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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스퍼 님의 서재입니다.

변수의 굴레

무료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SF

세스퍼
그림/삽화
발아현미우유
작품등록일 :
2014.08.20 17:22
최근연재일 :
2020.08.11 17:50
연재수 :
389 회
조회수 :
450,851
추천수 :
12,219
글자수 :
3,143,319

작성
17.04.24 19:11
조회
328
추천
12
글자
21쪽

(27막) 이쪽을 보고, 들짐승처럼 웃어주세요 (1)

DUMMY

하늘에서 봄을 비추는 태양의 표정은 파릇하지만, 대지에는 그 빛을 받아줄 어떠한 생명의 흔적도 보이지 않는다. 의도적으로 ‘황폐화’된 아실레마의 국경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정경. 그리고 이 척박함을 가로지르는 먹색의 무리에서도 표정이라곤 전혀 보이질 않는다.


“이대로 수도에 복귀하실 겁니까?”


먼저 침묵을 깬 목소리는 쥬넨의 것이었다. 그는 군마를 타고 앞서있는 청년이 본인의 허락 없이 입을 여는 걸 싫어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과감하게 용기를 내본 것이다.


“복귀요?”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의 농도는 의외로 부드러웠다.

“뭐했다고 벌써 복귀를 하겠습니까? 제가 블라고슬로바에서 한 모든 것은 경쟁자의 경쟁력을 낮춘 정도의 일이었습니다. 아직 갈 길이 멉니다.”


“하지만 계속해서 자리를 비우시면 중앙에서도 좋지 않은 이야기가 흘러나올 겁니다. 외부에서 기회를 만드는 것도 좋지만, 일단은 내부에서 다시 한 번 지지자들을 끌어모으시는 게-”


“쥬넨.”

무겁게 내리깔리는 목소리. 당사자인 쥬넨과, 근처에 있던 댄을 포함한 모든 기사들은 숨을 삼키며 베이어의 다음 반응을 기다린다. 그러나 이번에도, 쥬넨을 향한 표정과 목소리는 부드럽기만 했다.

“중앙엔 저를 지지해줄 사람 따윈 없습니다. 그리고 그건 저의 다른 형제들도 마찬가지예요. 왜 그런지 아십니까?”


“.......”


“저희는 영원히 증명해야하는 입장이기 때문입니다.”


군마의 발굽이 멈춘다. 동시에, 베이어의 표정 또한 멈춘다. 쥬넨으로선 그와 나란히 말머리를 놓을 수 있는 기회였다.


“증명.......말입니까?”


“저와 제 형제들이 지금의 직급에 오르는 데 아버님의 이름은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저희는 끊임없이 자신을, 서로를 증명해야 했습니다. 특히 저는, 다른 형제들보다 아버님의 피가 짙은 편이 아니었기에 생존을 위해서 영력 이상의 것이 필요했지요. 쥬넨, 당신과 댄을 받아들인 일 또한 제가 해야 했던 일종의 도박이었습니다. 지지자들이란 것은, 제가 기다리면서 찾아야 하는 게 아니라 직접 만들어야 하는 존재들이니까.”


“하지만, 우검성께선 대령님과 형제들 중 한 분이 좌검성에 오르기를 바라시잖습니까?”


“카나반에선 어쨌는지 모르겠지만, 이곳 아실레마에서 혈통이란 모든 것이자 동시에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무리 제가 우검성의 이름을 잇고 있다 해도, 그 사실은 결과적으로 이득과 손해 두 개를 함께 가져다줬으니까요. 다른 이들보다 앞선 출발지점에서 시작할 수는 있었던 만큼 육중한 견제와 시기도 받아내야 했습니다.”

씁쓸하게 번지는 창백한 미소.

“물론, 여기서 말하는 ‘견제’란 독이 든 술잔이나 한밤중의 암살자 같은 것들을 말하는 겁니다.”


“.......”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쥬넨은,

베이어가 대령이라는 직위까지 오를 수 있었던 것도,

그가 지금 좌검성직을 노릴 수 있었던 것도,

모든 게 그의 혈통 덕분이었으리라 단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혈통만을 믿고 오만하게 살아온 군인이 아니었다.

자격지심으로 형제들의 뒤를 쫓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끊임없이 자신을 증명해왔던 기사였다.


