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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스퍼 님의 서재입니다.

변수의 굴레

무료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SF

세스퍼
그림/삽화
발아현미우유
작품등록일 :
2014.08.20 17:22
최근연재일 :
2020.08.11 17:50
연재수 :
389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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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43,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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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2.01 2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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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글자
17쪽

(25막) 탈태(奪胎) (8)

DUMMY

마즈다힐 중부와 마즈다성 인근은 녹화작업으로 인해 겨울을 준비하는 숲이 낙엽바람을 우수수 불어대고 있었지만, 외곽, 특히 마즈다힐 남부국경지대는 아직 세뮈엘의 손길이 닿지 못한 상태였다. 기존에 이곳을 담당하고 있던 제국 2군단의 국경수비대가 남긴 것은, 생명의 흔적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황폐한 벌판과 끔찍할 정도로 단조로운 전초기지들뿐. 마즈다힐의 전력이 재정비될 때까지 이곳을 담당하게 된 베르달군으로서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심정으로 삽을 들어야 했다.

그나마 느긋했으면 괜찮았을 터. 그러나 블라고슬로바와의 상황이 바뀌면서 국경수비대의 분위기는 다급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그들의 발목을 잡는 건 장비나 자원의 부족도, 시간의 부족도 아닌, 바로 인력. 그중에서도 기사전력의 절대적 결핍이었다.

로빈이 왕위에 오른 이후로 베르달의 전력은 극심한 소모를 거듭해왔다. 카나반의 최정예라는 기대와 역할에 의한 어쩔 수 없는 투입들이었으나, 문제는 베르달 지역의 병력충원이 이를 따라가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기본적으로 베르달군은 베르달지역에서 태어나고 자란 대상자들로만 병력을 꾸린다. 뚜렷한 지역색 덕분에 이들은 별다른 계급체계가 없음에도 끈끈한 유대감으로 뭉칠 수 있었고, 어렸을 때부터 숲속에서의 사냥과 생존훈련 으로 단련되어왔기 때문에 기본적인 신체능력과 숲에서의 활동력에서도 정규군을 훨씬 상회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오랜 기간 중앙과 동떨어져 지내왔던 그들만의 생활양식으로, 일반적인 군대에서 바라는 훈련과 병력충원방식과는 개념부터가 달랐다. 애초에 베르달지역의 인구는 다른 지방과 비교하여 많은 편이 아니었으며, 기사의 피가 진하지도 않았다. 이런 한계점이야말로 로빈과 벤이 ‘통합군’이라는 별도의 중앙군을 만들어낸 가장 큰 이유이기도 했다.


“.......아니 뭐, 제가 요청했으니까 비스트마스터까지는 그렇다 칩시다. 근데 저것들이요?”


불편한 표정으로 주둔지를 내려다보는 여인의 이름은 루치아 레티. 베르달의 기사이면서도 중앙군으로부터 계급을 부여받은, 몇 안 되는 ‘대장’이자 장교 중의 한 명이었다. 그녀는 동시에 이번 남부국경강화의 총책임자이기도 했는데, 극심한 인력난을 해소하기 위해 바크달룬 성으로 보냈던 요청서의 결과물이 도착했음에도 그녀가 미간을 구기고 있는 이유는 명백했다.


“기사가 부족하다며? 그래서 데리고 왔잖아?”


그런 레티를 향해 마치 비웃는 것처럼 미소를 짓는 엘라. 레티는 얼마 전까지 크라트의 전속부관을 맡고 있던 기사였기 때문에 엘라와도 안면이 있는 장교였다. 때문에 엘라가 직접 지원 병력을 이끌고 오겠다고 했을 때부터 불안과 의심을 숨기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의 예상대로, 엘라가 데리고 온 무리는 레티가 기대하고 있던 ‘지원’과는 거리가 멀었다.


“제가 원했던 건 당장 전력으로 쓸 수 있는 기사였지, 얻어터져서 빌빌거리는 햇병아리가 아니었는데요.”


“어쨌든 기사는 기사잖아.”


“기사가 아니라 시체겠죠.”


