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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나은의 서재입니다.

물방울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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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나은
작품등록일 :
2021.09.13 19:09
최근연재일 :
2023.09.12 20:20
연재수 :
11 회
조회수 :
847
추천수 :
5
글자수 :
53,399

작성
21.09.23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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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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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0쪽

7. 파랑

DUMMY

나는 바다로 있었다. 내 몸이 바람을 타고 넘실넘실 흘렀다. 하늘은 파랗게 펼쳐져 있었다. 하늘이 파란색일 때, 내 몸이 파란색이 되었고, 하늘이 주황색일 때, 내 몸이 주황색이 되었다. 검은 하늘일 땐, 내 몸은 검은색이 되었다. 나의 몸은 순간순간 하늘 빛을 따라서 여러 빛깔로 변했다. 나는 여러 가지 색깔이 담긴 하늘을 마주보며 생각했다. 저 많은 색깔들 중에서 나의 색깔도 있을까? 수많은 색깔을 여행하다 보면 나의 색깔을 찾게 될까? 나도 다른 색깔들처럼 나의 색깔을 가지고 싶었다. 그리고 안정을 느끼고 싶었다. 나의 자리에 머물러 여행을 쉬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마음도 잠시, 나는 다시 곧 새로운 걸 바랐고, 색깔을 더 알고 싶다는 호기심과 함께 지금 있는 곳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했다. 세상은 내 마음을 알기라도 한 듯 항상 내 몸을 싣고 새로운 곳으로 데려다주었다. 그래서 나는 세상에게 이런 의심이 들었다. 나는 내 의지로 몸을 움직일 수 없고, 나의 다음 순간은 오직 세상에 의해 결정되지만 나의 마음도, 나의 생각도, 나의 의지도 세상이 결정한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다. 그렇다면 나의 생각은 세상의 생각이고, 나의 결정도 세상의 결정이다. 나는 내가 가게 될 곳을 먼저 직감해서 그곳으로 감정이 끌리는지도 모른다. 나의 모든 것이 세상에 의해 결정된 것이라면, 그럼 나는 세상이며 나인 것일까. 내가 운명을 지은 세상이라면, 나는 운명을 직감하고, 운명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나는 자유롭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내가 정해 놓은 운명으로 내 마음이 끌리게 되는 것이니까 말이다.

그럼 나의 운명은 무엇일까. 나는 세상에 어떤 역할로 존재하는 것일까. 나는 왜 색깔을 찾아 여행하는 것일까. 나의 존재가 세상에 어떤 영향을 줄까. 나는 나를 다 알게 될 수 있을까. 그리고 나의 색깔을 찾을 수 있을까.



나는 바다에서 바다와 하늘의 색깔을 닮은 파랑을 만났다. 파랑은 바다 가운데에 작은 섬에 있었다. 그는 바다를 바라보며 늘 해변에 앉아있었다. 앉은 다리 위에 두 손바닥을 얹고, 편안한 얼굴로 눈을 감고 있었다. 파랑은 그 자세로 계속 앉아있었다. 그리고 바로 옆에서 그와 닮은 존재가 같은 모습으로 앉아있었다. 파랑의 옆에 앉아 있는 그는 파랑과 같은 파란색이었고, 파랑보다 몸집이 많이 작은, 작은 파랑이었다. 하지만 작은 파랑은 파랑과 같이 같은 자세로 앉아 있다가도 다리를 자꾸 고쳐 앉았고, 몸을 자주 곰지락댔다. 그러다가 섬 이곳저곳을 살펴보거나 뛰어다녔고, 모래를 가지고 놀기도 하고, 바다로 들어가 한참 헤엄치다 나오기도 했다. 이따금 심심해지면 앉아있는 파랑의 곁에 다가가 모래로 장난을 쳤는데 파랑의 주변을 둥글게 둘러 모래산을 만들거나 바다 물길을 만들어 파랑의 다리를 젖게 했다. 파랑은 그럴 때면, 자세를 고쳐 앉아 작은 파랑에게 재밌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서로 대화를 나누었다. 작은 파랑은 파랑을 환이라고 불렀다.


