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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익은 글장이

세상을 파는 자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에그머니나
작품등록일 :
2015.03.20 13:48
최근연재일 :
2018.05.20 14:26
연재수 :
165 회
조회수 :
42,301
추천수 :
935
글자수 :
1,193,004

작성
15.11.13 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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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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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글자
21쪽

세상을 파는 자 Chapter 6: 귀로(歸路) (14)

DUMMY

라키안과 블래냐, 와이트랑과 이리나드는 떼거지로 몰려온 쿤즈를 벌집으로 만들어 놓은 다음 마치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이 기절한 루프를 들쳐메고 여관으로 돌아갔다. 아, 솔직히 말하자면 진짜로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이 행동한 것은 라키안 뿐이었다. 여관으로 돌아가는 그네들의 얼굴 표정은 다 가지가지였는데 그게 꽤 볼만했다.


우선 라키안은 평상시대로 싱글거리는 표정이었지만 그의 하나뿐인 인간 조수가 한동안 일을 제대로 못할 정도로 얻어맞았다는 점은 마음에 안드는 모양이었는지 가끔가다 괜시리 끙끙거리는 소리를 내곤 했다. 그의 바로 옆에서 걷고 있던 와이트랑은 대놓고 귀찮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아마 이 날씨 좋은 날 여관에서 늘어지게 잠이나 잘 기회를 놓친것이 꽤나 불만스러운 모양이었다. 더군다나 기절한 루프를 들쳐맨 것도 다름아닌 와이트랑이었다. 안그래도 주위의 시선을 끌어모으는 외모의 와이트랑이 척 보기에도 얻어터지고 기절한 남자 하나를 메고 가니 주변의 시선이 따가웠다. 귀찮은걸 극도로 싫어하는 와이트랑이 짜증을 낼 만한 상황이기도 했다.


블래냐는 이리나드의 옆에서 걷고 있었다. 그녀의 표정은 여느때처럼 조용했지만 그녀의 손은 힘이 주욱 빠져있는 이리나드의 한 쪽 어깨 위에 조용히 얹혀저 있었다. 블래냐는 꼿꼿이 목을펴고 정면을 보며 걷고 있었는데 힘없이 고개를 떨어뜨린 이리나드의 모습과는 제법 대조되는 모양새였다.


이리나드는 그렇게 그냥 고개를 떨어뜨리고 조용히 걸었다. 아직도 팔이 살짝 떨리는 것을 보아하니 마음이 산만한것이 사라지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블래냐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이리나드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고 있었지만 지금은 침묵했다.


자신이 먼저 나설 곳이 아니라고 생각한 것이다.


사실 라키안 일행과 이리나드는 그렇게 사이가 나쁘진 않았다. 오히려 좋다고 보는 편이 옳았다. 그녀에게 세상과 마주할 용기를 준 사람이 라키안이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 과정은 라키안답게 괴랄하긴 했지만 어쨌든 그것은 그만의 스타일인 것이고, 그 덕분에 이리나드는 용기를 얻고 세상을 여행하며 자신이 마주해야 할 것들을 찾기로 마음먹었던 것이다.


그랬던 그들이 모처럼 재회한 이래 별달리 나눈 대화가 없었다. 그만큼 이리나드의 정신이 루프라는 이상한 소년에게 쏠려 있었다는 말이다. 라키안 일행도 그녀와 루프의 일이 정리되기까지는 의도적으로 입을 다물고 있으려고 했고 말이다. 물론 라키안이 그렇게 주장했고 그렇게 하기로 했지만 말이다. 조금은 도와줄만도 하건만 냉철하게 입 싹 닫고 둘의 냉전을 조용히 지켜보기만 한 라키안의 성격은 확실히 정상이라고 보긴 어려웠다.


뭐, 그라는 인간이 원래 그렇기는 하지만 말이다.


여관에 돌아와서 루프를 자리에 눕히고 나서야 라키안은 이리나드에게 그간의 안부를 묻는 것이었다.


"그 동안 잘 지냈어요?"


어느 누구에게나 날아드는 그 예의바른 말투. 이리나드는 맨 처음 라키안을 만났을 때 그것이 굉장히 짜증난다고 생각했었다.


"당신 만나기 전까지는 뭐 그럭저럭..."


