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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시(錄始)의 서재

그래서 현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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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2.08.05 09:03
최근연재일 :
2022.10.22 09:02
연재수 :
47 회
조회수 :
1,688
추천수 :
47
글자수 :
216,165

작성
22.10.10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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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UMMY

만풍산 입구 먹거리 골목까지 내려오는 내내 은서는 말이 없었다.

야문과 수니홀, 다른 이귀들은 조용히 따라왔지만, 그들은 산의 정취에 흠뻑 빠져 계속 두리번거렸다.


“무슨 생각하세요?”

“천사의 정체.”

“천사요?”


은서는 천천히 걸으며 가방을 쓰다듬었다.

“파이널 헌터 말이야. 아무래도 억울함을 하소연하려던 거 같아. 천사는 고상한 척하는 사람들이고, 그들을 없애는 사신은 작가 자신이겠지.”

“작가가 하고 싶은 일을 흑치가 하고 있었네요.”


“심지아, 상상계의 세계가 안전해지려면 작가가 행복해야 해.”

“행복···? 실증계에서는 행복의 기준이 뭐예요?”


은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거창한 건 아니야. 자기 목숨에 애정을 가질 만큼? 그냥저냥 만족할 만큼은 되어야 할까?”


‘전설의 근원’은 원대함이 썼으니, 그가 행복해야 하는 건가?

행복해지면 소설을 이어 쓰려나? 바라는 일이 잘 풀리면 우리 세계에도 애정을 가져줄까.


“참, 작가를 찾았어요. 원대함이 이중인이었어요.”

나는 은서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대단한데? 벌써 작가를 찾다니. 그 사람은 누구야?”

“짱짱 만화방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살아요. 오전에는 초고리 편의점에서 일하고, 저녁에는 극단 장터에 가 있어요. 배우는 아닌 것 같던데.”


“자세히도 알아봤네. 소설을 다시 쓴대?”

“그게···. 기억해내기는 했지만···. 유치찬란한 클리셰 범벅이라고 했어요.”


“하하하!”

은서는 고개를 뒤로 젖히고 큰소리로 웃었다. 여간해서 웃음을 그치지 못했다.


한참 지나서야 배를 쓰다듬으며 간신히 입술을 오므렸다.

“굉장히 오래전에 썼나 보다. 그렇게 말할 정도면 지금은 꽤 글을 쓴다는 건데.”


“십 년도 더 지났다고 했어요. 아! 나주연하고 고등학교 같은 반이었어요. 그 사람에게 보여주려던 거래요.”

“뭐?”

은서는 외마디 소리를 내더니 콧잔등을 구겼다.


“그럼, 소설 이어 쓰지 않을 거야. 누구라도. 그때로 돌아갈 수 없으니까.”

“안 돼요! 그럼 우리 세계는 사라진다고요!”

은서는 대답 대신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이 급해졌다. 빨리 방법을 찾아야 해.

원대함을 모른 척하던 나주연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녀를 바라보던 그의 눈빛도 기억났다.


두 사람의 관계가 계속 불편하면 소설 생각은 하지 않겠지.

하지만, 만약 사이가 좋아진다면?


“은서님, 생각났어요. 그 스프링 책을 원대함에게 주는 거예요. 약도와 아이디어 노트까지 받으면 쓰고 싶어질지 몰라요.”

나는 흥분해서 소리쳤다.


“막연한 기억과 직접 보는 건 다르니까요. 자기가 쓴 거니까 마음이 달라질 거예요.”

“그렇게 잘 풀리면 좋겠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입안으로 스며들 듯 작아졌다.


“그래도 해봐야겠지. 어떻게 하려고?”

“나주연에게 암시를 걸게요. 그 소설, 원대함이 쓴 것이니 갖다 주라고요.”

은서가 며칠 전 스프링책에 대해 물었으니, 나주연은 암시를 자연스럽게 받을 것이다.


“문제는 그걸 보고 작가가 움직일 것인가 구나.”

“하나라도 희망을 가져야죠. 우리 세계의 운명이 걸린 일이니까요.”


현재안의 집에 있던 약도를 가져와야겠어.

수니홀을 돌아보자, 그는 기다렸다는 듯 내게로 날아왔다.

“뭐야? 재미있는 일 있어?”