레티의 감상은 정확했다. 엘라가 데리고 온 생도들의 상태는 치열한 전투라도 하고 온 듯이 처참했던 것이다. 그들 대부분이 중경상을 입은 채로 신음을 뱉고 있었고, 거동이 불가능한 인원들은 자신을 공격한 템피드들에 의해 후송되는, 치욕스러운 꼴까지 보여야 했다. 그런 그들이 주둔지에 도착하고 나서 가장 먼저 해야 했던 일은 바로 간이병동의 자리를 독차지하는 것으로, 지휘관인 레티는 물론이고 기존 베르달 용사들까지 이들에게 좋은 시선을 보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걱정 마. 그렇게 심하게는 안 굴렸으니까 하루 이틀이면 다들 일어날 거야.”


“그거 참 안심되네요.”


다른 베르달 기사들의 대부분이 그러하듯, 레티 또한 퉁명스러움과 상급자에 대한 뻣뻣함을 기본으로 깔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상대는 엘라론 니바르토다. 이 정도의 ‘무례’를 신경 쓸 만한 인간이 아니었다.


“아잉~, 너무 그러지 말고. 대신 내가 좋은 정보 하나 알려줄게.”


“정보?”


자신의 팔에 앵겨붙는 엘라를 가까스로 밀쳐내면서도 레티는 슬쩍 관심을 보인다.


“응. 해를 넘기고 날씨가 풀리는 대로 블라고슬로바에 선전포고를 할 거야.”


“.......예?”

레티는 굳을 수밖에 없었다. 엄청난 내용을 아무렇지도 내뱉은 엘라 때문이 아니었다. 그녀의 말이 진실이라는 가정하에, 지금 자신이 내려다보고 있는 광경을 더 이상 농담으로 치부할 수 없었으니까.

“잠깐만요, 선전포고? 블라고슬로바에? 정말입니까?”


“응.”


“아니, 그럼 더더욱 제대로 된 지원을 해줘야죠!”


레티의 목소리가 높아진 것은 당연했다.

그녀가 받은 명령은 어디까지나 국경선의 정비와 수비대의 재배치였다. 하지만 정말로 공화국과 블라고슬로바 사이에 전쟁이 발발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이곳은 카나반과 블라고슬로바가 맞닿고 있는 국경 중에 가장 중요하면서도 취약한 부분이 될 것이다. 카나반에게는 가장 먼저 확보해야 할 전초기지이자 보급로, 블라고슬로바에게는 역공으로 맥을 끊을 수 있는 요충지라는 형태로 말이다. 그런 곳에 고작 비스트마스터들과 햇병아리들로 지원을 해준다?


“말했잖아.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면- 이라고. 아직 마즈다힐도 뒤숭숭한데, 괜히 먼저 대규모로 군을 움직였다가는 준비도 안 된 상태로 도발하는 거나 다름없을 거 아냐.”


“하지만-.”

무언가 이어가려던 레티의 입술이 멈춘다. 그녀는 다시 한 번, 주둔지 곳곳에 있는 생도들을 살펴본다. 그리고 그런 그들을 만족스러운, 그리고 어딘가 기대에 넘치는 표정을 짓고 있는 엘라의 표정을 바라본다.

훈련생도.

비스트마스터.

겨울.

봄.

그리고,

준비.

마침내, 레티는 ‘광기의 꽃잎’이 왜 저리도 즐거운 미소를 짓고 있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대장. 듣자 하니 통합군소속의 전투마법사들도 곧 있으면 여기로 합류한다고 하던데, 맞아요?”


“응, 맞아.”


“ ‘표면적’인 이유는 합동훈련이죠?”


엘라가 다소 놀란 얼굴로 고개를 돌려 레티를 바라본다.


“그렇지.”


“.......첫 목표는 와르헨스톡이겠네요.”


담담한 레티의 목소리에 엘라의 입가로 미소가 번진다. 역시 ‘베르달의 늑대’에게 신임을 받은 지휘관이다. 미묘하게 맞물리는 상황들과, 그 여러 요인들이 최종적으로 향하고 있는 바를 날카롭게 집어내었으니 말이다.


“이제 알겠지? 내가 왜 쟤들을 여기로 데려왔는지?”


“예.”

해가 지면 입김이 나올 터. 쌀쌀해져 가는 날씨와 빠르게 기울어져 가는 햇빛은 레티에게 오직 한 가지 사실만을 일깨워주고 있었다.

“더럽게 긴 겨울이 되겠네요.”





======================




“아오, 씨바알.......”