“그러니까, 저는 수도로 복귀하지 않을 겁니다. 제가 수도로 돌아가는 순간, 제 아군과 적군 모두가 저를 더 이상 좌검성후보로 보지 않을 테니까요.”


“.......알겠습니다.”


고개를 숙이는 쥬넨. 순간 댄과 눈이 마주쳤지만, 그들은 아무런 말도 주고받을 수가 없었다. 그저, 그들이 모시기로 한 남자가 그들의 생각보다 무거운 존재였다는 사실만을 느끼고 있었다.


“.......”


재개되었던 군마의 걸음이 다시금 멈춰 선다. 그 ‘정지’의 시발점이 선두에 있던 베이어였기에 댄과 쥬넨은 의문을 품고 앞을 바라보았다.


“음?”


그리고

그들은 예상치 못한 광경을 맞이한다.

황폐한 풍경, 게다가 이곳은 엄연한 군사구역으로, 민간인의 출입이 통제된 장소다.

그런 진입로에,

이색적인, 작은 그림자 하나가 있었다.


“.......어린아이?”


댄의 중얼거림대로였다. 그것은 남자아이였다. 새카만 머리카락과 똘망똘망한 눈망울. 평범한 셔츠와 평범한 바지까지. 부모의 손을 잡고 학교에나 갈법한 인상의 아이였다.


“길을 잃었나? 하지만 여긴.......”


인간의 그림자는커녕 어떠한 생물체의 흔적도 찾아볼 수 없는 황폐한 평원. 이런 한가운데에, 어떤 동행도 없이 홀로 우두커니 길 한복판에 서있는 아이. 이해할 수 없는 풍경에 쥬넨이 먼저 앞으로 나서려는 순간,


“........여기서 기다리세요.”


라는 말과 함께, 베이어가 군마를 몰고 앞으로 나아간다.


“대령님?”


“곧 돌아오겠습니다. 기다리고 계세요.”


완곡한 표현이긴 했지만, 댄과 쥬넨은 베이어의 말에 담겨있는 ‘접근금지’의 뜻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결국, 두 기사는 홀로 아이에게 다가서는 베이어의 뒷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


높이 솟은 베이어의 그림자가 아이의 얼굴을 가리고, 아이는 옅은 미소를 지은 채로 다가선 청년의 얼굴을 올려다본다. 짧은 응시의 시간, 먼저 열린 것은 아이의 입술이었다.


“블라고슬로바에 갔었다지?”


“예.”


놀랍게도, 대답하는 베이어의 목소리는 경어를 품고 있었다.


“크리스티나가 그러더구나. 네가 자기 일을 망쳐놨다고.”


“어차피 방치하면 그대로 사라질 자산이었습니다. 탓하려면 누님 본인의 게으름을 탓해야죠.”


“아핫, 널 탓하려는 게 아니야.”


“그럼 수행원도 없이 혼자서 이런 곳엔 왜 오신 겁니까?”


“왜 다들 내가 혼자 다니는 걸 못마땅해하는지 모르겠네. 넌 진짜 내가 수행원 따위 필요할까 봐 그렇게 묻는 거야?”


“........”


베이어는 대답할 수 없었다. 그 말대로, 이 아이는 아무런 도움 없이, 안전하게 반도 전역을 돌아다닐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존재였으니까.

히죽 웃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것인지, 그림자에 가린 아이의 표정을 베이어는 좀처럼 종잡을 수가 없었다. 결국, 그는 한숨과 함께 말에서 내려서려고 했지만, 아이는 손을 들어 그런 베이어의 행동을 거부했다.


“널 찾아온 이유는, 우선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어서다.”


“묻고 싶은 것?”


‘그’의 질문은 베이어의 인생에 있어 그리 흔히 접해볼 수 없었던 것. 덕분에 살짝 기대감이 스며든 순간이었으나,




“카나반의 검성을 만나봤어?”




질문의 대상자는 역시 베이어 본인이 아니었다. 그러나 베이어는 내색하지 않고, 곧바로 고개를 흔든다.


“아뇨. 제가 상대한 건 엘라론 드리브달이었습니다. 아, 아시다시피 이젠 ‘드리브달’이 아니겠지만요.”


“흐음......., 그래?”


