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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nniless 님의 서재입니다.

현실적 의인화법을 손에 넣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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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nniless
작품등록일 :
2022.05.11 12:03
최근연재일 :
2022.06.11 21:00
연재수 :
32 회
조회수 :
849
추천수 :
35
글자수 :
158,588

작성
22.05.21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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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쪽

1부 11화

DUMMY

살짝 차가우면서도 온기가 깃든 봄바람이 내 몸을 스치고 지나갔다. 하늘에는 새파란 배경에 작은 흰 구름 한 덩이가 떠 있었다. 시선을 살짝 내리면 가로수와, 그 밑에 횡단보도를 기다리는 사람들과, 그 옆에 차선이 쭉쭉 그어진 기다란 도로와, 그 위를 달리는 차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내가 문밖으로 나와 있었다. 직선으로 내리쬐는 태양 빛이 느껴졌다.


“어떻게···”


그 상황을 이해 못 한 나는 고개를 돌려 가방을 마주 보았다. 가방은 그 자리에 헤실헤실 웃고만 있었다.



/ / / / /



신발을 신고 다시 바깥 땅을 밟아 보았다. 이번에도 아무렇지 않았다. 집을 나서려는 평범한 사람 같았다.


가방은 내 팔을 움켜쥐고 천천히 앞으로 밀었다. 난 아파트 복도를 따라 엘리베이터 앞으로 다가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나왔다. 위에서 보았던 풍경이 눈앞으로 다가왔다. 고작 집 앞이지만 굉장히 오랜만에 와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가방은 한 손에는 휴지를, 다른 한 손으로는 내 팔을 붙든 상태로 걸어 나갔다. 나도 그에 발을 맞춰 따라갔다. 신기하게도 가방 역은 산립역이 어디 있는지 아는 것 같았다.


산립역은 지하철역이다. 꽤 최근에 지어진 곳인 덕에 역 자체도 넓고 세련되었다. 긴 에스컬레이터를 두 번 꺾어 내려가면 역의 초입이 나온다. 벽은 짙은 회색빛에 내 키만 한 네모 홈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바닥은 살짝 밝은 유광이 비치는 것이 마치 대리석으로 마감된듯한 인상을 주었다.


그곳에 도착하였다. 화장실이 어디 있는지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개찰구 옆 벽면에 길이 나 있었다. 천장에는 화장실을 뜻하는 마크가 걸려있었다. 이제 화장실로 들어가 휴지를 전달하기만 하면 끝난다.


잠깐. 근데 휴지를 어떻게 전달할까. 난 여자 화장실에 들어갈 수 없다. 하는 수 없이 가방에게 부탁해야겠다. 가방은 여자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으니 휴지를 전달하고 올 수 있을 것이다.


“가방, 너가 들어가서 주고 와야···”


그렇게 말하려던 찰나였다.


“왔어?”


“어?”


여자 화장실 앞, 그 코너에서 누군가가 걸어 나왔다.


매일같이 들어서 너무나도 익숙한 목소리였다. 화장실 코너에서 혜진이 걸어 나왔다. 베이지색 반팔 티를 바지 속에 집어넣어 입었고, 슬림한 검은색 추리닝 바지는 골반부터 발목까지를 부드럽게 감쌌다. 추리닝 옆으로 나 있는 흰 줄이 우월한 다리 길이를 과시한다.


어떻게 된 거지. 휴지가 없다고 그러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혜진은 멀쩡한 모습으로 화장실 밖에 나와 있었다.


“어떻게··· 나온 거야···?”


“아, 옆에 칸에 있던 사람이 휴지를 가져다줬어.”


“아하.”


내 손에 들린 두루마리 휴지를 보곤 혜진이 푸핫, 웃음을 흘렸다.


“그거 나 주려고 가져온 거야?”


“음? 그렇지.”


근데 휴지는 방금까지 가방이 들고 있지 않았던가. 이게 언제 내 손안에 들어왔지. 그런 의문을 가지며 내 옆의 가방을 돌아봤다.


하지만 가방은 없었다.


“엇? 어···”


“왜 그래?”


가방이 사라졌다. 방금 전까지 내 옆에 딱 붙어 따라오고 있었는데, 정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뭐 잃어버렸어?”


“아, 아니야.”


눈을 믿지 못하며 주변을 몇 번 더 돌아봤다. 널찍한 지하철역. 그에 비해 적은 사람들. 무거운 빛깔의 벽면과 어울리지 않는 연두색 간판의 편의점도 보였다. 하지만 역 어디에도 가방은 보이지 않았다.


가방 대신에 혜진이 내 옆에 붙었다.


“빨리 너네집 가자. 나 배고파.”



/ / / / /



올 때는 가방과 함께였지만 돌아가는 이 길에는 혜진과 함께였다. 부쩍 더워진 날씨는 이제 반팔을 입을 때가 되었다고 말하고 있었다. 내 몸 상태도 괜찮았다. 보도블럭을 따라 집으로 향하는 모양새가 길가에 다른 행인들과 다를 게 없었다.


기분이 묘하다. 아까 전까지만 해도 왜 혜진이 안나타날까 온갖 걱정을 다 했는데. 지금 이렇게 눈앞에 혜진이 있다니.


혜진은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한낮의 태양 빛 아래 그 미소가 더 눈부셨다. 혜진은 화났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전부 내 착각이었던 건가.


아니 애초에 휴지가 없었다는 말도 가짜였는지 모르겠다. 그런 난처한 일을 겪은 사람이라기엔 혜진은 너무 태연하고 해맑아 보인다.


