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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흔] 님의 서재입니다.

흑운비사(黑雲秘事)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로맨스

[무흔]
작품등록일 :
2023.07.19 21:28
최근연재일 :
2023.08.16 08:00
연재수 :
21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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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6
추천수 :
16
글자수 :
94,212

작성
23.07.27 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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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어린 약탈자들 (一)

DUMMY

서(序)



여진 오랑캐의 시린 칼날 아래 쓰러진 아버지는 꺼져가는 목소리로 피를 토하며 간곡히 부탁하셨다.

‘살아 남거라. 어떻게 하든 살아 남거라. 그리고 강해지거라. 이 아비처럼 이렇게 나약하게 죽지 않으려거든.’

기억조차 희미해진 오래된 과거의 그 순간. 더욱 선명한 것은 천부의 부적과 같은 ‘기어코 살아남아 강해지라’는 아버지의 마지막 가르침이었다.


하루에도 두세 번씩 주인이 뒤바뀌는 북쪽 변방의 땅.

의지할 피붙이 하나도 없는 어린 고아가 살 수 있는 방법은... 가난한 길거리를 떠돌며 비루하게 끼니를 구걸하든지, 오랑캐들에 의해 시도때도 없이 벌어지는 약탈의 현장에서 목숨을 담보로 위태롭게 양식을 구하든지. 단 두 가지뿐이었다.


열 여섯. 어린 청유의 하루하루는 언제나 힘겨운 전쟁이었다.


피비린내 진동하는 수렁에서 꺼내준 은인은, 보은보다는 사내의 의리를 먼저 입에 올렸다. 험한 세상을 살아왔던 청유에게 의리는 그 무엇보다도 솔깃하였다. 은인의 목소리는 굵었고 눈빛은 맑고 강인하였다.

그 철석같은 의리를 믿고 주인으로 모시고 살겠다고 약조하였다. 수족을 약조한 청유에게 은인은 떠나고 싶을 때 언제든지 떠나라고 하였다. 은인의 믿음은 더욱 커 보였다.


언제부턴가 끈끈한 의리로 맺어졌다고 여겼던 그 붉은 마음이 퇴색되어 보이기 시작하였다. 아니. 그것이 아니었을지도, 그 믿음이라는 것이 처음부터 그저 겉만 번지르르한 허울이었을지도 몰랐다.


흑운(黑雲). 은인이 청유와 형제들을 가까이 부르며 내려준 이름이었다.

은인은 이미 우리의 미래를 정해 놓았던 게 분명하였다. 기나긴 살업에 지친 후에야 그 흑운이라는 이름이 절절하게 가슴에 와 닿았다.

은인은 청유와 그 형제들을 왜 검은 구름이라고 이름 지었겠는가.


보이지도 않는 검은 먹구름처럼 그렇게 은인의 곁에 머물다가, 언젠가는 은인이 불어대는 한 가닥 바람을 따라 흔적도 없이 사라져야 하는 그런 존재로. 허상과 같은 그림자처럼 살다 죽으라.

그렇게 말이다.


이 글은 고려 초 혼란의 시절을 배경으로 의(義)와 애증(愛憎)을 다룬 무협소설입니다. 역사적 사건과 인물을 빌려 쓸 뿐 역사적 사실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무흔 배(拜) ([email protected])


* * * * *


어린 약탈자들



앙상하게 메마른 잡목과 바윗돌이 간간이 뼈다귀처럼 속살을 드러난 새하얀 산줄기. 온 산천을 뒤덮고 있는 차가운 눈은 겨울 내내 쌓인 덕에 거침없이 푹푹 빠졌다.

헉헉.

험악한 세상만큼이나 매몰찬 땅바닥은 마치 늪지대의 진흙뻘처럼 두 발목을 사정없이 잡아당겼다.

가슴을 들썩이던 숨은 어느새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르기 시작하였다. 이를 악물어 굳게 닫혀있던 아래턱은 치받는 거친 숨결에 저절로 떨리며 벌어졌다. 그렇다고 두 발을 멈출 수는 없었다.

이 산줄기에서 두 발을 움직이지 못한 채 더 내달리지 않는다면, 바로 그것이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열 여섯 청유의 하루하루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위태로이 달리는 것이었다.

언제부터인지도 모를 처참한 어린 시절. 이렇게 힘겹게 달려서 끼니를 구했고 이렇게 달려서 목숨을 구했다.


달리는 것은 숨 쉬는 것만큼이나 자신이 있다고 여겼었는데 이 험한 산줄기를 넘나들 때마다 심장은 고통을 고스란히 안은 채 걷잡을 수 없이 힘겹게 뛰었다.

