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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죽재

관악구 산신령 도봉구

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판타지

아라운
작품등록일 :
2020.02.09 14:38
최근연재일 :
2021.02.17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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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9,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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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1.25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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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121화. 전화위복, 금상첨화(2)

DUMMY

"흑룡의 피를 잔뜩 묻힌 팔이다. 그러고도 온전히 인간의 팔로 남아있을 것이라 생각했느냐."

"이미 오래 전부터 인간의 팔 정도는 아니었습니다만."


관악산의 정기가 몸에 머물 때부터 이미 평범한 인간의 육체는 뛰어넘었다.

며칠만 쉬면 낫는 회복력부터 해서, 호랑이의 주먹을 막고도 부러지지 않는 뼈나 웬만해서는 생채기도 나지 않는 질긴 피부까지.

물론 낮에 몽랑에게 맞은 건 속에 골병이 들지 않을까 생각할 정도로 아프긴 했어도, 손짓 한번에 악귀를 봉하기 위한 결계마저 깨트려버리는 도깨비와 대판 싸움을 벌인 것 치고는 쌩쌩한 편이었다.

이게 어딜 봐서 보통 사람이겠나. 당장 국정원이나 정부 산하 비밀 연구소로 끌려가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다. 해부나 당하지 않으면 다행이리라.


"용의 피를 머금은 육신은 그 단단함이 이루 말할 수 없고, 용의 비늘을 닮은 피부는 그 자체만으로 온갖 삿된 것과 독기를 부정하노라."

"설마 피 좀 묻었다고 해서 비늘이 돋아나는 건 아니죠?"


딱히 뱀 같은 파충류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그래도 호와 불호의 수준에서 갈리는 것과, 직접 내 몸에 비늘이 돋아나는 건 전혀 다른 관점의 문제지 않나.

이에 아랑 님이 익살스런 미소와 함께 답했다.


"걱정 말거라. 혈족이 아닌 이상 어려운 일이니. 용의 피를 이어받은 직계, 혹은 이무기의 혈손 정도가 아니면 그 정도 피가 묻었다고 해서 네가 변하는 일은 없을 거다."

"휴, 그건 다행이네요. 그나저나 잠깐 용의 피와 접촉했다 하여 그 정도의 공능이 일어날 줄은 몰랐습니다."

"사실 엄밀히 말하자면 핏물에 파묻히고 젖어 범벅이 되지 않았더냐. 거기에 나의 몸뚱아리 안에서 영력을 흘려 보내 내 기운과 접촉했으니..."


수염이 없음에도 아랑 님은 턱을 쓰다듬으며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눈치였다.


"그래, 혹여 지크프리트란 인물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있느냐."

"...그건 어떻게 알고 계신 거에요."


솔직히 그 이름을 아랑 님의 입에서 들을 줄은 몰랐다.

동아시아 한 나라의 신령이 저 멀리 유럽의 중세에서 불렸던 이름을 알고 있다니. 지나가던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그래서 대답은?"

"당연히 알고 있죠. 판타지 쪽 매체에 자주 등장하는 이름들 중 하나인 데다가, 문학적으로도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으니까요."


명색이 글을 쓴다 깔짝거리고 있는 사람이다.

점점 비축해둔 분량이 짧아져서 조만간 하루 날 잡고 글만 딥다 써야 하겠지만, 아무튼 연재 펑크 없이 꾸준히 일정한 주기로 연재하고 있을 정도로 관심은 있다.

지크프리트, 독일 게르만 영웅서사시 중 하나인 '니벨룽의 노래'의 주인공.

더군다나 그는 북유럽 신화의 갈래인 '볼숭 사가(뵐승 사가)'의 시구르드와도 동일시되거나 깊은 연관이 있는 인물이다.


"지크프리트와 시구르드. 북유럽과 중세 독일 문학에서 비롯된 캐릭터성은 이후 수많은 문학 및 예술 작품에서 모티브로 작용하였죠."


이들에게서 비롯된 캐릭터들이 소설은 물론 만화와 게임에서도 살아 숨쉬고 있으니, 그 영향력은 원전이 기록된 시기부터 수백 년이 흐른 지금에도 이루 말할 수 없다.

어떻게 잘 알고 있냐고? 그거야.


