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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스퍼 님의 서재입니다.

변수의 굴레

무료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SF

세스퍼
그림/삽화
발아현미우유
작품등록일 :
2014.08.20 17:22
최근연재일 :
2020.08.11 17:50
연재수 :
389 회
조회수 :
45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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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3,143,319

작성
17.01.12 1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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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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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글자
18쪽

(25막) 탈태(奪胎) (4)

DUMMY

“그랬더니, 그 새끼가 깨진 유리잔을 붙잡고 사색이 되는데, 와-, 진짜 거기서 웃음 참느라 뒤지는 줄 알았다니까.”


“크큭, 씨발. 그래서? 알려줬더니 뭐래?”


“뭐라긴, 우리 죄다 잡아 족치겠다고 쫓아오길래 존나게 도망갔지.”


두 병사의 웃음소리가 숲바람과 함께 나무 사이를 가로지른다. 가죽을 덧대고 이어붙인, 방호력이 의심되는 갑옷이나 군율이라곤 보이지 않는 그 자유로운 분위기로부터 그들이 베르달의 용사들임은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아르다르로 이어지는 베르메스 평원. 그리고 그 평원과 맞닿아있는 베르달숲의 남서쪽 경계였기에 이쪽에서의 순찰 임무는 말 그대로 산책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그런 태도와 상황을 용납할 베르달의 ‘늑대’가 아니었지만, 용사들은 아무리 무서운 대장님일지라도 평시에 이런 변방에까지 경계점검을 나오진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게다가, 요새 대장님은 뭐가 그리도 바쁜지 바크달룬성에 틀어박혀 하루 종일 보이질 않고 있는 참.


“.......”


그러나

아무리 평화로운 시기의 평화로운 숲속이라 하더라도 베르달의 용사는 용사였다. 여인의 미소가 먼저 사라졌고, 곧바로 뒤이어 청년이 검과 단검을 뽑아든다. 비록 기사도, 기사의 피를 지닌 자들도 아니었지만, 온갖 전장과 생존으로 벼려진 용사들의 촉각과 후각이 먼저 위화감을 알아챈 것이다.


“아오, 씨발!”


그리고 그 ‘위화감’의 원인인 에두가 먼저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온다. 베르달의 용사들이 지나갈 때까지 숨어서 기다리자는 의견이 ‘분대’의 합의점이었지만, 숨을 죽이고 기다릴 성격도, 영력을 숨긴다는 개념도 없었던 ‘미친개’는 그냥 자신이 생각하기에 합리적인 선택을 강행하기로 한 것이다. 치체와 에이미는 한숨을 쉬며 에두의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


여전히 어설프기 짝이 없는 도약. 그래도 그 선천적인 탄력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에두였기에 그의 발은 빠르게 용사들의 그림자를 밟는다. 하지만 그를 기다리고 있는 건 굴욕이었다. 확신을 갖고 내지른 주먹이 크게 공중을 가로지른 것이다.

헛방.

익숙하지도, 앞으로도 결코 익숙해질 수 없는 감각이 에두의 전신을 휘감는다. 그의 입에서 무의식적인 욕이 튀어나오기 직전, 베르달 용사의 싸늘한 단검 끝이 에두의 턱을 받치며 들어온다.


“웬 놈이냐?”


만약 에두가 무장을 하고 있었다면 이런 친절한 물음 따위는 없었을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 목소리에 살의와 적의가 부족하다는 뜻은 아니었다. 에두는 여기서 자신이 다시 움직이려 했다간 이 단검이 곧바로 턱을 꿰뚫으리란 사실에 의심이 없었다. 그렇기에, 그의 얼굴은 굴욕감과 증오로 물들고 있었다.

엘라에게 처발렸을 때는 그러려니 했다. 그년이 워낙 괴물이었다고, 그렇게 합리화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상대는 명망 높은 기사가 아니다. 아니, 심지어 기사조차 아니다. 그저 하찮은 일개 병졸(에두의 관점으로는)일 뿐이다. 에두에게는 아르바티앙에서 그의 눈치를 보며 설설 기던 경비병들과 다를 게 없는 존재인 것이다. 그런데 이런 잡것에게 움직임이 읽힌 것도 모자라 제압당했다? 에두는 강하게 입술을 씹어 다시금 상처를 터트려버린다.