정확히는 라키안과 함께 다니던 루프를 만나기 전까지였지만 이리나드는 말을 아꼈다. 지금 루프에 대해서 뭐라고 한마디 하는것 자체가 찔렸다. 그녀도 일단은 사람이니까 말이다.


라키안은 돌아온 대답이 그다지 긍정적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내색하나 하지 않았다.


"그럼 그 동안 뭐 깨달은 것이라도 좀 있었나요?"


이리나드는 곱씹듯이 대답했다.


"내가 마녀라는 것 정도?"


"꿈도 희망도 없군."


와이트랑이 이죽거렸지만 그의 목소리는 평상시와는 많이 달랐다. 이리나드가 그에게로 살짝 고개를 돌렸다.


"당신은 어떻게 변태성이 더 늘었어요?"


"더 늘은게 아니야. 너한테 안 보여줬을 뿐이지. 마녀한테 변태짓하는 고양이라니 개미가 코끼리를 밟아 죽이겠다는 이야기처럼 들리는군."


그녀는 어느샌가 방긋 웃으면서 간단히 대답했다.


"어머나,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랑 같이 자려고 방으로 은근슬쩍 기어들어오려고 했던건 누구더라?"


와이트랑은 한마디도 지지 않았다.


"멍청한 사내놈보다는 그래도 예쁜 마녀가 백배 천배 낫거든."


그러면서 그는 보기 드물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좀처럼 인상을 펴는 일이 없는 와이트랑이 웃는 모습은 생각보다 보기 좋았다. 이리나드는 그 이야기를 듣고 작게 풋 하고 웃었다. 저 하얀 남자는 나름대로 자기한테 신경을 써 주고 있는 것이다. 원채 성격이 엉성해서 이상하게 보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걸 생각하면 척 보기에도 알 수 있었다. 저 어설픈 허세는 여전하구나, 이리나드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조금 기분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물론 와이트랑이 나름 신경을 써주고 있다는 점이 맞다는 가장 큰 이유는 와이트랑의 개소리에도 블래냐가 여전히 입을 닫고 침묵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만일 와이트랑이 한 말이 평상시처럼 허세 가득한 독설에 지나지 않았다면 블래냐는 아마 또 그냥 듣기에도 거북한 잔인한 말들을 한보따리 쏟아놓았을테니까 말이다.


거기까지 간단한 대화를 마친 이리나드는 한 번 숨을 골랐다. 이제 대화를 나눠야 하는 블래냐는 어려웠기 때문이다. 아, 평범한 의미로 어렵다는게 아니었다.


하필이면 이렇게까지 무너진 모습을 보여준게 미안해서 견딜 수 없었을 뿐이었다.


"엄마..."


블래냐의 눈치를 보면서 슬그머니 고개를 돌리는 이리나드. 블래냐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누가 네 엄마냐?"


"히잉..."


이리나드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풀죽은 목소리로 어물어물 거렸다. 무관심한 듯이 보이면서도 한숨을 푸욱 내쉰 블래냐는 풀이 잔뜩 죽어있는 이리나드에게 말했다.


"전에 다시 만날 때에는 훨씬 멋있어진 모습을 보여준다더니 꼴이 이게 뭐니?"


블래냐 특유의 쏘아붙이는 듯한 차가운 목소리가 이리나드의 귓전에서 울렸다. 하지만 이리나드는 평소처럼 능글맞게 대들지 않았다.


"히잉... 그러니까 왜 하필이면 이런 녀석하고 같이 다니고 있냐구요..."


이리나드는 여러가지 말을 생략하고 자기 앞에 누워있는 '이런 녀석'을 가리키면서 징징거렸다. 블래냐는 그 시니컬한 표정을 유지한 채로 이리나드의 이마를 콩 쥐어 박았다.


"너도 이제 좀 솔직하게 살아라."


"그게... 생각처럼 잘 안되서... 에헤헤."


블래냐는 어색하게 웃는 이리나드를 보면서 가슴이 답답해 지는 것을 느꼈다. 분명 저 아이는 정말 철이 없다. 겉으로 보기에는 능글능글하고 속을 알 수가 없는게 꼭 무슨 때마다 시마다 사람이 항상 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고 심지어는 그것이 너무 심해서 무슨 산전수전 다 겪은 인생의 베테랑 쯤으로 생각될 때도 있지만 실제로는 자신이 안고 있는 가장 큰 시련을 감추고 싶어서 도망치는 심정으로 타인을 연기하고 있을 뿐이다.


