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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죽재

마드라드의 나비는 폭풍을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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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운
작품등록일 :
2019.06.28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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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8.12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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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29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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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7화. 구원자의 의미(4)

DUMMY

이곳으로 들어온 것은 오랜만이었다.

완전히 몸에 대한 통제권을 잃은 채, 온전히 심상세계에서 새로이 눈을 뜬 것은... 마드라드 사태 이후로 처음이었다.


"그 정도로 내 몸 상태가 별로라는 건가."


현우는 가만히 생각을 정리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왼손은 폭발로 완전히 소실되었고, 체력을 회복하며 마나를 다시 쌓을 기회는 눈 씻고 복기를 해봐도 존재치 않았다.

정신과 육체, 모두가 지친 상황에서 다시 한번 이타콰를 맞닥뜨려 상대하였으니 당연히 결과는 필패(必敗)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다.


처음 심상세계로 발을 들일 때에는 이자나드의 권능에 의하여 체외와 체내를 오가는 모든 마력의 통로가 막혀버린 상황이었다. 정신도 잃었던 지라, 조금만 더 시간이 지체되었다면 영영 되살아 나지 못할 수도 있었다.

아니, 오히려 상황은 전보다 악화되었다. 당시엔 겉은 그래도 멀쩡했을지 몰라도, 지금은 흘리고 있는 피의 양이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조금만 시간이 지체되어도 현우 역시 어머니 나무의 품에 돌아가 생을 마감할 수도 있는 상황.

그렇다면 어떻게든 벗어나야 했다. 자신이 정신을 잃고 있는 지금, 이타콰의 다음 행보는 불 보듯 뻔했다.


그렇지만 어떻게? 그 고민의 벽에 다다른 순간, 현우의 모든 사고는 일시에 정지되었다.

지금 이곳엔 현우에게 도움을 줄 자가 없었다. 마드라드 테러 때와는 다르다. 그 당시에는 시어도어의 안배가 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자신에게 도움을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마지막으로 본 광경에 따르면 미아가 정신을 차린 듯 했지만.


"그 녀석은 이타콰와 싸우고 있을 거야."


현우는 생각했다. 자신이 이렇게 사고를 전개할 수 있는 것으로 보면 아직까지 목숨이 다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미아는 시간을 벌어주고 있었다. 어떻게든 현우가 수렁에서 빠져 나와, 다시 현실로 되돌아갈 수 있는 바탕이 될 귀중한 시간을.

그렇다면 마냥 포기하고 있어선 아니 되었다.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자가 있기 때문에 그 희망을 헌 신발 짝처럼 저버릴 순 없었다.


"구원이란 단어의 이면에는 자신을 도와주길 바라는 고통 받는 자들의 염원이 있기 마련."


문득 어느 누구와의 대화가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자신은 그렇게 말했었다. 햇살이 닿지 못하는 저 깊은 곳까지 보드랍게 감싸주는 바람이 되겠다고.

그렇게 현우는 슈타인 상단의 사람들을 위해 마석 골렘에 홀로 맞서 싸웠고, 미네바에선 누구보다도 먼저 제 몸을 내던지며 병마와 저주를 물리쳤다.

루고에 들어와 남의 것을 염탐하던 고양이를 쫓아냈고, 마드라드를 집어삼켜 세상을 불태우려는 불과 독무에 사로잡힌 미치광이를 저지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지금, 다시 한번 그는 엘리안의 사람들을 위해 어려운 한 걸음을 걸으려 했다.


"심상의 바람은 나의 의지로 움직여라."


이곳은 심상세계. 현우의 이성으로 이루어진 체계와 거기에 색색으로 덧씌워진 감성이 자리잡은 세계.

오로지 그에게만 열려있으며, 이곳에서 자신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었다.


"아."


현우는 왼손이 있던 자리를 내려다보았다.

정신을 잃기 전, 분명히 자신의 왼손은 완전히 파열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남은 것이라곤 몸뚱아리와 같이 떨어진 고깃덩어리 뿐이었었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아직 그의 손은 산산조각이 나지도, 중앙에 굵게 구멍이 뚫려있지도 않았다.

생각으로나마, 사고로나마 지금의 현우는 그 어느 때보다도 온전하며 완전한 상태였다.


"바람은, 불지어다. 모이고 모여, 더 큰 바람이 될 지어다."


온전한 양 손가락의 사이로 미풍이 느껴졌다.