“잠, 잠깐! 멈춰라!”


뒤늦게 따라온 치체가 다급하게 외친다. 그러나 이미 다른 베르달 용사가 그에게 권총을 겨누고 있는 상태였다.


“그쪽도 기사인가?”


에두를 제압하고 있는 청년이 묻자, 권총을 든 여인은 고개를 가로젓는다.


“모르겠어.”


“잠깐! 나는 이번에 새로 입대한 기사후보생이네! 거기 있는 건 내 동기이고.”


침착함과 귀족 특유의 엄숙함을 유지하면서 한 걸음 다가서는 치체. 그러나 총구는 더욱 위협적으로 그의 머리를 겨눈다.


“아, 그러셔?”

여인이 빠르게 치체의 행색을 훑는다. 엘라가 투입에 앞서 명한대로 후보생들 모두가 남색 정복을 벗은 평복이었기에, 여인의 시선에 담긴 의혹은 더욱 증폭되어갈 수밖에 없었다.

“무전 때려. 거수자 둘 잡았다고.”


“뭣?! 잠깐, 우린 거수자가-”


“어허, 움직이지 마. 머리에 바람구멍나기 전에.”


거수자 ‘둘.’

치체는 빠르게 상황을 인지하고 최대한 시선을 돌리지 않기 위해 애를 쓴다. 그리고 그의 예상대로, 베르달 용사들의 등 쪽 수풀 뒤로 에이미의 작은 그림자가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치체는 그 순간 지금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깨닫고 다시 한걸음, 과감하게 앞으로 내딛는다.


“내 말 좀 들어보게. 우린 수상한 자들이 아니야. 원한다면 신분증과 통행증을 드리지.”


“뭔 개소리야. 신분증이랑 통행증도 있는 것들이 왜 여기까지 기어들어 오냐고. 이야기 좀 그럴싸하게 다시 만들어봐. 감옥에서 들어줄 테니까.”


“그게 아니라-”


“움직이지 말라니ㄲ-”


에두와는 달리, 빠르고 깔끔한 도약이었다.

에이미는 용사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하기까지 어느 정도의 시간이 필요한지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자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전투화에 스친 나뭇잎이 다시금 땅에 떨어지기도 전에 베르달 청년의 배후로 파고들었고, 에두의 턱을 옥죄고 있던 단검을 쳐낸 뒤 추락하는 단검의 손잡이를 전투화로 걷어찬다. 단검은 일직선의 궤적을 그리며 베르달 여인의 손등에 명중했지만, 피가 튀는 일은 없었다. 처음부터 손잡이 부분으로 충격을 줘서 권총을 떨어트리게 하기 위함이었으니까.


“뭣-”


당황한 베르달 청년이 반대편 손에 있던 검을 휘두르려 했지만, 가만히 지켜보고 있을 에두가 아니었다. 그는 곧바로 청년의 품으로 파고들어 어깨에 머리를 들이박았고, 그 충격으로 청년은 검을 떨어트렸음은 물론 바닥으로 쓰러져야 했다.

상황은 빠르게 역전됐다. 청년은 깔려있었으며, 무방비했다. 에두가 터진 입술로 기괴한 미소를 지으며 주먹을 치켜드는 순간이었다.


“그만!”


그러나 거친 영력이 실려있는 그의 주먹이 용사의 안면에 내리꽂힐 일은 없었다. 어느새 다가온 치체가 뒤에서 에두를 붙든 것이다. 당연하게도, 피가 뚝뚝 흘러내리는 에두의 입가에선 욕설이 터져 나온다.


“이거 놔라, 씨벌롬아.”


“대장님 말씀 잊었나? 이들을 죽여선 안 돼!”


“좆도 알 바 아니니까, 놓으라고.”

비록 에두가 부상당한 상태이지만, 이미 훈련소로 향하던 언덕길에서 한번 그에게 제압당한 전적이 있었기에 치체는 방심하지 않는다. 무게중심을 완전히 에두의 등으로 실어, 그를 짓누르듯 옥죈 것이다. 그리고 그런 치체의 행동은 에두의 짜증을 폭발시키기에 충분했다.

“아이, 씨발 진짜, 뒤질래?”


