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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nniless 님의 서재입니다.

현실적 의인화법을 손에 넣었습니다

웹소설 > 자유연재 > 라이트노벨, 현대판타지

penniless
작품등록일 :
2022.05.11 12:03
최근연재일 :
2022.06.11 21:00
연재수 :
32 회
조회수 :
847
추천수 :
35
글자수 :
158,588

작성
22.05.14 20:30
조회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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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글자
11쪽

1부 4화

DUMMY

마치 블랙홀 속으로 빨려들어가듯 시선이 혜진의 머리카락에 고정되었다. 평소와 같은 혜진의 얼굴이면서도, 그 강렬한 이질감에 완전히 사로잡혔다. 너무 놀라 입도 잘 떨어지지 않았다.


혜진의 머리가 짧아져 있었다. 단발머리가 되었다.



/ / / / /



“언제 잘랐어?! 왜 잘랐어?!”


어젠 분명 길었었는데.


혜진은 머리를 꽤 정성스럽게 길렀었다. 어두운 갈색으로 염색하고도 머릿결이 상하지 않기 위해 애지중지였다.


“그걸 이제야 알아봐?”


“자를 거라는 건 상상도 못 했으니까.”


왜 갑자기 혜진이 머리카락으로 분위기 전환을 시도했는가. 그건 정말 모를 일이다. 그러다 혜진의 표정이 달라졌다. 잠시 숨을 가다듬더니 긴장한 투로 물었다.


“그래서··· 어때 보여?”


“응?”


“머리 어떠냐고.”


혜진이 얼굴을 붉히고 안절부절못했다.


머리 모양을 자세히 관찰했다.


역시 혜진에겐 단발이 안어울린다. 스타일링도 이상하다. 마치··· 실수로 너무 짧게 잘랐는데, 어찌 수습도 못 하고 끝을 대충 말아 올린 느낌이랄까.


“진짜 별로.”


“어?!”


혜진이 움찔했다. 너무 사실적인 표현은 충격적일 거 같아서 비유적으로 돌려 말했다.


“잘못 만든 초코송이 같아. 대머리 어른한테 사이즈 너무 작은 유아용 가발을 대신 씌우면 딱 그렇게 될 거 같아.”


“······”


내가 잘못 말했나.


분위기가 싸늘했다. 안경의 표정도 좋지 않았다. 혜진과는 눈이 마주친 채로 있었는데, 그 눈에서 눈물이라도 흘릴 것처럼 눈동자가 일렁였다.


“읏.”


“어?”


“······”


혜진이 고개를 푹 숙였다. 어찌할 틈도 없이 혜진이 말했다.


“나··· 가볼게.”


혜진이 몸을 돌려 현관으로 향했다.


“야! 왜 그래! 어디가!”


혜진이 문을 벌컥 열고 밖으로 나갔다. 어찌 붙잡기도 전에 문이 도로 닫혔다.


집 안에는 나와 안경만이 남았다.


“어···”


내가 안경에게 물었다.


“내가··· 말을 잘못했나.”


“호의적인 어투는 아녔지.”


“그게 저렇게 획 가버려야 할 정도야?”


“본인도 머리 망쳤다는 걸 인지하고 있었고, 그것 때문에 계속 속상했는데, 너한테까지 그딴 소리를 들으면 충분히···”


생각해봤다. 안경의 말은 일리가 있다.


아마 머리 망쳤다는 걸 가장 먼저 깨달은 사람은 혜진 본인일 거다. 어제저녁에 잘랐을 테니, 어쩌면 어제 밤새 거울 보면서 괴로워했을지도.


하지만 내가 틀렸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어쨌든 내 조언은 당연했다고. 저 얼굴에 단발이라니. 이쁜 얼굴을 망치는 짓이야.”


“넌 표현력이 후달리구나. 너 같은 밑바닥 쓰레기가 내 주인이라니.”


내가 사람도 아니고 안경한테 욕을 먹었다.


“···이제 어쩔까.”


“왜? 수습은 하고 싶나 봐?”


나 때문에 누군가 데미지를 입는다는 것 자체가 충격이다. 난 항상 최약체였는데. 가해자가 돼버리다니.


“어···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넘기는 건 좀 그래서.”


“이제 와서 예의 있는 척 하지마 쓰레기 주인.”


“···어쩌는 게 좋겠냐고.”


“몰라. 사과 문자라도 하던지.”


핸드폰을 꺼냈다. 혜진에게 문자해봤다.


[혜진?]


[차단]


칼답이었다.


“······”


진짜 차단했는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지금은 얘기하길 싫어하는 거 같다.


“안경? 이제 어쩌지?”


