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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나은의 서재입니다.

물방울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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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나은
작품등록일 :
2021.09.13 19:09
최근연재일 :
2023.09.12 20:20
연재수 :
11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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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18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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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쪽

3. 초록, 빨강

DUMMY

초록.


아름다운 몸이었다. 몸선이 우아하고 기품 있었다. 부드러운 곡선이 큰 물결을 이루는 것 같았다. 가느다란 팔과 다리가 길게 뻗어있었고, 긴 다리로 높이 서 있어서 그의 우아함이 멀리서도 돋보였다. 머리가 하늘을 닿을 듯 말 듯 했는데 나중엔 하늘 위까지 오르는 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햇빛을 받은 머리칼이 연둣빛으로 반짝이고 있었고, 그의 몸은 아래로 내려갈수록 초록빛을 띠었다. 긴 머리칼이 바람에 흩날려 얼굴을 덮었고, 흔들리는 머리칼 사이로 긴 속눈썹이 살랑거렸다. 그 속에 그의 눈이 보일 듯 말 듯 했는데, 눈동자가 항상 하늘을 향해 있었다. 초록은 움직이지 않은 채로 같은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지만 하늘을 향해 나아가 듯 위로 조금씩 자라고 있었다. 그는 정말 하늘로 가려는 듯해 보였다. 다른 곳은 보지도 않고, 하늘만 보며 자랐다. 몸은 땅에 있었지만 그의 시선은 하늘에 있었다. 하늘 위 어딘가에서 그가 떠돌고 있을 것 같았다. 그런 초록의 태도는 주변을 외롭게 만들기도 했다. 굳게 다문 입은 말을 안 한 지 꽤 오래돼 보였고, 그는 대화를 나눌 친구도 주변에 없었다. 친구가 있어도 친구는 외로움을 느껴 그의 곁에 오래 머물지 못할 것 같았다. 곁에 있어도 하늘과 땅 사이의 거리만큼 둘은 가까워질 수 없을테니까.

나는 그의 머리카락에 바짝 붙어 그의 눈을 바라봤다. 하늘을 향해 초점을 잃은 눈동자가 자신은 누구와도 마주할 수 없을 거라고 단정하고 있었다. 그 눈 속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꿈을 꾸는 착각이 들기도 했는데, 그럴 때면 몸에 아무런 무게가 느껴지지 않았고, 하늘에 떠 있는 것처럼 내 몸이 나른했다. 주변의 모든 소리들이 나와 관계없이 스쳐갔다. 바람이 불어도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세상이 불투명해 보였다. 나는 눈앞에 그의 초록색 표면을 살펴봤다. 초록색 표면이 곧 거뭇한 색으로 변했고, 거뭇한 색은 다시 초록색이 되었다가 다시 거뭇한 색이 되었다. 그리고 그의 몸이 실체가 맞는지, 초록은 실제로 존재하는지,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닐까, 아니면 초록은 세상을 떠도는 혼일까, 나는 흐릿한 정신으로 어떠한 결론에도 닿지 못했다.


연둣빛으로 반짝이던 머리칼이 색을 잃었다. 메마른 팔은 얼마 가지 않아 툭 부러질 것 같았다. 다리가 질퍽한 진흙에 빠져있었고, 몸은 썩은지 오래된 듯 머리 위까지 검은 반점들이 차올라와 있었다. 우아했던 그의 몸이 흉측하게 변했다. 아니면 그가 원래 이 모습이었을까. 그를 처음 봤을 때 아름답고 우아했던 그 모습이 내 착각이었을까. 그의 모습이 무엇이 진짜인지 판단이 되지 않았다. 현실과 꿈의 경계가 흐릿했다. 나는 그의 진짜 모습을 알고 싶었다. 몸선을 따라 미끄러졌던 표면은 주름지고 푸석해져 있다. 거친 표면이 나를 밀어내는 듯했다. 이대로 내 몸이 햇볕 속으로 사라질까 두려웠다. 나는 초록을 찾고 싶었다. 그리고 그의 몸속에 스며들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믐달이 뜬 밤이었다.

