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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익은 글장이

세상을 파는 자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에그머니나
작품등록일 :
2015.03.20 13:48
최근연재일 :
2018.05.20 14:26
연재수 :
165 회
조회수 :
42,300
추천수 :
935
글자수 :
1,193,004

작성
15.10.20 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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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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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글자
21쪽

세상을 파는 자 Chapter 5: 가문의 연 (5)

DUMMY

랭스턴의 영주 저택에 초대받은 루프일행은 일단 따듯한 목욕과 식사, 잠자리를 제공받았다. 루프는 다시금 그 호사스런 생활을 즐기면서 (보쥬라크에서의 그것과는 비교할바가 못되었지만...) 한껏 만족감을 느끼는 중이었다.


찰랑, 루프가 몸을 담군 욕조의 물이 유려하게 흔들린다.


'도대체 라키안 저인간은 뭐하는 인간이길래 가는 곳마다 귀족들이 들러붙지?'


아무리 생각한들 답이 나올리가 있나. 루프는 입맛을 쩝쩝 다시면서 욕탕을 나와 방으로 돌아갔다. 시중드는 시녀들이 와서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루프를 두고 안마도 해주고 이부자리도 만들어주고 숙면을 위해 놓고간 차까지 깔끔하게 마무리한 후에, 그는 드디어 잠에 빠져들었다. 여행 시작 이후로 이틀 연속으로 꿀같은 단잠을 자본적이 별로 없었던 루프는 (부상으로 인한 휴식은 제외하고) 한껏 가벼운 마음으로 눈을 붙일 수 있었다.


그리고 다음날이 되어서야, 루프와 라키안, 그리고 와이트랑과 블래냐는 그들을 저택으로 초대한 사람을 그의 알현실에서 만날 수 있었다. 넓은 복도와 영주가 앉아있는 보좌가 인상적인 알현실이었지만 그래도 영주가 라키안 일행을 배려했는지 그 맞은편에 의자 네개가 따로 놓여 있었다. 붉은 카펫이 깔린 홀웨이 위에 덩그러니 놓여진 의자들은 제법 어색했지만 그들은 괘념치 않고 아무렇게나 그 의자에 둘러 앉았다.


놀랍게도, 그들을 초청한 것은 한사람이 아니라 두사람이었다.


"그대가 라키안인가?"


라키안은 별 감흥없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렇습니다만, 댁은 뉘신지요?"


그의 반응에 괜한 루프의 간만 쫄깃해진다. 예절이라곤 눈꼽만치도 찾아볼 수 없는 라키안의 말에 가문기사들이 움찔하며 반응했지만 영주는 손을 살짝 들어 그들에게 가만있으라고 표시했다.


"나는 이 랭스턴의 영주이자 라오디게아의 남작 마모스 슈텔바으허요. 그리고 이쪽은 그대로 위명을 들어서 잘 알고 있겠지만..."


마모스 남작은 자신을 소개할 때보다 더 우렁찬 목소리로 그의 옆자리에 앉은 중년인을 소개했다.


"비벅홀드의 날랜범, 메이어 바스투스 경이시오."


"메이어 바스투스? 그 유명한 비벅홀드 기사단의 단장... 흡!"


거의 경악 수준으로 깜짝 놀란 루프는 저도 모르게 소리를 내지르다가 황급하게 손으로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메이어는 그런 루프를 그럴만 하다는 자신만만한 눈으로 쳐다볼 뿐,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루프의 리액션이 맘에 든 모양이었다.


"헤에~? 마을에 비벅홀드의 호랑이들이 우글우글거리더니 대장님까지 와있을 줄은 몰랐네요."


하지만 라키안은 여전히 냉랭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할 뿐이었다.


"으, 으음... 바스투스경 앞에서는 입을 좀 삼가주시오."


