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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온주 님의 서재입니다.

풍혼무적 - 흑룡이 봉인된 검을 찾아야 한다고 합니다.

무료웹소설 > 자유연재 > 무협, 대체역사

한온주
작품등록일 :
2019.04.01 20:48
최근연재일 :
2019.07.17 18:00
연재수 :
54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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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60
추천수 :
57
글자수 :
293,471

작성
19.05.10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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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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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30화 - 진광과의 첫 만남

DUMMY

“아미타불. 곳곳에 시체가 없는 곳이 없구나.”


흥화진 부대와 귀주 부대가 요 성종의 거란 본진을 맞아 의기충천한 죽음을 맞이한 애전. 지나가던 이십 대의 젊은 중 한 명이 애전 벌판에 가득한 고려군의 시신들을 보고 불호를 외웠다.


“이분들의 희생으로 셀 수 없이 많은 생명들이 살아났으니 그 공덕이 얼마나 클 것인가. 불제자 된 도리로 내 어찌 그냥 지나칠 수가 있으랴.”


진광(眞廣)이라는 법명(法名)을 가진 중은 참혹하게 흩어진 고려군 시신들을 하나하나 거두어 모았다. 하지만 그는 거란군의 시신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는 불제자지만 고려의 백성이기도 했던 것이다.


시신들을 한데 모은 그는 근처의 숲으로 가서 허리에 매어둔 법패(法牌)를 풀어 손에 쥐었다. 단단한 박달나무에 법명을 새긴 진광의 법패는 보통의 법패와 달리 끈이 매우 길었다.


“법패로 사람을 패는 것보다는 나무를 하는 게 더 나을 테니 부처님께서도 이해하시겠지. 껄껄껄.”


진광은 법패의 끈을 쥐고 슬슬 흔들었다. 그의 몸에서 흰빛이 피어오르고 법패가 진동했다.


훙훙훙.

진광이 법패를 사방으로 휘두르자 백광을 담은 법패에 맞은 나무들이 우지끈 부러졌다. 진광이 파팟 소리를 내며 재차 법패를 휘둘러 부러진 나무들을 때렸다.


불문신공의 공력이 실린 법패는 어렵지 않게 나무들을 쪼갰다. 그렇게 수십 차례 법패를 휘두른 진광은 숨을 가다듬고는 법패를 다시 허리에 묶었다. 그의 주변에는 법패로 쪼갠 나무들이 널려 있었다. 진광은 다비(茶毘)를 행하기 위해 나무들을 시신이 쌓인 곳으로 가지고 갔다.


“부디 극락왕생하소서. 나무 관세음보살.”


부싯돌을 탁탁 쳐서 불꽃을 일으킨 그가 잘 마른 나뭇가지에 불을 붙였다. 불 붙은 나뭇가지는 시신과 나무를 쌓은 곳에 던져졌다. 진광이 미리 송진이 잔뜩 묻은 관솔을 나무들 사이에 넉넉히 섞어두었기 때문에 불은 금방 활활 타올랐다.


“으음...”


한참이나 불에 타는 시신들을 바라보며 불경을 외던 진광의 눈이 번쩍 떠졌다. 불가의 무공으로 단련된 그의 예민한 감각에 희미한 신음소리가 들렸다.


“응? 이게 무슨 소리지?”


그가 황급히 소리가 나는 쪽으로 귀를 기울였다. 아직 불이 붙지 않은 시신 더미 사이에서 가느다란 소리가 새어나왔다. 타닥타닥 나무에 붙은 불이 소리가 나는 쪽으로 옮겨 붙는 중이었다.


진광은 서둘러 공력을 끌어올렸다. 그의 손이 빠르게 움직이며 시신 더미를 들어냈다. 아직 어려 보이는 소년 한 명이 시신 더미 밑에 깔려서 끊어질듯 말듯 미약하게 숨을 쉬고 있었다. 죽음의 회오리를 불러낸 후 기력이 다해 고려군의 시신 아래에 깔렸던 괴명성이었다.