그의 몰골이 차가운 달빛 아래에서 더 흉측해 보였다. 그 음산한 분위기가 그의 모습을 더 쓸쓸하게 만들었다. 하늘에 검회색 구름이 몰려왔다. 구름이 달빛을 가리자 일순간 세상이 컴컴해져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눈앞에 푸른빛의 연기가 피어올랐다.


내 몸이 똑똑 떨어지며 바닥에 부딪혔다. 나는 어느 천장에 붙어있었고, 물방울로 떨어지고 있었다. 바닥에 떨어진 물방울들은 작은 웅덩이가 되었고, 그리고 곧 큰 웅덩이를 만들었다. 그때, 누군가가 다가왔다. 그리고 나를 내려다보았다. 웅덩이에 얼굴이 비쳤다. 푸른 얼굴에 푸른빛 긴 머리카락이 일렁이고 있었고, 긴 속눈썹이 눈을 가렸다. 그 얼굴은 초록의 얼굴과 묘하게 닮아있었다. 그는 웅덩이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며 얇은 목소리로 주절거렸다.

“괜찮아 아가야, 아무도 널 괴롭히지 않을 거야. 넌 아무 아픔도 느낄 수 없어. 꼭꼭 숨어 있으렴. 세상 밖은 위험하단다.”

그가 손가락으로 수면을 건드렸다. 파문이 일었다. 물결이 점점 옅어지고 그의 얼굴이 다시 또렷이 비쳤다. 그리고 그는 웅덩이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손가락으로 따라 그리더니 물속에 손을 넣어 얼굴을 흐트러 놓았다. 내 몸이 그의 손등을 타고 또르르 굴렀다. 손등이 매우 차가웠다. 내 몸이 얼어버리는 것 같았다. 나는 순간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그가 눈을 크게 뜨며 주위를 살피고는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누구니!”

내 목소리가 그에게 들리는 걸까. 나는 조심스럽게 말을 했다.

“내 목소리가 들려?”

“그래, 누구니?”

“난 물이야.”

그는 웅덩이를 다시 바라봤다.

“내 아가의 방에 왜 들어온 거야?”

“아가가 누군데?”

그는 살짝 엷은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아가는 나의 자식, 나의 사랑, 나는 아가의 안에 있어. 우린 하나야.”

아가는 초록을 말하는 것 같았다. 이곳은 초록의 몸속이었다.

“초록을 말하는 거구나. 나는 아가의 진짜 모습을 찾고 있어. 아가는 어디 있니?”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는 입을 크게 벌리며 나를 향해 차가운 바람을 내뿜었다. 내 몸이 얼음으로 얼어버렸다. 그리고 그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내 아가는 만날 수 없어! 네가 이곳을 나간다고 하면 얼음을 풀어줄게.”

“난 단지 아가를 보고 싶은 것뿐이야. 그리고 어차피 난 사라지게 될 거야.”

“내 아가를 왜 보고 싶은데?”

“나는 세상에 있는 색깔들을 알아가는 중이야. 세상을 여행하고 있어.”


그의 긴 속눈썹이 팔랑이면서 커다란 눈동자가 드러났다. 눈동자는 천천히 한 바퀴 구르고 나를 매섭게 쏘아봤다. 그리고 그의 긴 머리카락이 나를 향해 물결쳤다.

더운 바람이 불어왔다. 얼어있던 나의 몸이 녹아 바람 따라 회오리쳤다. 바람은 나를 깊은 안쪽으로 밀어냈고, 난 작은 물방울이 되어 날아갔다.

좁고 긴 길이 엉켜있는 어지러운 길이었다. 긴 길을 뭉쳐서 눌러 담아 아주 오랫동안 버려둔 것처럼 길은 습한 냄새와 함께 악취가 났다. 까맣고, 끈적끈적였다. 이곳은 이미 썩은지 오래되어 아무도 살 수 없을 것 같았고, 길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이대로 초록을 찾을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나는 불안했다. 막다른 벽이 나왔다. 벽은 검은 진흙이 돼서 흘러내렸고, 그 너머로 공간이 보였다.


