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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채의 서재입니다.

말빨로 살리는 네크로맨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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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채 아카데미 작가
작품등록일 :
2023.02.05 16:31
최근연재일 :
2023.04.10 08:20
연재수 :
28 회
조회수 :
14,960
추천수 :
770
글자수 :
159,042

작성
23.03.20 21:20
조회
762
추천
36
글자
12쪽

까마귀 부부

DUMMY

휘이이이···

북으로부터 불어오는 건조하고 서늘한 바람.


-끼익!


그 사이로 마수의 소름끼치는 울음이 수를 놓는다.


지옥.

그것이 북부의 또 다른 이름이다.

북서쪽 너머로 보이는 '타락한 숲'은 물론, '공허의 평야', 사람의 정신을 망가뜨린다고 하는 '몽환의 호수' 등등.


-대륙인들은 북쪽으론 오줌도 싸지 않는다.


10년 전 방구석 대문호, 김한수는 그렇게 적었다.


랄프의 둥지는 북부 마경과의 경계면에 있었다.

깎아지른 듯 아찔한 절벽.

사이사이 갈라진 틈 중 하나가 놀랍게도 둥지로 향하는 길목으로 기능했다.


그렇게, 금세 수풀로 가려진 동굴의 작은 입구가 드러났다.

과연 랄프의 기억대로, 두꺼운 철제문이 그 앞을 지키고 있었다.


"···찾았군요."


필립이 그간의 채증을 내려놓듯 말했다.

문 앞에 덩그러니 놓인 몇 개의 짐가방.

랄프는 여기서 열쇠가 사라진 것을 알아채곤 절망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아니다.

지금 '까마귀 둥지의 열쇠'는 내 손에 있으니까.


철컥! 끼이이···

녹슨 마찰음과 함께 문이 열렸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리는 탄성을 내질렀다.


공간이 넓지는 않았으나, 온 벽면에 제국 금은화와 귀금속들이 널려 있었다.

장식장에는 장인의 솜씨로 보이는 액세서리들이 그득 쌓여있었고, 마나석이 담긴 상자는 차마 닫히지도 못한 채, 입 틈 사이로 그 푸른 보석을 한껏 내뱉고 있었다.

제국 귀족들의 비고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었다.


쏴아아.

몇 년만의 햇빛 덕에, 둥지가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동굴의 끝에 다다르자, 새로운 문이 기다리고 있었다.


끼이이···

문이 열렸고, 보물창고와는 참으로 대조적인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낡은 나무 그릇과 양동이, 해진 수건이 걸려 있었고, 식탁 위에 놓인 식물이 미라처럼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사람이 살던 흔적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침상에 누운 백골이 보였다.

그녀의 텅 빈 눈자위는 문을 향해 있었다.


소피.

그녀는 이 문이 열리길 줄곧 기다렸을 것이다.

자신의 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도.


무심결에 그녀의 눈을 감겨주려 했지만, 손가락이 쑤욱 빠져버렸다.

그녀에게는 이제 눈꺼풀이 없는데.

여느 때와 같이 격통이 찾아왔다.


【인물 퀘스트 -소피 피셔】

【당신과 소피의 인연이 시작되었습니다. 당신은 그녀의 존재를...】


그녀 자신도 왕년에는 유명한 도둑이었다.

10년 전, 나는 그렇게 상상했었다.


퀘스트 창에 띄워진 마지막 메시지를 확인했다.

그리고 곧장 몸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루시아와 필립에게 말했다.


"다녀오자."

 

▶ 퀘스트: Step1 : '랄프의 시체' 획득.

▶ 보상: 스킬, 판타스마고리아 [소피] 1단계


아무리 생각해도 그 놈의 무덤은 거기가 아니었다.




***




달그락.

랄프의 유골은 연골이 모두 썩어버린 탓인지, 블럭 조각처럼 각기 떨어져 있었다.

필립이 큼지막한 바구니를 챙겨왔고, 다 같이 녀석의 뼈를 하나하나 주워 담았다.


랄프의 뼈를 소피 곁에 재조립하듯 늘어놓았을 때, 번뜩 퀘스트 창이 눈앞을 채웠다.

그것도 두 개나.


▶ 퀘스트: Step1 : '랄프의 시체'를 획득했습니다.

▶ 보상: 스킬, 판타스마고리아 [소피]가 개화합니다.


▶ 퀘스트: Step2 : '소피의 시체'를 획득했습니다.

▶ 보상: 스킬, 판타스마고리아 [랄프]가 2단계로 격상됩니다.


두 사람 모두 스킬을 개화했다.

판타스마고리아는 인물의 '찬란했던 때'를 상연한다.

그리고 여기에는 내 나름의 해석을 가미할 수 있다.


침상의 부부처럼, 서로 얽힌 두 사람의 퀘스트가 의미심장해 보였을까?

그도 아니면, 울리히가 가진 문필가 특유의 감성적인 기질이 튀어나온 것일까.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나는 분명 무언가에 휩쓸려 있었다.

그래서 스킬을 사용했다.


