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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강한 산장 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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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향조
작품등록일 :
2019.10.19 2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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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6.19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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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3 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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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화 - 나 좀 꺼내줘 5

DUMMY

* * *


에반은 말을 탄 채 고루본의 뒤를 따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인적이 드문 곳으로 들어오게 되자 그의 입가가 씰룩거렸다.


‘마침 잘 됐지. 이대로 순순히 보내주긴 찝찝했거든.’


고루본은 미리 장소라도 봐둔 듯 완벽하게 둘이서만 결판을 낼 수 있을 법한 공터로 그를 데려왔다.


“그렇게 속이 좁으셔서야 총독은 어떻게 해먹으시나?”


에반이 말을 멈춰 세우며 말했다.


“그저께 물 먹은 게 어지간히도 속이 쓰렸나보네. 하긴, 여행 갈 때마다 물 때문에 속앓이 하는 거 조심해야지. 그렇지 않나?”

“······천박한 놈. 언제까지 그 가벼운 입을 놀릴 수 있을지 궁금하군.”


에반이 빈정거리자 고루본은 허리춤에 찬 검을 꺼내들었다. 번뜩거리는 것이 평범한 검은 아니었다.


‘저 정도 퀄리티라면 무조건 드워프 작품이군. 뻔뻔한 자식, 남의 피땀 어린 물건을 홀라당 훔쳐 먹으니까 그런 꼴을 겪은 거다.’


에반은 소문을 듣고 플로린에 속속들이 도착했던 드워프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비통함과 절망으로 가득 찬 눈이 신의 불꽃을 보고 일말의 희망을 품는 순간, 에반은 도저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괜히 부끄러웠지. ······딱히 그 남사스러운 석상 때문은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고 종족 전체가 에반, 한 사람을 믿고서 플로린에 정착하는 상황. 그는 그만큼 막중한 책임을 지고 있었다.


“그런 거 함부로 꺼내도 괜찮겠어? 애써 모은 건데 부러지면 아까울 텐데?”

“너 같은 기본도 안 되어 있는 놈에게 과분할 정도지. 잔말 말고 너도 검을 뽑아라. 허리춤의 그것은 장식인가?”


‘제대로 열 받았네. 앞 뒤 안 가리고 싸움부터 건다니 말이야.’


송곳니를 드러내는 고루본을 보며 에반이 미소를 지었다.


“먼저 사과하지. 미안하지만 이건 장식 맞거든. 자존심에 상처 입지 않게 하려고 일부러 안 뽑은 거라고.”


에반은 플로린에서 떠나기 전 켐베르토에게서 받은 예장용 검을 꺼냈다.


맑은 소리와 함께 뽑혀 나온 검은 고루본의 것과 비교해도 꿇리지 않는 검광을 발했지만 날은 서있지 않았다.


“······검도 제대로 휘두르지 못하는 자가 어찌 자신의 것을 지킬 수 있겠나. 부끄러운 줄도 모르는군.”


고루본은 잠시 놀란 눈을 하다가도 다시 적의를 불태웠다. 그의 비아냥에 에반은 코웃음만 쳤다.


“그러는 너는 잘난 검술로 뭘 지켰나? 내 눈엔 여기 와서 이틀 만에 많은 것을 잃은 것처럼 보이는데? 그 많던 호위들은 어딜 갔지?”

“개자식······!”


고루본이 욕을 하며 이를 갈았다. 까득하고 날카로운 소리가 에반에게까지 들렸다.


적당히 말로 놀려먹었다고 생각한 에반은 다시 검을 칼집에 집어넣었다.


“뭐하는 거냐! 지금 비겁하게 꼬리 말고 도망치려는 셈이냐?!”

“성질 한 번 급하네. 기왕할거면 제대로 해야 될 거 아냐?”


고루본이 소리쳐도 에반은 느긋하게 말에서 내렸다. 그는 말의 목을 쓰다듬으면서 고루본을 쳐다봤다.


“랜스도 없는데 마상시합은 좀 아니잖아? 기왕 결투라면 내려와서 자신의 주특기로 시원하게 싸워보자고.”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 것이지?”

