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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시(錄始)의 서재

그래서 현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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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2.08.05 09:03
최근연재일 :
2022.10.22 09:02
연재수 :
47 회
조회수 :
1,682
추천수 :
47
글자수 :
216,165

작성
22.10.03 15:00
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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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쪽

아이디어 노트

DUMMY

금은비가 나온 집은 스프링 책이 있던 곳에서 상당히 멀었다.

놀이터에서 병원까지 가는 거리만큼 서쪽으로 한참 흘러갔다.


마당 넓은 이 층 주택이어서 여러 명이 모여 사는 줄 알았다. 나주연의 원룸처럼.


금은비는 곧바로 자신이 나온 곳으로 들어갔다. 그녀 역시 다락방의 먼지 쌓인 상자에서 나왔다.


“이 먼지 좀 봐. 콜록콜록.”

그녀는 일부러 크게 기침하며 상자를 가리켰다. 원래는 신발 상자였는지 운동화 그림이 보였다.


“뭔지 모르겠어요. 지저분한 쪽지에, 낙서도 있고, 수첩도 있어요.”

그녀는 모서리가 닳은 수첩을 내밀었다.

수첩에는 ‘전설의 근원’ 주요 등장인물의 이름, 외모, 성격 등이 간단히 적혀있었다.


‘이건 작가가 쓴 설정집이야.’

나는 조그맣게 휘파람을 불었다.


상자에 담긴 수첩과 쪽지, 노트가 소설의 밑그림이라도 실제 우리 세계와는 조금 달랐다.

차오름도 초록색 머리에 나이도 스물한 살이라고 쓰여 있었다.


시작부터 끝까지 대략적인 설명이 있었고, 사건도 여럿 있었다. 이미 일어난 사건도 있지만, 아직 일어나지 않은 사건도 많았다.

‘소설이 이렇게 흘러가는구나!’


마지막은 해피엔딩이었다.

차오름은 진정한 용사가 되고, 구하라는 새로운 차원관리자가 된다. 두 사람은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고 뜨겁게 키스한다.


가슴이 콩닥거렸다.

뜨거운 키스라니···. 이래서 내가 차오름에게 가까이 못 간다니까.


괴물 그림도 몇 개 있지만, 우리 세계에는 없는 것이었다. 앞으로 나타날 시련인가? 이 괴물을 차오름이 무찌르고?


쪽지가 마구 섞여 한눈에 흐름을 읽기는 어려웠지만, 대략적인 전개가 머릿속으로 들어왔다.


밑바닥에 깔린 종이를 보니 소설의 제목도 ‘전설의 근원’이 아니었다.

“차오름의 원대한 모험?”


뭐지? 이 낯익은 단어는? 아주 익숙한데? 왜 갑자기 원대함이 생각나지?


“이건 작가의 것이에요. 이걸 쓴 사람이 누구인지만 알면 돼요.”

나는 종이를 가지런히 상자에 담았다.


“금은비님, 이걸 누가 썼는지 알아요?”

“으음···. 여기 사는 사람은 아닐 거예요. 글 쓰는 사람은 없던데···.”

“혹시 다른 단서가 있나요?”

“책이 엄청 많은 곳이 있어요.”


금은비는 햇빛이 잘 드는 서재로 우리를 안내했다.

소파와 책상으로 아늑하게 꾸며진 서재지만, 오래 묵은 종이 냄새가 섞여 있었다.


“아휴, 재미없는 책만 잔뜩 있어요. 이거 다 훑으려면 열흘도 모자랄 거예요.”

그녀는 한숨부터 내쉬었다.


아래층 주방에서 누군가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혹시 작가인가?’

우리는 곧장 소리 나는 곳으로 날아갔다.


한 여인은 야채를 씻고, 한 여인은 그릇을 달그락거렸다. 뒤돌아서서 그릇을 만지는 여인은 어디선가 본 듯했다. 뒷모습이라도 눈에 익었다.

‘저 사람은?’

갑자기 심장이 빨리 뛰었다.


여인이 냄비에 재료를 넣고 돌아섰다.

‘최소희? 지새늬의 새어머니? 아니···. 원대함의 어머니?’


