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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나은의 서재입니다.

물방울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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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나은
작품등록일 :
2021.09.13 19:09
최근연재일 :
2023.09.12 20:20
연재수 :
11 회
조회수 :
848
추천수 :
5
글자수 :
53,399

작성
21.09.19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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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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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글자
12쪽

4. 노랑

DUMMY

하늘에는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고 있었다. 노란 모래벌판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모래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황량한 사막이었다. 나는 바람에 실려 수많은 모래알과 함께 사막 위를 날아가고 있었다. 꽤 오랜 시간을 날았다. 사막 한가운데에 무언가 우뚝 서있는 게 보였다. 멀리서 본 그것은 거대한 모래산처럼 보였다. 그리고 점점 가까워지자 그것이 살아있는 존재라는 걸 알았다. 그는 몸집이 산만큼 거대했고, 모래색과 같은 노란빛을 띠었다. 크고 둥글 넓적한 머리는 햇빛을 받아 반질반질 광이 났다. 그는 두툼한 두 다리로 거대한 몸체를 받치며 모래 위에 앉아있었다. 그 모습이 꽤나 안정돼 보였고, 위엄 있어 보였다. 모래 위에 박혀있는 큰 바위돌 같아 보이기도 했다. 돌처럼 굳은 자세로 그는 한참 동안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집요한 시선에는 절대 변하지 않는 그의 고집이 담겨있는 듯했다. 새까만 눈동자가 반짝거림 하나 없이 눈 속에 가득 차 있었다. 컴컴한 눈은 모든 것들을 다 빨아들이고, 빛까지도 삼켜버릴 것 같았다. 작은 날같이 날카로운 입은 움직임 없는 몸과는 달리 작은 자극에도 기민해 보였다. 그리고 그 입에서 많은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는 낮은 목소리로 차분하게 천천히 말을 했다.

“아름다운 나의 얼굴, 지적인 눈동자, 장대한 나의 몸, 만물을 창조하는 손, 나는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존재다.”

그가 쏟아내는 대부분의 말들은 스스로를 훌륭한 모습으로 드러내는 말들이었고, 자신을 찬양하는 말을 밤낮으로 쉴 새 없이 뱉어냈다. 그는 앉아서 말을 열심히 많이 하는 존재였다. 햇빛을 받은 그의 머리가 매 순간 반짝였다. 나는 그의 뜨거운 머리 위에 붙어서 그가 과시하는 말을 가만히 듣고 있었다. 그는 이 모래벌판 밖으로 나가본 적이 있을까, 세상에는 노란색뿐 아니라 수많은 색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을까. 노랑은 드넓은 사막 한가운데에 홀로 앉아 자신의 존재를 말로서 세상에 알리고 있었다. 그의 과시의 말은 어쩌면 나비를 유혹하는 꽃의 향기와 같을지도 모른다. 그의 특별함을 필요로 하는 존재가 나비처럼 날아오게 될지도 모른다. 세상에는 특별한 존재가 많이 있지만 혹시나 사막의 길을 지나가는 누군가가 노랑의 달콤한 말에 유혹되어 노랑을 필요로 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밤이 되었다. 무수한 별들이 밤하늘에 쏟아졌다. 노랑은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새까만 눈동자가 별들이 담겨 반짝거렸다. 반짝이는 눈동자 때문인지 노랑의 모습이 낯설게 느껴졌다. 낮에는 메말라 보였던 그의 눈동자가 밤에는 별빛에 반짝여 촉촉하게 젖었다. 눈동자가 별을 따라서 또렷이 움직였다. 그는 생각에 잠겼는지 그제서야 많은 말을 멈췄다. 그는 밖으로 쏟아내는 말들 대신 안으로 많은 생각을 하고 있는 듯했다.

별을 바라보는 그의 얼굴이 낮보다 편안해 보였다. 수많은 별들 속에서 자신만의 안식처를 찾은 것처럼 그는 조금 낮게 뜬 별에 앉아 세상을 느긋하게 구경하고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세상에 관심이 많아 보이지만 세상에 가까이 다가가고 싶어 하지 않는다. 하늘 아래와 하늘 위 사이에서 홀로 가만히 앉아 말을 쏟아내거나 생각에 잠기거나 할 뿐이다.



노랑이 앉은 모래 밑에서 하얀 뱀이 기어나왔다. 노랑의 다리를 타고, 몸을 한 바퀴 돌고 올라가더니 노랑의 입속으로 스르륵 사라졌다. 시커먼 입속이 살짝 벌려진 채 노랑의 입꼬리가 칼날처럼 가늘게 올라갔다.


