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글거리는 속을 억누르고 있을 때, 카카오 톡 알림 음이 울렸다. 이 시간에 나에게 메시지를 보낼 만한 사람이 몇 없는데, 하고 조금은 들뜬 마음으로 카카오 톡을 실행시키자, 엄마에게서 온 메시지가 카카오톡 화면에 나타났다.
- 딸, 엄마는 해 보러 동해 간다. 부럽지?
그래, 누가 나에게 이 시간에, 이런 날에 메시지를 보내겠어. 딸한테 카카오 톡으로 자질구레한 걸 자랑하는 게 취미인 엄마나 나한테 보내겠지. 그나저나 엄마는 오늘도 여전히 나에게 엄마의 일상생활을 자랑하고 있었다.
- 응, 정말 부럽네. 와 부럽다!
영혼도 감정도 담겨있지 않은 답변을 보내고 휴대 전화를 내려놓기도 전에 칼 같은 엄마의 답장이 도착했다. 가끔 보면 나보다도 타자치는 게 빠른 엄마다.
- 딸은 뭐하고 있니?
- 그냥 카페.
- 이 시간에? 아니 그보다 새해를 카페에서 맞을 셈이니?
- 뭐 어때. 새해라고 뭐 바뀌는 것 도 없잖아.
- 애인도 없니 너는?
엄마의 정곡을 찌르는 카카오 톡 메시지에 나는 울컥했지만, 최대한 냉담하게 반응했다.
- 그런 거 안 키워.
- 딸, 엄마는 눈물이 앞을 가린다. 새해에는 꼭 애인 만들어. 20대 중반 멀쩡한 아가씨가 애인 하나 없다니 말이 돼?
- 2013년 된다고 뭐라 달라지나? 아 몰라몰라. 김여사님은 2013년 첫 해나 잘 보고 오쇼~
“쿡쿡.”
답장을 보내고 신경질을 내며 휴대 전화를 내려놓자 옆에 있는 남자가 가볍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고 보니, 아직까지 옆 자리에 앉아있었지.
“아, 미안해요. 그냥 보이기에... 어머님이 참 유쾌하신 분이신 것 같아요.”
“그렇죠. 우리 엄마는 좀 젊게 살아요.”
이상하게도, 내 사생활을 훔쳐봤다고 할 수 있는 행동인데도, 남자의 언행이 기분 나쁘지 않았다. 넉살 좋게 말을 걸어오는 게 친근해서 그런 걸까. 아니면 적당히 내 취향에 부합하는 외모라서? 어쨌든, 남자가 경계심 없이 다가오자, 나도 경계심이 한 층 옅어지는 건 사실이었다.
“여기는 자주 오세요?”
“네, 집이 이 근처거든요.”
“아, 그렇군요. 혹시 럭키 아파트?”
“어? 어떻게 아셨어요?”
“저도 며칠 전에 그 아파트로 이사 왔어요. 혹시나 해서 물어봤는데, 우연이네요.”
나와 눈을 마주치며 살포시 웃는 그 남자는 무척이나 매력적이었다. 이런 사람과 새해를 함께 맞이한다면 충분히 기분이 좋은 한 해가 될 것 같다.
“저는 혁인이에요. 권혁인.”
“아, 희은이에요. 김희은.”
‘혁인’이라는 이름이 봄바람처럼 살랑살랑 내 마음에 새겨졌다. 남자는 내가 예상했던 것처럼 23살이었고, 제대 한 뒤, 여행을 떠났다가 이제 복학할 예정이라고 했다. 내가 26살이라고 했더니, 물론 빈말이겠지만 놀라워하며 훨씬 어려보인다고 말해 기분이 좋았다. 이 사람은 사람을 기분 좋게 하는 그런 향수라도 뿌린 건지, 웃는 횟수가 점차 많아지고 있는 내가 있었다.
문득 시간을 확인하려고 벽에 걸려있는 시계를 바라보니 어느새 시침이 1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사실은 오늘 직장 상사의 히스테릭한 짜증을 고스란히 다 받아주고, 스트레스를 잔뜩 받아서 이 가게에 들어왔다. 달달한 커피를 마시며 조금 기분 전환이 되던 때, 저 오징어 같은 여자가 내 스트레스를 가중 시켰었는데, 어느새 그런 스트레스는 모두 사라지고 내가 왜 짜증을 부리고 앉아 있었는지도 잊었다. 혁인은 그만큼 유쾌한 말동무이자 마음에 드는 남자였다.
“누나라고 불러도 되요?”
“나야 좋죠.”
“누나 말 편히 하세요.”
“조금 더 친해지면 그때 편하게 할게요.”
마치 데이트라도 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대화가 잠깐 끊기고 잠시 정적이 찾아왔다. 그 때 옆자리에서 작은 소리로 나누는 대화 소리와 여자의 흐느낌이 들렸다.
“민철씨, 다 알잖아요. 하아.”
“...혜영아. 여기서 이러면 안 돼.”
“왜요? 왜 안 되죠?”
깜짝 놀랐다. 그 여자는 사장님을 똑바로 바라보며 울고 있었다. 눈물을 볼 위로 한 가닥, 두 가닥 흘려보내며 사장님한테 화를 내고 있었다. 앞 뒤 상황을 몰라도 진부한 스토리인 건 알겠다. 아마도, 자신이 열심히 발바닥에 땀나도록 이 가게에 드나들고 끼를 부려도 넘어오지 않는, 아니 반응조차 없는 사장님에 대한 야속함이 참을 수 없이 커져, 눈물을 보였겠지.