무언가 내 안에서 꿈틀거렸다.

‘글씨를 확인해야겠어.’

현재안의 집에서 본 약도와 다락방 수첩의 글씨는 한 사람의 것이었다.


나주연의 방에서 나온 것은 출력물이라 글씨체를 확인할 수 없었다. 출처도 애매해서 작가를 찾는 단서로는 맞지 않았다.


최소희가 글씨를 쓰게 만들면 된다. 나는 그녀에게 암시를 걸었다.

‘요리의 재료를 쓰게 하는 거야.’


그녀는 식탁 위의 펜과 메모지를 들고 글자를 쓰기 시작했다.

“뭐 빠진 것은 없나? 나이가 드니 정신이 오락가락하네.”

그녀는 골똘히 생각하며 자신이 만드는 요리의 이름과 필요한 재료와 양념을 적어 넣었다.


메모지 두 장을 채우는 동안 그녀는 가끔 숨을 몰아쉬었다. 다 쓰고 나서는 양손을 주물렀다.

지새늬의 병실에서는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어딘가 아파 보였다.


원대함이나 지새늬가 알고 있을까. 누군가 옆에서 도와줘야 할 텐데.


“심지아님, 뭐 하세요?”

금은비가 내 등을 건드렸다.

“글씨체를 확인하려고요.”


최소희는 작가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지새늬의 방을 찾아봐야겠어.

지새늬도 아니라면 원대함일 확률이 높아진다.


다락방에 살림을 올려놓은 다른 사람이 있을 수 있지만, 원대함의 필체도 아니라면 그때 다시 찾아야지.


“지새늬의 방으로 가죠.”

“어? 여기 사는 사람 이름을 어떻게 아세요?”

“어쩌다 알게 되었어요.”


“아후, 일하는 사람들 얘기 들었는데 정말 인정머리 없대요.”

금은비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그녀는 이 층 가장 안쪽 방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방 하나가 나주연의 원룸보다 컸다. 화려한 장식과 아기자기한 소품으로 꾸며졌는데, 주로 연보라색이었다.


금은비와 고충만이 방을 구경하는 사이, 나는 책상을 뒤적였다.

앞부분 몇 장만 쓰고 덮어놓은 다이어리가 보였다. 마지막 기록은 한 달 전이었다.


‘난 주인공이라고! 왜 자꾸 아니라는 거야? 알지도 못하면서.’


‘오빠랑 언니는 호주로 가더니 연락도 없다. 아빠한테는 연락하면서···. 나한텐 관심도 없어. 그러라지! 누가 아쉽대?’


‘새엄마라고 잔소리하는 거 정말 싫다. 그 아들도 허수아비 같이 생겨서는. 그래도 놀려먹는 재미가 있어.’


글씨를 본다는 것이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병실에서 본 지새늬의 표정이 떠올라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과연, 딱 어울려.


중요한 것은 그녀 역시 작가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원대함의 필체를 확인하는 일만 남았다.


“고충만님, 금은비님. 난 다른 사람을 확인하러 가야겠어요. 각자 나온 곳에서 단서가 더 있는지 살펴봐요. 나중에 놀이터에서 만나죠.”

“알았어요. 하지만, 그 놀이터 너무 먼데···. 여기는 멋진 그림도 없어서 너무 피곤해요.”


“바닷가 오두막 비었다니까.”

고충만이 웅얼거렸다.

금은비가 눈을 흘겼지만, 그는 모른 척 입맛을 다셨다.


*


원대함이 집에 있으려나.

그의 집이면서 내 오두막이 있는 큰솔하우스로 향했다.


허공을 떠가면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사방이 어두운데, 오늘도 구름이 달을 가리고 있었다. 밤마다 하늘이 흐려 조바심이 났다.


원장님이 기다릴 텐데···. 다른 원로들도 소식을 기다릴 것이다.

걱정 반 기대 반이려나? 아니면 언제나처럼 카드 게임을 하며 즐겁게 보내시려나.


소설의 내용과는 상관없이 원로들끼리 사이가 좋았다. 우리 세계가 평화로운 이유 중의 하나였다.


