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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녹시에탄 님의 서재입니다.

고도로 발달한 근육은 마법과 구별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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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에이아이
작품등록일 :
2023.06.03 04:54
최근연재일 :
2023.06.16 11:30
연재수 :
23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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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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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글자수 :
149,366

작성
23.06.11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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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물에서 태어난 불

DUMMY

“미들 우드로 가거라. 일로레님께 편지도 써놨다.”


아힌이 풀려난 어린 엘프에게 말했다.

그러나 자신을 키리엔이라 밝힌 그녀는 주점 구석의 기둥을 만지며 딴청을 피웠다.


“우와! 기둥이 진짜 크고 딱딱해요! 색은 또 어찌 이리 까맣담?”

“....”


푹 빠져있던 첩실이 창녀였단 사실을 안 시장은 루테판 전체를 뒤집어 놨다.

미트론과 콘셀로에게 즉시 일급수배를 내렸으며, 관련된 경비대를 문책하거나 파면시켰다.


그 과정 중 엘프의 무죄가 증명됐다.

벤쟈렌 사망 당시 다른 곳에서 목격됐음이 밝혀진 것이다.

애초에 콘셀로가 뒷돈으로 재판 없이 사형을 앞당긴 무리한 경우였다.


‘엘프는 어딜 가도 눈에 띈다. 걸어 다니는 알리바이인 셈이지.’


아힌은 처음부터 키리엔의 무죄를 확신했다.

자신이 진범인 건 제쳐두더라도, 요정의 아름다움에 홀린 수많은 이들이 앞 다퉈 진실을 말해줄 게 뻔했으니까.


일이 어떻게든 해결이 됐으니, 이젠 어린 엘프를 돌려보낼 차례였다.

그러나 저항은 생각보다 완강했다.


“시킨대로 자수했잖아요! 아니 내가 거길 왜 가냐구요! 전 그 분들 알지도 못한다니깐요?”

“정녕 일로레님께 따로 고해야 정신을 차릴 셈이냐?”

“아 정말! 왜 이렇게 딱딱하게 굴어요? 꼰대처럼!”


키리엔이 빼액 소리를 질렀다.

아힌은 태어나 처음 들은 꼰대라는 단어에 잠시 정신이 멍해졌다.


“황혼의 악마단 그 개새끼들 때문에 고향은 사라졌고 부모님도 돌아가셨어요! 아무리 말려도 전 반드시 숲을 살리고 원수를 갚을 거라구요! 왜 자꾸 미들 우드로 가라는 건데요?”


지독한 사춘기 덕에 그녀는 에카릴도 한 수 접을 성질머리를 뽐냈다.

보통 요정의 은원관계는 저런 불같은 성질을 띄지 않았다.


‘그 반대에 가깝지...’


그들의 성정은 조용하고 끊임없이 흐르는 물과 비슷했다.

그 적막한 꾸준함이 바위를 뚫고 때론 새싹을 피워내듯. 요정의 복수와 은혜를 갚는 방식은 고요하고도 집요했다.

그래서 혹자는 엘프를 ‘은원의 종족’이라고도 불렀다.


어쨌든 저 어린 돌연변이를 설득하기 위해 아힌은 논리를 꺼내들었다.


“첫 째. 너 같은 꼬마를 보았음에도 돌려보내지 않는 건 요정어를 사사한 일로레님께 큰 결례다. 요정족이 세상사에 관심이 없다한들 종족을 위하는 마음이 없는 건 아니다.”


인간으로 치면 신세 진 이의 사촌아이가 길 잃은 걸 목격한 셈이다.

엘프 나이로도 어린 열 일곱, 인간나이로는 대략 여섯 살.

그냥 지나친다면 나중에 일로레에게 할 말이 없어진다.


“둘 째. 복수를 하려면 너 혼자로는 무리다. 미들우드로 가 도움을 청해라. 중앙의 엘프들은 이미 계획을 세워 놨을 터다. 그들은 은혜를 잊지 않는 만큼 복수도 잊지 않으니까. 너무 조용히 진행돼 사람들이 알아채지 못할 뿐이지.”


정론이 쏟아지자 키리엔이 뚱한 표정으로 입을 닫았다.

그조차 요정답게 아름다운 미모였지만, 아힌은 다른 생각을 품었다.


‘셋 째. 일로레님에게 내 편지를 보내줄 사람이 필요하다.마력이 사라져서 실은 연통을 띄울 수 없으니까. 넷 째. 이로써 나는 요정족에게 빚을 지게 하는 셈이다. 그들은 복수만 철저히 갚는 게 아니니 커다란 이득으로 돌아올 테지.’


콘셀로의 보석주머니 절반도 이미 키리엔에게 들려준 상태였다.

그쯤이면 나무성장 촉진제라는 걸 사는데 큰 보탬이 될 것이다.


“그냥 아저씨랑 같이 다니면 안돼요? 힘도 세고 머리도 좋으니 우리끼리 황혼의 개새끼들한테 엿을 먹일 수 있을 거예요! 일로레님께 편지는 제가 알아서 보내 볼게요! 네?”

“흠...”


