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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거 님의 서재입니다.

선 넘는 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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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거
작품등록일 :
2022.12.05 19:12
최근연재일 :
2023.02.02 16:05
연재수 :
44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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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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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6
글자수 :
272,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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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01 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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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14. 선택의 대가(2)

DUMMY

670호 앞에 서서 공기헌은 숨을 골랐다. 그리고 천천히 미닫이문을 열었다.


익숙한 공간이 드러났다. 먼지가 햇빛에 반짝여 부유하는 밀폐된 장소. 낡아빠진 병원 침대 하나와 그 밑에 대각선으로 삐죽하게 나온 보호자용 간이침대. 공기헌의 제복을 걸쳐 놓은 옷장이 열려 있고, 그 안에는 구겨진 환자복이 나뒹굴고 있었다.


공기헌은 느릿느릿 걸어 들어가 침대에 사뿐히 앉았다. 발에 채는 건 휴대용 산소통이었다. 연결된 호스와 호흡기는 침대에 놓여있다. 누나가 쓰던 산소호흡기다.


누나는 여기 갇혀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내가 죽은 줄 알았을 텐데.’


정확히 어디로 떠났는지 눈치챌 수 있는 흔적을 남겨놓을 리 없다. 누나는 바보가 아니니까. 하지만 혹시나 모를 단서를 찾기 위해 공기헌은 매트리스부터 꾹꾹 누르고 들추기 시작했다. 썩은 붕대만 보였다. 침대 프레임 밑을 내려다봤다. 먼지밖에 없다.


간이용 침대에도 없다. 널빤지를 억지로 뜯어내고 창문 유리를 깬 뒤 걸쇠를 들췄다.


드르륵. 바깥쪽에도 누나가 남긴 흔적은 없다. 옷장 위를 손으로 훑었다. 먼지만 잔뜩 일었다. 옷장 안부터 환자복까지 샅샅이 뒤졌다. 없다.


책상을 뒤졌다. 원래는 이곳에 각종 필기구류랑 종이가 있어야 하는데 깨끗이 치워져 있다. 그 볼펜으로도 사람 하나 죽일 수 있는 게 누나니까 지아연이 치우라고 명령했을 게 눈에 훤하다. 책상 서랍장을 뒤졌다. 없다. 없어.


힘이 쭉 빠졌다. 역시 뭘 남겨놓을 리 없다. 공기헌은 허탈한 마음을 금치 못했다. 분에 차 서랍장을 쾅 닫았다. 그런데 서랍장이 끝까지 들어가지 않고 반쯤 닫히다가 반동을 못 이기고 앞으로 쭉 튀어나왔다.


‘뭐지?’


무언가 뒤쪽에 걸렸다.


공기헌은 쭈그려 앉아 힘으로 서랍장을 뜯어내고 던졌다. 그리고 팔을 안쪽으로 뻗어 빠르게 더듬었다. 딱딱한 표면이 느껴진다. 두 손가락으로 집어내려 했지만, 두께가 상당하다.


‘책?’


공기헌이 손으로 꽉 잡고 꺼냈다. 날카로운 연결부에 손이 스쳐 베였지만 개의치 않았다. 드러난 책을 보고 공기헌은 실소했다.


『동물 대백과 –조류편-』


누나를 추방한 그 날, 선물 받은 책이다. 공기헌은 침대에 걸터앉아 책을 펼쳤다.


“콜록, 콜록.”


서랍장 뒤에 오랫동안 처박혀 있던 게 분명하다. 먼지가 잔뜩 인다.


「@#@페이지 봐봐. 네가 찾던 그 새도 있으니까.」

「콘도르.」


자유를 상징하는 지구상 가장 거대한 맹금류. 공기헌이 어릴 때부터 좋아하던 새다. 물론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로 관심도 없었지만.


목차에서 콘도르를 확인하고 해당 페이지를 열었다. 거기엔 하얀 쪽지가 하나 접혀 있었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책을 옆에 두고 쪽지를 폈다.


【동생한테.


나는 네가 목숨을 쉽게 버릴 놈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이 편지를 남긴다. 어떻게든 살아날 방법을 생각하고 몸을 던졌다고 믿는다. 그렇게 믿을 거야.


나는 지금 재수 없게 지아연 수중에 떨어져서 감금됐다. 하지만 기필코 탈출할 거야. 접촉할 대상도 찾았으니 문제없다.


너에게 할 말은 단 하나다. 난 너를 원망하지 않아. 네 선택을 존중해. 다만 나는 내 선택이 더 옳다고 믿어. 덕분에 일이 이렇게 꼬였지만, 이 또한 어떤 뜻이 안배됐다고 생각해.