“왜? 막상 싸우려니 겁나나? 원한다면 너는 말에서 탄 채로 싸워도 된다만······.”

“네 놈이야말로 말도 제대로 타지 못하니 그러는 것 아니냐!”

“하! 찔렸겠지만 그렇게 발끈할 것까지는 없잖아? 그럼 너는 제대로 기량을 발휘하지 못하는 상대와 싸울 생각이었나 봐? 비겁한 녀석.”

“······.”


고루본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제대로 말려버렸단 생각에 속으로 욕을 내뱉었다. 그걸 눈치 챈 에반이 키득거렸다.


‘사실 스킬 덕분에 이젠 말 위에서 싸워도 자신이 있지만······ 세자 저하께 빌린 말이니까. 다치면 곤란하지.’


말 못하는 짐승이지만 에반을 배려해 이것저것 신경을 써준 고마운 동물이었다. 굳이 왕자의 말이 아니더라도 다치게 할 생각은 없었다.


“상관없다. 어차피 너 같은 무뢰배는 어떻게 하든 내 상대가 되지 못하니! 네 특기인 주먹이나 꼴사납게 휘둘러봐라!”


그리 말하며 고루본은 검으로 준비 자세를 취했다. 깔끔하고 군더더기 없는 몸놀림. 어딜 봐도 높은 수준에 오른 검사의 모습이었다.


“이제 와서 잘난 척하긴.”


에반은 천천히 걸어 나가며 손목을 풀었다.


‘너무 얕봐도 곤란하겠지. 그 유명한 총독이니.’


그가 약한 것은 아니었지만 상대방은 어디까지나 이 세계 역사의 흐름에 관여하고 있던 NPC.


유저들이 정확한 레벨 수치를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었지만 추산하기로 최상위 고수 수준이었다.


에반은 적당한 곳에서 멈춰 섰다. 그는 주먹을 쥐었다가 뻐근한 목을 돌렸다. 뚜둑거리며 시원한 관절 소리가 들렸다.


마찬가지로 다가오던 고루본도 적절한 위치에 멈춰서 더욱 자세를 안정적으로 낮췄다.


격식을 갖춘 대결에서 잡는 자세가 아닌, 단 일격에 상대의 목숨을 취하겠다는 의지가 담긴 자세였다.


고루본은 자세를 취한 채 에반의 눈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보고 말했다.


“······그런 성격을 숨기고 잘도 영웅 행세를 했군.”


생사를 건 결투를 눈앞에 두고도 에반은 오히려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웃고 있었다.


“누가 할 소릴. 웃고 있으니 더 흉한 면상이구만.”


고루본의 한쪽 눈에 비친 에반은 이가 보일 정도로 웃고 있었다.


‘이상하다. 내가 원하던 것은 이런 것이었나?’


등골이 저릴 정도로 짜릿한 기분이 전신에 흘러넘쳤다.


에반은 지금 이성을 유지하고 있다고 자신할 수 없었다.


속에서 끝없는 투쟁심이 끓어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에반의 주먹에서부터 검은 기운이 일렁거리며 피어나 팔뚝을 기어올랐다.


“너 같은 천한 자에게 어울리는 칙칙한 색이로군.”

“기왕이면 모든 것을 포용하는 색이라고 해주지? 누구처럼 촌스럽게 빨간 색깔이 아니라 아주 고급스러운 색이거든.”


고루본의 검에서는 용암보다 붉은 기운이 타오르듯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의 외견과 아주 어울리는 강렬한 색이었다.


둘이 본격적으로 싸울 준비를 하자 흘러넘친 기운이 맞부딪치기 시작했다. 바람 한 점 불지 않던 숲이 변했다.


공기가 흔들리며 잎들이 무성한 나무들의 잎 부딪히는 소리는 마치 결투장의 관중들이 환호하는 것 같았다.


팽팽한 긴장감이 두 사람 사이에 감돌았다. 에반은 발 한쪽을 뒤쪽으로 조금 빼면서 말을 걸었다.