막상 짜증이 사라진 감정의 한 구석에 같은 여자로서 그녀의 마음이 다가와 싱숭생숭 해졌다.
조용히 여자를 달래며 사장님은 힐끗하고 나를 잠깐 쳐다봤다. 난처하다는 기색이 역력한 눈빛. 여자는 사장님의 그런 시선을 놓치지 않았고, 한층 더 표정이 어두워졌다. 입술을 깨문 여자는 표독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한 번 훑어보고는 외투와 가방을 챙겨 일어섰다. 구두소리를 또각또각, 가게 안에 남기며 문을 열고 나섰다. 사장님은 여자의 뒷모습이 아련하게 남아있는 문을 한참동안 씁쓸하게 쳐다보다가 주방으로 들어가셨다.
“사장님이 인기가 많으신 것 같아요.”
“네, 뭐. 워낙 매너도 좋고, 멋있잖아요.”
바닥을 보이는 블루 사파이어의 잔에 꽂힌 빨래로 얼음들을 휘휘 돌리며 대답했다. 마음이 어수선했다. 내가 끼어들 문제는 아니었지만 그냥 괜스레 날도 날이고, 감정 변화가 오늘 유난히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 같다.
“누나도 사장님 같은 타입이 좋아요?”
“음? 저는 나이 따져요 왜 이래요.”
“아, 사장님이 나이가 많으신가 봐요.”
“혁인씨는 사람 나이 잘 모르는 구나. 나보고도 아까 그러더니, 사장님 저래보여도 40살이세요.”
“정말요? 훨씬 젊어보이시는데...”
혁인이는 주방 쪽을 한 번 슬쩍 봤다가 다시 나를 바라봤다.
“그런데 누나 저 아까부터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는데요.”
나는 빨래를 입에 물고 눈썹만 움직여 말해보라는 무언의 긍정을 표시했다. 혁인이는 얼음물이 든 컵을 들어 목을 잠시 축이더니 그 후로도 말을 못하고 한참을 컵만 뚫어져라 바라봤다.
“흠흠, 그러니까….”
“뭔데 그래요?”
나는 뜸을 들이는 혁인이의 행동에 조금 기대를 하게 됐다. 여자와 사장님일 때문에 마음이 어수선한 건 어수선 한 거고, 지금 뭔가 말을 꺼내려는 혁인이의 행동은 나에게 벌어진 사건이었다. 당연히 이 쪽 일이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혹시나 연락처를 달라거나, 계속 연락하지 않겠냐는 식의 말이 나오지 않을까하며 차분한 척 기다리는 데, 혁인이가 드디어 말을 꺼냈다.
“여….연……세대학교 가려면 지하철이 빨라요. 버스가 빨라요?”
“네?”
“아니, 그러니까 그게 제가 연대생인데 여기 이사 온 지 얼마 안 되서 그러니까 이게….”
기대와는 전혀 다른 엉뚱한 질문에 내가 얼빠진 표정으로 쳐다보자, 혁인이는 고개를 푹 숙이고 옹알이 하듯 뭐라 뭐라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제가 차가 있긴 한데요. 아버지한테 받은 중고차인데, 그게 사실 서울에서는 자동차보단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게….하아. 죄송해요. 그러니까요.”
내가 아무 말 없이 계속 쳐다보고 있자 더 깊이 고개를 숙이며 웅얼거리던 혁인이는 고개를 다시 번쩍 들더니 나를 똑바로 쳐다봤다. 나는 재촉하지 않고 그냥 묵묵히 시선을 마주치며 혁인을 쳐다보았다. 이럴 때 묵묵히 기다려주는 게 여자의 매너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데, 넉살이 좋던 사람이 이런 면에선 또 약한 게 의외라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풋, 네 그러니까요?”
“그러니까…. 누나 혹시 여…연,연락처 좀 줄 수 있어요?”
연락처 달란 말이 그렇게도 어려웠나. 귀여우니까 그래도 봐준다.
나는 물 컵 옆에 있는 혁인의 휴대전화를 가져와 내 번호를 누르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내가 설정해 둔 컬러링을 들으며 혁인이의 번호가 내 휴대전화에 찍히는 걸 확인한 후, 종료 버튼을 누르고 다시 돌려줬다.
약간은 얼빠진 표정으로 내 행동을 지켜보다가 휴대전화를 받아든 혁인은 그제야 크게 웃었다.
“하하하! 누나, 누나 진짜 매력있어요.”
“그래요? 고마워요.”
“정말로요.”
하얀 이를 가지런히 드러내며 활짝 웃는 혁인이는 신이 나 휴대전화에 찍힌 내 번호를 저장했다. 그 때 나와 혁인이 앞에 칵테일이 한 잔 씩 올라왔다. 주방에서 나온 사장님이 어느새 우리 앞에 서 있었다.
“이건 서비스. 그런데 희은씨, 나두고 바람피우는 거예요?”
마음이 좀 정리가 된 건지 평소처럼 장난을 치는 사장님은 괜찮아보였다. 나는 사장님의 기분을 맞춰주기 위해 맞장구 쳤다.
“뭐, 그러면 안 되나요?”
“누나 나이 많은 사람 싫다더니, 나 가지고 논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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