아무리 떨쳐버리려고 해도 자신이 마녀라는 사실을 쉽사리 뿌리쳐 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 사람의 모습을 연기하며 살고 있는 이리나드의 모습이 블래냐는 안쓰럽기 그지 없었다.


그토록 바랬거늘... 이번 만큼은 옳은 길을 찾을 수 있기를... 블래냐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아직이 어린 소녀의 인생이 끝이 아니라는 것에 작게 감사하는 것이었다.


라키안조차도 모르는 그 사정은 블래냐와 와이트랑만의 비밀이었기 때문이었다.


"이 친구하고는 어쩌다가 엮이게 된 거에요?"


이번에는 라키안이었다. 그는 팔짱을 끼고 루프의 머리맡에 서 있었는데 더할나위 없이 '이 조수는 나의 것이다'라는 주인의식을 철철 발산하고 있었다. 루프가 그것을 알았다면 거품을 물고 경악을 했겠지.


"몰라요."


그러고 보니까 잘 생각이 안난다. 분명히 처음 만난것은 보쥬라크의 하르그니스 공작가이다. 하지만 이상하게 처음에 어떻게 만났는지는 기억이 안난다. 고작 그런 첫만남의 인상을 기억하기에는 그 이후에 이리나드가 루프라는 녀석을 통해 겪은 일들의 무게가 너무나도 무거웠기 때문이리라. 이리나드는 한참을 생각한 후에야 대충 둘러댈 수 있었다.


"어쩌다 눈의 마법이 풀려서... 도망치다가 보니 루프를 납치하게 되서... 에잉 잘 기억이 안나네."


그나마도 추측이다. 이리나드와의 첫만남을 토씨하나 잊지 못하고 속속들이 기억하는 루프에게는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하긴, 그렇게 납치당하고 잊어버리면 그게 더 희한하지.


눈치좋은 라키안이 이리나드가 한 말을 대충 알아듣고는 중얼거렸다.


"어쩌다 마법이 풀렸다면... 보쥬라크 시가지에 펼쳐져 있던 디스펠이려나... 그럼 거기서 만난 거네요."


이리나드는 퉁명스러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가끔 당신이 그렇게 날카롭게 굴면 쬐끔 짜증납니다."


라키안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받아쳤다.


"뭐 어때요. 내 눈치 좋은데 보태준 것도 없으면서. 그나저나 루프 이녀석... 저런 여자를 만나놓고는 나한테는 일언반구도 없었단 말이죠... 상관을 멸시하다니 안되겠어요. 한동안은 급료를 주지 말아야겠어."


의외로 라키안의 폭언에 태클을 걸어온 것은 와이트랑이었다. 그런데 웃기는 사실은 그것이 순수한 의문이었다는 점이다.


"네가 언제 루프 급료를 준 적이나 있냐?"


와이트랑은 성격이 직선적인 반면 이런 순수한 구석도 있는 모양이었다. 라키안은 활짝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럼. 41셀링... 이 맞나? 여하튼 여기 오고 나서 한 번 줬지."


라키안은 얼마를 줬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와이트랑은 그것이 어떻게 지출되게 되었는지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 그거 루프가 식사 한 번 거창하게 쏘고 탕진된거 아니었나?"


"근데 이 친구가 돈을 안냈더라구. 나중에 무슨일이 있어도 받아내려고 꼭꼭 기억하고 있었지."


블래냐가 저쪽에서 움찔했지만 다행이도 라키안은 그것을 눈치채지 못한듯했다.


"그나저나 이 녀석... 언제 일어나려나?"


와이트랑이 모처럼 루프의 걱정을 하면서 중얼거렸다. 이리나드는 귓전에서 울리는 그의 젊잖은 목소리를 들으면서 루프에게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실컷 맞아서 퉁퉁 부은 얼굴. 블래냐가 간단한 치료를 한다고 (그녀는 마법을 쓸 줄 알았는데 '자꾸 마법만 쓰면 면역력 나빠져' 라면서 오늘은 손수 루프의 몸상태를 돌봐주었다) 옷을 모두 벗겨놓고 보니 아직 성인이 되지 못한 그의 몸은 참 별볼일 없었다. 요 몇달간 거대한 짐덩이를 짊어지고 다니면서 근육이 좀 붙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원래 마른편이었던 그의 체형이 달라질 정도는 아니었기에 루프는 여전히 빈약해 보였다.


