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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등록일 :
2024.02.03 21:07
최근연재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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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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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04 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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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연기가 아니었네 (1)

DUMMY

오디션은 5명씩 무리 지어 들어갔다.

시간은 조당 10분 남짓. 중간에 결원이 있는 탓에 40분쯤 기다리니 차례가 됐다.


“42번부터 49번까지 준비하세요.”


스태프가 민재의 조를 호명했다.


정장을 입은 모델 같은 남자.

어디선가 본 듯한 순박한 인상의 남자 둘.

그리고 날라리 창식이 뒤로 민재가 마지막으로 들어갔다.


“아까 설명 들으셨죠? 자기소개 같은 건 안 하셔도 됩니다. 주어진 연기만 하시고, 심사위원들이 묻는 것에만 답하세요. 심사위원들이 별말씀을 안 하시면 그냥 제자리로 돌아오시고요.”


스태프가 문 앞에서 빠른 어조로 설명했다.


“들어오세요.”


먼 너머에서 묵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스태프가 문을 열어준 뒤, 그들은 일렬로 들어갔다.


심사위원은 다섯 명이었다.

감독으로 보이는 털보 아저씨가 가운데.

왼쪽에는 안경 낀 여자 둘이 앉았고, 오른쪽에는 민재 또래의 여자와 남자 배우가 앉았다.

감독 뒤에는 큰 카메라 세 대가 조명을 받아 번쩍이고 있었다.


오디션장 중앙에는 연기에 쓸 소품이 배치됐다.

큰 테이블에 주방용 칼과 도마, 야채 몇 개가 놓여 있었다.


‘역시 배우는 일반인하고 인종이 다르구나. 저 작은 얼굴에 어떻게 눈, 코, 잎이 다 붙어 있지?’


민재는 감독 오른쪽에서 시선을 멈췄다.


선남선녀.

나이스 캐스팅이었다.

나란히 앉은 것만으로도 그림이 좋았다.


“42번.”


감독이 번호를 짧게 불렀다.


모델처럼 생긴 남자가 나섰다.

심사위원들에게 꾸벅 인사한 뒤, 테이블에 다가가 칼을 잡았다.


타타탁, 당근을 썰며 하는 말.


“요리는 손으로 하는 게 아니야. 마음으로 하는 거지. 그딴 식으로 겉멋에 치중할 거면 때려치우고 다른 길을 알아봐.”


로봇이 책을 읽는 것 같았다.


“풋.”


민재는 자기도 모르게 실소를 터뜨렸다.


아차, 소리가 컸다.

오른쪽에 앉은 여자가 채점표를 작성하다가 눈을 가늘게 뜨고 째려봤다.


“44번.”


수더분하고 착해 보이는 참가자가 나섰다.


마찬가지로 양파를 자르며 하는 말.


“요리는 손으로 하는 게 아니야. 마음으로 하는 거지. 그딴 식으로 겉멋에 치중할 거면 때려치우고 다른 길을 알아봐.”


이번엔 훨씬 나았다.

맘씨 좋은 선배가 농담처럼 충고했다.


세 번째 지원자도 같은 연기와 대사.

여주인공을 짝사랑하는 모양이었다. 말투에서 따스함이 느껴졌다.


다음은 창식이 차례.

동네 건달 역에 몰입 중이라더니 못 헤어 나온 모양이었다.


“······때려치우고 다른 길을 알아봐.”


녀석은 상대를 조롱하듯 이죽거렸다.


‘분명 같은 연기, 같은 대사인데 느낌이 전혀 다르네.’


민재는 제자리로 돌아오는 창식이를 바라봤다.


생각대로 안 된 모양이었다.

녀석은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다음 49번.”

“아, 저는 참가자가 아니라······.”


그가 변명하려는 찰나.

창식이가 왼손으로 엉덩이를 슬쩍 밀었다.


“파이팅.”


녀석의 속삭임.


‘이건 진짜 예정에 없었는데.’


민재는 녀석을 힐끔 돌아보고 테이블 앞에 섰다.


***


화려한 조명 아래.

심사위원과 참가자들의 시선에 그에게 집중됐다.


‘야구밖에 모르던 놈이 지금 뭐 하는 거지?’


여전히 얼떨떨했다.


에휴, 우측 맨 끝의 심사위원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연기를 시작하기 전부터 마음에 안 드는 눈치였다.


좌불안석.

뭐라고 말해야 할 것 같은데 입이 안 떨어졌다.


‘어쩌지? 난 드라마도 잘 안 보는데. 누구라도 좋아. 제발 좀 도와줘.’


제발, 제발.

식은땀이 흘렀다.

누군가의 도움이 이렇게 절실하긴 처음이었다.


“49번님은······.”


감독이 한심하다는 듯 말하려는 찰나였다.


- 내가 도와줄게요. 대신 제 부탁을 들어주세요.