손을 휘젓는다. 잔잔한 바람이 현우의 마력과 섞여, 그의 의지를 불어넣은 바람이 되었다.

바람이 쟁기가 되어 땅을 갈았고, 곱게 갈려 평탄해진 땅에는 그간 배웠던 수식들이 빼곡하게 새겨졌다.

단번에 보이는 저 시야의 끝에서 끝을 지름으로 삼는 거대한 원형의 진이 울음을 토해냈다.

번쩍거리는 빛과 함께, 현우의 입술이 살짝 달싹이며 세상에 고할 마법의 이름을 되뇌었다.


"나는 여기서 그대를 부르노라."


저 멀리 위에서 내려온 빛의 기둥이 현우를 삼켰다.


* * *


"그 피가 아깝구나. 지혈은 하지 않는 것이냐."

"적의 형편까지 신경을 쓰는 줄은 몰랐네, 이타콰."

"적이 아니라 내가 삼을 그릇이라면 아끼고 닦아야 함이 당연하지 않는가."


그는 희열에 찬 눈빛을 현우에게 돌리며 말했다.


"네놈이 깨어났으니 저 여자는 이제 쓸모가 없겠군."

"미아를 쓸모 없다 말하지 마!"

"왜, 이제야 비로소 그런 감정이 생겨난 것이냐. 분명히 이 몸이 너의 의식을 관측했을 때에는 그런 건 단 한 톨도 발견할 수가 없었을 터인데."

"그 입은 다물었으면 좋겠는데."


현우는 계속하여 이타콰의 말을 맞받아치면서도 오른손에 마나를 끌어올려 그대로 절단된 왼팔을 감쌌다.

피가 좀처럼 멎지 않은 왼팔의 손목에 오른손이 닿는 순간, 그간 겪었던 그 어떤 고통보다도 더 격렬한 통각이 그를 엄습했다.

이를 악무는 것만으로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눈의 실핏줄이 터질 정도의 아픔이었다.

그러기를 십여 초, 거친 숨을 몰아 쉬며, 날개의 마법사는 다시 아네모네를 잡고 일어섰다.


"상처의 부위를 마력으로 덮어버린 건가. 붕대 대신에 사용한 거로구나."

"살짝 지지기까지 했으니 한동안은 괜찮을 거다. 누구 덕분에 실드를 펼치는 것에 대해서는 제대로 교육받아서 말이지. 마력 조절은 익숙하거든."


지금 그녀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잠깐의 잡념이 현우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어차피 나중에 보면 될 일. 적어도 지금부터는 눈 앞의 적에게 관심을 돌려선 아니 되었기에, 현우는 스태프에 마력을 불어넣으며 정신을 집중했다.


아네모네의 끝에서 마력이 꽃처럼 피어났다. 순백의 꽃잎을 자랑하는 아네모네의 마법은 한 장, 한 장마다 좌시할 수 없는 위력이 느껴졌다.

바람에 휘날리는 꽃잎들은 얼핏 보면 아름답기 그지없었으나, 이를 상대하는 자는 결코 그런 달콤한 생각에 빠질 수 없으리라.


휘몰아치는 바람은 일견 광풍에 가깝게 보였고, 단순한 마력탄 세례에서 벗어난 위력을 가진 현우의 마법이 이타콰를 향해 쏘아졌다.

단숨에 거리를 좁힌 돌풍과 함께 아네모네의 꽃잎이 이타콰를 휩쓸었다. 거센 바람 속에서, 무릇 사람이라면 눈도 뜨지 못하고 그대로 몸이 갈기갈기 찢겨나갈 것만 같았다.

그러나 상대는 사람이 아니었다.


쿵!


스태프가 바닥을 한번 찍음에 따라 이타콰의 주변에서는 얼음이 콰과곽 솟아나며 바람의 흐름을 막아 세웠고, 흐름이 끊긴 폭풍은 회전이 풀리며 그대로 허공으로 모습을 감췄다.


"조금 전에 비해선 봐줄 만 하구나. 허나 이것에 불과하느냐."

"그만하면 되었거든. 본 공격은 지금부터야!"


마법을 날리며 흘긋 본 세계수는 이미 중심이 뜯겨진 상태였다.

이미 어머니 나무의 정수를 취한 상태, 그렇다는 건 자신과 마찬가지로 그 순수한 마력을 그대로 흡수했다는 것이라.