상처 입은 것은 타박상으로 물든 몸뚱어리뿐만이 아니었다. 조금이라도 뒤척일 때마다 비명을 질러대는 관절보다도 더욱 생도들의 고통을 후벼파는 건 다름 아닌 주변의 시선이었다.

습격의 원흉이었던 템피드. 그들을 조종하고 있었던 비스트마스터들은 물론이고, 주둔지를 오고가는 베르달의 용사들까지. 모두가 골골 앓고 있는 생도들을 향해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시선을 보내오고 있었다. 침대를 빌려 누워있기는 해도 고통과 굴욕감 때문에 잠들 수 없는 생도들에게는 그야말로 끔찍한 시간이었다.


“뭘 봐, 씨벌럼들이.”


물론 모두가 비참하게 남아있는 건 아니었다. 전투 내내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시선을 끌었던 탓에 다른 생도들보다 심하게 당한 에두였지만, 그 특유의 내구성 덕분에 그는 일찌감치 의무실에서 벗어나 자신을 곁눈질하는 베르달의 용사들마다 시비를 거는 중이었다.

물론 그는 용사들에게 시비를 걸면서 산책을 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난 게 아니었다. 퉁퉁 부어오른 눈두덩이 사이로 시퍼렇게 날이 선 그의 눈동자는, 오직 하나의 얼굴을 찾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당직의무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야전병원의 천막들을 일일이 헤집으며 소란을 피웠고, 같은 행동을 일곱 번 반복하고 나서야 마침내 찾고 있던 얼굴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야이 좆같은 새꺄!”


군의관은 물론이고, 주변에 있던 생도들까지도 그의 도약을 막을 수 없었다. 몸상태가 멀쩡했던 때보다도 거친 도약으로 에두는 한 간이침대를 덮쳤고, 평화롭게 그곳에 누워있던 생도 하나를 무자비하게 폭행하기 시작한다. 깜짝 놀란 다른 생도들이 아픈 몸을 이끌고 모여들어 에두를 떼어내려 했지만, 정작 팔을 붙들어 에두를 제지한 것은 폭행의 피해자인 치체였다.


“이게 뭐하는 짓이야?”


간신히 아물어가던 입술이 다시 터져버린 탓에 치체는 말을 내뱉음에 앞서 피를 먼저 뱉어내야 했다.


“야이 좆같은 새끼야, 몰라서 물어? 니 새끼만 말 쳐들었어도 그따구로 처발리진 않았을 거 아냐?!”


그제야 치체, 그리고 주변의 생도들 모두 어째서 에두가 여기까지 쳐들어왔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러나 돌아오는 건 치체의 비웃음이었다.


“그런가? 지휘관이랍시고 고래고래 소리만 지를 줄 아는 양아치보다는 내 쪽이 더 오래 버텼던 것 같은데?”


“이 새끼가-”

다시금 달려들려고 했던 에두였지만, 그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 어느새 수많은 생도들이 그의 팔다리를 붙들고 있었던 것이다. 에두는 곧바로 주변을 향해서도 욕지거릴 내뱉으려 했지만, 그는 대신 씁쓸한 미소를 삼켜야 했다.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너무도 익숙한 생도들의 얼굴. 벌레와의 전투에서 자신의 고함을 듣지 않고 치체의 곁에서 진형을 이루었던, 바로 그들이었다.

“.......하하, 이 씨발새끼들 봐라.”


그리고 그들의 공통점은 또 하나 있었다. 마구잡이로 싸웠던 에두 근처의 생도들과는 달리, 그들은 ‘기본’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즉, 그들은 기초교육을 이수한 귀족자제들이었던 것이다.


“엘라 경을 기사로서 존경하지만, 그분의 선택까지 존경할 수는 없을 것 같군.”


입술을 감싸 쥔 채 치체가 침대에서 일어선다. 에두는 그런 치체를 날카로운 눈동자로 추격했지만, 아무리 그일지라도 분노만으로 수 명의 기사가 짓누르고 있는 압박을 벗어나기엔 무리가 있었다.


“패려면 패라. 그럴 배짱이 있다면 말이지, 쫄보새꺄.”


“내가 너처럼 무식하고 야만적인 사람으로 보이나?”


천천히 다가와, 무릎을 꿇어 에두와 눈높이를 맞추는 치체. 그에 에두의 으르렁거림이 깊어진다.


“내가 대장인 게 불만이면 다시 일대일로 뜨던지, 좆밥새끼가.”


