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천하제일의 무공
“무공에는 두 가지 길이 있다. 느리고 힘들지만 결국에는 천하 제일인이 될 수 있는 길. 쉽고 빠르게 고수가 될 수 있지만 절대로 천하 제일인은 될 수 없는 길. 너희는 어떤 길을 택하겠느냐?”
얼굴이 희고 눈매가 또렷한 아이는 노인의 얼굴을 한참동안 맹랑하게 바라보았다.
“첫 번째 길을 택한다면 반드시 천하 제일인이 될 수 있나요?”
“물론이다. 대성한다면 너는 반드시 천하 제일인이 된다.”
노인. 그러니까 대화산파의 23대 장문인 풍정도장은 아이의 대답에 단호하게 말했다. 천하제일을 논하는 순간에 풍정도장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그것은 자파의 무공에 대한 지극한 믿음으로만 가능한 태도였다.
근 천년 이상 내려온 무림 역사 속에서 세인들의 관심사는 단연 ‘천하제일의 무공은 무엇인가?’였다. 그간 수많은 논쟁이 있었지만 당대에 와서는 소림의 역근과 세수, 무당의 태극혜검이 천하제일 무공으로 논할만했다.
그러나 풍정도장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항간에는 ‘북으로는 숭산이, 남으로는 무당이 있다.라는 말이 있었지만... 융성함만 놓고 문파 무공의 수준을 짐작한다면 그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겠지...’
아무리 뛰어난 무공이라도 익히는 이가 극히 적다면 제대로 전수될 리 만무하다. 달마대사가 창시한 역근과 세수는 특유의 심오함과 난해함이 언제나 문제가 되지 않았는가? 뛰어난 천재들이 평생을 바쳐도 성취를 보일 수 없는 무공은 차라리 없느니만 못하다는 것이 현 소림방장 혜정의 생각이었다.
혜정의 사부 반선대사는 죽을 때까지 역근경을 붙잡고 있었다. 반선대사가 82살의 나이로 세상에 뜨기 전 혜정에게 유언으로 이런 말을 남겼다.
“역근과 세수는 무공서가 아니다. 이것을 천하제일 무공으로 알고 익히려는 인간이 얼마나 어리석고 오만한지 알려주는 가르침이다. 나는 그것을 죽기 전에야 깨달았다. 아니지... 내내 아니라고 부정하다가 죽기 전에야 겨우 인정하게 된 것이겠지...”
혜정의 사부는 소림이 배출한 최고의 기재였다. 그의 무명이 소림의 안팎으로 진동할 정도가 되자 소림방장과 계지원의 노승들의 허가로 달마삼검, 달마역근경, 세수진경 중 하나를 익힐 수 있게 허가해 주었다. 모두가 전설로만 내려오던 무공이었다. 또 소림에서도 제대로 익힌 자가 없어 사장되다 시피한 무공이었다.
그 때문인지 뛰어난 자가 배출될 때마다 소림은 묘한 기대감을 내비쳤다. 혹시나 이 무공들이 부활할지도 모르기에... 그러나 역근은 과연 역근인 것인가! 천고의 기재라는 혜정의 사부역시 역근경의 벽을 넘지 못했다. 쉰이 넘을 때까지 역근의 기초적인 무리 이상을 깨닫지 못한 그는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때 반선대사는 청년시절 자주 쓰던 무공들을 다시금 점검하고 있었다. 과거 화려했던 시절을 추억해보며 자신감을 되찾고 싶기도 했었다. 더불어 무엇인가 자신이 놓치고 가는 것이 있는지 확인할 필요도 있었다. 문제는 그 때 발생했다.
그의 성명절기였던 반선수(盤禪袖)의 위력이 오히려 감소한 것이다. 소림의 무공은 철저하게 내공을 중심으로 한 것. 나이가 들어 근력이 감소했다고 무공의 위력까지 퇴보하진 않는다. 허망하게도... 역근을 익히며 허비한 시간 동안 실제로 그의 무공은 퇴보해 버린 것이다.
그는 충격을 받아 자신에게 무공을 권했던 계심원으로 쳐들어갔다. 그곳은 은퇴한 노승들이 죽기 전까지 참선과 불법 연구를 이어가는 곳이었다. 때때로 소림의 일에 이런저런 충고와 훈수를 두기도 하고 소림이 위기에 처하면 숨겨둔 힘으로 일어서는 곳이기도 했다. 계심원을 뒤집어 엎던 그는 사대금강에게 제압당해 참회동에 붙잡히는 신세가 되었다. 소림의 사대금강하면 절정고수로 이름이 높았지만 그들 모두 반선대사의 사질이나 다름없는 이들이었다. 무공으로도 배분으로도 과거 그와는 눈도 마주치지 못할 정도로 격차가 있지 않았던가... 지금은 사대금강 중 둘만 나서도 오십수를 채 버티지 못했다. 일년 후 참회동에서 나온 반선대사는 폭삭 늙어 있었다. 혜정대사는 허옇게 세어버린 스승의 수염과 텅 비어버린 동공을 보고 할 말을 잃었다.
