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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나은의 서재입니다.

물방울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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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나은
작품등록일 :
2021.09.13 19:09
최근연재일 :
2023.09.12 20:20
연재수 :
11 회
조회수 :
850
추천수 :
5
글자수 :
53,399

작성
21.09.21 10:00
조회
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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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글자
9쪽

5. 보라

DUMMY

바닥에 하얀 꽃들이 떨어져 있었다. 위에서 하얀 꽃잎과 꽃들이 계속 내렸다. 한 겹, 두 겹 쌓여 바닥이 하얗게 물들었다. 바삭 마른 꽃들 위로 이제 막 떨어진 꽃들이 풍성하게 자리했다. 그 가운데에 그가 서 있었다. 그는 길고 가는 두 다리를 유연하게 꼬고, 바람결을 따라 부드럽게 춤을 추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완성된 보석처럼 뾰족하게 다듬어져 있었고, 얼굴을 움직일 때마다 여러 빛깔로 영롱한 빛이 났다. 세상의 화려한 색깔을 모두 담은 빛이었다. 그의 뾰족한 얼굴선이 차가워 보였지만, 나는 곧 그의 영롱한 빛깔에 매료되어 그가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긴장이 되었다. 그의 몸 위에 닿아 있기가 부담되었다. 내가 완벽한 몸 위에 붙은 작은 티라도 된 듯 괜히 잘못을 짓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잘못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할 것 같았다.


그의 몸에는 하얀 꽃들이 활짝 피어있었다. 하얀 꽃들 사이로 보랏빛 열매가 탐스럽게 열려있었다. 때로 그는 가느다란 팔을 길게 뻗어 가장 빛깔이 진한 열매를 하나 따서 조그마한 입으로 가져가 한 입씩 베어 먹었다. 그리고 열매를 머금으며 황홀한 표정을 지었고, 열매를 삼킨 뒤엔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었다. 그는 혼자서도 행복하고, 풍요로워 보였다.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굳이 그가 필요로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의 아름다움을 더욱 돋보이게 할 환한 햇빛과 더 많은 칭송과 아껴주는 사랑일 것이다. 그의 주변엔 그를 감탄하며 칭찬하는 존재들이 많지만, 그의 보랏빛 열매를 탐하는 존재들도 많았다. 열매를 탐하는 그들은 배고픈 존재들이었다. 그중에서 가장 그를 성가시게 한 건 몸이 작달막하고 악취가 나는 갈색 집단이었다. 갈색 집단은 그의 열매를 함부로 파먹기도 하고, 고약한 냄새를 풍기기도 하고, 그리고 끈적거리는 갈색의 흔적을 남겨 그의 몸을 더럽히기도 했다. 그들이 지나가고 나면 그의 몸은 악취를 풍기는 초라한 꼴이 되었고, 고귀한 보석은 가치를 잃었다. 그러고 나서 그는 모두가 잠든 밤에 홀로 흐느껴 울었다. 세상에 버림이라도 받은 듯한 애절한 울음이었다.


그가 완벽한 모습을 되찾을 때까지는 꽤 오랜 날이 걸렸다. 그 후로 그는 매 순간마다 감각을 날카롭게 세웠는데 작은 소리에도, 작은 냄새에도, 작은 바람에도, 작은 빛에도, 열매의 작은 흠에도 변화를 놓치지 않으려 했다. 그는 자신의 아름다움을 지키기 위해 세상의 모든 존재들로부터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나는 그의 가냘픈 어깨 위에 붙어 있었고, 그의 경직된 어깨가 내 몸을 더 긴장시켰다.

뾰족한 그의 얼굴이 점점 더 날카롭게 변해갔다. 보석 같던 얼굴이 점차 길쭉해지더니 머리끝이 칼날처럼 날카로워져 태양에 번뜩였다. 화려한 빛깔을 펼치던 그의 영롱한 빛은 사라져 버렸다. 날카로운 칼날이 햇빛에 번뜩일 때마다 나는 정신이 아찔했다.

그의 팔과 다리 그리고 꽃과 열매 사이사이로 가시가 돋아났다. 열매 하나도 허락하지 않을 거라는 듯 그는 뾰족한 가시를 밖으로 바짝 세웠다.


가시는 열매들을 모두 지켜냈다. 열매를 탐하는 존재들이 함부로 다가오지 못했다. 그는 혼자서 여유롭게 열매를 따 먹었다. 먹어도 먹어도 모자람 없이 열매가 주렁주렁 열렸다. 하지만 그는 혼자서 많은 열매를 다 먹을 수 없었다. 열매들이 점점 그의 몸에 가득해졌다. 영글어 무거워진 열매들이 바닥으로 떨어졌고, 결국 많은 열매들이 서로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우수수 떨어졌다. 바닥에 떨어져 짓물린 열매들은 빠르게 썩어갔다. 그리고 썩은 냄새를 풍겼다. 그를 칭송하던 존재들도 모두 사라지고, 그의 곁으로 아무도 다가오지 않았다.


나는 그의 어깨 위에서 불안에 떨었다. 마른 꽃과 썩은 열매들이 뒤섞인 바닥으로 떨어지지 않길 바랐다. 나는 깨끗하고 고결한 그의 몸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래서 긴장을 하며 그의 어깨에 바짝 붙었다. 하지만 품위 있는 모습을 결코 잃지 않던 그가 바닥에 너부러진 썩은 열매들 탓에 다리를 이리 꼬고 저리 꼬며 자세를 자주 고쳤다.