“김새게 하고 싶진 않은데······ 하나만 묻지.”

“······떠나는 저승길에 인사가 빠지면 아쉽겠지. 좋다. 말해봐라.”

“왜 그렇게 화가 난 거지? 옛날에 집적거리던 첫사랑을 뺏긴 탓인가? 아니면 단순히 창피를 당해서인가? 혹시······ 둘 다?”


강렬한 도발. 고루본은 얼굴을 마구 구기며 읊조렸다.


“역시 아무것도 모르는군. 어리석은 자 같으니.”

“글쎄, 너보단 아는 게 많을 것 같은데?”

“아니! 무지한 네놈 탓에 모든 것을 망쳤다!”


고루본은 이 말을 끝으로 강하게 땅을 굴렀다. 그는 제법 떨어진 간격을 한순간에 좁히고 들어왔다.


“이봐! 좀 알아듣게 말하지 그래!?”


위협적인 검격을 에반은 두 팔을 내밀어 맞받아쳤다. 강한 기운들이 서로 부딪히며 불꽃이 튀었다.


그 여파로 마치 공기가 찢어지는 것 같은 소름끼치는 소리가 터졌다.


“이 미련한 제국 친구야! 묻는 말에 대답도 제대로 못해주는 거냐?”


검격을 튕겨내는데 성공한 에반은 뒤쪽 발을 축으로 빙글 돌았다. 회전력이 담긴 주먹이 매섭게 고루본의 얼굴을 향해 꽂혔다.


“미련한 것은 네놈이다! 네가 무슨 짓을 저지른 건지 아직도 모르는 것이냐!”


고루본은 에반의 주먹을 검을 세워 막았다. 마치 거대한 바위에라도 부딪힌 것처럼 검이 울리자 그는 가벼운 신음을 삼켰다.


“그럼 그렇게 잘난 척하지 말고 지껄여보라고! 이런 상황에서까지 말을 아낄 필요가 있어?”

“닥쳐라!”


고루본은 주먹을 밀쳐내고 이번엔 검을 수평으로 세워 찔러왔다. 양손으로 잡아 강하면서도 더욱 빨라 위협적인 기세였다.


“어이쿠. 다치겠네.”


에반은 빠르게 옆으로 피해 반격하려고 했다.


“뭣······.”


하지만 실패했다. 에반이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도저히 검의 궤적을 바꿀 수 없다고 자신하며 회피한 것이지만 고루본의 검은 놀랍게도 순식간에 에반을 향해 휘둘러졌다.


“끝이다!”


고루본은 기회를 잡아 의기양양하게 외쳤다. 금방이라도 에반의 심장을 벨 것처럼 붉은 검이 다가오고 있었다.


‘피하기엔 늦었다. 그렇다면······.’


찰나의 순간에 에반은 발에 힘을 집중해 땅을 찼다. 검은 기운이 벼락처럼 발까지 닿더니 그의 발이 깊숙이 땅을 파고 들어갔다.


“와라!”


에반은 가슴을 쭉 피며 검을 피하지 않았다. 순간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채고 검을 거두려했지만 이미 기세를 탄 검은 에반의 가슴을 강하게 두드렸다.


“크윽!?”

“쿨럭!”


에반의 옷 아래 피어오른 수호자의 오라와 부딪힌 고루본의 검강이 폭발했다. 엄청난 충격에 고루본은 뒤로 튕겨져 나갔다.


“크······ 으윽! 어떻게 맨몸으로 내 검을······.”


간신히 넘어지는 것을 피한 고루본은 침음을 흘렸다. 분명 공격한 것은 그일 텐데 입가에서는 피 한줄기가 흐르고 있었다.


“퉤! 제법인데? 누가 쳐서 피 흘린 건 오랜만이야.”


목구멍을 타고 올라온 피를 뱉으며 에반은 웃었다. 땅에 박아둔 발로 그는 밀려나지 않고 그 자리에 굳건히 서 있었다.


“묵직한 회심의 일격이었는데 어쩌나? 나한텐 안 통하는 것 같은데?”

“괴물 같은 자식이······!”

“칭찬 고마워.”