【단계 격상으로 인해 판타스마고리아 [랄프]의 쿨타임이 초기화되었습니다.】


【판타스마고리아 [랄프] 2단계】

발동 유형: 액티브

-5분 동안, 살아생전 인물이 가졌던 '찬란했던 때'를 상연합니다.

-습득하고 있는 스킬, '해석학자. level.9'를 적용하여 발동할 수 있습니다.


지속시간이 5분으로 늘어났고, 얼만지 모를 쿨타임 또한 초기화되었다.

나는 '찬란함'에 대해 나름의 해석을 가미한 참이었다.

그들이 '최고로 사랑할 수 있었던 때'.


긴 인생에서 얼마 되지 않는 짧은 시간이다.

그러니 찬란하다, 삶의 다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하지만 판타스마고리아는 내 해석을 뛰어넘는, 그 이상의 결과를 보여주었다.


【판타스마고리아 [랄프]가 판타스마고리아 [소피]와 상호성을 발휘합니다.】

【'다중 판타스마고리아'가 적용됩니다.】

【적용 테마: 노스탤지어(Nostalgia)】


【'다중 판타스마고리아 : 노스탤지어(Nostalgia)'로 인해 판타스마고리아 [소피]가 2단계로 임시 격상됩니다.】


화아악-!

뿌연 연기가 미친듯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대부분 금색, 그리고 옅게 섞인 분홍색.

약간의 갈색이 가을 낙엽처럼 얹혔다.


취이이...

우리는 천천히 동굴 밖으로 빠져나왔다.

그리곤 말없이 절벽을 등지고 나란히 섰다.


동굴 안쪽에서 새어 나온 황금빛이 그림자를 만들었다.

그리고,


-하하.

-호호.


두 남녀의 웃음소리가 새어 나온다.

다중 판타스마고리아로 인해 어느 두 사람의 '찬란했던 때'가 상연된다.


러닝타임 5분.

그야말로 황금 같은 시간이다.

나는 무언가에 홀린 듯, 저물어 가는 해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방랑시인 level.9이 발동됩니다.】


우리는 탐욕스런 까마귀 부부.

황금으로 가득 찬 생애를 살았네.


금화가 아니어도 좋아.

은화가 아니어도 좋아.


각자 깃털에 숨겨온 한닢

나란히 두 닢이면 족했네.


우리는 탐욕스런 까마귀 부부.

황금은 쌓여도 삶은 짧았네.


얼굴이 야위었소.

이리 오랠 줄 알았다면 곁에나 있을걸.


이제 우리는 욕심 많던 까마귀부부 .

분에 찬 생애를 살았네.


신혼이 아니라도 좋아.

황혼이라도 좋았어.




***




날이 밝았다.


공작가의 재산과 둥지의 보물을 손에 넣었다.

그 수를 가늠하느라 한나절 내내 손이 모자랄 지경이었다.


철컥!

당장 필요한 짐만 안장에 챙겼고, 일단 나머지는 그대로 두었다.

물론 저금통처럼 썩혀 둘 생각은 없다.


장차 우리는 제국과 전쟁을 벌여야 한다.

상당한 양의 보물이라곤 하나, 군자금으로서는 부족한 양이다.

이 돈을 좀 더 크게 굴려줄 필요가 있었다.


마침, 이 근방에서 찾으려던 영감이 정확히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이다.

그는 재신(財神)의 선택을 받은 인간이니까.

로토스 대륙의 워렌 버핏이라고나 할까.

백발 노인네인 것까지 아주 똑 닮았다.


필립에게 물었다.


"필립, 혹시 프리츠 상단이라는 곳을 들어본 적이 있나?"

"물론이죠. 자유연합을 상징하던 대표 상단 중 하나였는 걸요. 하지만 이상하게 최근에는 이렇다 할 소식을 못 들었네요."

"프리츠 상단주에 대해 알아봐 줄 수 있을까? 정확히는 상단 사무소에 머무는 시기를 알 수 있다면 좋겠는데."

 

프리츠는 자잘한 상행도 직접 이끄는 편이다.

무턱대고 갔다가는 몇 주 이상 기다려야 할지도 몰랐다.


필립의 대답은 긍정적이었다.


"흩어진 모호이너지가의 가신 중에 연합으로 흘러 들어간 이들이 있습니다. 오랜만에 식구들을 봐야겠군요, 흐흐. 그리 어렵지 않게 알아낼 수 있을 겁니다."


필립은 그 말을 끝으로 곧장 자유연합으로 떠났다.

길게 배웅하지는 않았다.

조만간 다시 만날 테니.


마저 짐을 챙기려던 중, 유난히 큰 보따리에서 경박스런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래서, 사제는 언제 데려올 거요?"


딱딱!

목소리의 주인은 깔끔하게 부위별로 발골된, 한 무더기의 뼈 해골이었다.

루시아가 성큼 다가가 정강이뼈 하나를 집어 들었고, 리드미컬하게 보따리를 후려쳤다.


-빠악!


"아악-!"

"닥쳐라. 도둑놈."


그렇다.

나는 랄프를 되살렸다.


나의 판타스마고리아가 녀석의 우울감을 이미 치유한 상태였기에, 설득은 어렵지 않았다.

