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문식(3) - 당가타에서 온 소녀
매정립은 억류하는 피를 목구멍에 가까스로 넘겼다. 그는 이미 마음이 이는 데로 검을 자유롭게 수발할 수 있다. 초식을 잊었으며 구결에 따른 내공의 도인 없이도 검세를 취하면 자연스럽게 내공이 인다. 그 모든 것은 거의 동시에 일어나서 어떤 것이 먼저라 할 것도 없다. 이 모든 것이 초절정을 코 앞에 둔 절정고수의 진면목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의 뛰어난 무공이 오히려 독이 되었다.
방금 일어난 일을 떠올리자 비릿한 혈향이 다시금 울대를 치며 올라왔다. 절체절명의 순간... 매정립은 검을 멈출 수 있을 것이라 여겼다. 아마도 종이 한 장 차이로. 분명 그렇게 되리라 믿었건만...
맹렬히 일어난 파도는 한 순간에 멈춰버린 검세를 아랑곳 하지 않았고 그대로 치달았다. 갈 길을 잃은 자하진기는 오히려 그의 혈도들을 요란하게 가격하며 내부를 진탕시켰다. 그때의 작은 충격. 그것이 그의 검끝을 흔들리게 했고 청하의 목에 검흔을 남긴 것이다.
‘나는 아직도 자하진기를 통제하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자하진기의 힘에 밀려 손을 제때 멈추지 못하고 피를 보고 말았구나...’
매정립은 자하신공을 처음 연성한 날부터 뱃속에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용을 사슬로 묶어두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그런 느낌은 무공실력이 높아지면서 더 심해졌다. 무공이 성장할수록 자하진기도 같이 성장하고 있는 탓이다.
‘자하신공을 대성한다는 것은 자하진기를 다스린다는 것과 마찬가지. 그것이 가능해야만 천하제일 무공을 익혔다 할 수 있겠지.’
그의 스승인 규검자가 처음 자하신공의 구결을 읊어줬을 때 해주었던 말이 갑자기 생각났다. 그때는 그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 수 없었지만 지금은 뼈 져리게 느끼고 있다.
검 끝에서 어떤 위력이 펼쳐질지 예상하기 힘들 때도 있어 두려움이 일정도니. 매정립은 눈을 감았다. 이룩했던 모든 것이 의심스럽고 앞으로의 성취 역시 점치기 힘든 지금... 무공은 일년 째 답보 상태. 장문인도 자신의 상태를 눈치 채고 있을 것이다.
-심마(心魔)의 초입
이런 상황이 지속되다보면 언젠가는 반드시 심마(心魔)가 찾아오게 되리라... 그 날이 오면 이지가 흐트러지고 무공은 쇠락하며 자하신룡이라는 신화 역시 산산이 부서질 터!
‘자하신공은 내 의지보다 더 빨리 일어나... 때로는 자하신공의 의지대로 내가 움직이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강력한 신공을 익힌다는 것은 전부 이런 것인가. 절세 무공의 꼭두각시가 되는 것!’
그는 이런 생각부터가 심마의 시작인 것을 알기에 애써 고개를 저었다. 아직 입문을 기다리는 제자들이 셋이나 남아 있었다.
“사천 성도, 당가타에서 온 당소여 앞으로 나오거라.”
당가타의 이름이 들려오자 얼마간 지속되었던 침묵을 뚫고 좌중의 웅성거림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당소여는 자신을 대고 떠들어대는 소리에 진절머리가 났다. 정소소라는 소녀는 의연하게 이런 모욕을 받아 넘겼는지 모르겠지만 자신은 아니다.
사천에서 그녀의 아버지 일수탈혼비(一手奪魂飛) 당주보는 사신(死神)이라 불린다. 사천 안에서라면... 그녀 역시 만인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흔들었다. 듣기 싫은 소리라면 들리지 않게 하면 그만이다. 그것이 이제까지 그녀가 사는 방법이었다.
그저... 품안에 갈무리해둔 우모침을 아둔한 말코들을 향해 뿌리기만 하면 된다. 이중 몇몇은 자신이 왜 죽었는지도 모르고 한줌 혈수가 되어 사라지리라... 그렇게 생각하자 이내 기분이 좋아지며 입꼬리가 올라갔다. 보조개가 파인 방만한 미소였으나 어딘지 섬뜩한.
허나 사천 밖이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당가는 사천 무림 이외에서 가전무공을 펼치지 못하도록 가법에 의해 강력히 규제되고 있으니... 당연히 당문이 자랑하는 암기법과 용독술 역시 사용할 수 없을 터. 당소여 역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곧 미소를 지우고 태사의 앞으로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사천에는 사패와 일화가 있다는데 네가 바로 귀화(鬼花) 당소여로군.”