아힌이 잠시 고민했다.

사실 단칼에 거절해야 마땅한 제안이었다.

자신은 황혼의 악마단과 표면적으로 척을 지지도 않았고, 꼬마 엘프의 보호자가 될 이유도 명분도 없었다.


다만 그럼에도...


‘저 아이의 재능은 놀랍기 그지없다. 단검술은 그저 에카릴의 영웅담을 들은 것만으로 스스로 재현한 것라 했지... 또한 저 나이에 저 정도 마력과 감각은 실로 유래가 없을 정도야.’


그의 마법사적 호기심이 잠시 꿈틀거렸다.

마력은 사라졌지만 여전히 그의 내면엔 마법사의 사고방식이 자리 잡고 있다.


역대급 재능을 목도한 기쁨.

그 재능을 키워 마법적 지식을 전수하고픈 욕망.

어쩌면 마나의 샘이라 불리는 엘프를 가까이 하면 뭔가 신체의 변화가 생기진 않을까 싶은 막연한 기대감.

그렇게 생각하면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허나 역시 그럼에도...


“싫다.”

“왜요?”

“넌 너무 이목을 집중시킨다.”

“네?... 아니! 아저씨는 뭐 눈에 안 띄나? 더럽게 크면서?”

“그래서 더 안 된다. 너까지 데리고 다니는 건 스스로 목줄을 차는 셈이다.”


어쨌든 아힌의 최종목표는 륜의 행방을 추적하는 것.

이미 본인의 거대한 몸뚱이만으로도 여실히 눈에 띄었다.

거기에 드워프와 엘프를 함께 데리고 다니는 건, 제발 나 좀 봐 달라고 발광을 떠는 것과 다름없었다.


‘혹시 형상변환 마법을 쓴다면... 아니... 안 되겠군.’


엘프는 형상변환을 나이가 차 세상에 나갈 일이 생긴 자에게만 전승한다.

그렇다고 자신이 가르쳐줄 수도 없었다.


‘마나가 말라버린 건 둘 째치고, 요정과 우리는 체계가 다르지.’


마법사는 자신만의 논리로 마법을 이행한다.

아힌의 경우 내면 속에서 복잡한 미로를 그려냈고, 어떤 이는 수학을 풀며, 어떤 이는 그림을 그리기도 한다.

특히 종이 다르면 에테르의 마력전환과 마법구현의 성질이 완전히 달라 더욱 달랐다.


“거기 드워프 아저씨도 한 마디 좀 거들어 줘요! 네? 동료 많으면 좋잖아요! 으쌰으쌰! 몰라요?”

“흥!”


잠자코 팔짱만 끼고 있던 요나프가 콧방귀를 꼈다.

흔히 알고 있듯 드워프는 엘프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오해와 달리 엘프는 드워프를 그닥 싫어하지 않았다.


이엔 농담 같은 역사적 기원이 있다.

어처구니없게도 바로 씨름 때문이었다.


‘요정왕 트루리온과 난장이왕 골드바인의 일화였던가...’


과거 둘 사이가 가깝던 시절, 드워프왕이 교류를 위해 만난 엘프왕에게 씨름 시합을 제안했다.

막 바레스에서 건너온 씨름이 드워프들 사이에서 열풍이던 시점이다.

그 때 요정왕이 난장이왕의 제안을 단칼에 거절했다.

씨름을 하면 풀밭이 망가지고, 엉덩방아를 찧다 꽃이나 벌레가 죽으면 안 된다는 이유였다.


이에 드워프들은 자신들을 모욕했다 여겨 교류를 끊고 돌아갔다.

또한 눈치 없는 엘프들은 영문을 몰라하며 화해없이 지금의 관계가 이어졌다.


일부 역사가들은 그들의 틀어짐이 고작 그 때문일 리 없다며 다른 이유를 필사적으로 찾고 있다.

물론 아직도 별다른 성과는 없는 상태다.


“아니 드워프들 우리 엄청 싫어한다더니 진짜네? 거인 아저씨! 이게 맞아요?”

“그 건... 너희 조상들에게 묻거라. 내가 낄 얘기가 아니다.”

“흥!”


요나프는 석화마법에 걸린 듯 고개를 돌린 채 키리엔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키리엔은 이 후에도 길길이 날뛰며 까불었으나, 아힌과 요나프의 고집이 한 수 위였다.


“벌써 시간이...”


아랑곳 않고 고기를 뜯던 아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곧 그는 검은 기둥을 들고 나갈 채비를 마쳤다.

그러자 키리엔이 주점 문 앞을 가로막았다.


“아 저랑 같이 다니자니까요! 저 싸움 잘해요! 마법도 잘 쓰구요!”

“안다. 그래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 비켜라.”

“못가요! 아! 허락해주기 전까진 못간다고요!”


아힌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지금은 운동하러 갈 시간이었다.

그는 이 시간만큼은 마음먹은 이후로 어긴 적이 없었다.


“스스로 안 가면 집어 던져서라도 보내겠다. 못 할 것 같으냐?”


아힌의 힘을 준 팔뚝에 굵은 핏줄이 불거지며 팽창했다.