나는 하얀 뱀이 나오는 꿈을 꾸고 일어났다. 노랑이 누군가와 대화를 하고 있었다. 노랑의 손바닥만한 작은 키에 동그란 몸, 동그란 손, 동그란 발, 동그란 얼굴, 동그란 눈을 가진 새하얀 하양이 노랑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하양은 자신의 집을 찾고 있다고 했다. 큰 별 때문에 사막에서 길을 잃었다고 했다. 하양처럼 사막에서 길을 잃은 존재들이 많은지 노랑의 얼굴은 익숙한 듯 편해 보였다. 노랑이 차분하게 물으며 대화를 이끌었다.

“네 집은 어떻게 생겼어?”

“내 집은 하얗고 네모난 집이야. 집 주변엔 하얗고 네모난 집들이 많이 있어. 내 집보다 키가 큰 집도 있고, 옆으로 길쭉한 집도 있고, 집과 집을 쌓아 올린 높은 집도 있어. 우리는 마을에서 함께 살아...... 내가 별을 좋아하는데 집에는 창문이 없어. 그래서 밖으로 나가 별을 자주 구경하곤 했어. 내가 가장 큰 별을 발견했는데 어느 날 그 별이 땅으로 떨어지는 걸 봤어. 나는 큰 별이 떨어진 곳으로 무작정 달렸어. 하지만 별을 찾을 수 없었어. 한참을 달리고 주위를 둘러봤지. 주위엔 아무것도 없었고, 모래벌판뿐이었어. 나는 집으로 돌아가려고 계속 걸었어. 그런데 걸어도 걸어도 집이 보이지 않았어. 같은 곳만 계속 맴돌고 있는 것 같아. 사막에서 몇 밤이나 보냈는지 몰라. 그러다 널 발견했고.......”

“나는 네가 보았던 큰 별, 그 별을 알고 있어. 그 별은 세상에 길을 알려주는 별이야. 집을 찾아주는 친절한 별이지. 진짜 집 말이야. 큰 별이 떨어진 곳에 네 집이 있을 거야. 큰 별을 찾아가야 해.”

“난 큰 별 때문에 집을 잃었는걸. 큰 별이 떨어진 곳은 나의 집이 아니야. 나의 집은 하얗고 네모난 집이야. 나의 가족이 살고 있어. 난 그곳에서 태어났어. 그곳이 나의 고향이고, 내 집은 그곳뿐이야.”


잠깐 동안 침묵이 흘렀다. 노랑의 머리가 유난히 반짝거렸다. 노랑은 눈을 한 번 깜빡였다. 그리고 하양에게 말했다.

“네 집을 찾아야 해. 네가 큰 별에게 끌렸던 건 그곳에 진짜 네 집이 있기 때문이지.”

하양은 대답하지 않았다. 노랑이 다시 말을 이었다.

“네가 집 밖을 뛰어나왔을 때처럼 큰 별이 있는 곳을 계속 찾아가. 그곳이 진짜 네 집일테니까.”

하지만 하양은 노랑의 말을 의심하며 격앙된 말투로 말했다.

“큰 별을 찾아간다면 나는 더 길을 잃고 말 거야. 결국 찾지도 못하고 사막에서 죽게 될 거야. 가족들도 나를 찾고 있을 거라고.”

순간 노랑의 머리에 반사된 햇빛에 눈이 부셨다. 나는 잠깐 동안 눈앞이 아찔했다. 그리고 노랑이 말했다. 노랑의 목소리는 조금 흥분돼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도 큰 별을 계속 갈망하게 될 거야. 그리고 넌 이곳으로 다시 돌아오게 되겠지. 나는 네 집이 어디인지 몰라. 그래서 알려줄 수 없어. 하지만 네가 큰 별을 찾아간다면 내가 도와줄 수 있어.”


“가족이 기다리고 있어. 아무래도 집으로 돌아가는 게 좋겠어.”

하양이 단호하게 말하고 노랑을 돌아섰다. 그리고 걸음을 내디뎠다.

그때, 고요했던 모래벌판이 크게 흔들리고, 모래바람이 일어났다. 노랑이 자리에서 일어난 것이다. 나는 더욱 높아진 노랑의 머리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봤다. 하양이 거품만큼 작게 보였다. 하양은 넘어져 모래에 반쯤 덮여있었다.

노랑이 하양을 손으로 집어 올렸다. 노랑의 입에서 뱀의 긴 혓바닥이 날름댔다. 노랑이 입을 쩌억하고 벌렸다. 입속은 노랑의 눈처럼 시커멨다. 그 컴컴한 어둠 속으로 하양이 꿀꺽 삼켜졌다. 노랑의 몸이 점점 부풀어 올랐다. 몸집이 더 거대해졌다. 커진 몸집이 모래벌판을 밀어냈다. 사막이 세상을 향해 조금씩 조금씩 넓혀지고 있었다.