"이래 보여도 종교학과 출신이에요. 북유럽 신화와 게르만 신화에 관한 내용은 학교에서 배웠거든요."


외할머니로부터 이어진 핏줄에 대해 알기 위해서는 객관적이며 체계적으로 정리된 정보가 필요했다. 알음알음 귀동냥으로 들은 정도로는 부족했다.

이러한 관심과 열정이 더해지고 나니, 나는 어느새 낙성대학교의 종교학과 학생이 되어 있었다.

교수님들 중에는 한국의 신앙을 중점적으로 연구하시는 분도 계셨으니까. 전에 뵈었던 홍 교수님이 한국 무속신앙을 전공하셨다.


물론 지크프리트에 대한 이야기는 학교에서만 접한 건 아니다.

만화나 웹소설로도 많이 읽어 보았고, 게임은 하지 않지만 게임에서 나왔던 정보들은 이미 인터넷을 통해 여러 번 보기도 했다.

정말이다. 나는 그런 가챠(현금으로 목록 상의 랜덤한 경품을 획득할 수 있는 아이템을 사는 행위) 게임에 돈을 쓴 적이 없다.


...적어도 지금은 안 한다.


"그래서 아랑 님은 어떻게 그걸 알고 계신 겁니까."

"용과 관련된 설화이기 때문이니라. 동서양을 통틀어 그런 이야기는 흔치 않으니 말이다."


그제서야 나는 깨달았다. 어째서 그녀가 그 이름을 입에 담았는지를.


"악룡 파프니르(Fafnif)를 참살한 영웅. 바다 건너 저 멀리 다른 나라서 건너온 이야기긴 하나 어쨌든 용을 죽인 설화니까..."

"우리네 땅에선 뱀이 오랜 세월을 묵어 이무기가 되고, 이무기가 다시 인고의 세월을 닦아 용으로 승천하지만."

"저쪽은 처음부터 용이죠, 뭐. 그래도 본질적으로는 용이란 정체성을 가지고 있으니, 아랑 님이 알고 계시는 것도 큰 무리는 아니겠네요."


"그가 파프니르를 죽인 뒤 용의 피로 젖어 불사의 육체를 가지게 된 것처럼, 지금 제 상태도 그것과 비슷해졌다는 이야기인가요?"

"아마 네 경우엔 두 팔만 해당이 되겠지. 허나 나 역시 이 땅에서는 제법 이름이 알려져 있는 용이니라."

"제법 이름이 알려져 있다니요. 아랑 님은 한반도에선 제일 잘나가는 용이 아닙니까."

"하랑, 굳이 내 얼굴에 금칠을 칠할 필요는 없단다."


큼큼. 목을 가다듬은 아랑 님은 눈을 빛내며 말을 이었다.


"흑룡의 피가 묻은 팔에는 창칼과 화살이 통하지 않으니. 네 이상의 힘을 머금지 않은 날붙이에는 결코 상처 입을 수가 없음이니라."

"일상생활에서도 유용하게 쓰일 수 있겠네요."


아무런 장비 없이 팔로 칼 같은 걸 막을 수 있다는 건가.

가위나 식칼에 손가락 베일 염려는 없겠다. 식사 준비할 때는 편하겠네.


"아마 억지로 팔에 상처를 입힌다면 그 지이잉-하고 돌아가는 칼날 정도는 쭉 대고 있어야 할 게다."

"...무슨 그런 험한 말씀을 하고 그러세요."


고기나 철강 자르는 절단기를 말씀하시는 거 아니야 지금.

그걸로 안 잘라지는 게 있나? 당혹스러움에 머리 속이 순간 휑했다.


"그 정도로 단단하면 총알 같은 건요?"


연하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게 무슨 방탄유리도 아니고 그걸 어떻게 막겠냐. 권총 시연 영상 같은 거 보면 막 철판도 뚫고 그러던데."

"흐음... 혹시 괜찮다면 시험해줄까?"

"네?"


미려가 손가락을 빙빙 돌리며 말했다. 그녀의 손가락에 걸린 검은 물체가 휙휙 소리와 함께 자기 존재를 뽐냈다.


"구식이긴 해도 여전히 잘 쏴지긴 하더라."

"...어디서 구하신 거에요?"

"북한강의 원류는 저어기 금강산에서부터 시작하거든. 그쪽에 또 내가 아는 사람들이 쫙 깔렸잖아."