“머리 식혀. 일반 병사한테 발린 놈이 뭐 잘났다고 지랄이야 지랄은.”


이미 에이미는 베르달 여인에게서 포승줄을 빼앗아 원래의 주인을 포박하는 중이었다. 비록 그쪽으로 고개는 돌리지 못했지만, 대답하는 에두의 목소리는 날카롭게 에이미를 향해있었다.


“뭐? 시발년아 방금 뭐라 그랬냐?”


“틀려? 할 줄 아는 건 욕이랑 달려드는 것밖에 없으니 그렇게 처발리고 민폐나 끼치지. 나 아니었음 지금쯤 묶이고 있는 건 너였을 걸.”


“아나, 씨발, 진짜. 야, 씨, 이거 놔. 안 놔?”


끔찍한 고통에도 불구하고 당장이라도 튀어오를 듯 온몸을 들썩거리는 에두. 치체는 깊은 한숨과 함께 포박을 마무리한 에이미가 이쪽으로 다가오는 모습을 지켜본다.


“이제 어쩌지?”


“어쩌긴. 어디 안전한 나무 위 같은 곳에 묶어놔야지. 어차피 이번 훈련 길어봐야 일주일이니까. 위치 잘 기억해뒀다가 끝난 후에 찾아오던가.”


“.......괜찮을까?”


치체의 시선엔 우려가 담겨있었다. 행여나 이들이 잘못될까 걱정하는 것일 테지. 그에 에이미는 피식 얕은 웃음을 터트린다.


“인간이란 건 당신 생각보다 튼튼하거든요, 귀족 나으리. 게다가 베르달의 용사들인데, 오죽할까.”


그녀의 단어 선택에 치체의 곱게 빗어 넘긴 머리가 흔들린다.


“귀족 나으리라니, 내 이름은-”


“그래그래, 치체. 슬슬 서둘러야 해. 아무리 후방이라지만 순찰 중인 병사들이 안 보이기 시작하면 의심할 거야.”


“이거 놔! 씨발년놈들아!”











“어찌어찌 넘어갔네.”


세 후보생이 알아채지 못하는 곳에서, 두 쌍의 눈동자가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 ‘어찌어찌’?”

유진의 말을 되짚으며 헛웃음을 내뱉는 셰르.

“내가 볼 땐 쟤네 이틀 안에 털릴 거 같은데. 그것도 내분으로. 괜히 엘라 경이 따로 지켜보라고 하신 게 아니었어.”


“그래? 난 오히려 저런 애들이 나중에 더 잘 될 거 같은데?”


통통한 자신의 붉은빛 입술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며 살짝 고개를 갸우뚱하는 유진. 그 모습이 사랑스러웠는지, 셰르는 유진의 허리를 끌어안아 자신의 쪽으로 끌어당긴다. 그 바람에 자세가 무너져 나무 아래로 떨어질 뻔했기 때문에, 유진은 양손으로 그렇지 않아도 째진 셰르의 눈가를 옆으로 주욱 늘어트린다.


“그런 것도 그거 나름이지. 저 망나니 새끼 좀 봐. 아마 엘라 경도 쟤는 갱생 불가능일걸.”


셰르가 말한 ‘망나니’가 누군지는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을 터. 그러나 유진은 미소를 거두지 않는다.


“그거야 두고 보면 알겠지. 기억 안 나? 너랑 나도 처음 만났을 땐 진짜 최악이었던 거?”


“아하하, 그랬었지.”

아직도 눈에 선하다. 서로의 가문을 비꼬며 잔뜩 날 세웠던 첫 만남.

서로의 가문.

셰르는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랬지.”


“왜?”


새빨간 가슈펠라르의 눈동자로 돌아보는 유진에게, 셰르는 고개를 흔든다.


“아니, 그건 그렇고, 그 뒤로 오라버니가 별말씀 없으셔?”


갑작스러운 셰르의 화제전환에 유진은 잠시 미간을 찌푸렸지만, 빠르게 원상복구 된다.


“응, 워낙 이래저래 일이 많았으니까. 아마 신경 쓰지 못하고 계실걸.”


“흐음.......”


“갑자기 오라버니는 왜?”


“아냐. 아, 쟤네 움직인다.”