공간의 바닥은 뚫려 있었다. 아래는 깜깜했고, 깊이가 아득하게 느껴졌다. 바람 소리와 함께 차가운 바람이 위로 올라왔다. 그 가운데에 뿌리가 나있는 기둥 하나가 공중에 떠 있었다. 기둥은 꽤 높고 컸고, 밑의 뿌리가 얼마 남지 않은 채로 듬성듬성 끊겨있었다. 빛도 들지 않는 컴컴한 공간 속에서 홀로 떠 있는 기둥이 몹시 쓸쓸해 보였다. 그 모습이 초록과 닮아있었다.


나는 바람에 날아가 기둥에 맺혔다. 기둥은 딱딱하고 차가웠다. 그리고 아주 얕게 숨을 쉬고 있었다.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기둥은 아무 말이 없었다. 움직임도 없었다. 초록은 살아있는 걸까. 초록이 보고 싶었다. 나는 기둥을 따라 얕은 숨을 쉬었다. 한참이 지나자 아무런 감각이 들지 않았다. 아무 의지도 없었다. 초록을 찾고 싶은 마음도 사그라들었다. 가슴이 텅 비워진 듯했다. 가슴속 가장 밑바닥에 마음이 한 겹 남아있었다. 마지막 남은 마음을 나는 밖으로 뱉어냈다. 그리고 한마디의 말이 함께 흘러나왔다.

“사랑받고 싶어.”


위로 하얀 빛이 보였다. 나는 하얀 빛을 한참 올려다봤다. 그리고 꿈을 꿨다.

햇빛에 반짝이는 초록의 머릿결, 초록의 머리에 연분홍 꽃잎이 날렸다. 초록은 꽃나무 한 그루 같았다. 수많은 색깔들이 초록을 바라보며 예쁘다고 말했다. 초록은 기쁜 미소를 지으며 고운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향긋한 꽃냄새가 세상에 퍼져나갔다. 세상이 밝고 따뜻해졌다.


‘툭’하는 소리에 나는 잠에서 깼다. 초록의 머리카락과 함께 나는 아래로 떨어지고 있었다. 위로 초록의 얼굴이 보였다. 초록은 여전히 밤하늘에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밤하늘에 그믐달이 무심히 기울었다. 내 몸이 바닥에 부딪혀 부서졌다. 곁에는 초록의 갈빛 머리카락들이 바스락거리며 뒹굴었다.




빨강.


한낮에 불꽃이 타올랐다. 나는 불빛에 이끌렸다. 화려한 불빛에 시선을 뗄 수 없었다. 그가 나를 유혹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를 끌어당겼다. 반짝이는 불빛 따라 내 몸이 반짝였다. 화려한 불꽃이 내 몸에 들어와 타올랐다. 그가 높이 타오를수록 나는 가슴이 벅차올랐고, 세상이 너무나 아름답게 느껴져서 어떤 불행도 이 순간을 비집고 들어오지 못했다. 다른 것은 보이지 않았다. 세상에 그와 나 오직 둘뿐이었다. 어쩌면 그 매혹적인 불꽃속으로 세상의 모든 존재들이 뛰어들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와 나 오직 둘만 세상에 남은 것이다. 세상의 모든 존재들이 이 불꽃속에서 불꽃으로 새롭게 피어나 함께 춤을 추고 있다. 그는 나를 새롭게 깨우는 불꽃이었다. 나는 그의 곁에서 내가 완전해지는 특별함을 느꼈다. 나를 감싸고 있는 그의 뜨거운 품에서 나는 아름다워졌다.