“환, 환은 심심하지 않아?”

“나는 나를 괴롭게 하는 마음은 다 비우는 중이야.”

“마음을 비우면 안 심심해?”

“그럼.”

“환은 심심하면 많이 괴로워?”

“괴로울 때가 있지.”

“괴로우면 재밌게 놀면 되잖아.”

“재밌게 놀고 나면 또 안 심심할까?”

“그럼, 또 놀면 되지! 심심하면 재밌게 놀고, 또 심심하면 더 재밌게 놀고.”

“매번 같은 놀이를 하면 나중에는 재미를 못 느끼게 될 테고, 그럼 더 재밌는 놀이를 찾게 될 거고. 내 욕심은 끝이 없어질 거야.”

“나는 아직 못해 본 놀이가 많은 걸. 환은 그럼 그 놀이들을 다 해봤다는 거야?”

“나는 세상 놀이에 관심 없어. 내 욕심을 비우고 싶은 거야. 그래서 나를 전부 비워내고, 색깔을 비우는 중이야.”

나는 파랑의 손바닥 위에 붙어있었다. 색깔을 비우고 있다고 말하는 파랑의 말에 솔깃했다. 나는 파랑의 말에 더 집중했다.

“그럼, 환이 다 비워지고, 색깔도 없어지면 환은 사라지게 되는 거야?”

“자신을 전부 비운 분을 직접 만난 적이 있어. 하지만 그 분의 몸은 사라지지 않았어. 나는 그분에게서 가르침을 받았어.”

“자신을 전부 비웠는데 환을 어떻게 가르친다는 거야?”


파랑은 대답하지 않았다. 파랑은 바다의 수평선 쪽을 바라봤다. 그리고 바다 냄새를 크게 들이마시고는 미소 지었다. 작은 파랑은 파랑이 대답이 없자 살짝 시들한 얼굴이었다. 작은 파랑은 다시 모래산을 쌓아 올렸다. 물길을 만들고, 작은 집을 만들어서 조개껍데기와 돌멩이를 가지고 마을 놀이를 했다. 파랑은 바다를 마주 앉아서 두 손을 다리에 얹고 눈을 감았다. 섬에는 파랑과 작은 파랑 둘뿐이었다.


밤이 되었다. 섬의 밤은 더 고요했다. 파도치는 소리만 나직이 들렸다. 파랑과 작은 파랑은 해변에 나란히 누웠다. 밤하늘에는 별이 가득했다.

“환은 내일도 마음을 비울 거야?”

“응. 넌?”

“난 오늘 하늘색 조개랑 연분홍색 돌멩이가 살고 있는 마을 12호를 만들었어. 집도 만들어 줬는데 둘이 싸움이 난 거야. 둘이 갈라서게 됐어. 연분홍색 돌멩이가 마을을 나가서 마을 13호를 만들었어. 내일은 마을 13호가 완성될 거야. 마을 13호는 마을 12호보다 훨씬 커. 높은 돌탑도 있어. 그런데 하늘색 조개가 돌탑을 보고.......”

작은 파랑이 이야기를 한참 재잘거렸다. 그리고 밤공기가 점점 차가워지자 작은 파랑이 이야기를 멈추고, 파랑에게 말했다.

“그런데 많이 춥지 않아?”

“난 괜찮아. 별이 참 예쁘다.”


파랑과 작은 파랑은 곧 잠이 들었다. 차가운 밤공기에 작은 파랑이 다시 잠에서 깼다. 파랑이 콜록거리며 기침을 하고 있었다. 작은 파랑이 일어나 풀숲으로 가더니 잠시 후 덮을 것을 가지고 왔다. 작은 파랑은 파랑과 함께 몸을 덮었다. 그리고 파랑의 손바닥 위로 자신의 손을 포갰다. 작은 파랑은 잠이 들었다. 나는 파랑의 손바닥에 있었다. 작은 파랑의 손이 내 몸에 포개졌다. 나는 작은 파랑의 몸속으로 스며들었다.