요는 북한산 총이라는 거다. 보아하니 옆면에 백 뭐시기 라고 쓰여있는 것 같아 보이기도 하고.

조금만 시간을 주면 암묵적으로 동의하는 줄 알 테니, 나는 혹시나 싶어 황급히 손을 휘휘 저었다.


"총 맞을 일이 살면서 얼마나 있겠어요. 애초에 우리나라는 민간인이 총을 들고 다니는 걸 엄격하게 금지하는데."

"그건 또 모르는 일이다? 도 산신도 나랑 똑같은 생각 아니야? 그렇지, 하랑?"

"동감한다."


원군을 얻은 그녀의 목소리는 신이 나 있었다.


"그 몽랑인지 하는 도깨비 새끼를 내 손으로 잡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 복수는 해줘야 할 것 아니야. 그 자한테 졌으면서."

"...아쉽게 판정패였거든요?"

"어쨌든 결과는 그렇게 말해주고 있지. 네가 말한 대로 그런 조직적인 범죄까지 저지를 수 있는 자라면 휘하에 설마 총을 다루는 사람 하나 없을까."


순간이나마 미려의 주장에 마음이 끌렸다. 하마터면 홀랑 넘어갈 뻔 했다.


"어차피 보일만한 거리에서는 총알을 피할 수 없고, 보이지 않을 만큼 먼 거리에선 총을 쏘는지도 모르잖아요."

"그렇다고 무방비로 다닐 거야?"

"강철보다 더 단단해졌다는 건 팔뚝이 전부인데, 사실 총을 쏘려면 몸통이나 머리를 쏘겠죠. 그리고..."

"그리고?"

"그인지 그녀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 자식은 총 같은 건 사용하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드네요."

"확신해?"

"어차피 이 땅에서 총을 써봤자 정부나 공권력이 개입할 빌미만 제공할 테니 그쪽도 괜한 신경 쓰고 싶지 않으면 자제하겠죠, 뭐."

"도 산신님의 의견에 저도 동의합니다."


미려에게 하랑이 있었다면, 내겐 옥향이 있었다. 그녀가 대화를 이어받아 내 뒤를 받쳐주었다.


"웬만한 도검이 도봉구 님께 창상을 남기지 못한다는 건 즉, 메스와 주사기의 바늘 또한 소용이 없다는 이야기. 팔뚝과 손목에 제한되지만, 만약 그 부분이 심하게 다쳤다면 다른 병원에서는 손을 써볼 염두도 없을 거에요. 마취도 되지 않는데 그걸 어떻게 처치를 하겠어요."


더군다나 총을 쏜다면 필시 크게 다칠 터인데, 라며 옥향은 말을 줄였다.

이후로도 몇몇의 대화가 끊임없이 이어진 가운데, 오늘 하루 동안 너무나 많은 일이 있던 탓일까.

긴장이 풀림과 동시에 눈썹이 갑자기 무거워졌다.


"어, 어라. 도봉구? 야!"


이런, 또 다시 잠들고 싶지는 않았는데.

의식의 실이 톡, 하고 끊겼다.


* * *


"피곤하겠지. 그 망량과 한바탕 전투를 치르고 나서 쉬지도 못하고 내 거처에 오지 않았더냐. 더군다나 나를 치료하기 위해 한차례 정신을 잃기도 했으니... 미려."

"네, 아랑 님."


어조가 달라진 것을 느낀 미려가 아랑에게 고개를 조아리며 답했다.


"저 의원을 다시 집으로 편히 데려다 줄 수 있겠느냐."

"아랑 님의 말씀이시라면 설사 저 분을 북한으로 데려가 달라 하여도 수행해 보이겠어요."

"저기... 그건 죄송한데 제가 바라는 게 아니라서."

"나 한강의 신령, 아랑을 도와준 보답은 나중에 치르도록 하겠으니. 때가 늦었구나. 객은 돌아갈 시간이로다. 미려, 부탁한다."

"네, 아랑 님."

"그리고 하랑."

"예."

"오늘 있었던 일을 아침부터 소상히 정리해 문서로 만들어줄 수 있겠느냐. 내가 이곳에 머물기 시작할 때부터의 상황도 같이 포함하여 말이다."