====================





“하지만 대장, 이렇게 되면 또 너무 우리 쪽 애들만 구르는 거 아냐?”


“어쩔 수 없다. 검성이 통합군을 확실하게 재편하기 전까지는 우리와 줄리아의 방위군이 마즈다힐까지 모두 담당해야 한다.”


“도대체 그 줄리아란 게 누구야, 근데?”


“머지않아 만나게 될 거다. 마즈다힐로 복귀하면서 여기에 들르라고 일러뒀으니까.”

크라트가 허리를 펴고 깊은 숨을 내쉰다. 부장들이야 저마다 한마디씩 툭툭 던지는 거지만 일일이 대답하고 지시해야 하는 크라트의 입장에서는 피로가 쌓일 수밖에 없다. 그것도 며칠에 걸쳐 이어지다시피 했으니, 아무리 베르달의 늑대일지라도 한숨을 내쉴 수밖에.

벤의 재판과 전후관리라는 명목으로 모두가 수도 아르다르에서 휴가와 비슷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때였으나 크라트는 그럴 수가 없었다. 로빈이 따로 부탁한 바도 있었지만, 그 본인부터가 계절이 바뀌면서 상황이 어떻게 흘러갈지 예상할 수 없었다는 점도 있었다.

“듀라가 이번 겨울은 혹독할 거라 경고하더군. 드루이드들이 잘해주고 있긴 하지만, 베르달의 어린나무들과 이제 막 조성하기 시작한 마즈다힐의 나무들을 잘 신경 써야 한다. 그들을 다음 봄까지 잘 관리하는 게 곧 1년 방위의 기틀이 될 테니까. 전쟁이든 협상이든 공화국이 다음으로 신경써야 할 상대는 블라고슬로바다. 경계를 게을리하지 마. 그래서 남동쪽의 전선 말인데-”



쾅.



이곳이 전선이었다면 부장들 모두가 무기를 꺼내 들었을 것이다. 폭탄이 아닐까 의심될 정도의 폭음. 그러나 그 정체는 회의실의 문을 반쯤 박살 내고 들어온 한 미소였다.


“헤헷.”


말 그대로, 뜻밖의 미소였다.


“엘라?”


놀란 얼굴로 자신에게 다가서는 부인의 이름을 부르는 크라트. 부장들도 놀라긴 마찬가지였지만, 엘라는 그들의 시선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크라트의 뺨에 입술을 맞춘다.


“나 없어서 심심했지?”


“심심할 겨를도 없었다. 여긴 어쩐 일인가? 아르다르에서 휴가 중 아니었나?”


“자기 보고 싶어서 왔찌이~”


매혹적인 엘라의 애교에 주변 부장들은 으엑-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곧바로 죽일 듯 자신들을 노려보는 엘라의 시선을 알아채고 딴청을 피운다.


“엘라, 난 지금 좀-”


“어차피 제대로 쉬지도 못했을 거 아냐? 같이 저녁이나 먹자, 응?”


“.......”


난처한 얼굴로 부장들을 바라보는 크라트. 일종의 구원 사격을 요청하는 행동이었지만, 부장들은 지금 여기서 누구의 편을 들어야 할지 명확하게 알고 있었다. 나중에 눈치를 조금 보는 편이 낫지, 목숨을 걸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대장 계속 밤샜잖아. 가서 좀 쉬고 와. 배차랑 경계작전은 우리가 손보고 있을 테니까.”


“그래. 얼굴이 말이 아니야.”


“........”


“꺄핫, 봤지? 충신도 이런 충신들이 없다니까. 자, 나가자.”


반쯤 강제로 끌려나가는 ‘늑대’의 시린 시선을, 부장들은 애써 일하는 척하며 외면할 수밖에 없었다.










“아흣.......!”

땀으로 촉촉한 등줄기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올라오던 늑대의 혀가 갑자기 날카로운 이빨이 되어 목덜미를 물어버린다. 마치 짐승과도 같은 모양새였지만, 엘라의 입술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쾌락의 신음은 짐승의 그것 이상이 되어있었다. 일종의 봉사였다. 크라트는 엘라가 이렇게 엎드린 채 당하는 걸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니까.

“아.......앗, 아앙.......”