마모스는 메이어의 눈치를 잔뜩 보면서 라키안을 타일렀다. 라키안은 별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네에네에~'라고 대답했다. 블래냐가 그런 라키안을 보면서 이마를 살짝 짚었지만 와이트랑은 마냥 신난듯이 웃어대고 있었다. 아마 알현실의 귀족적인 분위기가 맘에 든 모양이다. 메이어는 그런 라키안 일행을 흥미로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서, 날 부른 목적은 뭐에요?"


라키안의 직접적인 질문에 대답한 것은 바스투스 백작이었다.


"자네가 일반에서는 구하기 힘든 진귀한 물건들을 팔고 돌아다니는 행상이라는 사실을 들었네. 그게 사실인가?"


"행상이라기보단... 음, 그래요. 세상을 파는 자라고 불러주시길."


'세상을... 파는 자?'


라키안은 막상 그 대목에서 만큼은 굉장히 또박또박한 말투로 대답했다. 그가 스스로를 지칭한 '세상을 파는 자'라는 호칭에 루프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같이 여행길에 오른 이후로 라키안이 스스로를 그렇게 부르는 것을 들은건 처음이었다. 생소한 호칭에 살짝 당황하는 루프, 그는 순간적으로 라키안이 슬쩍 눈을 굴려 자신을 쳐다본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그래, 그 세상을 파는 자. 확실히 그렇게 불렀었지."


바스투스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만족스러운 듯 대답했다. 라키안이 날카롭게 질문했다.


"과연... 하르그니스 공작입니까? 아니면 오렐로 백작? 그러고 보면 용의자가 너무 많네요."


바스투스는 빙긋이 웃음을 지으면서 살짝 손사래를 쳤다.


"훗, 하르그니스 공작 그 영감탱이는 최근들어서 정계에 모습을 잘 안드러내서 말일세. 그가 아니라는것만큼은 확실하게 말해두지."


라키안은 흐릿한 조소를 머금었다. 대국의 백작을 향한 놀라운 패기였다.


"호오~? 저명하신 비벅홀드의 날랜범께서도 하르그니스 공작의 정치력은 무시 못하시는 모양이네요?"


라키안의 도발적인 어투에 마모스 남작이 발끈하면서 앞으로 나서려고 했지만 덩치가 큰 바스투스는 그런 마모스를 한팔로 가로막았다.


"맞는 말일세. 입이 칼보다 강하다는 것을 항상 몸소 보여주시는 분이지, 그 영감탱이는."


약간 앞뒤가 안맞는 그의 말을 들으면서 라키안은 그제서야 흥미가 동한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에헤~. 존경은 하는데 싫어하시는 모양이네요."


"그 말 그대로일세."


바스투스는 건강해 보이는 웃음을 머금으면서 그렇게 대답했다. 그런 바스투스의 모습이 마음에 들었는지 라키안이 드디어 자세를 바로잡았다. 의자에 바르게 앉아서 손을 마주잡는 그의 모습은 이제 그가 제대로 이야기를 나눌 의지가 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고맙네."


바스투스는 호감이 가는 남성이었다. 키도 덩치도 상당히 큰편에 속했지만 그의 별호가 '날랜범'인 것으로 보아 아마 몸놀림도 상당히 빠르리라. 그렇게 우락부락하지는 않지만 튼튼하게 자리잡은 그의 몸을 보면 그 누구라도 한순간에 '멋지다'라고 생각하게 되고 말리라. 얼굴은 그렇게 잘생긴 편은 아니었지만 맵시있게 기른 수염과 어우러진 그의 인상은 전체적으로 시원시원하여 보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었다.


라키안은 그런 바스투스 백작이 나름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그의 입가에 걸린 희끄무레한 웃음이 그것을 잘 나타내주고 있었다. 아마 본인이 생각하기에 상대할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라고 인정한것이리라.


"그래서 저한테 원하시는 그 '진귀한 물건'이라는건 뭔가요?"