예상할 수 있는 반응. 그러나 베이어는 ‘그’의 흥미가 곧바로 증발해버렸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건 왜 여쭤보시는 겁니까?”


“아, 뭐어, 너도 알다시피, ‘변수’가 카나반에 등장한 후 몇 년 새 정세가 많이 뒤틀렸잖냐. 카이우스 드레브냑을 견제할 수단으로 이용한 것까지는 좋은데, 슬슬 내가 신경 써야 할 문제가 된 게 아닌가 싶어서.”


베이어의 표정이 굳는다.


“그 일은 저희에게 위임한 줄로 알고 있었습니다만.”


“아, 그래, 그렇지. 너희가 처리해야 할 일 중 하나지. 근데 너와 네 형제들이 알아야 할 게 하나 있다.”


“.......듣고 있습니다.”


“중앙의회에서 곧 차기 3군단장에 대한 발표를 할 예정이야. 이어서 해산된 상태나 마찬가지인 2군단의 뒤를 이어 남서부의 방위를 책임질 새로운 부대의 창설도 준비 중이지.”


“........”


“그리고 너도 알다시피, 폐하는 여전히 침묵 중이시다. 즉, 유일한 최종결정권은 나에게 있다는 소리지. 나에게 좌검성을 임명할 권위는 없지만, 군단을 새로 만들 정도의 군권은 가지고 있거든.”


미소다. 이번엔 확실한 미소를 짓고 있다. 그리고 저 미소가 의미하는 바는 오직 한가지뿐이었기에, 베이어는 어느새 식은땀이 배어나온 자신의 이마를 쓸어 넘겨야 했다.


“그 말씀은-”


“너는 언제나 가장 취약해 보이면서도 가장 많은 준비를 해왔었지. 하지만 표면에 드러나지 않는 네 힘을 알아줄 사람은 많지 않아. 너에겐 남들에게 내보일 수 있는 힘이 필요해. 그런 힘을 쥐게 되면, 너는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능숙하게 그 힘을 다루는 스스로의 모습에 놀라게 될 거야.”


소년의 따스한 미소.

하지만 베이어는 마주 웃을 수가 없었다.


“.......그럼 저는 경쟁에서 탈락하는 겁니까?”


“뭐?”


“그렇지 않습니까? 저에게 그 일을 맡기신다는 건, 제가 좌검성이 될 기회를 잃게 된다는 거잖습니까?”


진중한 베이어의 표정과 질문이었으나, 소년의 입가로 떠오르는 것은 웃음소리뿐이었다.


“하하핫, 거봐. 역시 넌 너무 성급하게 생각하는 게 문제라니까?”


“.......예?”


의문이 피어오르는 베이어의 얼굴을 향해,

소년은 마침내 해답을 내어놓는다.


“이번에 차기 3군단장으로 부임하는 게 누구일 거라고 생각해?”


“.......?”


“크리스티나가, 정말로 게을러서 네가 남쪽에서 깽판부리고 있는 걸 방치하고 있었을까?”


“.......!”


베이어는 마침내 깨닫는다.

그가 왜 여기까지 자신을 만나러 왔는지,

그리고 이 의미심장했던 대화의 끝이 어디로 향해 있는지.


“난 너희에게, 확실하면서도 새로운 판을 깔아주려고 해. 가장 공정하고, 너희들의 능력을 가장 효율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판을 말이야. 알겠냐? 그 누구도 불평할 수 없어. 너흰, 그저 서로보다 잘하면 되는 거다. 그 끝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


“.......”


대답은 없었다. 대신, 베이어는 얼굴과 가슴으로 대답하고 있었다.

본래의 창백함이라고는 보이지 않을 정도로 상기된 안색과, 끓어오를 기세로 두근거리는 박동까지. 그런 베이어를 향해, 소년은 마지막 목소리를 뱉는다.


“네 피를 실망시키지 마라, 베이어러빌 폰 인피에르노.”


사라지는 소년의 그림자.

멀리서 이쪽을 지켜보던 이들은 물론이고, 바로 앞에 있던 베이어마저 소년의 존재가 어디로 사라지는지 확인할 수 없었다.

남은 것은,

소년이 남긴 그림자의 잔향을 향한,

베이어의 짧은 대답뿐이었다.





“예, 아버님.”





=================





“죄송하지만 환자는 절대적인 안정을 취해야 하므로 일체의 면회를 거부-”


“비켜라.”