초고리 편의점에 다다르니 야외 데크에 원대함이 앉아있었다. 탁자에는 캔맥주 네 개와 과자 한 봉지가 놓였다.


그와 마주 앉은 사람은 엄청난 거구이므로 뒷모습만으로도 누구인지 알아보았다. 현재안인지 현재밖인지, 짱짱만화방의 붙박이.


‘저분은 아침은 컵라면, 점심은 샌드위치, 저녁은 삼각김밥일 걸?’

만화방에서 은서는 웃으며 말했지만, 그는 삼각김밥이 아니라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현재안과 원대함이 아는 사이였어?’

나는 그들의 대화가 궁금해 빈 의자에 내려앉았다.


“아참, 내 방에 귀신이 사나 봐. 이왕이면 처녀 귀신이 좋은데, 예쁘고 착한.”

현재안이 싱글거리며 어깨를 들썩였다.


“착하면 귀신이 되었겠어?”

“왜? 진짜 귀신이면 부탁해볼게. 너 시나리오 딱 붙으라고.”


현재안의 말에 원대함은 빈 캔을 찌그러뜨렸다.

“됐다. 가망 없어.”


“또 떨어졌냐? 떨어지는 거 말고 붙는 것 좀 해봐. 본드 한 번 해 볼텨?”

“그러는 넌? 너도 마음잡아야지. 언제까지 그럴 거냐?”

“왜 화살이 나한테 와?”


현재안은 입술을 실룩거리더니 의자 등받이로 몸을 기댔다.

“말했잖아? 합격하는 것이 더 겁난다고. 지금이 좋아. 적어도 꿈이 있으니까.”


그는 원대함에게로 상체를 숙였다.

“공무원 돼 봐. 죽어라 일하고 욕먹으며 시간이 가겠지. 눈치 보느라 하루가 가고. 인생 빤하잖아? 결혼하고, 집 장만하고, 아이 낳으면 햐, 그 어마어마한 교육비! 보험에, 자동차, 세금까지 신경 쓸 게 한둘이냐? 거긴 꿈이 없고 문제만 많아.”

한바탕 말을 쏟아내더니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허! 그걸 궤변이라 하지. 너 몸집 늘리는 이유만큼이나.”

원대함이 콧잔등을 구겼다.


“이거 왜 이래? 나 벌크업 중이야.”

“그게 근육이냐?”

“그게 그거지. 잘생긴 얼굴 좀 감춰야지. 여자들 쫓아오는 거 귀찮아.”


그 말에 원대함이 삼키려던 맥주를 뿜어냈다. 입가에 묻은 맥주를 손등으로 닦아내며 그는 너털웃음을 지었다.


“현아웃, 너 거울 없냐?”

“거울이 바로 증거라 이 말이야.”

현재안은 자신 있게 웃었다.


만화방을 독서실로 삼았다고 했던가. 책을 읽는 곳이니까 거기서 거기라고.

원대함이 큰소리로 활짝 웃었다. 그렇게 웃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지새늬의 병실에서도, 놀이터에서 사람들과 만날 때도 표정이 거의 없었는데, 현재안과 농담할 때는 아주 편해 보였다. 그만큼 친하다는 뜻이겠지.


가만, 원대함이 시나리오를 쓴다고? 그렇다면 소설도 썼을 거야.

지금이 바로 그의 필체를 확인할 기회였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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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디어 노트 22.10.03 25 1 10쪽
11 약도가 있는 방 22.10.02 23 1 11쪽
10 새로운 만남 22.10.01 24 1 10쪽
9 도우미들 22.09.30 27 1 10쪽
8 노하우 22.09.29 27 1 11쪽
7 다른 단서를 찾아 22.09.28 29 1 10쪽
6 특이한 인연 22.09.27 34 1 12쪽
5 정류장의 이귀들 22.09.26 41 1 9쪽
4 이상한 남매 22.09.25 47 1 11쪽
3 스프링 책의 주인 22.09.24 49 1 9쪽
2 작가를 찾아서 22.09.23 61 1 11쪽
1 프롤로그 – 파견의 주술 22.09.22 172 1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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