“나가 죽어.”


안되겠다. 이제 안경한테서는 적합한 조언을 기대하기 힘들어 보인다. 난 핸드폰에서 지금 시간을 확인했다.


“생각해보니 이제 24시간 지났잖아.”


“응?!”


난 안경에게 명령했다.


“안경. 다시 사물로 돌아가.”


안경이 기겁했다.


“싫어!”


“돌아가라고. 이제 공부하려면 안경 필요해.”


“너 공부 안하잖아!”


“할거거든?!”


안경이 뒤에서 날 끌어안았다. 이전처럼 안은 손으로 고리를 만들고 눈앞에 씌웠다.


“자, 잘 보이지? 이대로 공부해.”


“···어디서 아닌 척이야.”


24시간이 지나면 물건으로 돌려보낼 권한은 내게 있다.


“요정 불러서 처리해줄까. 아님 순순히 포기할래.”


“쳇.”


안경도 더 이상 내 명령에 저항할 수 없었다. 포기한 듯 순순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는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생명력을 잃은 순수한 사물로 돌아갔다.



/ / / / /



어찌됬건 혜진과의 관계는 회복할 필요가 있었다. 어떻게 하면 화해할 수 있을까. 진심 어린 사과? 물론 사과도 해야 하겠다. 하지만 그걸로 충분할지 걱정이다.


일단 떠오른 최고의 방법은, 문제의 원흉인 혜진의 망한 머리를 고쳐주는 거다. 사과하며 혜진의 머리까지 고쳐준다면 얼어붙은 이 관계도 금방 녹아들 거다.


하지만 혜진의 머리를 고쳐줄 방법이 없다. 난 내 머리도 꾸며본 적이 없었다. 남의 머리를 손봐줄 입장이 아니다.


그때 생각난 게 있었다.


엄마가 이 집을 떠났을 때, 엄마가 쓰던 물건 대부분은 그냥 여기 두고 갔다. 내가 알기로 엄마의 고데기가 이 집에 남아있다.


난 고데기고 뭐고 미용 기구 자체를 잘 모른다. 하지만 미용 기구를 인간화시킨다면, 내가 사용법을 몰라도 쓸 수 있지 않을까.


안방에 있는 서랍을 보이는 대로 열어봤다. 낡은 충전기 꾸러미나 예전에 쓰던 2G폰 등 여러 가지 잡동사니들이 쏟아져 나왔다. 내 돌잔치 금반지도 나왔다. 옛날 물건을 보관한 것으로 보이는 작은 상자 몇 개를 빼내 들었다.


···찾았다.


상자들 한두 개를 열어보니 고데기를 찾을 수 있었다. 오래된 것이지만 쓰질 안아서 새것같이 빛이 났다.


고데기 위에 왼손을 얹고 주문을 외웠다.


“사람 사람 사람.”


고데기가 인간화되었다. ···이번에도 여자아이였다. 지금까지 인간화해본 사물들 중에는 가장 어려 보인다. 대략 중학생 쯤으로 느껴지는 외소한 체구에 갈색 단말머리를 하고 있었다.


여태껏 인간화했던 사물들은 기존의 디자인을 반영해서 인간화가 됬다. 그리고 상식적인 범주의 복장을 입고 있었다.


근데 왜 고데기는··· 수영복 차림이냐.


정말이다. 그냥 분홍색 수영복 차림이었다. 문제는 그뿐이 아녔다.


“야옹.”


“······?”


고데기의 머리엔 갈색 고양이 귀가 달려 있었다. 수영복 뒤쪽 골반쯤에는 작은 구멍이 있었고 거기로 검은 꼬리가 튀어나와 있었다.


“미야옹~”


꼬리가 살랑거렸다. 이게 뭐야.


“너··· 사람 말 못 해?”


“냥. 냥”


뭔가 이상한데. 그리고 보니 고데기에 고양이 모양 로고가 달려있긴 했다. 설마 그게 반영된 건가.


“···버리고 다시 사야겠네.”


“저는 고데기에요.”


“말 한마디에 포기한다고?!”


말 못하는 척 하는 건 역시 연기였다. 고데기가 투덜거렸다.


“버려지긴 싫어요. 저도 살긴 살아야죠.”


“티끌만 한 끈기도 없구나.”


“그럼 반반 섞어서 쓰겠다냥.”


“···징그러워. 하지마.”


시작부터 만만치 않다. 고양이··· 아니, 고데기가 바닥에 납작 엎드리고 허리를 쭉 피는 스트레칭을 했다. 그다음엔 손등으로 얼굴을 부비며 말했다.


“얘길 들었어요. 인간화시킨 물건을 하루 만에 갈아치운다면서요.”