카나반 귀족파의 대표이자, 가슈펠라르 가문의 가주, 란다 가슈펠라르의 단호함을 막아낼 수 있는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권위라던가 압도적인 영력의 전개 따위가 아니었다. 애초에 그는 이런 요소들에 의지하는 사내도 아니었거니와, 지금 그의 온몸을 휘감고 있는 것은 오직 분노 하나뿐이었으니까.


“........”


경비병의 만류를 뿌리치고 벌컥 병실의 문을 밀어버리는 란다. 낡은 여관방을 연상시키는 작은 일인실의 공간, 반대편 벽의 절반을 차지하는 창문과, 그 창문 바로 아래에 위치한 깨끗한 침대.

그리고 그 침대에서,

익숙한 한 쌍의 붉은 눈동자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 오라버니.”


“........”


부드러운 미소에 친숙한 인사였지만, 란다는 여동생의 환영에 답할 수가 없었다.

그의 시선은 오직, 유진의 상체를 감싸고 있는 붕대만을 향하고 있었다.


“바쁘실 텐데 이런 변방까지 어쩐 일이세요?”


“........”


“오라버니?”


“........”

플로닉스가 만들어낸 겨울도 지금 란다의 얼굴보다 싸늘할 수는 없으리라.

그는 아무런 감정도, 표정도 담지 않은 채, 그저 조심스럽게 침대로 다가선다.

그리고

붕대로 단단히 봉인된 유진의 가슴팍 위로 손을 올려놓는다. 소름끼치는 행동이었지만, 유진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질 않았다.

“........이게......., 이게 무슨 짓이냐?”


마침내 신음처럼 흘러나오는 란다의 목소리. 살짝 떨리는 그 울림을 향해, 유진은 활짝 미소를 짓는다.


“문제라도 있나요, 오라버니?”


“문제? 문제가 있냐고?”

서서히 격앙되기 시작하는 란다의 눈빛.

“진심으로 묻는 거냐? 문제가 있냐고? 이건....... 이건 무슨-”


“네, 전투에서의 부상으로 가슴이 잘려나갔습니다. 그게 왜요?”


침착한 유진. 동시에, 란다의 얼굴에 경악이 번진다.


“.......뭐....라고?”


“충성을 맹세한 카나반의 기사로서, 명예로운 근위대의 일원으로서 임무를 수행하다가 부상을 입었어요. 그리고 살아남았습니다. 여기에 문제라도 있나요? 아니면-”

미소가 사라지고, 싸늘하게 뒤바뀌는 유진의 시선.

“제 ‘여자로서의 상품가치’가 훼손됐다는 게 걱정이신가요?”


날카로운 소리가 병실을 가득 채운다.

거세게 뺨을 맞았음에도, 유진의 눈동자엔 흔들림이 없었다. 오히려 흔들리는 쪽인 란다의 목소리였다.


“........일부러, 일부러 이런 것이냐? 이러려고 마지막 파견을 자처한 거였냐.......?”


“왜요? 그 명망 높은 니바르토 가문의 차기 가주께선 가슴 한쪽 없는 여자와는 결혼하기 싫다고 하던가요?”


다시 한 번 란다의 손바닥이 날카로운 파열음을 만들어낸다. 이전보다 훨씬 둔탁한 무게였기에, 유진의 터진 입술 아래로 붉은 줄기가 흘러내렸음은 물론이었다.


“네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는 알아? 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아냔 말이다!”


“오라버니야말로 저에게 무슨 짓을 하려고 했는지 아세요?! 저는 오라버니의 정치적 수단이 되기 위해서 기사가 되고 지금까지 살아온 게 아니에요! 오라버니는, 고작 가슴 한쪽이 잘려나갔다는 이유로 파혼을 하는 남자에게 저를 팔아넘기려고 한 거예요!”


“뭔 개소리냐?! 정치적 수단? 넌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거야?! 나는 그저 너의 행복을 위해-”


“제가 그 결혼에서 얻을 수 있는 행복은 신체적 결함만으로도 간단히 깨질 수 있는 수준의 행복이었어요! 모르시겠어요? 풍요로운 삶과, 차기 가주의 아내가 되는 건 제가 얻고자 했던 행복이 아니라구요!”


“.......”