어디선가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나이는 50대 초반 정도.

배려심 많고 차분한 어조였는데, 동굴에서 말하는 듯 울렸다.


‘누구지?’


민재는 좌우를 곁눈질했다.

다른 이는 안 보였다. 


- 걱정하지 마세요. 나쁜 사람은 아니니까.


낯선 목소리가 웃음기를 머금고 덧붙였다.


이것저것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알았어요. 일단 도와주세요.’


민재는 마음속으로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다음 순간, 오싹한 한기가 등골을 훑고 지나갔다.


***


“쟤 뭐야?”


감독의 오른쪽, 황 작가는 짜증 가득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친구를 만나러 나온 듯한 편안한 복장.

다른 사람의 연기에서 웃더니, 막상 자기 차례가 되자 당황해 어쩔 줄을 모른다.


49번은 첫인상부터 마음에 안 들었다.

키가 크고 마스크는 제법 반반했지만, 단지 그것뿐이었다.

다른 심사위원들도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채점표를 작성했다.


“49번님은······.”


정 감독이 한숨을 쉬며 말하는 도중이었다.


49번의 표정이 달라졌다.

칼과 도마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뭐지? 갑자기 분위기가 달라졌는데.”


정 감독은 고개를 갸웃하며 황 작가에게 속삭였다.


“꼴에 본 건 있나 봐요. 매소드 연기를 흉내 내는 건가?”


황 작가가 인상을 찌푸리고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49번이 냉소적인 미소를 머금고 칼을 들었다.

오른손으론 당근을 천천히 밀며 기계적으로 칼질했다.


타타타탕, 너무 빨라 손이 제대로 안 보였다.

연기가 아니었다. 수십 년은 주방에서 구른 프로 중의 프로였다.


“요리는 손으로 하는 게 아니야. 마음으로 하는 거지. 그딴 식으로 겉멋에 치중할 거면 때려치우고 다른 길을 알아봐.”


시선은 칼을 향한 채 낮게 덧붙였다.


“요리로 진심을 전해야 해. 모양만 흉내 내는 건 기술자야.”


시니컬한 표정과 말투.

49번의 모습 위에 다른 모습이 겹쳤다.

요리에 대한 자부심과 자존심이 엿보였다.


“김 셰프?”


황 작가는 벌떡 일어나 비명처럼 외쳤다.


***


드라마는 100% 허구의 창작물이 아니었다.

사실에 기반을 두고 상상력을 더한 예술이었다.

특히 현대를 배경으로 하는 드라마는 핍진성과 개연성이 중요했다.


12년 차 정상급 요리가 한대수.

여주인공에게 요리를 가르쳐주는 선배도 황 작가의 오랜 취재 끝에 탄생한 캐릭터였다.


모티브는 이태원에서 이탈리안 레스토랑을 운영하는 김일수 씨, 일명 김 셰프였다.

시니컬하면서도 츤데레 같은 분위기가 인상적이었고, 요리는 마음으로 한다는 대사도 그가 신입을 가르치면서 한 말이었다.


‘김 셰프는 지난주에 교통사고로 죽었잖아? 독신이라 유족은 없다고 했고. 감독님하고 문상까지 다녀왔는데, 어떻게 된 거지?’


황 작가는 크게 도리질했다.


현실 감각이 돌아왔다.

그녀가 본 것은 한대수를 만들며 그린 이미지였다.

연기를 끝낸 민재는 다른 참가자들 옆에서 멋쩍게 서 있었다.


“내가 뭘 본 거지? 마지막에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까지 김 셰프하고 똑같잖아?”


장 감독도 입을 쩍 벌렸다.


당혹스럽긴 민재도 마찬가지였다.

느닷없는 오한을 느낀 순간,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뭐였지? 누군가가 내 몸에 들어온 기분이랄까?’


정신을 차려 보니 연기가 끝난 뒤.

심사위원들의 눈치를 보다가 슬그머니 제자리로 돌아왔다.


“연기 잘 봤습니다. 시니컬하면서도 우수에 찬 눈빛이 멋졌어요.”


왼쪽에 앉은 여배우가 엷은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이름이 뭐였더라?

이민주였던가, 김민주였던가?

어디선가 많이 본 것 같았는데, 기억이 잘 안 났다.


이름이야 어쨌든 상관없었다.

어차피 다시 만날 사이도 아니었으니까.

심심풀이로 나온 오디션, 망신만 안 당하면 다행이다.


‘우수에 찬 눈빛? 당연하지. 방출된 지 일주일도 안 됐는데.’


우울해 보이는 건 연기가 아니라 실제였다.


“프로필하고 많이 다르시네요. 여기엔 175cm, 68kg이라고 쓰여 있는데. 모델? 아니면 운동선수?”


남자 배우도 참가자 명단을 유심히 살피며 물었다.