“종이 한 장을 가져다줘. 어디 있는지는 고충만이 알 거야.”

“좋아. 그렇지 않아도 기다렸어. 드디어 할 일이 생겼네!”

수니홀은 이귀들을 데리고 앞장서 갔다. 야문도 그 뒤를 따라갔다.


다음은 최소희의 다락방에 있는 상자 차례였다. 그것은 이귀들이 움직일 수 있는 크기가 아니었다.

종이 한 장이야, 바람에 날리는 전단지처럼 보이겠지만, 신발 상자가 떠다닐 수는 없지 않은가.


최소희에게도 암시를 걸까? 아니면 지새늬에게?

앞뒤 맥락 없이 갑작스러운 암시가 들어가면 사람들은 혼란스러워할 것이다. 기억에 오류가 생기거나, 공백이 생기면 그걸 메꾸기는 더 어렵다.


너무 갑자기 단서가 모이면 작가도 이상하게 생각하겠지? 시간차를 두고 움직여야겠어.

우선 자연스럽게 나주연을 설득하는 것부터.


‘상자도 정리해놔야겠어. 다락방에서도 눈에 잘 띄는 곳으로 옮겨놔야지.’

어렵게 생각해낸 계획이 성공하기를 바라며 산 정상을 올려다보았다.


*


만풍산 입구의 먹거리 골목은 대형 찜질방 건물 뒤에서 끝났다.

은서는 택시를 타고 돌아가고, 나는 앞으로의 계획을 생각하며 천천히 떠다녔다.


원대함이 소설을 이어서 쓸 거라 생각하니 뿌듯했다.

드디어 우리 세계가 안전하고 평화로워질 거야.


한편으로는 차오름이 걱정되었다.

남은 무기를 얻기 위해 싸우고, 다치고 지금보다 훨씬 어려운 시련을 겪을 것이다. 차원침입군과의 마지막 결투도 치러야 한다.


‘많이 힘들겠지.’

가슴이 따끔거려 이를 꽉 물었다.

‘그래도 끝내야 해. 새로운 시작을 위해서.’


찜질방 뒤편을 정처 없이 떠다니는 데, 작은 포장마차에 낯익은 사람이 앉아있었다.

혼자 술병을 기울이는 남자는 극단의 한다발 단장이었다. 천막을 걷어놓아 그의 모습이 훤히 보였다.


그의 목소리가 스승님과 많이 닮았는데···. 스승을 생각하니 지나칠 수 없었다.

이렇게 환한 낮에 혼자 앉아서 술을 마시다니.

‘극단에서 여기까지 무슨 일이지?’


접시에는 가시가 드러난 고등어구이가 있었다. 소주는 이미 한 병을 비웠고, 두 번째 병도 반쯤 마신 뒤였다.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여기서는 투명한 사념체이기에 마음 놓고 관찰할 수 있다.

한다발의 머리가 전등 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머리카락은 스승님과 다르구나.


달빛사원의 스승을 생각하는데, 그의 생각이 들렸다.


‘아휴, 그놈의 성질.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지만···.’

그는 소주 한 잔을 들이마셨다.


‘월세 내고, 단원들 월급 주면 극단 유지하기도 빠듯한데, 어디서 돈이 나오냐고.’

빈 잔에 술을 따르는 그의 손을 물끄러미 보면서 이유를 물었다.


‘누가 힘들게 하나 보죠?’

“누군 누구야. 마누라지.”

잠꼬대처럼 그가 대답했다.


아하! 달빛사원에서 배운 대화술이 동물과 식물에게만 통하는 줄 알았는데, 이쪽 세상에서는 취한 사람에게도 통하는구나.

‘속엣 말을 털어놓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구나.’


“할 수 없지. 그래도 이만하기 다행이지. 그럭저럭 지내긴 지내잖아.”

‘다른 기획을 찾아보세요. 극단에서 할 만한 거 없나요?’

내가 묻자 그는 잔을 내려놓고 허공을 바라보았다.


“직장인반 만든 거? 남들은 다 반대해. 귀찮고 힘들고 돈도 안 된다고.”

그는 마른 입술을 소주로 적셨다.


“그래도 기회를 주고 싶어. 끼와 열정이 있는데도 못하는 사람들 많잖아?”