어떨 땐 불꽃이 사그라질 때가 있는데, 그 불꽃이 일순간 사라질 땐 나는 두려운 공포를 느꼈다. 내 몸이 조각이 나 조각 난 조각들이 나의 조각난 조각들을 찌르고 서로 소멸시키는 죽음이었다. 그러다가 다시 불꽃이 피고 타오르면 나는 죽어 있던 숨을 한꺼번에 들이마실 수 있었고, 내 가슴을 다시 뛰게 했고, 나를 세상 높이까지 날아오르게 했고, 가장 높은 곳에서 아름답게 빛나는 특별한 존재로 만들었다. 나는 이 황홀한 순간을 잊을 수 없어 그에게서 절대 벗어날 수가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황홀함을 향한 나의 집착은 점점 커져갔고, 커져가는 욕망과 함께 나의 마음도 조금씩 바뀌었다. 불꽃이 여느 때처럼 아름답게 타오르고 있어도 전과 같은 감동의 기분을 온전히 느끼지 못했고, 불꽃이 꺼지는 때를 나는 미리 두려워하면서 불꽃의 모양을 매 순간 살폈다. 불꽃이 흔들리고 작아질 땐 화들짝 놀랐다가 바람에 잠깐 흔들린 거라는 걸 알고는 다시 마음을 놓았고, 그리고 어떨 땐 불꽃의 색깔이 다르게 보이기도 했는데 불꽃의 붉은색이 차차 옅어지더니 담갈색으로 변했고, 이내 불투명한 노란색으로 바뀌더니 흐릿해지는 것이었다. 흐릿한 색깔을 바라보며 나는 어지럼증을 느꼈고, 불꽃이 붉은색으로 되돌아오자 나는 다시 기뻐하며 안심했다. 나는 불안한 마음이 커질수록 불꽃이 더 크게 더 높이 타오르길 바랐다.

그의 힘은 세상에서 가장 강해 보였다. 나를 매 순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는 나를 가장 아름답게 만들어내는 존재였다. 나는 그의 곁에서 가장 특별한 존재가 될 수 있었다. 그가 아니면 세상에 의미가 되는 건 없었다. 나는 그와 영원히 함께 하고 싶었다. 다른 색깔을 알고 싶은 마음도, 세상을 여행하고 싶은 마음도 잊혔다. 그가 나의 세상이었다. 그가 내게 온 순간 나의 세상은 죽었고, 그의 세상에서 나는 새롭게 깨어났다.


그는 봉오리처럼 오므려진 몸을 해를 향해 천천히 펼쳐내고 팔을 벌려 불꽃을 활짝 피어냈다. 불꽃이 해를 받아 빛깔이 더 선명해졌고, 더 커졌고, 더 힘차게 움직였다. 커다란 불꽃이 바람따라 너풀너풀 춤을 추며 주변을 찬란하게 빛냈다. 그 모습은 밤에 특히 더 매혹적이었다. 어둠 속에서 환하게 빛나는 붉은 빛이 주변을 따뜻하게 밝히며 세상의 두려움을 모두 잊게 해줄 거라고 유혹했다. 밤하늘 높이까지 타오르는 불 끝에 나는 금방 매료되었다. 나는 불 끝을 한참 바라봤다. 내 몸이 한 겹 벗겨진 듯 가벼웠다. 그리고 몸이 날아올라 불꽃속으로 던져졌다. 뜨거운 불꽃이 내 몸에 일렁였다. 그의 몸이 춤추는 대로 내 몸도 따라갔다. 그의 품은 더 뜨겁게 타올랐다. 내 몸도 뜨겁게 끓어올랐다. 우린 서로를 매만지고 몸을 뒤섞으며 밤하늘 높이까지 올라갔다. 불의 끝에 다다랐을 때 나는 부글부글 요동치며 하얀 연기를 뿜어냈다. 내 몸이 하얀 연기가 되어 밤하늘 위로 흩어졌다. 나는 그를 내려다봤다. 그는 봉오리처럼 몸을 오므리고 있었다. 그의 불꽃이 어느새 사그라졌다. 세상이 컴컴해졌다. 나는 텅 빈 밤하늘에 홀로 있었다.


작가의말

나를 발견하는 시간이 되길 바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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