그런 빈약한 몸으로 마녀를 감싸고 몰매를 맞다니... 참 이해가 안가는 소년이다. 이리나드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피식 웃는 것이었다. 무안하기도 했고 고맙기도 했다.


'얼른 일어나. 그래야 내가 대답을 해 주지.'


그녀는 아주 잠깐동안 그런 생각을 했다.


그 때 즈음 루프는 다시금 그 괴상한 검은 공간을 방문하는 중이었다.


"또냐..."


저도 모르게 터져 나오는 한숨. 굉장히 부담스럽게 생각하면서도 그는 한편으로 모종의 기대감을 품기 시작했다. 여기서 만나는 이리나드에 대한 기대감 말이다. 현실에서 만나는 이리나드는 성격이... 미안하지만 똥같다만 여기에서 만나는 그녀는 그야말로 가녀린 소녀.


이팔청춘이 갓 지난 루프가 이것에 두근거리지 않는다면 그것이 되려 이상한 일이었다.


그리고 오늘은 틀림없다. 자신이 기절하기 전에 '그런' 일이 있었는데 감히 이 시커먼 공간에 날 혼자 던져두고 안 오고 배기겠어? 루프는 그렇게 혼자 호언장담 하면서 가슴을 두어번 탕탕 쳤다. 답답했던 속이 탁 하고 풀리는 느낌이 나면서 그는 마른 기침을 두어번 내뱉었다.


"에구구... 너무 세게 쳤나?"


나, 루프는 얼토당토 않게 자신이 진심 바보는 아닌가 고민하는 것이었다.


에이그.. 그나저나 오늘은 여기서 얼마나 기다려야 하려나... 역시 이리나드가 나온다고 믿고 있어도 이 아무것도 없는 어둠은 정말 견딜만한 것이 못된다. 광활함이 주는 무한의 공포와 폐쇄감이 주는 질식할것 같은 분위기가 동시에 나를 조여온다.


내가 이래서 이 공간을 싫어하는 거야. 그리고 그것만큼이나 이리나드가 나오는 것을 기다리는거지. 그녀는 말 그대로 빛으로 다가오거든. 그녀가 오면 나를 덮고 있던 어둠이 거짓말처럼 물러간다. 그리고 그녀와의 아름다운 만남을 기억하는 장소로 우리를 옮겨다주지. 비록 이것이 꿈 속이라는 것은 너무나도 확연하게 알 수 있지만 그래도... 이것이 꿈이라는 것을 확신하는 만큼이나 내가 이 꿈에서 느끼는 감정도 생생하다.


그러니까 어서 와 이 마녀야. 언제까지 날 기다리게 할 셈이야?


"휴우..."


그나저나 가만히 생각해보면 나도 참 대책없는 짓을 했다. 어쩌자고 그 괴상한 여자를 지키자고 조직 폭력배한테 개기고 물씬 얻어터진 다음에 기절까지 할까. 나는 내 부모가 누군지는 모르지만 아마 이 상황을 봤다면 정상적인 부모의 범주 내에서 난리 법석을 치시겠지. 도대체 너는 뉘집 자식한테 홀라당 빠져가지고 그꼴을 하고 다니냐고 말이다. 그러면 나는 나답게 헤프게 웃으면서


'마녀요'


... 아 젠장 이래저래 좋은 그림이 도저히 나오지 않는다. 그냥 잊어버리자. 어쨌든 나는 기절한 것 뿐이고 그 놈들은 블래냐한테 나보다 심하게 쥐어 터졌을테니...


잠깐, 그러고 보니 블래냐는 언제부터 싸움을 그렇게 잘 하게 된거지? 잠깐, 이거 오히려 위험한거 아니야?


당연한 말이지만 나는 블래냐가 싸우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아, 물론 와이트랑이 보쥬라크에서 그 무지막지만 마법사 세듀서와 싸우는 것은 본 적이 있고 그 무위에 경악한 것도 사실이다만 블래냐는... 본 적이 없다.