란다가 뒤로 물러선다.

유진의 기세에 눌린 것은 아니었다. 그저, 그는 충격에 휘청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말단시절, 온갖 더러운 일을 하면서도 불평하지 않았다. 나에겐 확실한 목표가 있었으니까. 바로, 너, 너에게만큼은, 절대 내가 겪었던 더러움과 억울함을 보여주지 않기 위해서였어....... 내가 굶거나, 내 손에 더러운 피를 묻히는 한이 있더라도 너만큼은 부족함 없이 지낼 수 있게 해주었다.”


“.......”


유진의 침묵에, 양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감싸는 란다. 그 사이로, 무거운 목소리가 이어서 흘러나온다.


“.........보답 같은 걸 바라고 한 행동이 아니었다. 너는 내 동생이었으니까. 이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혈육이었으니까. 그리고 마침내 우리가 그림자에서 벗어났던 순간, 나는 내 출세 따윈 아무래도 상관없었어........ 그저, 이제야 네가 귀족다운 생활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기쁘기만 했다.”


“.......오라버-”


“정치적 수단이라고?! 너는 내가, 너를 고작 그런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고 생각해온 거냐?! 나를 그런 비열한 새끼라고 생각했었던 거냐?! 나는 너의 행복을 위해 그 모든 굴욕과 더러움을 참아왔는데, 너는 내가 너를 이용했다고 비난하는 거야?!”


“오라버니, 제 말 들으세요.”

가능했다면 자리에서 일어나 란다의 팔을 붙들었을 테지만, 유진이 입은 부상의 정도는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오라버니의 희생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요. 그리고 감사하고 있어요. 하지만....... 하지만 제 길은 제가 직접 선택하고 싶었어요. 정말로 저를 사랑하고 아끼신다면, 저에게 족쇄를 채우셔선 안 되는 거예요.......”


“........”

분명히 목소리는 닿았을 터. 그러나 란다에게선 어떠한 반응도 없었다. 깊은 한숨 소리와, 점차 차분해져 가는 숨소리. 그 끝에서, 란다는 마침내 손을 내리고 새빨간 눈동자로 동생을 내려다본다.

“.......그 녀석 때문이냐?”


“네.......?”


“시즈키치가문의 그 녀석 때문이냐고 물었다.”


“셰르하고는 아무런 상관도 없어요! 이건 제 선택에 대한 문제일 뿐이에요!”


다급한 부정이었지만, 오히려 란다에겐 확신만을 심어준 모양이었다.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어. 하지만 나는 너를 존중했다. 너를 아끼고 존중했기에 네가 옳은 선택을 하리라 믿고 있었어....... 하지만, 너는 내 기대를 배신했구나.”


“오라버니!”


상처가 찡- 울릴 정도의 외침이었지만, 란다는 매정하게 뒤돌아선다.

그가 남긴 그림자에, 망설임 따윈 보이지 않았다.




“.......네가 후회하는 걸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진 않을 거다.”





=======================





숲의 그림자 속에서도 확연하게 번뜩이는 바닷빛의 눈동자. 깊은 호흡과, 능숙한 손짓이 이어진다. 의식의 흐름을 따라 검붉은 마력이 흐르지만, 분홍빛의 입술은 어떠한 주문도 읊지 않고 있었다. 놀랍게도, 그 마력들이 응집되고 있는 곳은 한 자루의 평범한 검이었다. 물론, 그 검은 더 이상 ‘평범한’ 검이 아니었다.


“.......후우.”


땀방울이 뺨을 따라 흘러내리고, 연결된 한 쌍의 팔찌를 통해 마력은 현실계에 점차 형상을 이루기 시작한다. 태어나서 검을 쥔 횟수가 손에 꼽을 정도인 고도였지만, 지금 그녀가 검을 바라보고 있는 시선의 진중함만큼은 기사에 비견될 수 있는 수준이었다.


“.......”


크게 꿈틀거리던 일렁임은 이내 고도의 시선에 맞추어 검을 감싸며 형태를 맞춰나간다. 고도는 잠시 숨을 멈추고,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 검을 두꺼운 나무의 몸통을 향해 살짝 내질러본다. 놀랍게도, 검끝은 아무런 저항도 없이 나무의 껍질을 꿰뚫고 있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실제로 나무의 표면엔 어떠한 상처도 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오, 얼추 된 모양이네.”