에반은 땅에 박혔던 발을 꺼내며 흙먼지를 털어냈다.


‘······내가 피할 수 없다니. 망할, 믿는 구석이 있었잖아?’


태연하게 입가의 피를 손등으로 훔쳤지만 에반은 당황하고 있었다.


미처 옷 아래로 수호자의 오라를 발동해 몸에 두르지 않았다면 치명상을 입을 뻔 한 것이다.


‘단순히 허상으로 보이는 공격이 아니었는데 동시에 검이 다르게 휘둘러졌다. 그렇다면······’


에반은 떨리고 있는 고루본의 손을 보았다.


‘스킬인가! 얼마나 강하나 싶었더니 생각보다 위험한 놈이었어.’


몬스터를 상대하는 PvE에만 자신이 있었던 에반. 그는 얼마 전 암살자들의 습격을 상대하면서 PvP에도 소질이 있었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건 오산이었다. 제 아무리 고인물이라 하더라도 피할 수 없는 것은 있었다.


방금은 방심했다고만 넘기거나 예외로 따지기엔 너무나 위협적인 일격이었다.


‘수호자의 오라나 혹시 몰라 올려둔 강인도가 아니었다면 위험했다. 젠장! 영화 속 악당들처럼 될 뻔했네. 처음부터 전력을 다했어야 했어.’


사자는 토끼를 잡을 때도 최선을 다한다던가.


단순히 굶어죽기 싫어서라고 코웃음 치던 과거의 자신을 반성하며 에반은 수호자의 오라를 더욱 짙게, 온몸에 둘렀다.


“제기랄! 처음부터 전력이 아니었나! 얼마나 오만한 게냐!”


분하게 외치며 고루본은 다시 숨을 고르고 공격할 자세를 취했다.


“농락할 생각은 아니었어. 굳이 진심으로 싸울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거든.”

“이······!”

“그래. 화내는 건 좋아. 하지만 지금부턴 다를 거다.”


에반은 억눌렀던 살기와 위압을 있는 그대로 뿜어냈다. 순식간에 그의 뒤에 거대한 산이 들어선 것 같은 존재감이 드러났다.


고루본은 흠칫 몸을 떨었다. 곧바로 위압에 짓눌리지 않고 저항했지만 순간 두려움을 느끼고만 탓이다.


“잠시 숨을 돌릴 시간은 주지. 그 틈에 듣고 싶은 걸 들려줬으면 좋겠는데.”

“······뭐냐.”

“도대체 뭐가 너를 그렇게 몰아붙이고 있는 거지? 즐거운 연회에까지 나타나 수작을 부린 것은 너 아닌가?”

“······하!”


에반의 진지한 물음에 그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지금도 그것을 몰라 내게 묻는단 말인가? 어깨 위로 달린 것은 장식이 맞나보군.”


고루본은 허탈하게 웃으며 한쪽 밖에 남지 않은 눈을 부릅떴다. 오른쪽 눈에 떠오른 빛은 더 이상 에반을 두려워하지 않는단 증거였다.


“아둔한 자를 위해 짧게 줄이자면······ 너는 이용당하고 있단 거다.”

“헛소리로군.”

“아니, 너는 아무것도 모른다. 그러니까 그렇게 멍청하게, 그 속이 시커먼 작자들에게 좋을 대로 휘둘리고 있는 거다!”

“근거는 있는 소린가? 이제 와서 되는 대로 지껄인다고 이 기운을 거둘 일은 없어.”


에반의 으름장에도 고루본은 입술 한쪽을 치켜 올렸다.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세레노스의 국왕······ 현왕이라고 불린다지? 웃기지 마라. 그가 어떻게 왕좌에 앉았는지 알고 하는 소린가?”


고루본은 만천하에 고하듯 외쳤다.


“자기 형제와 자매, 그 조카들을 자기 손으로 죽이고, 선왕이 왕좌를 위협할 공신들을 다 쳐낼 때도 앞장섰던 자다! 지금의 유약해 보이는 모습은 가증스러운 가면이지. 자기 자식의 목을 치는 것도 직접 보지 않았나?”