“당연히 너를 대표로 인정하지 않아. 그렇다고 네가 살아온 더러운 뒷골목에서나 통용되는 방식을 택할 생각은 없다. 우린 너와 같이 생각 없는 깡패가 아니다. 우린 공화국의 자랑스러운 기사로서 복무하기 위해 부름에 응한 것이지, 의지도 능력도 안 되는 양아치에게 명령받겠다고 입대한 게 아냐.”


“어쩌라고?”


치체가 손을 들어 올린다. 에두는 그 탄탄한 손이 자신의 안면을 강타할 것을 예감하고 이를 악물었지만, 그것은 자신을 붙들고 있는 이들에게 물러나라는 손짓이었다. 자유가 된 에두의 눈이 빛난다. 그가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뭐하는 짓들이야?!”



생소한 목소리가 영력과 함께 천막을 뒤흔든다. 아무리 에두일지라도 경직될 수밖에 없는, 그런 농도의 영력이었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천막 입구에 서있었다. 검은 빛의 짧은 머리, 굵은 눈썹에, 넓은 이마와 콧잔등을 가로지르는 흉터까지. 흉갑의 굴곡이 아니었다면 영락없이 남성으로 오인을 받았을 만한 인상의 여기사였다.


“뭐야, 넌?”


역시나 앞뒤 가리지 않는 에두의 도발이 먼저 튀어나온다. 그에, 여기사는 그렇지 않아도 흉터로 흉악한 미간을 찌푸리며 성큼성큼 천막 안으로 들어선다.


“ ‘뭐야, 넌?’ 난 여기 지휘관인 루치아 레티다. 그러는 너야말로 뭐하는 새끼야? 생도들 전원 대기하라는 거 못 들었어?”


“나는-”


“죄송합니다, 소령님. 이번 전투에 관해 논쟁 중이었습니다.”


뭔가 무례한 것을 내뱉으려던 에두의 입을 틀어막으며 치체가 앞으로 나선다. 그는 레티의 말과 그녀의 계급장을 알아보고 빠르게 상황을 판단한 상태였다. 그러나 치체가 이끌어낸 것은 지휘관의 비웃음뿐이었다.


“논쟁? 까고 있네. 너무 열띠게 토론해서 입술이 터졌냐? 생도 새끼들이 벌써부터 빠져가지고 미쳐돌아가는구만. 잘 들어. 개인정비 취소다. 17시까지 전원 남문 앞으로 집합한다, 알았어? 다리가 부러졌든 목이 부러졌든 상관없어. 무조건 전원집합이다. 앙?”


“예, 알겠습니다.”


왼손으로는 에두를 짓누르고, 오른손으로는 격식 있는 경례를 올리는 치체. 레티는 그런 둘과 주변의 생도들을 날카로운 눈빛으로 한 번씩 노려보고는, 침을 탁 뱉으며 뒤돌아 천막을 빠져나간다.




==================




오붓한 저녁식사는 여관에서의 술자리로 대체되고, 화기애애한 분위기 대신 무거운 침묵이 둘 사이를 짓누른다. 하지만 30분이 넘도록 맥주잔은 움직이지도 못한 채 거품만 꺼져가고 있었다. 주변엔 즐거운 웃음소리와, 분노로 가득한 술꾼의 주정, 그리고 서로를 탐닉하는 남녀의 미소가 가득했지만, 셰르와 유진의 탁자는 마치 다른 세상처럼 아무런 표정도, 감정도 품지 않고 있었다.


“배 안 고파?”


마침내 침묵을 깨는 셰르의 목소리. 그러나 그 일상성은 너무나 처참하게 분위기 속으로 녹아들지 못한다. 대답하는 유진의 목소리가 말라버린 이유였다.


“별로.”


“뭐라도 먹어야지.”


“.......됐어.”


유진이 고개를 떨군다. 그리고 셰르는 차마 그녀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바라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여기서 침묵을 이어가면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다. 셰르는 유진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한숨을 뱉고 나서, 탁자 위로 손을 올려놓는다.


“네 오라버니 말대로 해.”


그 한 마디만으로 유진의 고개를 들게 하는 것엔 성공했지만, 그녀의 표정만큼은 역시나 제대로 마주할 수가 없었다.


“.......뭐?”