갑작스럽게 들려오는 느긋한 목소리. 고도는 화들짝 놀라며 살짝 비명을 내질렀고, 동시에 그녀의 검을 감싸고 있던 마력은 배수구로 빨려 들어가는 목욕물처럼 고도의 손끝으로 사라진다.


“아씨, 놀래라.”


“아, 미안.”


“됐어. 아 짜증나. 거의 다 됐었는데.”


혀를 차며 투정을 부리는 고도. 무거운 검은 어느새 그녀의 손에서 미끄러져 숲바닥을 나뒹구는 중이었다.


“파견 나갔던 애들한텐 뭐 좀 없었나 봐?”


그런 그녀를 달래기 위해 육포를 내미는 벤. 고도는 잔뜩 그의 얼굴을 째려보더니, 낚아채듯 하누를 입으로 가져가며 대답한다.


“전투다운 전투가 없었으니까. 실전에서의 효율을 따지려면 좀 더 연구가 필요할 거 같아. 마스터도 좀 더 시간이 필요하다고 하셨고.”


“음......., 혈마력이 아닌 일반적인 마력에 적용시키는 거 말이지?”


고도는 깊은 한숨으로 대답의 시작을 대신한다.


“가능할지 모르겠어. 애초에 움브라스톤이라는 거 자체가 영혼의 응집체나 다름없는 거잖아. 혈마력이 아니면 도대체 무슨 원리로 이 힘을 끌어낼 수 있다는 거야?”


“장비와 제도는 모두 준비되었어. 이제 남은 건 네 역할이야, 고도.”


“알고 있거든요.”

고도는 그제야 자신의 로브가 땀으로 흠뻑 젖어있었음을 눈치챌 수 있었다. 동시에 자신도 모르게 땀냄새를 신경 쓰면서, 벤으로부터 한걸음 물러서는 그녀였다.

“그나저나 아까 나팔이 울리던데, 로빈이랑 크라트 대장이 돌아 왔나 봐?”


“응.”


“뭐래?”


“몰라. 대머리 영감이랑 알아서 잘 얘기하고 왔겠지.”


“뭐야, 아직 만나보지도 않았어? 검성 주제에 너무 뺑끼치는 거 아냐?”


농담 반, 진담 반의 비난. 그러나 벤은 푸석푸석한 머리를 긁적일 뿐이었다.


“나도 기지에서 기다리고 싶었는데, 분위기가 좀 험악해서.”


“험악? 왜?”


“본국에서 손님들이 오셨거든.”


“손님?”


“응. 근데 그중에 지나도 있더라고.”


“.......아아.”

한창 민감할 시기다. 게다가 자신을 일선에서 배제하지 말라는 경고에도 불구하고 로빈이 그녀를 뒤에 냅두고 왔으니, 지금 지나의 표정이 어떠할지 고도는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물론, 벤이 도망쳐 나온 이유도.

“너한테 불똥이 튈까 봐 그러셔?”


“바로 그거지.”


“인정.”

검을 집어드는 고도. 그녀는 어설픈 동작으로 검을 검집에 되돌려놓고는, 그대로 벤을 향해 던져버린다.

“무거우니까 네가 좀 들어.”


“.......내가 무슨 짐꾼이냐.”


“이제 가자, 지금쯤 지나가 실컷 로빈을 갈궜겠지.”


짧은 피난은 끝을 고하고, 두 남녀는 느긋하게 전초기지를 향한 걸음을 옮긴다.

새파란 하늘, 쨍쨍한 태양.

봄기운이 완연한 숲이 그와 그녀의 뒤에 남아있었다.


어느새 말라 비틀어 죽어버린,


나무 한 그루를 제외하고.