바스투스 백작은 짐짓 진지한 표정으로 막 입을 열려고 하고 있었다.


"남작님! 비벅홀드의 기사들이 돌아왔습니다!"


바로 그 순간 알현실의 바깥쪽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막 이야기를 시작하려던 바스투스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그가 다시 입을 닫고 손을 모으자 마모스 남작이 황급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오오오! 드디어 돌아왔는가! 어서 들라해라!"


마모스는 곧바로 바스투스의 눈치를 살폈다. 바스투스는 진지한 표정으로 눈을 꾹 감고 입 역시 한일자로 굳게 다물고 있었다. 그 모습을 확인한 눈치빠른 마모스는 라키안에게 미묘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 어험! 이거 갑자기 급무가 생겨버렸군요. 여러분들 죄송하지만 잠시 방에 돌아가 주시겠습니까? 일이 끝난 후 다시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라키안은 바스투스에게서 눈을 떼고 마모스를 바라보면서 나직이 말했다.


"상당히 중요한 일인가 봅니다?"


마모스는 능란하게 라키안의 말을 받아 넘겼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 이상은 기밀사항이라 알려 드릴 수 없군요."


"뭐, 알았습니다. 그러죠 까짓거."


루프는 라키안이 너무 쉽게 포기해버리자 맥이 탁 빠지는 것을 느꼈다. 아니, 이럴거면 뭐하러 부른거야? 그리고 라키안 저 인간은 답지 않게 왜 이렇게 쉽게 물러나는거지? 루프는 약간 얼빠진 표정으로 라키안을 쳐다보았다. 라키안은 그런 루프를 향해 찡긋 윙크를 해 보이는 것이었다.


'왜 저래...'


루프가 그걸 보면서 인상을 찌푸리는 사이에 라키안은 몸을 일으켰다.


"아, 그렇지."


그렇지만 라키안은 그냥 물러서지는 않았다. 그는 차분한 발걸음으로 터벅터벅 바스투스에게로 걸어갔다. 마모스가 깜짝 놀라서 제지하려고 했지만 어느샌가 눈을 뜬 바스투스는 한손으로 그를 제지했다. 바스투스 앞에 다가간 라키안은 품 속에서 작은 손거울을 꺼냈다. 흰색과 핑크, 그리고 금장 장식이 귀엽게 어우러진 여아용 손거울이었다.


"이거 받으세요."


바스투스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오히려 옆에 있는 마모스가 '이게 무슨 불경한 짓거린가!' 라면서 난리를 쳐댔지만 라키안은 전혀 신경쓰지 않고 있었다.


"이게 뭔가?"


"보시다시피, 손거울입니다."


"그건 나도 아네. 하지만 이걸 나에게 주는 저의를 모르겠군."


"뭐, 나중에 다시 부르셔도 소용이 없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은 겁니다."


마모스가 결국은 참지 못하고 소리를 꽥 질렀다. 그것이 진심으로 우러나온 충심인지 권력욕에 눈이 멀은 만용인지는 알지 못했지만.


"이 자가! 아무리 백작님께서 인정해 주신다고는 하나 갈수록 무례하기 짝이 없군! 네 정녕 쓴맛을 봐야 정신을 차리겠는가!"


마모스 나름대로는 상당히 힘을 주고 말한 모양이었지만 라키안은 그가 한마디만 꺼내도 벌벌 떠는 이 땅의 하층민들과는 달랐다.


"없다고!"


"헉!"


라키안이 갑자기 소리를 꽥 지르자 마모스는 지레 겁을 먹고 뒷걸음질쳤다. 라키안의 목소리는 상상 외로 엄청난 패기를 지니고 있었다. 심지어는 주변에 도열해 있던 경비병들이 깜짝 놀라면서 라키안과 그 일행에게 창을 들이댈 정도였다.


"으힉!"