하랑 또한 자신의 윗전에게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말할 필요 없이 마땅히 따르겠다는 눈치였다.


"이솜과 상의하여 준비하면 좋겠구나. 한강의 용신을 중독시키는 술수를 부릴 줄 아는 도깨비라."

"도 산신이 말하기를, 그 자는 두억시니라 했습니다."

"두억시니... 그렇구나. 아무튼 정리를 부탁한다. 임진강에는 내가 연락할 터이니, 후에 날을 잡아 한강의 흐름에 몸을 담근 이들이 모두 모여야 하겠구나."


한강의 본류와 큰 지류 뿐만 아니라, 한강과 닿아있는 이름난 강들의 신령들을 모두 모으겠다는 이야기였다.

무뚝뚝한 면을 보이던 하랑이 눈을 크게 뜨며 놀랄 정도였다.


"오랜만에 백고를 만나겠군요."

"미려와 너와는 다르게 남들과는 잘 어울리지 못하는 아이이긴 하나, 지금과 같은 때에는 모이긴 해야겠지. 이솜, 하랑과 잘 이야기했으면 좋겠구나."

"아랑 님은요? 좀 더 안정을 취하셔야 하지 않습니까."


이솜의 물음에 아랑은 그저 미소만 지어 보였다. 이미 그녀의 옆구리에는 잠에 빠져 쓰러져 있는 청년이 팔에 감겨있었다.


"처음 도 산신을 이 바닥에 끌어들인 것이 나였으니, 녀석이 편히 쉬도록 하는 것도 내가 해야 할 일이지 않더냐. 연하야, 도 산신의 집은 기억하고 있느냐?"

"그럼요, 아랑 님. 제가 알려드릴게요."

"그럼 되었다."


단 한번의 손짓으로 웅혼한 기세를 일으킨 한강의 수신이 마지막 말과 함께 모습을 감추었다.


"내 이번에는 당했으나, 두 번을 당할 정도로 어리석은 신격은 아니로다. 지금의 발걸음이 훗날 그 자를 옭아맬 올가미의 첫 매듭이 될 지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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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 128화. 어둠 속 아이는 웃고 있었다(7) +1 21.02.10 82 4 13쪽
128 127화. 어둠 속 아이는 웃고 있었다(6) +2 21.02.08 90 5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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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 125화. 어둠 속 아이는 웃고 있었다(4) +4 21.02.03 81 5 12쪽
125 124화. 어둠 속 아이는 웃고 있었다(3) +2 21.02.01 84 6 12쪽
124 123화. 어둠 속 아이는 웃고 있었다(2) +2 21.01.29 105 5 12쪽
123 122화. 어둠 속 아이는 웃고 있었다(1) +1 21.01.27 99 7 12쪽
» 121화. 전화위복, 금상첨화(2) +2 21.01.25 104 7 12쪽
121 120화. 전화위복, 금상첨화(1) +1 21.01.22 120 8 13쪽
120 119화. 오랜 기억의 꿈(4) +4 21.01.20 101 7 12쪽
119 118화. 오랜 기억의 꿈(3) +3 21.01.18 105 5 11쪽
118 117화. 오랜 기억의 꿈(2) +2 21.01.15 111 7 11쪽
117 116화. 오랜 기억의 꿈(1) +3 21.01.13 120 7 13쪽
116 115화. 아랑(3) +3 21.01.11 120 8 12쪽
115 114화. 아랑(2) +3 21.01.08 121 7 13쪽
114 113화. 아랑(1) +3 21.01.06 128 10 12쪽
113 112화. 몽랑(3) +5 21.01.04 150 10 12쪽
112 111화. 몽랑(2) +1 21.01.01 157 12 11쪽
111 110화. 몽랑(1) +1 20.12.30 151 9 12쪽
110 109화. 두 물이 만나는 자리(4) +1 20.12.28 144 9 12쪽
109 108화. 두 물이 만나는 자리(3) +1 20.12.25 148 8 12쪽
108 107화. 두 물이 만나는 자리(2) +5 20.12.23 153 7 12쪽
107 106화. 두 물이 만나는 자리(1) +1 20.12.21 142 10 12쪽
106 105화. 다시 피어나는 산 +3 20.12.18 147 11 12쪽
105 104화. 똣똣한 햇살처럼(5) +2 20.12.16 137 9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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