“······그걸 모르는 사람이 있던가?”


에반도 보는 눈이 있고 듣는 귀가 있었다. 현 국왕이 어떻게 왕좌에 올랐는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에반은 그런 사실들에 크게 개의치 않았다. 그가 왕국을 생각하고 백성들을 아끼는 것 또한 사실이었으므로.


“크크크······ 그래! 원래 권력을 둘러싼 싸움이란 건, 왕의 피가 흐르는 자들에겐 숨 쉬는 것만큼 자연스러운 일이지. 그런 더러운 세계다.”

“······너는 그런 더러운 세계에 살고 있는 당사자 아닌가? 오크가 돼지 흉보는 격인데, 찔리지도 않나보지?”

“알고도 일부러 이런 세계에 발을 담근 자식에게 듣고 싶진 않군.”

“······.”


에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최근 들어 귀족 세계의 어두운 면을 더욱 실감하고 있었기에 그랬을지도 모른다.


“세레노스의 왕이 무엇을 원하는지, 뭘 꾸미고 있는지 제국이 모르고 있다 생각했나? 이대로 가면······ 남는 것은 끔찍한 전쟁뿐이다.”


고루본은 치가 떨린다는 듯 말했다. 그가 쥐고 있는 검의 끝이 흔들리는 것이 에반에게도 보였다.


“전쟁을 본 적이 있나? 며칠 전만하더라도 평범한 농부였던 병사가 팔 다리를 잃고 절규하는 소리는? 내장이 쏟아지고 피와 오물이 섞여 흐르는 대지의 끔찍한 냄새는? 밀 한줌 남기지 않고 약탈당한 대지에서 살아가는 자들이 방금 죽은 이웃의 살점을 씹을 때 맛은? 네놈은 아무것도 모른다!”


그가 총독에 오른 것은 제국 동부 국경에서 빈번하게 벌어지는 전쟁을 종식시킨 무훈 덕분이었다.


덕분에 제국은 더욱 넓은 대지를 지배하고, 부를 쌓게 되었지만 그것들은 고루본의 목적이 아니었다.


우연히 떠난 시찰, 그리고 교육을 위해 참전하게 된 전투에서 고통 받는 인간들을 보고 느낀 것 때문에 그는 검을 쥐었다.


보고 느낀 것을 그대로 토해내며 그는 에반에게 토해내듯 말했다.


“그런 비극을 막기 위해 나는 최선의 수를 선택했을 뿐이다. 어차피 파토나긴 했었으나 그녀는 내 과거의 약혼자 후보 중 한명. 아무런 문제 될 것도, 걸림돌도 없었다. 모든 것이 완벽했다······ 네 놈의 방해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검으로 가리켜진 에반은 담담하게 반박했다.


“그렇다고 네가 저지른 만행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 어째서 능력이 있는데도, 그렇게 정의로운데도 막상 위험에 닥친 이들을 구하지 않고 방관했지? 아니, 오히려 방해하고 핍박했던가?”

“······그 점에 대해선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하지만 필요한 조치였다. 그리고 그 자들도 우리들을 외면했었다! 오히려 그자들이 팔아넘긴 병장기에 우리 백성들이 죽어나갔지!”

“무기를 든 자들이 그렇게 쓴 것이 잘못이지. 드워프들의 무기는 제국에서도 비싼 값을 치루면서 구해 쓰지 않았나?”

“쓸데없는 것으로 꼬리를 잡아 논점을 흐리려는 것이냐?”


고루본이 사납게 인상을 찌푸리며 말을 끊었다.


“아니. 다만 희생되지 않았을 사람들까지 누구들 때문에 희생되었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야.”


에반은 여전히 제국에 좋은 감정을 가질 수 없었다. 많은 이유가 있었지만 고루본의 말을 듣고 나니 더욱 꺼려졌다.


“괜히 듣고 나니 속이 거북하군. 제국은 역시 마음에 들지 않아.”


수호자의 오라로 전신을 감싸 갑옷을 입은 것처럼 된 에반. 머리를 감싼 투구 외형의 기운 사이로 안광이 예리하게 번뜩였다.