- 사천 사패일화
청성파 검패 심양도장
아미파 권패 현암사태
백리세가 도패 백리장천
은성장 부패 은강호
당가 귀화 당소여
사천 무림에서는 이들의 이름을 모르는 자가 없었다. 청성과 아미의 양패는 당대의 장문인. 백리세가의 도패 백리장천은 소가주로 가전 무공인 심월도법(深月刀法)의 적통을 이은 자. 150년 넘게 사천 제일 부호의 자리를 놓치지 않고 있는 부법의 달인 은성장주 은강호.
모두 사천 무림에서 일파의 종주급 배분을 자랑하고 있지 않은가? 사패의 일원은 아니었지만 사패를 논할 때면 언제나 자연스럽게 끼는 일화. 그렇다면 이제 겨우 십대 후반으로 보이는 저 소녀가 독과 암기로 유명한 대사천당가를 대표할만한 인물이란 말인가?
“생각보다 훨씬 젊군... 그러나 무공을 새로 배우기에는 좀 많은 편이고.”
규검자는 당소여를 위 아래로 훑어보았다. 머리에는 나비 모양의 비녀를 꽂아 틀어 올렸고 녹색 경장 위에는 소매가 긴 붉은 당의를 겹쳐 입고 있었다. 고양이를 닮은 얼굴은 어려 보았으나... 그녀의 명성이 섬서성까지 들려 온 것이 벌써 오년 전이므로 지금은 적어도 스물은 되었을 것이다.
“배움에 있어 나이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당소여는 예의를 차린 말투로 웃으며 말했지만 맞은 편에 있는 매정립이 보기에는 그 모든 것이 거짓으로 꾸며진 것처럼 느껴졌다.
‘그녀의 마음은 사갈과도 같다. 애초에 오만함으로 똘똘 뭉친 당가의 소공녀가 구태여 화산에 입문할 이유도 없을 터. 무엇인가 노리고 온 것이 분명하다. 장문인도 그것을 모르는 바가 아닐 테니... 아마도 입문은 거절당하겠지.’
당소여는 자신을 주시하는 눈빛을 느꼈다. 두 남녀의 눈이 잠시 허공에서 얽혔다. 장문인의 옆에 서 있는 젊고 잘생긴 남자. 그러나 어딘지 불안하고 고독해 보인다. 저런 남자가 후지기수 중 제일이란 소리를 듣다니... 그에게 묘한 호기심이 일었지만 그게 다였다.
“그대는 이미 사천 무림에서는 종주 급 대우를 받고 있는 터. 굳이 사천을 떠나 배분을 낮춰 활동할 필요가 있겠는가?”
규검자는 생각보다 깐깐한 자였다. 적어도 당소여가 느끼기에는 그러했다. 당소여는 이리저리 재고 말을 돌리는 남자를 아주 싫어했다. 그러나 지금은 내색하지 않고 스스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구궁절맥(九宮切脈)에 대해 아시는지요.”
-구궁절맥!
매량은 안타까운 침음성을 흘렸다. 칠음절맥, 태음절맥이니 하는 것들은 과하게 타고난 음기로 인해 인체의 균형이 무너져 단명하는 병이었다.
대략 십대 중반이 되면 세맥이 굳어져 침상을 벗어날 수 없고 스물이 되기 전에 세상을 뜨는게 보통이었다. 병의 원인도 알 수 없고 불치에 가까워 하늘이 내리는 천형이라 불렀다. 잘 모르는 이들은 절맥을 타고난 이들은 하나같이 미모가 출중하고 오성이 뛰어나 하늘이 시기하여 일찍 데려갔다고 말하기도 했다.
구궁절맥은 이보다는 상황이 조금 괜찮았다. 세맥이 굳어 무기력하게 죽음을 기다려야 할 필요가 없었다. 남들 사는 만큼 살았고 어떻게 보면 남들보다 조금 더 건강하기도 했다. 죽을 때까지 구궁절맥에 걸렸다는 사실을 평생 모르는 이들이 태반이리라...
그러나 구궁절맥을 무림인이 앓는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대부분의 무인들은 자신이 구궁절맥을 앓는다는 사실을 토납법을 익히면서 알게 된다. 기해에 한줌의 진기가 쌓이는 순간... 그들은 세상이 뒤집어지는 고통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고통은 최초의 순간만이 아니라 내공을 쌓고 움직이는 매순간 일어난다.