나는 언제까지나 우리의 해방을 위해서, 그리고 이 세상이 평화를 되찾을 때까지 비밀을 파고 또 파고 저항하고 또 저항할 거야.


그러니까 만약 살아있다면, 아니 살아있을 테니까 말할게.


꽁기, 이제 내게 진 마음의 부담은 내려 둬. 부모님의 죽음도 내가 대학을 자퇴한 것도 모두 네 탓이 아냐. 그리고 내가 부적응자인 것도 네 탓이 아니야. 게다가 나 때문에 넌 죽을 뻔도 했잖아? 그러니까 우리 서로 부담을 내려놓자고.


이제 너는 어린 애가 아니고 나는 네 도움이 필요한 불쌍한 부적응자가 아니니까.


만약 살아있다면, 언젠가 서로 소식이 닿겠지. 그때, 만약, 정말 만약에 의견이 일치한다면 또 보자. 그때까지 잘 살아라, 동생.


멋진 네 누나가.


※추신: 건방지게 총구를 누나 머리에 들이미는 동생을 네 새끼밖에 없을 거다. 말로 했어도 그냥 갔어, 인마.】


“아, 씨···.”


쪽지가 부들부들 떨렸다. 공기헌은 쪽지를 품에 안고 침대에 드러누웠다. 천장에 ‘공기헌 개새끼’, ‘꽁기 @$@@#, 싸가지 없는 놈.’이라고 쓰여있다.


“언제 저런 건 또 써놓은 거야.”


편지는 점잖은 척 썼으면서 욕 한번 살벌하다. 게다가 악필이라 더 극적이었다. 의연한 척 썼지만, 마음에 남은 앙금이 상당하다. 누나는 그렇게 슬픔을 삭혔다. 누나 또한 본능적으로 동생의 죽음을 깨달았으리라. 애도하는 방식이 상당히 거칠 뿐.


“존나 짜증 나게···.”


공기헌의 눈가에 눈물 한줄기가 흘러내렸다.


“눈물 나잖아.”


들숨 날숨이 거칠다. 이윽고 공기헌의 눈에 폭포수처럼 눈물이 콸콸 흘러내렸다. 가슴속에 쌓이다 못해 고여 부패한 감정들이 수챗구멍 사이로 흘러내렸다.


“난 또···.”


발음이 부정확하다. 공기헌은 숨까지 헐떡이며 울었다. 엉엉 울었다. 아기처럼 엉엉 울었다. 그동안 참고 참았던 슬픔을 쏟아냈다. 수많은 죽음에 대한 죄책감, 새로 생겨난 힘에 대한 부담감,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맘껏 표현했다.


그리고 누나가 살아있다는 소식에 안도했다.


“시발, 진짜, 다행이다.”


공기헌은 한동안 그렇게 울었다. 쌓여 있는 오물들이 수채 사이로 모두 빠져나갈 때까지.


**


“형님, 헌터존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장강찬 선생님이 도착하셨대?”

“예.”


공기헌은 하늘하늘 내리는 눈송이를 바라보며 코트를 걸쳐 입었다. 창문 사이로 스미는 한기로 목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머리를 다듬어 목덜미가 휑한 게 여간 어색했다. 그 아래로 느껴지는 반흔이 유독 두껍게 느껴졌다.


고개를 내려 펼쳐진 책을 바라봤다. 커다란 날개를 펼친 콘도르가 보였다. 그런 콘도르를 손으로 더듬다가 대담하게 찢었다. 그리고 고이 접어 안쪽 주머니에 넣었다.


“그럼 모시고 가자.”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개중에 장강찬의 아내와 두 자식이 짐을 잔뜩 챙긴 채 대기 하고 있었다.


“헌터존 경계로 집을 옮기시게요?”

“소성혁 씨가 편의를 봐주셨습니다.”


부적응자의 리더 소성혁은 공수연의 소식을 듣자마자 득달같이 이곳 상황을 마무리하고 떠났다. 판타지 존에서 누나의 흔적을 찾겠다며, 그녀를 찾으면 공기헌에게 알려주겠다는 말을 끝으로 그는 그렇게 절뚝거리며 떠났다.


“나머지 짐은 저에게 주십시오. 이 친구한테도.”


짐을 나눠 받은 오춘식과 공기헌은 모두를 바라봤다. 그곳엔 단절자, 부적응자, 적응자 무리가 섞여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지아연이 마지막으로 제게 말했습니다. 붉은 선이 사라지면 다른 존의 주인들이 이 땅을 노릴 거라고.”


웅성거렸다. 걱정스러운 표정이 군데군데 엿보였다.


“또한 이 땅의 적응자 모두가 부적응자가 될 거라 말했습니다.”