원래부터 차이가 나던 마력의 질과 마법의 수준은 더욱 차이가 심해질 것이다. 제 아무리 세계로부터 새로운 마법을 허가 받았다고 한들, 그걸 쓰기 위해선 우선 넘어야 할 벽이 산더미였다.


그렇기 때문에 날개의 마법사가 제일 먼저 한 행위는, 자신의 계약자를 부르는 것이었다.


"데미안."

"뭐야, 왜 이렇게 오랜만에 부르나 했더니... 꼴이 이게 뭐야."


깃을 다듬다 나왔는지 조금 부스스한 모양새의 새는 눈을 크게 뜨고 화들짝 놀랐다.


"부탁 좀 하자."

"너를 이렇게 만든 녀석과 싸워달라는 건가? 그런 거라면 부탁이란 말을 쓰지 않아도... 흐음."


이미 수 차례 만나 현우와 같이 싸웠던 자가 다시 또 데미안의 시야에 보였다.

몸이 딱딱하게 굳었나 싶어, 현우는 슬쩍 농을 건네보았다.


"왜, 겁이 나?"

"겁이라니! 바람의 정령의 일원으로서 저런 사악한 것과는 마주보고 싶진 않지만, 그것이 패하는 이유가 될 수는 없지."


황금빛 깃털을 가진 새는 펄쩍 뛰어올라, 계약자의 어깨 위로 올라 탔다. 깃 정리를 마무리하며 자신의 계약자를 살펴본 데미안이 검은 눈자위를 빛내며 말했다.


"몸 상태가 이런데 싸울 수는 있나?"

"그래서 부탁 좀 하자는 거야. 이번에도 마력의 조정을 좀 감당해줬으면 좋겠네. 그리고."

"그리고?"

"가교 역할을 부탁해. 너에게는 조금 버거울 수도 있지만, 그를 부를 수단이 이것밖에 생각이 나지 않아서."


몸의 중심선에 맞추어 현우는 양손으로 아네모네를 쥐었다. 아니, 쥐려 했다.

한쪽 손이 허전한 것을 다시금 깨달았다. 자신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그러나 허전한 현우의 빈손이 자리한 공간에는 이윽고, 황금색 물결을 자랑하는 날개가 그의 손을 대신하여 아네모네를 붙잡고 있었다.


"...고마워."

"시작해. 어떤 마법이던지 간에, 그걸 도와주는 게 계약을 맺은 정령의 일이 아니겠어."


고개를 한 차례 끄덕인 날개의 마법사는, 입을 열어 수많은 문장으로 된 주문을 쏟아내었다.

그것을 허투루 볼 이타콰가 아니었다. 그랬다면 그가 결코 피와 죽음과 냉기로 점철된 악명을 떨치지 못했으리라.


마법을 그리는 중간에는 약간의 충격만 주어져도 곧바로 균형이 흐트러지며 마법이 깨어지고 만다.

그리고 그 여파는 모조리 주문을 외치는 마법사가 감당하게 될 일. 단순한 충격파를 날리는 것만으로도 해결될 문제였다.

이타콰는 코웃음을 치며(물론 코라는 부위가 그에게 있느냐는 또 다른 문제겠지만) 현우를 향해 스태프를 휘두르려 했다.


"풀뿌리여, 적의 발을 묶어라. 바람의 칼날이여, 적의 살을 가르고 그 피를 취하라!"


뒤에서 들린 미아의 목소리와 함께 그에게 다가온 살기 가득한 마법만 아니었더라면 이타콰는 현우를 향해 마법을 날리는 데에 성공했을 것이다.

반대로 말하자면,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공격에 허를 찔린 셈이었다.

그릇으로 삼을 이가 다시 정신을 차려 그의 앞에 나타난 순간부터, 미아란 존재는 이타콰에게 있어서 단순한 미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으니까.


"빌어먹을 것이!"


이타콰의 감정이 격해졌다. 휘두르던 손을 그대로 반대로 꺾어가며, 그는 모아둔 마력을 그대로 미아에게 방출했다.

미아의 몸이 붕 떴다. 허공에 떠오른 몸은 스무 걸음이 넘어가는 거리를 휙 날아가, 성소의 잔해에 부딪혀 축 늘어졌다.

최소 중상, 어쨌든 더 이상 이타콰를 방해하지는 못하리라. 그것이면 족했다.


다만 이 순간, 죽음을 초월한 마법사이자 그 힘을 다루는 사령술사에게 한탄스러운 것이 있다면.