“그렇잖아. 네가 평생 근위대에 말뚝 박을 것도 아니고, 지금이 딱 적절할 때지. 만약 봄에 올 원정에도 파견 나가게 되면 시기를 놓칠 거야. 그러다 대위라도 달면 더더욱 힘들어지고-,”


“아니, 잠깐만. 셰르, 지금 뭐라고 하는 거야?”

유진의 새빨간 눈동자가 원망으로 물들어간다.

“내 말 제대로 듣긴 한 거야? 결혼이라고. 그것도 정략결혼.”


“그래. 차기 니바르토 가문의 가주로 유력하다며. 잘 된 거 아냐?”


유진이 허리를 세우고 자세를 고친다. 그러나 어깨의 힘은 빠져나가고, 무릎에 올려놓았던 손은 덜덜 떨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눈동자 또한 그 떨림만큼이나 흔들리고 있었다.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현실로 되돌아온 것뿐이야. 나는 이름이 아까울 정도의 말단 가원이고, 너는 오라버니를 도와 가문의 미래를 짊어져야 할 사람이지. 처음부터 답은 나와 있던 거였잖아.”


“뭐.......?”


“아니면, 정말로 넌 우리 사이에 미래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만약 그렇다면, 넌 정말로 철이 없는 거야, 유진.”


“.......”

붉은 눈가에 투명한 물이 차오른다. 그러나 유진은 넘치는 그 열기를 훔쳐낼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떨리는 손을 다른 손으로 짓누르며 진정시키고 나서, 천천히 탁자 위 셰르의 손등 위로 겹쳐 올린다.

“셰르, 너 지금 일부러 이러는 거야?”


“난 나름대로 배려를 해줬어. 내가 잠자리에서 너와 마지막까지 가지 않았던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


“.......”


“간단해. 감당할 수 없으니까 그런 거야. 내 이름과 엮이면 엮일수록, 네 가치는 떨어질 수밖에 없으니까.”


“가치? 지금 가치라고 했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눈물을 흘리는 유진. 그러나 가장 안타까운 그녀의 얼굴을 앞에 두고서도 셰르의 표정과 시선은 흔들림이 없다. 그는 자연스럽게, 그리고 너무도 차갑게, 유진의 온기 아래에서 자신의 손을 빼어낸다.


“그래, 가치. 당연하잖아. 나는 죽을 때까지 이 제복을 입고 나의 비루한 가치를 증명하기만 하다가 끝나갈 인생이야. 너처럼 다른 미래를 꿈꿀 수가 없어. 이게 바로 내가 살아왔던 방식이고, 생존했던 방식이니까.”


“셰르.......”


“미안해. 나는 네가 원하는 걸 줄 수 없고, 너도 내가 원하는 걸 줄 수 없어. 미안하지만 이게 현실이야.”

셰르는 그대로 맥주잔을 들어 식은 내용물을 벌컥벌컥 들이킨다. 풍미 따윈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에겐 자리에서 벗어날 구실이 필요했을 뿐이었으니까.

“고마웠어.”


그는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여관 입구를 향해 걸음을 옮긴다.

유진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있었다.

그랬기에,

두 기사는 서로의 마지막 표정을 보지 못했다.


작가의말

언제나 미흡한 글을 봐주시는 독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어색한 문장이나 문맥, 오타가 있다면 지적 부탁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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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3 (23막) 네 눈물 속에서 나를 본다 (10) +10 16.10.18 421 13 19쪽
252 (23막) 네 눈물 속에서 나를 본다 (9) +10 16.10.13 480 15 17쪽
251 (23막) 네 눈물 속에서 나를 본다 (8) +8 16.10.08 475 12 18쪽
250 (23막) 네 눈물 속에서 나를 본다 (7) +12 16.10.03 548 14 16쪽
249 (23막) 네 눈물 속에서 나를 본다 (6) +5 16.09.28 470 15 16쪽
248 (23막) 네 눈물 속에서 나를 본다 (5) +10 16.09.23 431 13 17쪽
247 (23막) 네 눈물 속에서 나를 본다 (4) +8 16.09.18 507 15 19쪽
246 (23막) 네 눈물 속에서 나를 본다 (3) +10 16.09.13 511 13 18쪽
245 (23막) 네 눈물 속에서 나를 본다 (2) +10 16.09.08 458 14 13쪽
244 (23막) 네 눈물 속에서 나를 본다 (1) +7 16.09.03 511 12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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