겁많은 루프는 비명을 질렀지만 그 외에는 여전히 담담해 보였다. 라키안은 다시금 시선을 바스투스에게 맞추면서 하려고 하던 말을 마무리했다.


"그것밖에 없어요. 지금 가지고 있는 상품은. 그러니까 다음에 다시 불러봐야 팔게 그것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그냥 지금 줄게요."


바스투스는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꺼내는 라키안을 보면서 비로소 인상을 찌푸렸다.


"이게 뭔가?"


라키안은 양팔을 허리에 얹은 채로 대답했다.


"어차피 딱히 원하는 것도 없는 채로 이상한 주문만 잔뜩 해댈 작정이었잖아요?"


"...음..."


루프는 순간 바스투스 백작의 표정이 놀라움으로 물드는 것을 눈치채고 놀라워했다.


"자신을 돌아보는 데에는 거울만큼 좋은게 없죠. 그러니까 그거 그냥 가지세요. 대금은 여기서 먹고자고 한 값으로 생각할게요. 괜찮죠?"


바스투스는 허탈한 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하하...! 자네 지금 진심으로 하는 말인가?"


"하하! 진짜로 물건이 없는걸 어떡합니까? 그것밖에 팔게 안남았는데 이런 고급 주택에서 쉬게 해주시는 것에다가 먹여주기까지 하시니 솔직히 손해보는건 그쪽이죠. 전혀 마다하실것 없어요."


라키안은 그만의 생글생글 웃는 표정으로 잘도 이야기하고 있었다. 루프는 라키안이 한마디 한마디 꺼낼때마다 간이 쪼그라드는 경헝을 해야만 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얼굴이 붉으락 푸르락한 마모스와는 달리 바스투스의 표정은 나름 밝았다는 점이었다.


"크하하핫! 그거 괜찮군. 가만 생각해보니 이것 꽤 괜찮은 물건이군 그래. 자네 말대로 하지."


"백작님? 진심이십니까?"


마모스는 크게 당황하면서 백작에게 물었다. 바스투스는 거리낌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내 그는 돌연 표정을 매섭게 바꾸었다. 이번에는 진짜였다. 기사만이 지을 수 있는 기사의 표정. 그 좌중을 압도하는듯한 무시무시한 표정을 한 번 본 루프는 그만 너무 놀라 몇걸음인가 뒷걸음질을 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좀 나가줘야겠군."


"그러죠."


하지만 라키안은 그런 사람들 여럿 상대해 보기라도 한듯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고는 그대로 몸을 돌려서 알현실의 출구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 뒤를 와이트랑과 블래냐가 말없이 따랐다. 루프는 당황해서 라키안과 백작을 번갈아서 쳐다보다가 결국은 별 수 없이 라키안의 뒤를 따랐다. 그의 등 뒤에서 마모스가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라 해라!"


그와함께 루프가 향하고 있는 출구가 활짝 열리면서 한눈에 보기에도 위용이 넘쳐보이는 남자들이 우르르 모습을 드러냈다. 저마다 멋드러진 갑옷을 입고 허리에는 바스타드 소드를 걸친 어엿한 기사들이었다. 루프는 저도 모르게 주눅이 들어서 고개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루프 고개 들어요. 주눅들면 항상 지는거에요."


루프의 마음을 알리 없는 라키안은 그런 무리한 주문을 해왔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루프는 용기를 내서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것은 틀림없이 우연이 아니었을 것이다. 고개를 들어올린 루프는 소년과 눈이 딱 마주쳤다.


12살? 많이 봐야 14살 정도? 곱상하게 생겼지만 몰골은 말이 아닌 어떤 소년이 그곳에 있었다. 수명의 기사들의 단단한 손에 굳게 불들려서 결박된 채로 알현실로 끌려오는 소년이 그곳에 있었다. 루프는 순간적으로 헛바람을 들이키면서 터져나오려는 탄성을 집어삼켰다.