귓가에는 훅훅 내뿜는 도적떼 말들의 입김이 따라왔고 지축을 흔드는 말발굽 소리는 금방이라도 뒷덜미를 잡아당길 것처럼 조금 전 청유가 넘어왔던 등 뒤 산마루를 올라탔다.


휘이익. 휙.

파파팍. 팍.

순식간에 허공을 건너온 화살이 귓가를 스치며 반쯤 얼어있는 새하얀 땅바닥에 박혔다. 날카로운 화살촉에 파헤쳐진 눈조각들이 보석처럼 흩어졌다.

고개를 돌려 뒤를 살필 여유가 없었다.

땅바닥에 박힌 화살이 부르르 떨며 울었다.

발끝을 힘껏 찼다. 얼어붙은 땅바닥의 여운에 못이겨 흔들리고 있는 화살깃을 넘어 발을 쭉 뻗었다.

두꺼운 눈 속에 가려져 있던 돌부리를 밟은 발이 기우뚱하게 한쪽으로 쏠렸다.

균형을 잃은 몸이 휘청거렸다.

허리춤에 단단히 묶은 작은 주머니가 두려움에 떨 듯 힘없이 흐느적거렸다.


휘이익. 휘익.

잠시의 틈도 없이 도적떼가 날린 화살이 등 뒤에서 또 다시 날아들었다.


퍼억.

둔탁한 소리와 함께 옆의 아이가 눈 위에 뒹굴었다.

퍼억.

또 다른 아이가 붉은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함께 달아나던 아이들 중에 쓰러진 아이들을 부축하려고 발길을 멈출 아이는 없었다.

마지막 하나의 산등성이. 마치 태산과 같이 까마득해 보이는 저곳만 넘으면 고려의 최북방 , 공험진이었다.


이 북방의 땅에서 고아로 떨어져 질기게도 목숨을 이어온 아이들에게, 목숨이 경각에 달린 절박한 상황은 처음 겪은 일이 아니었다.

아이들은 이런 절체절명의 순간을 어떻게 벗어나야 하는지 본능적으로 잘 알았다.

누군가 소리를 질러 신호를 해준 것도 아니었다. 어느 순간부터 확 간격을 벌인 아이들은 부채살 모양으로 흩어져 산등성이를 기어올랐다.

이렇게 뿔뿔이 흩어져 내달려야, 누군가는 죽겠지만 또 다른 누군가는 그 죽은 아이의 공덕(?)으로 질긴 목숨을 이을 수 있을 터였다.

어느 방향이 더 나을 지는 아무도 몰랐다.

단지 운이었다.


가까스로 마지막 등성이에 오르자 지옥의 야차처럼 살벌하게 뒤를 쫓던 오랑캐의 화살은 더 이상 아이들의 등을 괴롭히지 않았다.

헉헉.

청유는 그제야 하얀 눈밭에 무릎을 박고 터질 듯이 커져버린 가슴을 들썩이며 숨을 골랐다. 초점까지 흔들거려 저 멀리 산능선 아래의 광경이 안개속처럼 흐릿하게 보였다. 그토록 지겹도록 따라붙던 도적떼들이 말머리를 돌리고 있었다.

오늘도 천운은 청유에게 있었다.


목숨을 담보로 하루하루의 끼니를 얻는 위험천만한 길. 고려의 북쪽 변방에서도 가장 밑바닥 아이들만이 할 수 있는 최악의 일이었다.

처절한 전쟁터와 같았던 도주의 현장에서 뿔뿔이 흩어졌던 아이들이 하나둘 공험진의 성벽 아래로 몰려들었다.

아이들의 옷차림은 낡고 지저분하였다. 찢어진 옷 사이로는 이미 굳어져 버린 핏물이 덕지덕지 딱지가 되어 붙어있었다. 아이들은 더 깨끗해질 리 없는 옷자락을 휘적휘적 손등으로 튕기어 흙먼지를 털어냈다.


햇볕이 맴도는 남쪽 성벽에서는 살을 에는 삭풍도 잠시 멈추었다.

한나절을 죽음과 사투를 벌인 아이들에게 공험진의 저 너머 산등성이부터 악착스럽게 쫓아오던 죽음의 그림자를 떨궈 버리기에 이곳보다 좋은 곳도 없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아이들은 따스하게 달구어진 성벽에 털썩 몸을 기대었다.

피로에 지친 몸은 햇볕을 받아 나른하였다. 눈꺼풀을 괴롭히는 햇살에 천근인 듯 게슴츠레 뜨고 있던 눈이 스르르 감기었다. 어느 순간 성벽에 기댔던 아이들의 몸뚱이도 흐물거리며 쓰러져 성벽 밑으로 물처럼 흘러내렸다.