비로소 키리엔의 맹랑했던 목소리가 작아졌다.

이 전의 힘겨운 전투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녀는 어리고 철이 없지만, 거인이 자신을 봐줬다는 걸 알아챌 실력은 있었다.


“그럼... 일로레님께 가서 허락 맡고 오면 되는 거죠? 같이 다녀도 된다고?”

“하아... 그래. 일로레님이 허락한다면 동행을 인정하마.”


아힌이 크게 한 숨 쉬며 끄덕였다.

어차피 그 일로레가 허락할 일은 없을 것이다.


‘내가 아는 그 분이라면 하늘이 두 쪽이 나도 그럴 일은 없을 테지.’


그는 괴팍하긴 했지만 뛰어난 마법사였고, 고매한 인격자였다.

어차피 저 사고뭉치가 밖을 나올 일은 없었다.


“하타카 아저씨! 또 봐요! 곧 만날 거예요!”

“그럴 리가...”


북쪽 산맥과 미들우드로 가는 갈림길에서 키리엔이 밝게 인사했다.

아힌은 씨름을 거절해 전 종족이 삐진 드워프의 일화보다 더 말도 안 된다 생각하며 고개를 저었다.


***


금발의 사내가 어둑한 동굴로 들어섰다.

쥐죽은 듯 고요한 어둠 속에서 인사말이 들려왔다.


“오랜만이야.”


허나 금발 사내는 인사를 생략하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남쪽 섬 레예스에서 신전 기둥이 발견됐다.”

“나도 반가워. 일단 불부터 켜야겠군.”


어둠 속에 기척이 일며 빛의 구체가 떠올랐다.

그렇게 드러난 두 사내는 완전히 상반된 모습이었다.


금발의 사내는 최대한 특색 없이 입은 듯 했으나, 옷의 품질은 물론 쭉 뻗은 키와 넓은 어깨가 도드라졌다.

특히나 귀공자 같은 얼굴이 체형과 너무나 잘 어울렸다.


반면 흑발의 사내는 그야말로 거렁뱅이 자체였다.

아무렇게나 기른 산발머리에 다 찢어져 로브라 하기도 민망한 거적을 걸치고 있었다.

거기에 왜소하고 깡마른 몸은 금발 사내와 비교되어 더욱 초라해보였다.


“놀라지도 않는 군. 역시 알고 있었던 거냐 륜?”

“맞아 레넬. 벌써 한 달이 넘었지.”


륜이 행색에 어울리지 않는 깊은 눈으로 레넬을 응시했다.

레넬은 이를 악물며 한참을 노려보다 륜의 멱살을 잡았다.


“왜 말 안했어! 대체 왜!”

“어차피 달라질 건 없으니까.”


륜의 깊은 호수 같은 눈길이 레넬의 불길에 사로잡힌 눈빛을 진정시켰다.

레넬은 곧 거의 매달리다시피 공중에 떠있던 륜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신경 쓸 거 없어. 바레스도, 요정들도, 황혼의 악마단도 그 무엇도 우리 계획을 바꾸지 못해. 물론 아힌도.”

“잠깐... 마지막에 뭐라고?...”

“아힌 말이야. 우리 친구 대마법사 아힌. 벌써 잊었어?”


레넬의 표정이 순간 기괴하게 구겨졌다.

그는 다시 흥분하여 소리쳤다.


“광인처럼 산다더니만! 정녕 미친 거냐? 그놈 이름이 대체 왜 나오는 거야?”


그 표정 없던 륜이 그 말에 빙긋 웃었다.

레넬은 왜 순간 공포심을 느꼈는지 한동안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고 잠시 뒤에 깨달았다.

그토록 오래 알고 지내며 륜이 웃는 걸 처음 봤다는 사실을.


륜은 그런 레넬을 향해 여전히 미소지은 채 답했다.


“녀석이 돌아왔어.”


레넬은 이번엔 왜 자신이 공포를 느꼈는지 명확히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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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콜로세움 23.06.13 30 0 12쪽
18 정보의 가격 23.06.12 34 1 12쪽
» 물에서 태어난 불 23.06.11 42 0 11쪽
16 가짜 동생 23.06.10 41 1 16쪽
15 근육과 마법 23.06.10 57 1 15쪽
14 뒷골목의 또다른 법칙 23.06.09 41 0 15쪽
13 주먹과 주먹 23.06.09 47 0 16쪽
12 뒷골목의 법칙 23.06.08 42 0 11쪽
11 장사 접는 날 23.06.08 51 0 14쪽
10 기둥을 든 푸른 고래 23.06.07 55 1 23쪽
9 불과 쇠의 격렬한 짝짓기 23.06.07 60 1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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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절규는 두 번 울려 퍼진다 23.06.05 84 0 17쪽
5 마법사의 영혼 23.06.04 81 1 14쪽
4 술독에 빠진 돼지들 23.06.04 96 1 17쪽
3 설원늑대부족의 방식 23.06.04 96 1 19쪽
2 단련의 시간 +1 23.06.03 112 2 12쪽
1 배신의 계절 23.06.03 209 2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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