어째서 위명높은 비벅홀드의 기사들이 저런 소년 한명을 잡아서 끌고오는 것인가?


소년 역시 루프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에 비친 감정을 루프는 읽기 어려웠다. 두려움? 공포? 글쎄, 그런것보다는 어째서인지 허무함이 가장 많이 느껴지는데... 하지만 모르겠다. 저 눈은 죽은것만 같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손발에 소름이 돋는, 그런 죽은 사람의 눈과도 같이 느껴진다.


순간이었다. 루프와 소년은 그대로 서로를 비껴 지나갔다. 라키안 일행은 아무 탈 없이 알현실을 빠져나왔고 기사들이 들어간 후 알현실 문은 굳게 닫혔다.


"저 아이는..."


그 아이가 너무나도 신경쓰인 루프는 조심스레 라키안에게 질문을 던졌다. 당연히 라키안이 알리가 없을거라고 생각했지만 라키안은 어째서인지 한숨을 푸욱 내쉬는 것이었다.


"하아... 역시 무리였나?"


"무리? 무슨 소리에요?"


"아니에요. 갑시다."


라키안은 다시금 앞장서 걷기 시작했다. 루프는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었지만 어차피 라키안이 한 번 입을 닫으면 열지 않는 성격인걸 잘 알고 있었는지라 아쉬운 한숨을 내쉬면서 그냥 포기해버렸다. 그는 조용히 블래냐의 뒤를 따라 걸었다.


한편 라키안 일행이 떠난 알현실 안에서는 또 다른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다.


"잡아 왔습니다."


"오오오! 과연 비벅홀드의 용사들이오!"


마모스는 과장스런 몸짓으로 비벅홀드 기사단원들을 보며 기뻐했지만 바스투스는 좀전의 밝은 모습은 어디로 가버렸는지 냉기가 풀풀 날리는 목소리고 이렇게 말했다.


"한 명 뿐이로군. 동생은 어딨나?"


"놓쳤습니다."


어느 기사가 대답했다. 그의 대답을 들은 바스투스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보좌를 떠나 홀웨이로 내려갔다. 그는 끌려온 소년의 턱을 붙잡아 올리고는 여전히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


"흥, 그야말로 빼다 박았군."


소년은 초점이 흐린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왜 이모양이지?"


그의 질문에 기사 한명이 천으로 칭칭 감싼 무언가를 그에게 내밀었다.


"이것 때문입니다."


"이게 뭔가?"


"검입니다."


"검?"


바스투스는 조심스럽게 그것을 받아들었다. 검은 희안하게도 검집에 들어있지 않고 천으로 불필요하다 싶을 정도로 과하게 둘둘 감겨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받아 든 순간 바스투스는 느낄 수 있었다. 검에서 뿜어져 나오는 무시무시한 힘을.


"오호, 이런걸 가지고 있었단 말인가? 이상하군. 이런 물건은 우리집 가보에 없었는데... 그자가 따로 장만이라도 했었단 말인가?"


바스투스는 의도적으로 소년, 안드레아스의 눈을 보면서 말했지만 그 소년은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검의 힘에 제압당한것 같습니다."


안드레아스의 오른편에서 그를 붙잡고 있던 기사가 말했다. 바스투스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답했다.


"그렇군. 그렇다면 정신이 들게 해야지."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 매몰차게 소년의 뺨을 때렸다. 짝! 하는 큰 소리와 함께 소년이 비명을 질렀다.


"윽!"


"이제 좀 정신이 드나?"


"으으으... 여, 여기는..."


무식한 방법이기는 했지만 확실히 정신은 돌아온 모양이었다. 안드레아스는 떨리는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다가 눈앞에 있는 바스투스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돌연 발버둥치기 시작했다.


"너! 네놈! 네놈이 감히 본가에 칼을 들이대다니! 어려서부터 품행이 단정하지 못하여 본가에서도 쫒겨난 사생아가 무슨 배짱으로 이런 사건을 일으킨 것이냐? 우리 부모님의 원수! 용서하지 않을거야!"


