 종일토록 공험진 성을 떠나는 기마대는 없었다.

저녁 햇볕조차 성벽 위에 나른하게 머물렀다. 북쪽 산줄기를 힐끔거리던 아이들의 눈빛은 붉게 변하는 햇볕에 풀이 죽었다.

이러면 앞으로 굶어야 하는데. 주머니가 홀쭉해진 몇몇 아이들은 눈이 실실 감기는 중에도 당장 내일의 끼니가 걱정이었다.

짧은 겨울 해는 아이들에게는 더욱 짧고 야박하게 느껴졌다.

노을과 함께 내려앉는 어둠을 지켜보며 아이들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오늘은 하늘과 땅이 하나인 듯 새하얬다.

조용하게 반나절이 지났다.

이제는 무료하기보다는 우중충한 날씨만큼이나 절박하였다.

아이들은 불안한 시선으로 북쪽 산줄기와 공험진의 성문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두두둑. 두두둑.

공험진의 성문 밖. 고려의 기마대가 성을 빠져나오고 있었다.

끄응.

청유는 성벽을 밀고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혁린과 여화도 그저 청유와 한 몸인 듯 성벽을 미는 두 손의 움직임까지 닮아 있었다.

청유가 뒤따르려는 여화를 잡아 성벽 아래에 다시 앉혔다.

“오빠, 왜?”

“너는 여기에 남어.”

“왜?”

“너는 몸이 제대로 낫지도 않았잖아. 산줄기를 뛰기는 아직은 무리야.”

“하지만 가만히 앉아있으면... 미안하잖아.”

“여화, 니가 그렇게 생각하면... 섭섭한데. 혁린하고 나는, 너를 친동생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너는 아냐?”

“오빠는 뭔 그런 말도 안되는 소리를. 나한테는 이 세상에 오빠들 밖에 없단 말야.”

“그러니까 여기 남아 있어. 알겠지?”

“에이. 오빠는 나를 너무 어린애 취급한단 말야.”

여화가 뾰로통하게 입술을 삐죽거렸다.

청유는 아예 여화의 볼을 잡아당겨 흔들었다.

“어린애 취급을 당하지 않으려면 어서 몸이나 나아라.”


오늘 약탈이 벌어진 마을은 거의 공험진의 북쪽 끝 마을이었다.

서너 개의 산줄기를 넘어 마지막 산마루를 오르기 전. 아이들은 바위 밑에 몸을 낮추고 들썩이는 숨을 고르며 기회를 기다렸다.

반 시진은 지났을까.

짙은 피비린내와 귀를 찢던 굉음이 여운을 남긴 채 북녘의 한 골짜기는 그렇게 조용해졌다. 그도 잠시였다. 마을쪽에서 통곡소리가 스멀거리며 올라왔다.

그것이 신호였다. 아이들은 그 소리에 맞추어 순식간에 산마루를 뛰어넘어 마을로 달려 내려가기 시작하였다.


마을은 울음바다였다.

자식을 잃은 부모들. 부모를 여읜 아이들. 죽은 시체들을 부여잡고 꺼이꺼이 목을 놓아 울부짖고 있었다.

마을로 뛰어드는 아이들의 귀에는 그 애끓는 호곡이 들리지 않았다. 여진 도적떼의 시체는 의외로 많았다. 한 오십여 구(具)는 거뜬히 넘었다.

뒤질 시체를 취사 선택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가장 먼저 달려온 자가 누릴 수 있는 마땅한 권리였다. 선두에 섰던 청유는 제법 그럴싸한 겉옷을 걸친 시체 옆으로 무너지듯 달려들었다.

청유는 도적의 허리띠를 잡았다.

허리띠가 쉽게는 풀리지 않았다.

이 빌어먹을 놈. 어디서 구했는지 허리띠는 틈실한 짐승의 가죽에 그것도 아주 새것이었다. 이빨로 물어뜯는다고 쉽게 끊어질 허리띠가 아니었다.

잠시 몸을 세운 청유는 사방을 휘이 둘러 고개를 돌렸다.

아. 그렇지. 청유는 그제야 허리에 깊이 찔러넣어 두었던 단도가 떠올랐다. 얼른 단도를 빼내 시체의 허리띠를 끊었다.

역시 청유의 눈이 틀리지 않았다. 이 시체는 아주 귀인이었다. 건포까지 섞여있는 주머니가 두 개씩이나 되었다.

오늘은 운수 좋은 날이었다.

아직 끼닛꺼리를 찾지 못한 아이들은 시체 사이를 허둥지둥 건너뛰며 이미 차가워진 도적들의 몸을 뒤지고 있었다.

또 하나의 시체를 뒤진 청유는, 넉넉해진 주머니를 허리춤에 단단히 꿰어넣고는 허리를 세우고 멀리 주위를 살폈다.

산줄기 너머로 반짝이는 물비늘처럼 날아오르는 잔설의 흩날림이 없었다.

청유는 천천히 허리를 숙여 얼어붙은 땅 위에 귀를 가져다 대었다.

귀에 들리는 소리. 시체 사이를 헤매고 있는 아이들의 가벼운 발걸음이 쿵쿵거렸다. 희미한 말발굽 소리가 뒤따라 들리기는 하였지만 아이들의 발소리에 묻혀 제대로 귓가에 와 닿지 않았다.

으음. 청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느긋하게 시체를 뒤져도 그래서 두 손에 들려있는 것이 많아도 도주하는데 어렵지 않을 듯하였다.

불현 듯이, 지금쯤이면 발을 동동거리며 성벽 아래서 오빠들을 기다리고 있을 여화의 허술한 옷차림이 떠올랐다.

그렇지. 이참에 옷도 한 벌. 구했으면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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