24시간이 되자마자 다시 사물로 돌려보내긴 했지.


“근데 넌 상자에 처박혀 있었잖아. 그걸 어떻게 알았냐.”


“주인이 악랄한 사람이라고 소문이 돌았거든요.”


“사물들 사이에서도 소문이 있어?”


“물론 있죠. 문자도 있고 SNS도 있어요.”


“SNS? 그 동내에서 서버는 누가 운영하냐.”


“연애도 하고 바람도 피고 불륜도 해요.”


“안좋은 것만 배웠구나.”


“실제로 해요. 얼마 전에 USB랑 하드디스크가 바람피다 들켰죠.”


···진짜 그런 세계가 있다고? 사물들 간의 사랑싸움은 쉽게 상상이 가지 않는다. 상당히 의외구만. 그나저나 USB랑 하드디스크랑 연애하면 자식은 뭐가 나오냐. SSD?


“사실 거짓말이에요.”


“···그럼 왜 그렇게 진지하게 얘기해!”


“인간의 입이 생긴 기념으로 아무 말이나 해보고 싶었어요.”


“인간들은 그렇게 아무 말이나 막 하고 살지 않아.”


“와! 역시 저는 인간 몸으로 오래오래 살아야겠어요.”


고데기가 바닥에 구르면서 기지개를 폈다. 얘랑 사사로운 대화를 이어나가서는 내 기가 빨릴 거 같다. 빨리 본론으로 넘어가자.


“됐고, 넌 어떤 식으로 작동하냐?”


바닥에 누워있는 고데기가 손을 V 모양으로 만들었다.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집어서 손질해요.”


손가락 V 근처에서 열감이 느껴졌다. 이게 고데기 열선 역할을 하는 거 같다. 고데기가 나에게 물었다.


“그래서, 맨날 처박아뒀으면서 웬일로 저는 꺼내셨죠?”


···바로 용건을 물으니 시원하고 좋다. 말이 잘 통할 거 같다.


“혜진이라는 애가 있는데, 걔 머리가 완전 망했어. 너무 짧게 잘라가지고. 본인도 좀 충격먹은 상태인 거 같어. 걔 머리를··· 좀··· 고쳐주고 싶은데···”


말하면서 생각해보니 내가 너무 말이 안되는 기대를 품었던 거 같다.


나는 미용 기기에 관해 잘은 모르지만··· 아마 고대기는 기껏해야 머리 모양을 잡아주는 물건일 거다. 혜진처럼 아예 잘못 자른 머리를 살릴 수는 없다.


하지만 고데기는 예상 밖의 대답을 줬다.


“살릴 수 있어요.”


“어?!”


“상태를 봐야 알겠지만··· 기본적으로 대머리 빼고는 다 살려요.”


그 와중에 대머리는 못 고치는구나. 전국의 탈모인 분들. 죄송합니다.


“그럼 그 혜진이 머리 좀 고쳐줘. 이쁘고 멀쩡하게. 걔가 어디 가서 부끄러워하지 않을 정도로.”


“네. 근데 혜진이란 사람은 어디 있죠.”


“내일 올 거야.”


혜진은 분명 내일도 올 거다. 어제도 그저께도 그랬으니까. 어쩌다가 혜진과 내가 싸우는 일이 있어도 항상 혜진이 먼저 와서 화해를 청했다. 차분하게 혜진이 우리 집 초인종을 누르길 기다리면 될 일이다.


하지만 그 전에 해야 할게 있다.


“너, 옷 갈아입어라.”


수영복 입은 고양이 인간이 집에 있다면 혜진은 기겁할 거다.


고데기는 몸을 움츠렸다.


“갈이 입힌다는 명목으로 저를 벗기려는 수작. 먹히지 않아요.”


“시도한 적도 없어.”


“고양이가 맨몸으로 있어야 한다는 건 선입견이에요. 요즘은 고양이들도 옷 입고 산책한다고요.”


“내가 언제 안입으랬냐. 갈아입으라고.”


“안되요. 이 방수 코팅은 고장을 막아줘요.”


수영복이 아니라 방수 코팅이었어? 고데기는 전자 제품이니까 저런 코팅이 있는 건가.


“그래. 안 벗길게. 그 위에라도 덮어 입어.”


품이 많이 남는 후드티와 츄리닝 바지를 대충 찾아줬다. 꼬리는 바지 안으로 말아 넣었고 고양이 귀는··· 옷장 구석에 야구모자를 찾아서 씌워줬다.


그렇게 입혀두니 얼추 사람 비스무리하게 되긴 했다. 누가 보고 기겁하진 않을 정도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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