안드레아스는 그의 작은 아버지, 메이어 바스투스, 한때는 메이어 터틀루스라 불리웠던 사나이를 향해 새하얀 송곳니를 드러내면서 달려들려고 발버둥쳤다. 하지만 그의 작은 체구로는 그를 붙잡고 있는 거구의 기사들을 당해낼 수 없었다.


"그게 네가 알고 있는 전부인가?"


바스투스는 담담한 목소리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안드레아스는 분노에 스스로를 가누지 못하면서도 시선만은 올곧이 바스투스를 노려본 채로 대답했다.


"무슨 소리를 하는거냐! 네놈이 우리 가문을 멸망시켰다! 고작 너같은 사생아의 치기어린 반항심 때문에! 용서할 수 없다. 용서하지 않을거야!"


13살 어린아이의 입에서 나왔다고는 생각하기 힘든 이야기가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오고 있었지만 바스투스는 오히려 코웃음을 칠 뿐이었다.


그 때 기사단 중 한명이 조심스레 바스투스의 곁으로 다가와서 그의 귓가에 대고 무언가를 속삭였다. 바스투스는 그 이야기를 듣고 자신의 손에 들려있던 검을 한 번 내려다 보고는 다시금 안드레아스에게 말을 걸었다.


"동생은 어디있지?"


"모른다! 알고 있다고 해도 알려줄 것 같으냐?"


"그 애비에 그 아들이로군. 쓸데없는 고집까지 똑같아."


"너같은 사생아가 우리 아버지의 이름을 모욕하느냐?! 으으으... 놔라! 놔!"


바스투스는 난리를 치는 안드레아스의 눈앞에 검을 내밀었다.


"힘을 손에 넣었군."


"으으으..."


"네 동생이 어딨는지 모른다고 했지? 사실은 내가 알고있다."


바스투스의 말에 비로소 안드레아스의 안색이 변했다. 진짜로 그는 동생 아드리안의 행방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분명 어떤 여자가 관련되어 있음은 틀림이 없었지만 그게 누구인지, 그리고 그 여자가 어디로 갔는지 알리가 없었던 것이었다. 안드레아스의 반응을 살펴본 바스투스는 입가에 진득한 미소를 지었다. 호감형인 그의 인상이 그런 미소를 지으니 또 다르게 보였다.


"지금 터틀루스 가문의 몰락을 틈타 세력을 확장하려는 지방세력가의 손에 들어가있다."


"뭐라고?"


바스투스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안드레아스, 네게 사생아라고 불리기는 하나 나는 너의 작은 아버지다. 너의 작은 아버지로서 네게 제안을 하나 하지."


"제안...이라고?"


"그래. 제안이다. 네가 그것을 완수하면 나와 비벅홀드의 이름을 걸고 너와 네 동생의 안전을 보장하지."


몸이 어린 만큼이나 마음이 어린 안드레아스였다. 그는 떨리는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저 원수의 말을 들을 것인가? 아니면 그냥 여기서 사라져갈 것인가?


그런 고민이 이루어지는 사이, 바스투스는 안드레아스의 앞에 들고 있던 헝겊덩어리, 그 검을 떨어뜨렸다. 툭하는 둔탁한 소리가 들려왔다.


"힘을 얻게 되었으니 그 책임을 져 보아라. 가서 그 지방귀족을 죽이고 네 동생을 구해. 다른 누구도 아닌 네 자신의 힘으로 말이다. 그렇게 한다면 나는 너를 더 이상 쫒지 않겠다. 이것은 기사로서의 맹세이다. 그 누구도 이것을 번복할 수 없음을 확실하게 해두지."


"그, 그런..."


이것은 거절하기 어려운 유혹이었다.