사실 휴지가 어찌구 한 것도 날 집 밖으로 끌어내 보기 위한 술수가 아니었을까. 그런 상상을 해보는 나였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정이다. 모든 걱정이 사라진 순간. 머리와 몸에 긴장이 풀리며 쌓여있던 모든 게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난 행복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다. 나 같은 사람이 으레 그렇듯, 이렇게 행복해지면 ‘어라? 나 왜 이렇게 행복하지? 진짜 아무 문제 없나? 내가 뭔가 엄청 안좋은 일을 까먹고 있는 거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한다.


그다음에는 스스로 내가 불행해져야 할 이유를 찾아 나선다. 예를 들면 ‘아 맞다, 난 무일푼 중졸 정신과 환자였지.’ 하는 사실을 떠올린다.


그러다 갑자기 그런 의문이 들었다.


과연 혜진은 날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혜진은 정말 날 싫어하지 않을까.


근 며칠간 내가 혜진에게 보여준 모습들은 그야말로··· 처참했다. 맨날 집에 다른 여자애를 대려다놨고, 여자애들 성격도 하나같이 이상했다.


랜덤 채팅으로 만났다고 둘러대긴 했지만 매일 랜덤 채팅으로 여자를 갈아치우는 것도 정상은 아니다. 아니 애초에 랜덤 채팅으로 만났다는 말 자체가 신빙성이 떨어진다.


객관적으로도, 혜진이 날 이상하게 볼 여지는 많다. 하지만 혜진은 항상 당연하다는 듯이 우리 집을 찾아왔고 아무렇지 않다는 것처럼 날 대했다.


그게 어떻게 가능한 거지.


보통 이런 의문이 생기면 입 밖으로 못내놓고 마음속에 담아둔 채, 혜진의 눈치를 살피며 조마조마하곤 했다. 하지만 왠지 지금은 물어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내가 천천히 운을 뗐다.


“나··· 이상해 보이지 않아?”


“응?”


“맨날 집에 모르는 여자애들이랑 같이 있고, 여자애들 성격도 하나같이 이상하고.”


혜진은 허공을 노려보며 생각에 빠졌다. 잠시 요 며칠 사이 일들을 되새겨보는 모양이었다.


“맞네. 확실히 요즘 이상하긴 했지. 너가 아는 여자가 그렇게 많을 리 없는데. 너가 열심히 꼬시고 다닐 성격도 아니고···”


혜진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지는 게 느껴졌다.


역시 의심받는 게 당연하다. 혜진이 날 싫어한다 해도 이상할 게 전혀 없다. 나도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근데 혜진의 낯빛에서 어두운 기운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다시 맑고 또렷한 미소가 자리 잡았다.


“그래도 괜찮아.”


“어?”


혜진이 내 어깨 위에 한 손을 얹고 가볍게 흔들며 말했다.


“난 너가 나쁜 놈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


“······”


“나쁜 짓만 아니면 괜찮잖아? 나중에 때 되면 알려줘. 어쩌다 여사친이 그렇게 많아졌는지.”


혜진이 소리 없이 입술로 키득거렸다. 그다음엔 나와 발을 맞춰 내 집으로 계속 향했다.


그러다 혜진이 화제를 전환하려는 듯 다른 말을 꺼냈다.


“그래서 어떻게 했어?”


난 다시 고개를 돌려 혜진과 눈을 마주쳤다.


“응? 뭘?”


“어떻게 집 밖으로 나왔냐고. 저번에는 현관 만나서도 죽으려고 하더만.”


“어··· 음···”


가방 덕분이겠지? 가방 덕분일 거다. 가방이 날 껴안고 희한한 소리를 했더니 이렇게 된 거니까. 하지만 혜진에게 그렇게 설명해줄 수는 없다. 그래서 난 대충 말을 지어냈다.


“그냥 한번 나와봤는데 괜찮더라고. 그래서 나왔지.”


“오올. 장족의 발전이네. 내 덕분인줄 알아.”


“너 덕분···?”


“내 덕분이지. 내가 안불렀으면 나오지도 않았을 거잖아.”


그렇게 생각하면 그렇네.


난 혜진과 길을 걸어 내 집으로 돌아왔다. 혜진은 웬일로 집에 다른 여자가 없다며 좋아했다. 그 뒤로는 예전과 똑같았다. 지극히 일상적이었다.


점심 저녁 메뉴를 혜진과 고민하여 시켜 먹고, 거실 바닥에 둘 다 드러누워 핸드폰을 보다가, 티비를 보다가, 각자 할 일을 했다.


그날 혜진은 유독 늦게 돌아갔다. 지하철 막차가 끊기기 직전까지 계속 우리 집에서 뒹굴거리다가 아슬아슬하게 집을 나섰다. 이후에 문자해보니 다행히도 막차를 놓치지는 않은 눈치였다.


그나저나 내 가방은 완전히 사라졌다. 사라진 가방은 어떻게 됐을까. 영문을 모른 채 잠에 들었다. 다음날 12시도 넘어서까지 늘어지도록 잠을 자고, 배고픔에 못 이겨 서서히 눈을 떴다.


사라진 가방을 찾으러 갈 필요는 없었다. 거실로 걸어 나왔을 때, 소파 위에 그 낡은 가방이 올려져 있었다.


아무 일 없다는 듯이 그곳에 놓여져 대각선으로 흘러들어오는 햇빛을 받아 빛나고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냐.




[1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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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2부 11화 22.06.01 21 0 12쪽
21 2부 10화 22.05.31 19 0 10쪽
20 2부 9화 22.05.30 20 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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