노랑이 ‘쿵’ 소리를 내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나는 노랑의 머리 위에서 흘러내려 노랑의 검은 눈 속으로 빠졌다.


노랑의 까만 몸속, 캄캄한 공간에 살짝 푸른빛이 돌았다. 밤하늘 같았다. 하양이 보였다. 하양은 살아있었다. 멍한 눈빛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곳엔 하양의 모습과 비슷한 친구들이 있었다. 하얗고 동그란 외모, 새까만 눈을 가진 하양을 닮은 친구들이었다. 모두 노랑에게 삼켜져 이곳에 갇혀있었다. 노랑이 홀로 앉아있는 사막은 쓸쓸해 보였지만 노랑의 몸속은 하양들이 있어 외롭게 느껴지지 않았다. 하양들은 다들 똑같이 움직였다. 모두가 동시에 같은 동작을 취했다. 다 같이 손을 잡고 빙글빙글 돌기도 하고, 위를 올려다보며 손뼉을 치기도 했다. 말은 하지 않았다. 그들은 몸짓으로 서로를 의식했다. 동작을 취하지 않을 땐, 가만히 앉아있었다. 별을 보며 생각에 잠긴 노랑의 모습처럼 말이다. 노랑의 목소리가 몸속에 울렸다. 노랑의 생각의 소리였다. 밖에는 별이 뜬 밤이 되었을 것이다.


“별은 나를 보고 있어. 세상을 전부 보고 있어. 그리고 모두에게 말하고 있어. 우리가 떠나온 집이 있고, 다시 그 집으로 우린 돌아가려 한다고. 그곳에서 우린 부서져 나왔어. 우린 조각이 되었어. 서로 다른 모양의 조각들. 부서진 조각들이 세상에 흩어져 별들의 별자리처럼 각자의 자리에 자리하고 있어. 하지만 조각들은 떠나온 집을 잊을 수 없어서 세상을 여행하며 집을 찾고 있어. 우리는 완성될 수 없는 흩어진 조각들. 서로 맞는 조각을 찾아 헤매며 방황하는 조각들. 외로운 조각들.......”


하양들은 위를 올려다보며 나란히 앉아있었다. 하양의 눈에 순간 별빛이 스쳤다. 하양의 눈이 촉촉해 보였다. 금방이라도 물방울 하나가 떨어질 것 같았다. 하지만 하양의 눈이 다시 메말랐고, 반짝임 하나 없는 새까만 눈으로 돌아왔다.

하양들이 점점 멀어져 갔다. 푸른빛이 도는 까만 공간 위에 하양들이 하얀 점들로 박혀있다. 밤하늘의 별 같았다. 나는 수많은 별들을 지나 노랑의 몸속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갔다.


푸른빛으로 가득 찬 공간이 나왔다. 천장과 바닥, 벽이 없는 공간이었다. 그 공간은 무한하게 넓어 보였다. 낯선 곳이지만 고요하고 편안했다. 나는 그곳에 푸른빛 하나와 함께 둥둥 떠 있었다. 푸른빛은 그 공간을 계속 맴돌고 있었다. 한번은 위에서 아래로 큰 원을 그리며 한 바퀴를 돌고, 다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큰 원을 그리며 한 바퀴를 돌았다. 푸른빛이 지나간 자리에는 짧게 푸른 잔상이 남았는데 마치 그림을 그린 것 같았다. 푸른빛은 알 수 없는 그림들을 공간에 가득 채웠다. 그리고는 미동도 없이 한참을 멈춰있었다. 그 순간 푸른빛이 나선형 모양으로 회전을 하며 공간에 있는 모든 것들을 빨아들였다. 푸른빛 속으로 내 몸이 빨려 들어갔다.



나는 세상에 혼자였다. 함께 있어도 혼자였다. 섞일 수가 없었다. 나는 괴물이었다. 나는 세상을 공감하지 못했고, 세상도 나를 공감하지 못했다. 그래서 모두가 내 곁을 떠났고, 나도 그들을 떠났다. 내 곁에 있는 존재는 나 하나뿐이었다. 나는 나를 이해해 주기로 했다. 그리고 나를 위로했다. 나는 아름답다고, 특별한 존재라고 아낌없이 말해주었다. 그리고 나는 바랐다. 세상 어딘가에 나를 맞이해주는 곳이 있을 거라고. 나와 닮은 친구가 있을 거라고. 나는 그곳을 찾고 싶었다. 그곳이 나의 집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세상 어딘가에 내 집이 있을 거라고 나는 믿었다. 나의 집은 큰 별처럼 반짝이며 나를 기다리고 있을 거라며.


하얀 빛이 보였다. 하얀 빛이 푸른빛을 감쌌다. 나는 외로움을 길게 몰아내쉬었다. 그리고 첫잠이 들었다.


작가의말

나를 발견하는 시간이 되길 바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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