나는 녀석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다.


대업을 이룬 뒤, 두 사람을 함께 성불시켜주기로.

신관 라파헬이라면 그 어떤 사제보다도 편안히 그들을 인도해줄 수 있을 것이다.

녀석 또한 적극적으로 수락했다.


한 가지 재밌는 점은 지금 녀석의 '형태'였다.

보따리 안에서 달그락거리는 것이, 영락없는 시장 봉투에 담긴 사골 국거리다.


루시아와 달리 랄프의 시체는 3년간 풍화되었던 탓에, 뼈를 연결하고 움직이는 흑마법적 '사념'에 정해진 형태랄 게 없었다.


예컨대...


"삼각형!"

"밀리터리 서클!"

"졸라맨 16호 로켓런쳐!"


어젯밤, 내 명령에 따라 척척 몸을 바꾸던 녀석의 재기발랄한 모습이 떠오른다.

북조선 서커스단에 비교해도 전혀 꿀리지 않았다.


나름 쓸모가 있을 것 같은 능력이다.

향후 다른 영웅들을 살려낼 때도 참고가 될 터.

하지만 랄프를 되살린 데에는 더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판타스마고리아 [랄프] 2단계】

발동 유형: 액티브

-5분 동안, 살아생전 인물이 가졌던 '찬란했던 때'를 상연합니다.


영웅들에 비하면 랄프는 일개 좀도둑에 불과했지만, 그럼에도 루시아보다 빠르게 판타스마고리아 2단계를 달성한 상태였다.

어쩌면 갓 살아난 영웅들 이상으로 활약을 해줄지도 몰랐다.

게다가, 애초에 이놈 특기는 따로 있었다.


▶ 퀘스트: Step3 : 난이도 (중) 이상의 아이템 절도하기 (0/3)

▶ 보상: 스킬, 판타스마고리아 [랄프] 3단계


세 살 버릇이 여든을 초월했다.

이놈은 죽어서까지 도둑질을 해야 한다고 운명이 점지해주고 있었다.


나쁘지 않다.

해골 특유의 은신 능력과도 시너지가 날 테고, 5분 정도는 쓸만한 도둑으로 활약할 수 있다.


물론 성과는 랄프뿐만이 아니었다.

애당초 목적이었던 루시아의 검날 또한 우리 손에 들어오게 되었으니까.


【판타스마고리아 [루시아] 1단계】

발동 유형: 액티브

-1분 동안, 살아생전 인물이 가졌던 '찬란했던 때'를 상연합니다.


이로써 1분 동안은, 루시아도 전성기 시절의 무력을 뽐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두 개의 판타스마고리아가 모이자, 자연스레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다중 판타스마고리아.'


랄프와 소피에게 스킬을 사용했을 때, ‘다중’이라는 글자와 함께 소피의 스킬이 강화되었다.

어쩌면 루시아와 랄프도 함께 다중 판타스마고리아를 발동할 수 있지 않을까?


테스트해 볼 여지는 충분했다.

마침 루시아에게도 좋은 퀘스트가 주어진 참이었으니까.


▶ 퀘스트: Step2 : 난이도 (중) 이상의 보스몬스터 처치하기 (0/3)

▶ 보상: 스킬, 판타스마고리아 [루시아] 2단계


쉬운 퀘스트는 아니다.

보통은 레이드를 벌여야 잡을 수 있는 것이 바로 저 '보스' 몬스터니까.

 

하지만 <로토스 전기>는 내가 쓴 게임이 아니던가?

보스들의 난이도는 물론, 놈들의 전투 패턴과 습성에 대해서도 속속들이 기억하고 있다.

그러니, 불가능한 퀘스트는 아니었다.


휘이이 불어오는 바람에 고개를 돌렸다.

절벽 아래, 북부의 서늘한 황야가 눈에 들어오고, 불길한 괴수들의 울음소리가 메아리처럼 들려온다.


-끼이이이이···


마침 코 닿는 거리에 쓸만한 놈들이 있다.

'북부'는 로토스 대륙 최악의 위험지대이지만···


우리에게 딱 좋은 사냥터가 될 거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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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사망선고 23.03.29 320 26 14쪽
15 빌헬름의 무사수행 +2 23.03.28 375 24 13쪽
14 고대의 유지 오르비스 23.03.27 388 25 14쪽
13 하겐 숲지대 공성전 +2 23.03.26 427 31 13쪽
12 환경보호 +2 23.03.25 417 32 13쪽
11 시몬을 찾아서 23.03.24 434 32 14쪽
10 정령석 경매와 리센 백작가 +3 23.03.23 478 33 13쪽
9 유포리아 +1 23.03.22 532 28 12쪽
8 타락한 숲의 쌍둥이 소녀 +1 23.03.21 626 32 12쪽
» 까마귀 부부 +2 23.03.20 763 36 12쪽
6 판타스마고리아 +2 23.03.19 822 36 11쪽
5 그거라도 보러 가시겠습니까 +1 23.03.18 943 38 11쪽
4 아는 이름 +4 23.03.17 1,107 47 12쪽
3 가능성 감각 23.03.16 1,288 58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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