‘역근은 불공(佛功)이 아니다... 마공(魔功)이다... 사람의 마음을 갉아 먹고 번뇌를 주는 것이 어찌 천하 제일 무공이냔 말이냐...;
혜정이 방장에 오르고 더 이상 역근과 세수를 익히는 무승은 없었다. 오직 선종을 연구하는 불법승들만이 달마의 발자취를 쫓아 그 낡은 책자들을 넘기고 있다.
무당의 태극혜검은 어떠한가? 그 역시 역근과 세수 못지 않다. 무당파의 조사인 현현자(玄玄子) 장삼봉이 창시했다 알려진 태극혜검. 장문인에게 일인전승으로 내려오고 있는 탓에 익히고 있는 자가 극히 드물었다. 무당의 장문인들 역시 무공이 외부로 세어나가는 것을 두려워해 절체절명의 순간이 아니면 꺼내지 않기로 유명하기도 했다.
너무 비밀스럽게 전승되고 있던 탓인가. 120년 전 무당의 장문인 수현진인과 장문제자 현유가 외유 도중 동시에 암살당하는 일이 발생한 뒤에는 더 이상 태극혜검을 익히는 자가 없다. 무당의 제자들은 혹시나 싶은 마음에 수현진인의 유품과 기록물을 찾아 보았지만 결국에는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 그들이 내린 결론은 태극혜검이 구결로만 전해진다는 것. 더불어 무당은 태극혜검을 영원히 잃어버렸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면에서 화산의 무공은 모두에게 열려있다. 장문인에게만 내려오던 자하신공도 풍정도장에 이르러서는 익히고자 하는 이에게 아낌없이 전수해주고 있었다. 단지... 지금처럼 익히려는 자의 각오를 물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아이는 고민할 것도 없이 대답했다.
“하겠어요. 천하 제일인이 되는 길.”
아이의 건강하고 밝은 태도에 주변에 서 있던 도인들은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 노인은 자신의 왼편에 서 있는 중년의 남자를 돌아 보며 말했다.
“자운. 이 아이는 자네가 데려가게. 자네 제자라면... 매(梅)자 항렬이 되겠군. 도명은 적당한 걸로 그대가 정해 주게나.”
“그러죠.”
자운은 한 자루 날카로운 검 같은 사내였다. 절정을 넘어서면 기도가 안으로 갈무리 되는 것이 보통이었으나 외려 자운은 예기를 겉으로 드러냈다. 그는 자하신공으로 예민해지는 감각을 숨기려 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감싼 기운을 주변에 휘둘렀다. 예전에는 그래도 사형 대우를 해주던 사제들은 이제는 그를 피했다. 그럴수록 자꾸 고독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절대 강자는 결국 혼자가 될 수밖에 없는 운명! 자운은 이미 그것을 뼈 속 깊숙이 알고 있었다.
선풍도골의 노인 앞에서도 떨지 않고 당당하던 아이도 자운의 눈빛을 받자 움찔 거렸다. 자운에게서 흘러나온 예기가 몸속으로 파고 들어 자신의 혈도를 타고 온몸을 샅샅이 훑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이 정도면 나쁘지 않군. 좋다. 네 도명은 매정립(梅正立). 날 따라 오거라.”
이제 매정립이 된 아이는 사문의 어른들에게 인사 한마디 없이 떠나는 자운을 따라 노군동을 떠났다. 자운은 다음 대 장문인으로 지목된 장문제자. 더불어 화산 제일검이자 천하 제일기재라 불리고 있는 사내였다. 그의 방자한 태도에도 사문의 어른들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30년 전 그도 천하 제일인이 되는 길을 선택했고 묵묵하게 그 길을 가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 길이 얼마나 고되고 힘든지, 그것을 위해 무엇을 포기해야 하는 그들은 모두 잘 알고 있었다. 좌중의 시선은 이제 매정립의 옆에 앉아 있었던 허여멀건한 아이에게 모아졌다. 아이의 이름은 진경이었다.
“그래. 진경아. 너는 어떤 길을 가고 싶으냐?”
풍정도장은 매정립에게 보여주지 않은 인자한 미소를 보였다. 진경은 풍경도장의 외손자. 눈에 넣어도 아플 것 같지 않았던 고명딸 마염비가 낳은 자식이었다. 진경의 파리한 인상에 처진 눈은 마염비를 그대로 빼닮았다. 그녀는 이미 죽어 없어졌기 때문에 풍정도장에게 진경은 아주 소중한 존재가 되어 버렸다.
“천하 제일인이 되는 길은 물론 고통스럽겠죠?”
“분명 그렇다.”
“혹시 제가 쉬운 길을 간다고 한다면 할아버... 아니 장문인님께서는 실망하실 건가요?”
“그렇지는 않다. 어디까지나 너의 선택. 선택도, 책임도 결과도 스스로 받아드리면 된다.”
“그렇다면 저는 결정했어요.”
모두의 이목이 진경에게로 쏠렸다.
“저는 독패강호(獨覇江湖)하고 싶은 마음이 없어요. 그저 화산의 평범한 제자면 족합니다.”
- 작가의말
매주 일요일 연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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