그 증거로, 엘라의 손가락은 침대보를 파고들다 못해 찢은 채로 박혀있었다. 그녀의 완력을 생각해본다면 이상한 일은 아니다. 거친 숨소리와 열기로 인해 침대 주변은 이미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고, 두 사람의 체액으로 흠뻑 젖어있었기 때문에 무언가 자세를 고정할 고리가 필요했을 터. 그러나 크라트는 그런 그녀의 저항을 용납하지 않는다. 두 손으로 각각 엘라의 손을 움켜쥐고, 그대로 무게를 실어 그녀의 이성을 뒤흔들어버린다. 비명 같은 교성이 터져 나온 것은 물론이었다. 상처가 걱정될 정도로 크라트의 이빨은 깊숙이 목덜미에 박혀갔고, 땀으로 반질거리는 엘라의 몸은 더욱 깊게깊게 침대 속으로 파묻혀간다.


“후욱.”


작은 기합과도 같은 숨소리와 함께 두 사람 모두 절정 속에서 헤엄친다. 크라트가 먼저 쓰러지듯 엘라의 목덜미에 몸을 얼굴을 묻었고, 엘라는 뒤를 돌아 그의 입술을 핥아준다. 마지막까지 짐승 같은 모양새였다.


“.......하아......하아....... 미안, 피곤한데 무리한 거 아냐?”


“아니, 언제든지.”


“그럼 한 번 더?”


“.......조금 있다가.”


“농담이야.”


마주 웃을 수밖에 없는 엘라의 붉은 미소. 깊은 키스를 나는 후, 크라트는 옆으로 누워 그녀에게 팔베개를 건넨다.


“그러고 보니, 로즈는?”


“.......이 짓 하자마자 묻는 게 걔야? 좀 그렇다.”


“아니, 로즈가 큰 뒤에는 좀처럼 기회가 없었잖나. 웬일로 엄마와 떨어져 있나 해서 물어본 거다.”


“왕비님이 잠시 맡아준다고 했어. 슬슬 걔도 연습해야지.”


“.......그런가.”

침실의 열기로도 잠재울 수 없는 한기가 서린 크라트의 눈동자. 그는 살짝 고개를 돌려 부인을 바라본다.

그와 마주하고 있는, 그 어떤 어둠보다도 짙은 눈동자.

축축하게 사방으로 늘어진, 불꽃과도 같은 새빨간 머리카락.

기사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매끈하고 눈부신 피부와, 부드럽게 풍만한 굴곡까지.

그녀는 아름답다.

그리고

그녀는 아직 어리다.

“.......이제 와서 묻는다는 것도 어리석긴 하지만, 괜찮은가?”


“응? 뭐가?”


그녀는 미소지은 채, 고개를 갸웃하며 크라트의 겨드랑이로 아래로 파고들어온다. 그녀가 정말로 모르는 것인지, 아니면 더 이상 상관없다는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 미소만으로, 충분한 대답이 되었으니까.


“아무것도 아니다. 저녁은 뭘로 할 텐가?


“나 배고파. 지금이라면 루남브루트 한 마리를 통째로 먹어치울 수 있을 거 같은데.”


“그건 맛이 없는데.”


“말이 그렇다고 말이. 아, 오랜만에 내가 요리할까?”


“식당에 말해서 작은 연회를 열어볼까.”


“야, 왜 못 들은 척하냐?”

살짝 허리를 튕겨 크라트의 턱을 깨물어버리는 엘라. 곧바로 익숙한 키스가 이어지고, 젖은 신체에 한기가 들어서기도 전에 둘은 다시금 뒤엉키기 시작한다.

“아, 맞다. 대장님. 하나 부탁할 게 있는데.”


“음?”


“애들 몇 명 뽑아서 숲 남서쪽으로 순찰대 좀 늘릴 수 없어?”


“남서쪽? 남서쪽은 왜?”


“흐흥, 재밌는 게 있걸랑.”


“.......음?”


의문이 이어지기도 전에 엘라가 하얀 등을 내보이며 돌아누웠기 때문에, ‘늑대’는 그 이상 질문을 할 수가 없었다.





=======================





“안 돼, 기각.”


“아, 왜?!”