작가의말

언제나 미흡한 글을 봐주시는 독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어색한 문장이나 문맥, 오타가 있다면 지적 부탁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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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8 (26막) 태동이 시작되고 욕이 솟아오른다 (11) +3 17.04.14 336 12 21쪽
287 (26막) 태동이 시작되고 욕이 솟아오른다 (10) +3 17.04.09 319 11 19쪽
286 (26막) 태동이 시작되고 욕이 솟아오른다 (9) +5 17.04.04 328 8 14쪽
285 (26막) 태동이 시작되고 욕이 솟아오른다 (8) +6 17.03.29 326 9 13쪽
284 (26막) 태동이 시작되고 욕이 솟아오른다 (7) +4 17.03.24 313 12 16쪽
283 (26막) 태동이 시작되고 욕이 솟아오른다 (6) +2 17.03.19 339 10 16쪽
282 (26막) 태동이 시작되고 욕이 솟아오른다 (5) +2 17.03.14 344 10 17쪽
281 (26막) 태동이 시작되고 욕이 솟아오른다 (4) +4 17.03.09 360 8 15쪽
280 (26막) 태동이 시작되고 욕이 솟아오른다 (3) +4 17.03.04 369 13 14쪽
279 (26막) 태동이 시작되고 욕이 솟아오른다 (2) +4 17.02.27 423 10 17쪽
278 (26막) 태동이 시작되고 욕이 솟아오른다 (1) +6 17.02.21 403 13 16쪽
277 (막간) 이 구역의 미친개는 나야 +4 17.02.16 367 10 18쪽
276 (25막) 탈태(奪胎) (10) +8 17.02.11 553 6 16쪽
275 (25막) 탈태(奪胎) (9) +4 17.02.06 378 10 20쪽
274 (25막) 탈태(奪胎) (8) +6 17.02.01 383 10 17쪽
273 (25막) 탈태(奪胎) (7) +4 17.01.27 471 6 17쪽
272 (25막) 탈태(奪胎) (6) +4 17.01.22 492 11 14쪽
271 (25막) 탈태(奪胎) (5) +4 17.01.17 388 9 18쪽
270 (25막) 탈태(奪胎) (4) +10 17.01.12 541 11 18쪽
269 (25막) 탈태(奪胎) (3) +8 17.01.07 425 14 18쪽
268 (25막) 탈태(奪胎) (2) +8 17.01.02 424 12 20쪽
267 (25막) 탈태(奪胎) (1) +8 16.12.28 479 12 16쪽
266 (막간) 우리가 그림자를 대하는 자세 +8 16.12.23 451 11 13쪽
265 (24막) 다시 품은 목소리 (10) +4 16.12.18 498 12 18쪽
264 (24막) 다시 품은 목소리 (9) +8 16.12.13 393 12 23쪽
263 (24막) 다시 품은 목소리 (8) +2 16.12.08 369 12 22쪽
262 (24막) 다시 품은 목소리 (7) +6 16.12.03 519 11 16쪽
261 (24막) 다시 품은 목소리 (6) +7 16.11.28 435 12 19쪽
260 (24막) 다시 품은 목소리 (5) +4 16.11.23 400 11 17쪽
259 (24막) 다시 품은 목소리 (4) +8 16.11.18 415 11 17쪽
258 (24막) 다시 품은 목소리 (3) +4 16.11.13 487 11 20쪽
257 (24막) 다시 품은 목소리 (2) +6 16.11.07 727 12 17쪽
256 (24막) 다시 품은 목소리 (1) +8 16.11.02 436 12 17쪽
255 (막간) 무게 +4 16.10.28 509 13 16쪽
254 (23막) 네 눈물 속에서 나를 본다 (11) +10 16.10.23 512 13 23쪽
253 (23막) 네 눈물 속에서 나를 본다 (10) +10 16.10.18 421 13 19쪽
252 (23막) 네 눈물 속에서 나를 본다 (9) +10 16.10.13 480 15 17쪽
251 (23막) 네 눈물 속에서 나를 본다 (8) +8 16.10.08 475 12 18쪽
250 (23막) 네 눈물 속에서 나를 본다 (7) +12 16.10.03 548 14 16쪽
249 (23막) 네 눈물 속에서 나를 본다 (6) +5 16.09.28 470 15 16쪽
248 (23막) 네 눈물 속에서 나를 본다 (5) +10 16.09.23 431 13 17쪽
247 (23막) 네 눈물 속에서 나를 본다 (4) +8 16.09.18 507 15 19쪽
246 (23막) 네 눈물 속에서 나를 본다 (3) +10 16.09.13 511 13 18쪽
245 (23막) 네 눈물 속에서 나를 본다 (2) +10 16.09.08 458 14 13쪽
244 (23막) 네 눈물 속에서 나를 본다 (1) +7 16.09.03 511 12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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