작은 파랑은 꿈을 꾸고 있었다. 작은 파랑의 몸속에 꿈이 가득 펼쳐졌다.


파랑이 바다를 마주보며 해변에 앉아있다. 바다와 하늘이 맞닿은 수평선에서 하얀 빛이 비쳤다. 하얀 빛이 더 환해지고, 가까워졌다. 파랑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파랑은 하얀 빛을 향해 천천히 바다로 들어갔다. 그때, 작은 파랑이 소리쳤다.

“환! 가지 마!”

작은 파랑이 파랑에게 가려 했다. 하지만 발을 꼼짝할 수 없어 걸음을 떼지 못했다. 작은 파랑은 멀어지는 파랑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목메어 울었다.

“환! 멈춰! 가지 마... 날 두고 가지 마... 제발 돌아와!”

파랑의 몸이 바다로, 하얀 빛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파랑의 색깔이 비워지고 있었다. 그리고 파랑이 사라졌다.

파랑이 떠났다. 나는 두려움이 밀려왔다. 섬과 바다, 이곳 모든 것이 낯설게 느껴졌다. 파도가 철썩철썩대며 나를 위협하고 있었다. 성난 듯 하얀 거품을 일으키며 해변을 기어올라와 모래산을 집어삼켰다. 파란빛이 사라진 회색빛 하늘에는 곧 무엇이 휘몰아칠지 알 수가 없었다. 거친 바람이 모래를 흩뿌리며 섬 전체를 휘젓고 다녔다. 나는 세상 밖으로 갓 나온 새끼처럼 울부짖었다. 모래밭을 구르고 하늘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나는 섬에 혼자가 되었다.


나는 두려움을 마주할 용기가 없었다. 혼자서는 견뎌낼 수 없었다. 나는 섬 속에서 아주 나약한 존재일 뿐이었다. 나를 두려움에 떨게 하고, 괴롭게 하는 모든 것들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다. 나는 이 섬으로부터 달아나고 싶었다. 그래서 파랑을 따라가기로 했다.


그 후로 나는 매일같이 바다를 보며 해변에 앉았다. 파랑과 같은 자세로 앉아 눈을 감았다. 나는 바다의 공기를 천천히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파도 소리를 듣고, 바다 냄새를 맡고, 손바닥 위로 스치는 바람결을 느꼈다. 나는 지금 순간의 것들을 받아들였다. 나는 바람이 되기도 하고, 바다가 되기도 하고, 모래가 되기도 하고, 하늘의 새가 되기도 했다. 나와 세상이 구분되는 건 없었다. 모든 것이 나와 같았다. 세상에는 내가 가지고, 지켜야 할 것도 없었다. 그건 내 몸도 마찬가지였다. 셀 수 없는 것이 이미 내 안에 있었다. 어느새 나의 괴로움이 바다로 흘러가 수평선으로 사라졌다. 나는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하늘과 바다의 경계는 없었다. 둘은 이어져 하나로 되어 있었다. 그곳은 하얀 빛으로 빛났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하얀 빛을 향해 바닷속으로 들어갔다.



수평선 위로 해가 떠올랐다. 파랑과 작은 파랑이 잠에서 깨어났다.

밤 사이에 작은 파랑의 마을 12호가 바닷물에 쓸려 반쯤 부서져 있었다. 파랑이 말했다.

“12호 마을이 습격 당했다! 연분홍색 돌멩이의 짓인가!”

“하늘색 조개가 바다로 떠난 걸 거야.”

“그러고 보니 하늘색 조개가 사라졌네.”

“환, 나도 오늘부터 환이랑 같이 비우는 놀이할래.”

“그래. 좋아!”


작가의말

나를 발견하는 시간이 되길 바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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