일단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와이트랑이 사람이랑 고양이를 막 왔다갔다 변신하는 존재이고, 블래냐도 마찬가지니까 같은 정도로 강하다고 생각을... 하긴 했지. 그러니까 기절하기 직전에 그녀의 모습을 보고 슬쩍 안도의 한숨을 쉬기도 했고... 그렇게... 믿고는 싶은데 그게 진짜 그럴까? 젠장... 만일 아니면 어떡하지? 괜히 나때매 블래냐까지 곤란한 상황에 빠지게 되는거 아냐? 으아아아악! 이건 또 정말 상상하기도 싫다!


다른 누구는 몰라도 블래냐만큼은 곤경에 빠뜨리고 싶지 않다는 걸 지금에야 깨닫다니 루프 네놈은 진심 병구로구나!


아, 제발 눈아 떠져라. 불안해서 못살겠다. 블래냐는 괜찮은걸까? 나는 나도 모르는 새에 마음이 조급해져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그녀라면 걱정할 필요 없어."


그리고 나는 그자의 목소리를 들었다. 내가 앞으로 평생동안 잊지 못할 그 자의 목소리를... 마치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한 달관한 그 말투, 그 목소리, 그리고 입가의 미소. 그의 목소리를 쫒아 시선을 돌린 나의 앞에는 완전한 어두움 속에 홀로 우뚝 서 있는 그자가 있었다.


거짓말처럼, 그자의 주변으로만 휘황찬란한 광휘가 빛을 발하고 있었다. 나는 여전히 어둠속에 갇힌채로 생각했다.


'저 목소리... 들어 본 적이 있는 목소리다...'


"나는 너다."


재수없으리만큼 잘생긴 외모의 그는 다짜고짜 그런 말을 해댔다. 난 어차피 '넌 누구나?'라고 진부한 대사를 내뱉을 작정이었기 때문에 속을 들킨것 같아서 흠칫했지만 이내 진정할 수 있었다. 이걸로 확실해졌다. 저 놈의 목소리는 이전 몇 번인가 피바다가 된 싸움터 안에서 나한테 철학적인 질문을 던져대던 재수없는 그 목소리와 완전히 똑같았다.


결국은 모습을 드러내는군. 뭐하는 놈인지는 여전히 알 수 없지만.


"나는 너래두."


그 자는 이전에 나한테 말할때의 위엄같은건 생각도 안한다는 듯이 킬킬 웃으면서 말했다. 으으 잠깐만 이거... 내 속 읽히고 있는거 아냐? 어떻게 저렇게 말을 딱딱 맞춰서 하지? 재수없다. 재수 없는게 라키안하고 동급이다. 나는 본능적으로 나오는 놈에 대한 적개심에 몸을 떨었다.


왠지는 모르겠지만 가까이하면 안될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아, 미안하지만 나랑 그 행상인을 엮는 것은 될 수 있으면 하지 말아줬으면 하는군."


그 자는 또 싱글생글 웃으면서 말했다. 나는 생각했다. 저 능글맞게 웃는 모양새가 완전히 똑같다고.


"그 자와는 양립할 수 없는 사람이거든, 내가."


그는 내가 묻지도 않은 말을 마구 해대고 있었다. 솔직한 심정으로 나는 지금 벙쪄서 아무말도 꺼낼 수가 없었다.


... 아니, 기다리던 이리나드는 안나오고 저건 또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놈이냐? 에잉 젠장 이게 어법에 맞는 말인가? 당황스럽고 혼란스러워서 말도 꼬인다. 아니, 입 밖으로는 한 마디도 내뱉지 않았으니 생각조차도 꼬이는구나. 빌어먹을, 요새 정말 인생에 액이라도 낀 모양이다. 꿈 깨고 나면 블래냐한테 액막이라도 해달라고 해볼까...


"이것저것 궁금하겠지만 조금만 더 참아라. 때가 가까워지고 있거든."


그는 말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 같았다. 그는 이번에도 내 생각을 읽은 듯한 말로 대댑해왔다. 이걸로 나는 거의 확신할 수 있었다. 놈은 내가 생각하는 것을 알 수 있는 모양이다.


"아니야, 그렇지 않아. 다만 네가 알아야 할 것들을 최소한의 정보만 포함해서 알려주는 것 뿐이지."


"무슨 말입니까?"


그에게 건넨 나의 첫 마디는, 지극히도 루프적인 것이었다.


"네가 좋아하는 소설의 주인공이 될 기회를 주는거야, 루프."


나는 황당함을 애써 감추고 대답했다.