이놈의 보정 사진.

실물하고 영 매치가 안 됐다.


“얼마 전까지 야구를 했습니다.”

“사회인 야구요?”

“아니요. 대전 이글스에서 뛰었습니다. 2군에만 있어 모르는 분이 더 많지만요.” 


민재는 쓰게 웃으며 대답했다.


“어쩐지 피지컬이 남다르시더라니. 무슨 포지션이었어요?”


황 작가가 눈을 빛내며 끼어들었다.


“우투우타의 포수였습니다. 연습 때는 외야도 가끔 봤는데, 실전에 투입될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민재는 187cm, 81kg의 탄탄한 체격을 자랑했다.

헬스장에서 만든 미용 근육이 아니었다. 운동으로 다져진 실전 근육, 일명 말 근육이었다.


“어쩐지. 요즘 남자 배우들에게서 흔치 않은 이미지라더니.”

“분위기가 독특해요. 운동선수 특유의 야성미가 느껴진다고 할까?”


두 남녀 배우도 새삼스러운 눈으로 민재를 살피며 감탄했다.


다른 참가자는 자기소개할 기회도 없었는데.

심사위원들은 펜을 부지런히 놀리며 질문을 쏟아냈다.


“칼질이 수준급이시던데, 따로 요리를 배운 적이 있으십니까?”

“아니요. 요즘 프로야구에는 2군에도 전문 영양사가 계십니다. 요리는 전지훈련 때 선배들 야식으로 라면 몇 번 끓인 게 전부입니다.”

“김일수 씨하고 어떤 관계이십니까? TV에도 자주 나오는 유명한 셰프님인데요.”

“그분이 누굽니까? 야구 선수는 눈 관리가 중요하거든요. TV와 핸드폰도 거의 안 보고 살았습니다.”


민재는 내심 당황하면서도 솔직히 대답했다.


“김일수 씨도 모르세요? 그럼 아까 그 표정은 뭐였어요? 김일수 씨하고 판박이던데.”


잠깐 스톱.

감독은 귀신에 홀린 표정으로 민재를 바라봤다.


캐릭터를 잘 소화하는 배우는 많았다.

하지만 캐릭터의 모티브가 되는 인물까지 연구하고, 사소한 습관마저 재현하는 배우는 금시초문이었다.


“전에 연기해본 경험이 있으세요? 발성은 평범해도 캐릭터 몰입력이 대단하시던데.”


이번엔 오른쪽 끝에 앉은 조연출의 물음이었다.


“야구에서 은퇴한 지 며칠 안 됐습니다. 친구 녀석이 연기하는 걸 가끔 보긴 했는데, 눈앞에서 다른 사람의 연기를 본 건 오늘이 처음입니다.”

“오디션은 어떻게 지원하게 됐습니까?”

“친구 따라서 왔습니다. 우울한 일이 있어서 기분전환 좀 하려고요.”


민재는 창식이를 곁눈질했다.


‘얘 뭐야? 정말 내가 알던 민재가 맞아?’


녀석은 놀란 표정으로 눈만 끔뻑거렸다.


‘쟤 뭐야? 야구 선수가 여기에 왜 나와?’

‘정말 피지컬이 남다르네. 저만하면 마스크도 훌륭하고.’


다른 참가자들도 시기 어린 시선으로 그를 쏘아봤다.


***


민재가 인사하고 나간 뒤.


“나 놀란 거 보이지? 아까 정말 한대수가 나타난 줄 알았다니까.”


장 감독은 소매를 걷어올렸다.

통통한 팔뚝에 닭살이 숭숭 돋아 있었다.


“심심해서 친구 따라온 게 저 정도라니. 발성이 약한 편이지만 그건 연습으로 고칠 수 있죠.”

“운동선수라 그런지 몸이 멋있어요. 로션도 안 바르고 온 거 같은데, 잘 꾸미면 마스크도 좋을 거 같고요. 우리가 찾던 원석이에요.”


조연출과 여배우도 찬성이었다.


“다른 참가자들은 볼 것도 없어요. 내가 찾던 게 저 사람이에요. 야구 선수 출신이라 화제성도 확실하고. 강민재야말로 한대수를 위해 태어난 사람. 다른 사람은 절대 안 돼요.”


황 작가가 제일 확고했다.

다른 참가자들은 머릿속에서 깨끗이 지운 눈치였다.


만장일치.

남자 배우만 뭔가 할 말이 있는 눈치였지만 속으로 삼켰다.


“근데 프로야구 선수라고 했잖아. 그럼 출연료를 얼마에 맞춰야 하지? 프로는 보통 억대 연봉 아닌가?”


장 감독은 팔짱을 끼고 난감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오디션은 성공.

작가가 찾던 좋은 신인을 발굴했다.

하지만 대우와 출연료라는 현실적인 문제가 고개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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