기절처럼 곯아떨어졌던 쪽잠에서 깨어나자 온몸을 내리누르던 피곤이 잠시 물러났다.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몸을 일으키는 아이들의 눈동자에는 서서히 생기가 돌기 시작하였다.

부스럭거리며 허리를 다시 성벽에 붙인 아이들은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성벽 아래 똑같은 모습으로 두리번거리는 친구 아닌 친구들의 얼굴을 서로 살폈다. 오늘 늦은 아침. 이 성벽을 떠날 때 같이 나섰던 무리 중에서 눈에 띄지 않는 아이들이 더러 있었다. 일순 낯빛이 어두웠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어디 한두 번 겪었던 일이던가. 아이들은 이내 잠결에서도 두 손으로 감싸안고 결코 놓지 않았던 허리춤 주머니로 시선을 옮겼다.

허리춤에 묶여있는 주머니는 가벼웠다. 그렇지만 아쉽지는 않았다. 늘 뱃가죽은 등줄기에 붙어있던 터라, 그런대로 아껴먹으면 닷새는 족히 버틸만한 양식이었다.

며칠이 지난 후에는 어찌되었건 당장 닷새는 아무런 걱정없이 공험진 성벽에서 햇볕을 즐기면 되었다.


고려라는 나라가 세워진 지 겨우 십여 년. 고려 군영의 힘이 닿지 않는 북쪽 변방의 땅은 약탈이 판치는 무법 천지였다.

겨우 화전을 일구며 끼니를 연명하는 고려의 백성들에게 수십여 명씩 떼지어 다니는 여진의 오랑캐들은 시도때도 없이 들이닥치는 약탈자들이었다.

약탈이란, 굶주린 세상에서 좀 더 쉽게 세상을 살아가는 삶의 또 다른 방편이 아니던가. 그렇다고 약탈로 먹고사는 오랑캐들의 하루도 마냥 쉬운 것은 아니었다. 약탈도 오랑캐들의 생업인지라 이미 몸에 익을대로 익었지만 느긋하게 약탈을 자행할만큼 항상 여유롭지는 않았다.

더 많은 욕심으로 약탈에 정신이 팔린 사이에 국경을 순찰하던 고려 토벌군의 창칼에 걸려들기 일쑤였고 그 실수의 댓가는 하나뿐인 목숨이었다.

가까스로 살아남은 몇몇 도적들이 북쪽 변경 밖으로 도주한 후 토벌군은 국경을 따라 또 다른 곳에서 벌어지고 있을 약탈의 현장을 찾아 이동을 하였다.

척박한 땅을 떠도는 도적들일수록 의리는 의외로 돈독하였다. 토벌군의 기척이 사라지면 도주하였던 도적들은 제 동료의 시신이라도 수습하고자 닦달같이 되돌아오곤 하였다.


여진의 도적들과 토벌군이 한 차례씩 폭풍처럼 다녀간 화전(火田)의 마을. 토벌군들은 떠나고 도적의 무리들은 미쳐 되돌아 오지 못한 그 짧은 통곡의 시간. 약탈의 현장에서는 또 다른 약탈이 벌어졌다.

마치 그 시간만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공험진 쪽 산등성이를 넘어 참혹한 마을로 달려들은 아이들은, 붉은 피로 땅바닥을 수놓고 죽어버린 도적들의 시체를 뒤적이며 바쁘게 뛰어다녔다.

그랬다. 이 변방의 고아 아이들이 피비린내 진동하는 이 약탈의 현장에 마지막으로 남아있는 최후의 약탈자들이었다.


부모라는 그늘이 없는 아이들. 세상 어디에도 기댈 곳이 없는 그 불쌍한 인생들이 마치 정해진 운명처럼 발을 들여놓는 처음 일이 구걸이었다.

하지만 말이 좋아 구걸이지 그 구걸도, 풍요로운 고읍도 아닌 궁핍하기 이를데 없는 이 머나먼 북녘의 변방에서는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시퍼렇게 날선 도적들의 창칼이 언제 들이닥칠 지도 모르고 거듭된 흉년으로 곡식조차 구경하기 힘든데 그 누가 선뜻 아이들에게 적선을 하겠는가.

뜯어먹을 풀뿌리조차 하얀 눈 속으로 사라진 겨울. 구걸만으로 목숨을 연명해 보겠다는 허무맹랑한 생각은 말 그대로 망상이었다.


구걸조차 힘들어진 곳에서 팔다리가 멀쩡한 고아 아이들이 할 수 있는 일. 그 마지막 남은 일거리가 딱 한 가지 더 있었다.

그것은... 모진 목숨을 어떻게든 잇기 위해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마지막 밑천인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 약탈과 토벌이 멈추고 잠시 통곡만이 자욱한 살육의 현장으로 뛰어들어 도적들의 시체들을 뒤지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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