"일단 좀 따지고 보자면... 당신 지금 당신이 나라고 했는데 나는 그렇게 잘생기지 않았어요."


틀렸다! 틀려도 한!참! 틀렸다! 도대체 왜 이 모양이냐 너는 항상! 아이고... 나는 뒤죽박죽 엉망이 되어가고 있는 머리속을 정리해 보려고 애썼다. 하지만 그자는 그런 나는 아랑곳도 하지 않고 자기 할 말을 이어나갔다.


"너는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위대하다. 그것은 그 때가 오면 알게 되겠지. 스스로 잘 준비하고 그 순간을 기다려. 너는 네가 상상도 하지 못한 경험을 하게 될 거야."


"... 당신이 정말 나라고 한다면 내가 지금 당신 하는 말 1%도 이해 못하고 있다는 것 쯤은 잘 아시겠죠?"


그는 재밌다는 듯이 웃었다.


"음, 뭐 그렇다고 볼 수 있지."


... 당신 뭐 신이라도 되우? 나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저 자의 존재를 그냥 대충 '신'정도로 치부해버리고 싶었다. 그렇지 않으면 뭐라 표현할 방법이 없었다. 차라리 내가 이중인격이거나 뭐 그런 성격장애라도 있었다면 몰라... 매우 정상적인 바른생활 소년 루프한테 저런 내면의 성격이 있을리가 없잖아?


"흠... 뭐 1% 정도는 이해하고 있는 것 같은데?"


나는 얼떨결에 대답했다.


"엥? 뭐라고요?"


그는 나를 똑바로 바라보면서 말했다. 그것이 그의 마지막 말이었다. 그의 목소리가 울리는 순간 그의 얼굴에 드리운 소름끼칠 정도로 잔인하고 비릿한 그 미소를, 나는 한동안 머리속에서 지울 수 없었다.


"곧 그 때가 올거야."


그는 그렇게 말하고 처음 왔을 때처럼 순식간에 사라져갔다. 항상 그렇지만, 나는 또다시 어처구니 없는 나의 인생을 저주하면서 어둠속에 혼자 남았다. 도대체 그 놈은 뭐하는 놈이길래 수시로 나타나서 나를 들쑤셔 놓는지 알 수가 없다... 라키안하고 아는 사이인것 같기는 한데...


나는 그제서야 내가 울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눈물이... 눈물이 나온다. 왜 이러지? 언제부터 이런거야? 슬프지도 기쁘지도, 아무렇지도 않은데? 그냥 당황스러울 뿐인데 어째서 눈물이 이렇게 폭포수처럼 나오는 거지? 나는 소매로 얼굴을 이리저리 닦아 보았다. 하지만 막을 수단도 없이 흐르는 눈물은 마치 그 눈물 자체가 겁에 질린 것처럼 뺨을 타고 내려와 속절없이 어둠 속으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뭐지? 왜 울고 있는 거야 나는?


나는 그 어두움 속에서 이유도 모르는 채로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그 날 이리나드는 내 꿈 속에 나타나지 않았다.


작가의말

두둥!


저런 속이 시커먼 녀석이 하나쯤은 나와 줘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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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세상을 파는 자 Chapter 6: 귀로(歸路) (3) 15.10.26 306 5 21쪽
55 세상을 파는 자 Chapter 6: 귀로(歸路) (2) 15.10.25 378 2 15쪽
54 세상을 파는 자 Chapter 6: 귀로(歸路) (1) 15.10.24 237 2 15쪽
53 세상을 파는 자 Interude +2 15.10.23 237 2 11쪽
52 세상을 파는 자 Chapter 5: 가문의 연 (8) 15.10.23 208 4 42쪽
51 세상을 파는 자 Chapter 5: 가문의 연 (7) 15.10.22 156 2 31쪽
50 세상을 파는 자 Chapter 5: 가문의 연 (6) 15.10.21 166 3 21쪽
49 세상을 파는 자 Chapter 5: 가문의 연 (5) +2 15.10.20 189 3 21쪽
48 세상을 파는 자 Chapter 5: 가문의 연 (4) 15.10.16 180 2 19쪽
47 세상을 파는 자 Chapter 5: 가문의 연 (3) +1 15.10.14 183 6 26쪽
46 세상을 파는 자 Chapter 5: 가문의 연 (2) 15.10.13 265 2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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