그는 자신의 몸이 더럽혀지는 것에 몹시 민감했지만 그 자리를 절대 떠나지 않았다. 나는 궁금했다. 그는 더러운 것을 이처럼 불편해하면서 왜 다른 곳으로 떠나지 않는지, 왜 이 자리에 있기만을 계속 고집하는지.

나는 결국 그의 몸부림에 떨어져 가시 사이사이로 흘러내려가 활짝 핀 하얀 꽃 속으로 깊이 빠져 들어갔다.


보라의 몸속은 보라의 겉모습처럼 아름다웠다. 맑고 투명한 보석들이 활짝 핀 꽃을 그려 놓은 듯 진열되어 있었다. 보석들이 서로 반사되어 무지개 빛깔로 가득 반짝였다. 내 몸도 보석처럼 반짝였다. 나는 빛나는 보석이라도 된 듯 마음이 우아해지면서 품위를 지니고 싶었다. 많은 보석들 속에 내 모습이 비쳤다. 보석 안에 비친 수많은 내가 나를 둘러쌌다. 나는 아름답게 빛나고 있는 나의 모습들을 보면서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순간 무지개 빛깔들이 내 안에서 물결쳤다. 빛깔은 하나하나 또렷해져 내 몸을 더 맑고, 깨끗하게 만들었다. 나의 모습은 고결하고, 신성했다. 내가 세상에서 작은 존재일 뿐이라는 것은 믿기 힘든 일이었다. 내 안에는 그보다 더 초월적인 힘이 깃들어 있었다. 나는 가볍게 날아올라 찬란한 빛깔을 펼쳐내어 세상을 무지갯빛으로 만들 수 있었다. 세상이 나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완벽한 존재였다.


보라의 생각의 소리가 흘러나와 빛을 흔들었다. 무지갯빛들이 잔물결처럼 진동했다. 보석 안에 비친 내 모습들이 무지개 물결에 흐려졌다.

“보석 같은 나의 얼굴, 화려한 나의 빛깔, 활짝 핀 하얀 꽃, 달콤한 열매, 길고 고은 팔과 다리, 우아한 몸짓, 날 환히 비추는 햇빛, 날 찬사하는 존재들...... 나는 가장 완벽했어. 모두가 날 부러워했어. 세상으로부터 나의 가치를 높이 인정받았어. 그리고 많은 사랑을 받았어. 나는 시련과 고통에도 품위를 잃지 않았어. 나를 탐하고, 더럽혀도 나는 그들을 해하지 않았어. 나의 명예를 지켰어. 내가 지금껏 지켜온 나의 자리, 나의 땅, 내가 태어나고 자라난 나의 집, 나의 존엄, 나의 자존심은 내 목숨보다 더 소중해. 내 몸이 사라져도 그것들은 세상에 영원히 살아 숨 쉴 거야. 나는 나의 자리를 한 발짝도 벗어나지 않을 거야. 한순간 더럽혀질지라도 나는 절대 포기하지 않고 지켜낼 거야.”


보라의 소리가 사라졌다. 보석에 비친 내 모습이 다시 아름답게 빛났다. 나는 영원히 이 자리에 머물고 싶었다. 하지만 내 몸은 그곳을 벗어나 보라의 몸속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수많은 무지갯빛을 스쳐갔다. 보랏빛 열매가 보였다. 내 몸은 멈추지 않고 열매 속으로 스며들었다. 질깃한 보라색 껍질을 뚫고, 말랑한 보라색 속살을 지나 연보랏빛의 씨앗을 마주했다. 나는 씨앗에 달라붙었다. 씨앗은 보드랍고, 단단했다. 그리고 따뜻했다. 보라를 만난 후로 처음 따뜻함을 느꼈다. 하지만 나는 씨앗 속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씨앗은 아주 강하고 질긴 껍데기로 자신을 덮고 있었다. 무엇도 자신의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부서지거나 깨지지거나 하는 일은 절대 가능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어떤 모양으로도, 어떤 색으로도, 어떤 성격으로도 변할 수 없다는 고집을 담고 있었다. 그 고집이 씨앗의 몸을 뜨겁게 달구었다.

그리고 씨앗은 혼잣말로 속삭이고 있었다. 높고 아름답지만, 날카로움이 서린 보라의 목소리였다.


“나의 씨앗은 세상에 남아 아름답게 자라서 빛나는 보석이 될 거야. 강하고 단단한 보석이 돼서 오래오래 세상에 머물 거야. 그리고 열매를 맺고, 몸이 죽어도 나는 새로운 씨앗 속에서 영원히 살아 숨 쉬어. 나의 씨앗은 세상에 남아 아름답게 자라서 빛나는 보석이 될 거야. 강하고 단단한 보석이 돼서 오래오래 세상에 머물 거야. 그리고 열매를 맺고, 몸이 죽어도 나는 새로운 씨앗 속에서 영원히 살아 숨 쉬어. 나의 씨앗은 세상에 남아 아름답게 자라서.......”


씨앗은 혼잣말을 멈추지 않았다. 같은 말을 끝없이 반복했다. 어느새 씨앗의 말이 내 몸에 깊게 기억되었다.


하얀 빛이 보였다. 고단한 몸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날카롭게 서 있는 나의 감각이 솜털처럼 부드러워졌다. 나는 긴장이 풀렸다. 부릅뜬 눈을 살며시 감았다. 그리고 깊은 잠을 잤다.


작가의말

나를 발견하는 시간이 되길 바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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