그는 남은 소주를 한 번에 털어 넣었다.

취했어도 목소리는 여전했다. 저음의 굵은 목소리.


‘사람들이 말이야, 오십만 되어도 뒷방 늙은이 취급하잖아? 평균수명은 팔십이 넘는데. 열정은 젊은이 못지않다고!’

이번에는 말을 꺼내지 않았지만, 그의 생각이 또렷이 들렸다.


‘어쨌든, 연습을 견딜 수 있는 사람만 남을 테니, 그 정도 열정과 체력이면 되는 거 아냐?’

그는 내가 보이는 듯 나를 향해 손가락을 펼쳤다.


‘올해는 지원금도 못 받았어. 진짜 욕 나온다니까. 심사위원 후배라고 실적 하나 없는 극단이 선정되다니 말이 돼?’

‘말이 안 되죠.’


‘거기 작품 봤어? 나 참, 어이가 없어서. 아니꼬우면 출세하라잖아. 괜히 나온 말이 아니라고.’

그는 두 번째 병을 다 비웠다. 다시 한 병을 주문하려 손을 들기에 재빨리 그를 말렸다.


‘오늘의 공연. 단원들이 기다릴 텐데.’

암시를 주자 그가 벌떡 일어났다.


“그렇지. 모니터링 해야지. 오늘은 내 차례야.”

계산한다고 비틀거리다가 지갑을 떨어뜨렸다. 그래도 그는 넘어지지 않고 잘 걸었다.


이쪽 세계에서도 몸이 있으면 도와줄 텐데, 안타까웠다. 단장을 돕고 싶었다.

‘나주연도 직장인반에 들어가면 좋겠다.’


응? 그거 좋은 생각인데? 자연스럽게 원대함과 가까워질 거 아냐?


*


만풍산에서 나주연의 집으로 가다 보니 초고리 편의점 앞이었다. 놀라서 눈이 크게 떠졌다.

‘이게 언제 여기로 옮겨왔어?’


아닌가. 내가 어느 사이에 여기까지 왔어라고 물어야 하나.

쉬고 싶다는 생각이 나를 오두막으로 이끌었나 보다. 하지만 지금은 들어갈 수 없었다.


편의점 앞에 서니 유연한이 마음으로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정령님, 제발 돌아오세요. 모습을 보여 달라는 얘기는 절대 하지 않을게요.’


그의 방은 반지하라 창문이 땅바닥과 붙어있었다. 쪼그려 앉아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는 그림 앞에 서서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였다.


‘정령님, 부디 돌아오세요.’

그는 가지런히 모은 두 손을 흔들었다.


나를 두고 정령이라니. 진짜 정령의 후손은 만화방에서 알바하는데···.

초췌한 모습이 어쩐지 불쌍했다. 오늘은 몸도 피곤하고, 집주인이 저렇게 간절히 바라니 돌아갈까?


아니야, 나를 알아보면 골치 아파져. 너무 위험해.

그럼 어디로 가지?


나주연 집으로 갈 것이냐, 유연한의 오두막으로 돌아갈 것이냐. 그것이 문제구나.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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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푸르니와의 인연 22.10.09 22 1 11쪽
17 새로운 시도 22.10.08 23 1 11쪽
16 달빛사원의 소식 22.10.07 21 1 11쪽
15 소극장 마중 22.10.06 23 1 10쪽
14 기억 되살리기 22.10.05 22 1 9쪽
13 이중인의 정체 22.10.04 22 1 8쪽
12 아이디어 노트 22.10.03 25 1 10쪽
11 약도가 있는 방 22.10.02 23 1 11쪽
10 새로운 만남 22.10.01 25 1 10쪽
9 도우미들 22.09.30 28 1 10쪽
8 노하우 22.09.29 28 1 11쪽
7 다른 단서를 찾아 22.09.28 29 1 10쪽
6 특이한 인연 22.09.27 34 1 12쪽
5 정류장의 이귀들 22.09.26 41 1 9쪽
4 이상한 남매 22.09.25 47 1 11쪽
3 스프링 책의 주인 22.09.24 50 1 9쪽
2 작가를 찾아서 22.09.23 61 1 11쪽
1 프롤로그 – 파견의 주술 22.09.22 172 1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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