“맞아. 내 친구 놈이 헌터존 구경 가보겠다고 멋모르고 건넜다가 황천길 갈 뻔했어.”


한 명의 증언에 모두가 동요했다. 공기헌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로써 확실해졌네요. 여러분 모두 부적응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경기 북부부터 여기 서울 강북과 강남 일부까지 모두 쉼터가 됐습니다. 만약 다른 존이 넓어지면 쉼터는 그만큼 줄어들겠죠.”

“그렇다면 저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공기헌에게 희망을 건 눈빛이었다.


“모릅니다.”

“네?”


당황했다. 노려보는 자도 속출했다. 무책임하다고 욕하는 자도 있었다.


공기헌이 소리쳤다. 짜증이 가득 담긴 목소리다.


“이제 여기는 여러분의 땅입니다. 그렇다면 해결해야 할 당사자는 누굽니까?”


조용해졌다. 눈을 내리까는 사람도 보였다.


“바로 나지.”


서병훈이 큰 목소리로 답했다. 그리고 손으로 한 명 한 명 가리켰다.


“그리고 너, 너, 너, 너. 이 새끼들, 모두 다.”

“맞습니다. 제 복수를 위해서 벌인 일이지만, 여러분 모두 살기 위해서 동의했습니다. 물론 동의하지 않은 연구소 출신도 있겠죠. 하지만 물은 이미 엎질러졌고, 여러분은 살아남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모두가 스스로 책임지세요. 다른 존이 침범하는 걸 막을 방법을 찾고, 막아서야 합니다. 안 그러면 여러분이 부적응자를 취급하던 그 방식대로 다른 존의 사람들이 여러분을 그렇게 취급하겠죠.”

“큼큼.”


양심에 찔렸는지 헛기침하는 자들이 보였다.


“물론 저 또한 판타지 존으로 향하면서 그 원리를 계속해서 밝혀낼 겁니다. 소식은 제때제때 전할 거고요. 그 정도면 제 책임을 다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이 말을 끝으로···.”


다시 한번 집중한다. 공기헌이 멋쩍게 말했다.


“잘 사세요.”


일순 고요해졌다가 박수갈채가 일었다. 공기헌은 그런 낯간지러운 반응에 고개를 돌려 무리와 함께 남쪽으로 향했다. 뒤에서 서병훈이 소리쳤다.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해! 방독면이라도 쓰고 찾아갈 테니까!”


공기헌이 감사의 손짓을 표했다. 서병훈이 껄껄 웃으며 그들을 배웅했다. 누군가는 보내고 누군가는 떠나야 할 시간이었다.


**


헌터존과 쉼터의 경계선이 위치한 구역, 공중처형대 밑, 진눈깨비로 진창이 된 거리에 한 사내가 서 있었다. 희끗거리는 머리칼, 미간에 주름이 잔뜩 진 사내. 그 사내의 잿빛 눈동자가 요동쳤다. 사내가 천천히 그 붉은 선을 넘어 걷다가, 차츰 빠르게 발을 내딛더니 이윽고 전속력으로 달렸다. 그리고 아내와 두 자식을 안았다.


“여보!”

“여보···.”

“아빠!”


딸 아이만 손가락을 빨며 자신을 껴안는 남자를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바라봤다. 그 눈빛마저 사랑스러워 장강찬이 눈물을 보였다. 장강찬이 아내의 얼굴을 확인하고 아들의 얼굴을 확인하고 딸의 얼굴을 확인했다.


“아아···. 고생했구나, 고생했어.”


저 혼자 S급 헌터가 되어 안락한 삶을 누렸다고 자책하며 장강찬이 엉엉 울었다. 특히 피골이 상한 아내와 검은 얼룩으로 번진 아들의 얼굴을 보았을 땐 가슴이 찢어지듯 아팠다. 희멀건 딸 아이의 호기심과 경계심이 섞인 눈빛은 기쁘면서도 슬펐다. 자식의 얼굴에 각인 되지 않은 아비의 얼굴이라니.


“내가 네 아빠야. 내가 네 아빠.”

“아...빠···?”

“응, 사랑아. 아빠라고 해봐, 아빠.”


아내의 말에 딸이 천천히 뱉었다.


“아빠.”

“어, 그래. 사랑아. 내가 아빠야.”


가슴이 뜨거워진다.


공기헌은 그 장면을 보며 만감이 교차했다.


공중처형대가 내려다보이는 이곳에서 그 모든 일이 시작됐고 종지부를 찍었다.


만약 첩자이자 장강찬의 아내인 이 여자와 아들을 살리지 않았다면···.


「네가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살아. 꼴리는 대로 살라고, 공기헌.」


“누나 말이 맞네, 진짜.”


공기헌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차가운 겨울바람을 만끽했다. 새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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