“아, 왜-는 무슨, 너 이거 아직 의회에도 공개 안 했다는 거 몰라? 그리고 목소리 낮춰 인마.”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투닥거리는 로빈과 벤이었지만, 그들의 목소리 크기는 한정적이었다. 대화를 나누고 있는 곳이 본궁 지하의 근무자식당이었던 것이다. 정확히는, 평화로운 아침 식사를 위해 내려온 로빈에게 멋대로 벤이 침략해온 것이었지만.


“그럼 공개하면 되잖아?”


목소리를 낮추는 대신, 아삭한 양상추샐러드를 한가득 입에 담아버리는 벤. 그에 로빈은 답답하다는 듯 고개를 젓는다.


“그게 내 맘대로 되는 거냐? 아직 네가 제시한 방법대로 상용화할 수 있는지 덜린족한테 물어보지도 않았어. 애초에 가능한지도 모른다고.”


“그럼 물어봐.”


“.......내 생각인데, 그거 뭔가 굉장히 덜린에게는 도전적으로 들리지 않을까. 나도 아직 그들의 전통이나 문화 같은 걸 완벽히 이해하고 있는 게 아니라서-”


“그러니까 물어보라고.”


“아이씨, 갑자기 왜 이래? 재판 끝난 지 얼마나 됐다고 또 사고를 치려고? 나 이번엔 너 못 봐준다.”


“봐주기는 뭘, 교회에서 그렇게 날 죽일 듯 몰아붙여놓고는.”


“아 쫌.......”


이래서야 끝이 없다. 벤의 눈을 보니 알겠다. 이놈은 자신의 입에서 승인이 나올 때까지 이렇게 붙들고 있을 참이다.


그렇다면,


방법은 한 가지.





“.......그럼 네가 직접 얘기해봐.”


작가의말

언제나 미흡한 글을 봐주시는 독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어색한 문장이나 문맥, 오타가 있다면 지적 부탁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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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7 (25막) 탈태(奪胎) (1) +8 16.12.28 479 12 16쪽
266 (막간) 우리가 그림자를 대하는 자세 +8 16.12.23 451 11 13쪽
265 (24막) 다시 품은 목소리 (10) +4 16.12.18 496 12 18쪽
264 (24막) 다시 품은 목소리 (9) +8 16.12.13 393 12 23쪽
263 (24막) 다시 품은 목소리 (8) +2 16.12.08 368 12 22쪽
262 (24막) 다시 품은 목소리 (7) +6 16.12.03 519 11 16쪽
261 (24막) 다시 품은 목소리 (6) +7 16.11.28 435 12 19쪽
260 (24막) 다시 품은 목소리 (5) +4 16.11.23 400 11 17쪽
259 (24막) 다시 품은 목소리 (4) +8 16.11.18 415 11 17쪽
258 (24막) 다시 품은 목소리 (3) +4 16.11.13 486 11 20쪽
257 (24막) 다시 품은 목소리 (2) +6 16.11.07 727 12 17쪽
256 (24막) 다시 품은 목소리 (1) +8 16.11.02 435 12 17쪽
255 (막간) 무게 +4 16.10.28 509 13 16쪽
254 (23막) 네 눈물 속에서 나를 본다 (11) +10 16.10.23 512 13 23쪽
253 (23막) 네 눈물 속에서 나를 본다 (10) +10 16.10.18 421 13 19쪽
252 (23막) 네 눈물 속에서 나를 본다 (9) +10 16.10.13 480 15 17쪽
251 (23막) 네 눈물 속에서 나를 본다 (8) +8 16.10.08 475 12 18쪽
250 (23막) 네 눈물 속에서 나를 본다 (7) +12 16.10.03 547 14 16쪽
249 (23막) 네 눈물 속에서 나를 본다 (6) +5 16.09.28 470 15 16쪽
248 (23막) 네 눈물 속에서 나를 본다 (5) +10 16.09.23 429 13 17쪽
247 (23막) 네 눈물 속에서 나를 본다 (4) +8 16.09.18 507 15 19쪽
246 (23막) 네 눈물 속에서 나를 본다 (3) +10 16.09.13 511 13 18쪽
245 (23막) 네 눈물 속에서 나를 본다 (2) +10 16.09.08 458 14 13쪽
244 (23막) 네 눈물 속에서 나를 본다 (1) +7 16.09.03 511 12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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