자신은 죽음을 이겨냈기에 존재의 시간의 한계만 사라졌을 뿐이지 흐르는 시간이란 존재를 통제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고.

모두에게 공평히 흘러가는 시간은 이번에도 자신이 미아를 떨쳐내는 그 짧은 시간 속에서, 작은 기적을 날개의 마법사에게 주었다는 점이었다.


"나 적법한 자격을 갖춘 자로서 부르노라. 이 세계의 바람과 거하는 자, 이 세상 누구보다 자유로운 자."


귓가로 흘러 들어오는 현우의 말에 이타콰는 다급히 죽음의 마력을 현우에게 쏘아내었다.

마법적 처리를 하지 않았으나, 시체에서 뽑아내고 수백 년의 숙성을 거친 그 힘은 빗방울 정도만 닿아도 살아있는 생물들에겐 더할 나위 없는 독약과도 같았다.


타앙!

무언가 튕겨나가는 소리가 두 사람의 사이로 퍼져나갔다.

강력한 마력장, 그 존재를 부르는 것만으로도 허공에 생성되어가는 압도의 기세가 이타콰의 마력을 말 그대로 짓이겨버렸다.

본체에서 퍼져나가는 마력의 파장이라면 모르되, 다급히 쏘아낸 사령술사의 마력은 현우의 눈 앞에서 생성되는 고요한 폭풍 앞에서 무력화되었다.


"세계로부터 생을 받아 모든 바람을 둘러싸는 가장 큰 바람이자, 이 세상 그 무엇보다 가장 순수한 바람의 근본."

"세계수의 구원자!"


이타콰 또한 그것을 두 손 놓고 보지는 않았다.

세계수로부터 흡수한 정수가 모이고 모여, 스태프의 끝에서 뭉쳐지는 검은 구체에 압축되고 또 압축되었다.

일렁이는 바람은 먹물을 탄 것마냥 검게 물들었고, 구체의 주변에 흐르는 대기가 밤에 푹 젖은 듯 어두워졌다.

죽은 자들의 비명까지 섞여, 이곳에 온전히 발을 디디고 서 있는 자가 있다면 보는 것만으로도 단번에 미쳐버릴 만큼의 기괴함까지 더했다.


그리고 이타콰는 천천히 그것을 현우에게 밀었다.

주변의 것들을 모조리 한가지 색으로 물들일 검은 구체가, 검은 바람에 휩싸여 그대로 날개의 마법사를 향해 날아갔다.

다섯 걸음, 네 걸음... 그리고 한 걸음만을 남기고서.


그 순간, 날개의 마법사는 등 뒤에 생긴 엷은 날개를 활짝 펼치며 외쳤다.


"나 장현우는 그대와의 계약을 원한다. 오라, 제피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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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세계관 지도 안내 ver. 1.0 20.04.22 176 0 -
276 1부 후기 20.08.12 81 3 5쪽
275 275화. 또다시 바람은 다가오나니[1부 완] 20.08.11 42 1 14쪽
274 274화. 폭풍이 지나간 이후(3) 20.08.10 42 0 14쪽
273 273화. 폭풍이 지나간 이후(2) 20.08.07 69 0 14쪽
272 272화. 폭풍이 지나간 이후(1) 20.08.07 41 0 14쪽
271 271화. 시간이라는 바람(4) 20.08.06 32 0 13쪽
270 270화. 시간이라는 바람(3) +4 20.08.05 65 0 14쪽
269 269화. 시간이라는 바람(2) 20.08.03 41 0 13쪽
268 268화. 시간이라는 바람(1) 20.07.30 27 0 14쪽
» 267화. 구원자의 의미(4) +1 20.07.29 33 1 13쪽
266 266화. 구원자의 의미(3) 20.07.28 34 0 13쪽
265 265화. 구원자의 의미(2) 20.07.27 32 0 14쪽
264 264화. 구원자의 의미(1) 20.07.23 53 0 15쪽
263 263화. 해와 달이 지고 뜨는(5) 20.07.14 52 0 13쪽
262 262화. 해와 달이 지고 뜨는(4) 20.07.10 52 0 14쪽
261 261화. 해와 달이 지고 뜨는(3) 20.07.09 52 0 14쪽
260 260화. 해와 달이 지고 뜨는(2) 20.07.07 74 0 13쪽
259 259화. 해와 달이 지고 뜨는(1) 20.07.06 39 0 14쪽
258 258화. 이스윈 공방전(4) 20.07.04 35 0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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