“하하······ 그리고 네가 성대하게 착각하는 것이 있더군.”


그 무시무시한 안광을 정면으로 받아넘기며 고루본이 웃었다.


“너는 그 공주가 진심으로 너를 사랑한다고 생각하나?”

“······그런 것까지 알고 있었나?”

“제국이 모르는 것은 없다. 그리고 굳이 듣지 않아도 알겠더군. 네놈의 태도나······ 아무것도 없는, 욕심도 없던 놈이 어째서 왕의 개가 되었는지 생각해보면 간단하지.”


고루본은 비웃음 섞인 미소를 더욱 짙게 지었다.


“영웅이라고 치켜세우니 뭐라도 되는 줄 알았나? 얼굴은 반반한 그 공주가 달콤한 말을 속삭여주니 세상이라도 다 가진 기분이었나? 멍청하긴!”


에반을 가리키는 검이 한번 가볍게 휘둘러지며 더욱 맹렬한 붉은 기운을 불태웠다.


“속고 있는 거다! 모두 이용해먹기 좋은, 어리숙한 네놈을 속이기 위한 짓이란 말이다! 사랑이라니 우습군! 그런 낯간지러운 감정으로 왕족이 움직일 거라 생각했나?”

“······더 말해보시지.”


에반의 주먹이 강하게 쥐어졌다.


검은 기운은 마치 사그라지는 것처럼 정제되는 반면, 살기는 더욱 짙게 피어나며 그의 주변을 휘감기 시작했다.


“얼마든지! 어떤 식으로 구슬려졌을지는 뻔하지. 넌 속고 있던 거다! 멍청하지만 무력만 따졌을 땐 네놈의 이용가치는 훌륭하니까! 감히 제국에 이런 왕국을 견줄 만큼!”


에반이 흥분하여 이성을 잃는 것처럼 보였기에 고루본은 더욱 신랄하게 그에게 말을 내뱉었다.


“설마 아무것도 없는 평민에게 그녀가 접근했겠나? 마치 운명처럼 사랑을 느꼈을 거란, 그런 순진한 생각을 아직도 가진 것은 아니겠지! 떠올려라! 그 계집의 몸에도 그 간악한 왕족의 피가 흐르고 있단 사실을! 그 알량한 권력을 지키기 위해 어떤 더러운 짓을 할 수 있을지 잘 생각해 보아란 말이다!”


그때였다.


“헉!”


고루본의 눈이 찢어질 것처럼 커졌다.


쿵하는 소리가 울리나 싶더니 순식간에 에반이 사라졌다. 눈으로 쫓았을 때는 이미 코앞에 에반이 다가와 있었다.


“할 말은 그게 다냐?”


에반이 속삭이듯 말을 걸었다.


거기엔 깊고 어두운 분노가 묻어있었다.


그와 함께 선명하게 느껴지는 죽음의 향기. 그것은 고루본이 오랫동안 전장에서 경험해보며 겪은 것과는 다른 무언가다.


당연할지도 몰랐다. 지금까지 고루본이 경험한 죽음이란 것은 엄연히 타인의 것. 이렇게 자신을 위협하는 것은 그가 살면서 처음 겪는 것이었다.


고루본은 눈앞에 닥친, 감히 거부할 수 없는 공포와 직면해 답하지 못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답할 시간을 에반이 주지 않았다.


“······유감이지만 네 말이 맞는 것 같네.”


그 말을 끝으로 에반의 주먹이 번개처럼 고루본의 얼굴을 향해 뻗어왔다. 방금 전 맞부딪칠 때와는 명백하게 다른 기세였다.


‘이대로 끝나고 마는 것인가.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나······ 허무하구나.’


죽음을 직감한 고루본이 하나뿐인 눈을 질끈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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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 126화 - 뒤엉킨 실 5 +1 20.03.09 176 2 15쪽
126 125화 - 뒤엉킨 실 4 20.03.06 194 1 15쪽
125 124화 - 뒤엉킨 실 3 20.03.04 171 1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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