운기라는 것은 한 치의 번뇌도 없는 고요한 상태에서 행해야 하는 것. 강한 고통은 무아지경에 몰입하는 것을 방해한다. 고통이 운기조식에 각인되면 축기를 하고 자신의 내부를 들여다 보는 일 자체가 두려워지기까지 한다. 그 상태에서 계속 내공을 쌓으려 든다면 주화입마에 들게 되는 것은 뻔 한 일.
구궁절맥을 앓는 이들은 결국 내공을 포기하고 외공수련에 빠지거나 무공 자체를 포기하게 된다. 무공을 익히더라도 그들은 결국 반쪽짜리... 무명을 휘날리며 천하를 종횡하는 일 따위는 평생 없을 것이다.
“내공을 익히면 고통을 느끼는 절맥이 아닌가. 축기가 불가능해서 외공 따위에 빠지게 된다지...”
당소여는 장문인의 얼굴을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마치 절반만 맞췄다는 듯이.
“축기가... 아예 불가능하지는 않습니다. 그 고통을 참을 수만 있다면요.”
매정립은 당소여의 말에 크게 놀랐다. 그녀의 말은 마치 그녀가 구궁절맥을 앓고도 내공을 쌓아 일파의 종주급 무공실력에 도달했다는 뜻이 아닌가!
“하하하! 재미있군... 재미있어.”
장문인은 눈을 감더니 대략의 상황을 정리한 듯 싶었다. 눈을 뜬 규검자는 이제 그녀를 흥미로운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래. 입문자에게 화산파는 두 가지 선택지를 주고 있다. 이는 벌써 100년도 전부터 정해진 전통. 절대고수가 되는 길과 그 이외의 길.”
매정립은 장문인이 당소여에게 입문의 기회를 주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화산파의 문호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문파 제자들의 추천 없이는 입문이 불가능한 점창파나 까다로운 입문시험으로 위명이 높은 무당파와는 다르다. 그들이 물어보는 것은 단 하나. 자신의 무공이 담길 그릇의 크기. 그 후에는 그에 맞는 무공을 가르쳐 줄 뿐이다. 입문식이라는 칭호도 100년 전에는 아예 없었다. 그때는 수시로 제자를 받았고 모두가 매화검법을 익혔다. 장문인과 장문제자. 둘만이 비밀리에 자하신공을 연마했을 뿐.
아무리 화산파가 다른 문파들에 비해 입문이 자유롭다고 하나 어느 정도 자신의 무공을 완성한 이가 들어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인 것이다. 그런 이들은 문파에 대한 존중이나 감사의 마음이 일체 없다. 분명 문파의 위세를 이용하는 관계가 되리라.
당소여. 매정립은 그녀에 대해 자세히 알지는 못하지만 매정립은 섬서와 사천 일대에서 활동하던 흑갈쌍살이 어떻게 죽었는지는 알고 있다. 머리를 제외한 나머지 부위가 모두 녹아 버렸다던가. 흑갈쌍살이 아무리 사마외도의 길을 걷는 마인이라 할 지라도 그녀의 손속은 너무 무정하지 않은가. 분명 그녀의 태도와 사갈 같은 마음은 입문 뒤에도 두고두고 문제가 될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입문에 대한 것은 전적으로 장문인의 결정. 두 길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질문이 나온 이상 그녀의 입문은 결정된 것이나 다름 없었다.
“장문인님. 제가 천하제일인이 되는 길을 선택한다면 자하신공을 배우게 되겠지요?”
당소여의 질문에 좌중의 시선은 모두 규검자의 입에 쏠렸다. 입문식에 참가한 일대의 제자들 역시 자신이 앞으로 익히게 될 무공에 대해 궁금증이 가득했다. 과연 소문처럼 과거 장문인들만 익혔다는 전설적인 자하신공을 익히게 되는 것인가.
“그렇다. 자하신공을 익히지. 그것을 대성하는 것은 너의 재능에 달려있지만 말이다.”
의외로 대답이 쉽게 나오자 당소여는 보조개를 들어내며 미소를 보였다. 당소여가 입문하게 된다면 아마도 매정립의 문하... 어쩌면 장문인이 직접 가르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당소여는 매정립의 사매가 될 수도 있는 일. 그녀의 무공 실력이나 재능만 놓고 보아도 그렇게 될 가능성이 높았다.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자 매정립도 마냥 그녀를 백안시 할 수는 없게 되었다. 경계하는 눈빛이 다소 풀어졌다.
“그렇다면 저는 천하 제일인이 될 수 없겠군요. 저는 자하신공을 익힐 마음이 없습니다.”
당소여의 선언에 좌중은 모두 놀란 토끼눈이 되었다. 그 누가 천하제일인의 무공을 걷어찬단 말인가! 오직 매량만이 과거의 자신이 떠올라 헐렁한 웃음을 지을 뿐...
Comment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