"네가 원한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놓아줄 수 있다. 뒤를 쫒는자도 절대 붙이지 않는다. 가서 그 자를 죽이고 네 동생을 되찾아라. 그 소식이 들리면 우리도 너희 형제에게서 완전히 손을 떼겠다."


안드레아스가 쉬이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안절부절 못하고 있자 바스투스는 계속해서 이야기를 꺼내들었다.


"도망쳐봐야 어차피 라오디게아 안에 숨을곳은 없다는 것정도 스스로도 잘 알고 있을텐데? 숙부에게라도 갈 생각인가? 그렇다면 비벅홀드 기사단은 그 자마저도 도륙하고 말 것이다. 그렇다고 국외로 도망할 생각은 추호도 하지 마라. 우리가 너희같은 꼬맹이들이 국외로 도망칠 때까지 손을 놓고 있을것만 같으냐? 절대 그렇지 않지. 자아, 어쩔테냐?"


그의 이야기는 잔인했다. 안드레아스에게 선택의 여지를 주고 있는듯 했지만 실제로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바스투스도, 그리고 안드레아스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아버지... 동생을... 아드리안을...'


지키리라고 약속했다. 세상이 무너져도 반드시 지키리라고 다짐했다.


"... 기사로서 맹세 하는 것이냐?"


"그러지."


마침내 안드레아스가 대답했다.


"당신 말대로 하겠다."


바스투스 백작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작가의말

 아이고 최근 며칠간 환절기 감기에 걸려서 엄청 고생했네요.. 다들 감기 조심하십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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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세상을 파는 자 Chapter 6: 귀로(歸路) (13) 15.11.11 282 7 15쪽
65 세상을 파는 자 Chapter 6: 귀로(歸路) (12) 15.11.10 227 4 11쪽
64 세상을 파는 자 Chapter 6: 귀로(歸路) (11) +1 15.11.09 194 5 26쪽
63 세상을 파는 자 Chapter 6: 귀로(歸路) (10) 15.11.07 241 4 23쪽
62 세상을 파는 자 Chapter 6: 귀로(歸路) (9) 15.11.05 197 4 14쪽
61 세상을 파는 자 Chapter 6: 귀로(歸路) (8) 15.11.03 191 3 22쪽
60 세상을 파는 자 Chapter 6: 귀로(歸路) (7) 15.11.02 248 4 16쪽
59 세상을 파는 자 Chapter 6: 귀로(歸路) (6) +2 15.10.31 169 4 16쪽
58 세상을 파는 자 Chapter 6: 귀로(歸路) (5) 15.10.29 228 5 12쪽
57 세상을 파는 자 Chapter 6: 귀로(歸路) (4) 15.10.28 151 4 20쪽
56 세상을 파는 자 Chapter 6: 귀로(歸路) (3) 15.10.26 306 5 21쪽
55 세상을 파는 자 Chapter 6: 귀로(歸路) (2) 15.10.25 378 2 15쪽
54 세상을 파는 자 Chapter 6: 귀로(歸路) (1) 15.10.24 237 2 15쪽
53 세상을 파는 자 Interude +2 15.10.23 237 2 11쪽
52 세상을 파는 자 Chapter 5: 가문의 연 (8) 15.10.23 208 4 42쪽
51 세상을 파는 자 Chapter 5: 가문의 연 (7) 15.10.22 156 2 31쪽
50 세상을 파는 자 Chapter 5: 가문의 연 (6) 15.10.21 166 3 21쪽
» 세상을 파는 자 Chapter 5: 가문의 연 (5) +2 15.10.20 189 3 21쪽
48 세상을 파는 자 Chapter 5: 가문의 연 (4) 15.10.16 180 2 19쪽
47 세상을 파는 자 Chapter 5: 가문의 연 (3) +1 15.10.14 183 6 26쪽
46 세상을 파는 자 Chapter 5: 가문의 연 (2) 15.10.13 265 2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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