“허허. 큰일 날 뻔 했구나. 설마 살아있는 사람이 있었을 줄이야. 하마터면 꼼짝없이 산 채로 태울 뻔했네그려.”


불이 붙기 직전 간신히 괴명성을 시신 더미에서 꺼내어 땅에 조심스레 눕힌 진광이 급히 그의 맥을 짚었다. 진광의 손에 미약하게 움직이고 있는 괴명성의 내공이 느껴졌다.


“어린 시주가 무공을 익혔군. 상처가 많고 내공이 바닥나긴 했지만 본신의 생명력까지 손상되지는 않았어. 불의 열기 덕에 밤새 얼어붙은 몸이 되살아난 것인가. 실로 부처님의 가피로다.”


그가 서둘러 냇가로 달려가 허리춤에 매달려 있던 호리병에 물을 담았다. 물을 괴명성의 입에 흘려 넣은 그는 자신의 승복을 찢어 물에 적신 뒤 상처를 닦아주었다. 급히 숲으로 뛰어가 약초 몇 종류를 뜯어온 진광이 법패로 약초를 짓이겼다. 괴명성의 전신에 가득한 상처에 약초의 즙을 바르고 다진 잎을 붙인 진광은 공력을 한껏 끌어올렸다.


“이대로 두면 죽고 말겠군. 부족한 내가 불문의 신공을 익힌 건 이때를 위한 세존의 뜻이었는가. 아미타불.”


그는 하얀 서광이 어린 손으로 괴명성의 몸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정순하기 그지없는 불문신공의 공력이 괴명성의 몸 속을 수차례 씻어냈다. 진광의 불문 공력이 괴명성의 몸을 치료하며 안에 있던 탁기마저 없애주었다. 어마어마하게 정순한 공력의 공능이었다. 장엄한 백광이 괴명성의 전신을 감싸고 있었다. 진광의 몸에서 땀이 비 오듯 흘렀다.


이윽고 괴명성의 내공이 진광의 공력에 반응하여 스스로 움직였다. 진광은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급한 상황은 넘겼으니 조금만 기다리면 깨어나겠지. 다비나 마저 끝내야겠구나.”


괴명성을 치료하느라 많은 내력과 심력을 소모한 진광이 피곤에 절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호흡이 띄게 안정된 괴명성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어린 시주가 무슨 기연이라도 얻었던가? 기맥이 예상보다 훨씬 많이 열려 있구나.”


진광이 시신을 태우는 다비를 행하고 있을 때 괴명성이 깨어났다. 정신을 차린 괴명성은 온 몸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신음을 흘렸다.


“으음... 윽.”

“어? 깨어났군.”


괴명성의 기척을 느낀 진광이 염불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괴명성이 몸을 일으키려는 모습을 본 그가 급히 다가갔다.


“어허. 아직 움직이는 건 무리야. 그대로 누워있게, 시주.”


낯선 목소리와 말투에 괴명성은 성치 않은 몸으로도 경계를 했다. 천만다행히 풍혼공은 정상적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스, 스님은?”

“난 그냥 지나가던 땡중이라네. 법명은 진광이라고 하지. 자네는 거란군과 싸웠나 보군.”


진광의 대답에 괴명성은 억지로 몸을 움직였다. 창칼에 베이고 찔린 상처가 고통스러웠지만 다행히 내상은 없었다. 내공을 전부 쓴 후유증인지 몸에 힘이 없었지만 혼절해있는 동안 몸의 기능은 전부 회복된 것 같았다.


“아, 스님께서 저를 구해주셨나 보군요.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허허. 죽어가는 사람을 구하는 건 불제자의 당연한 도리니 괘념치 마시게.”


천진한 진광의 웃음에 괴명성은 마음속에 일어났던 한 줄기 의심이 풀어졌다.


“네. 저는 양규장군의 부하인 괴명성이라고 합니다.”

“역시 그랬었구만. 그분들 덕에 거란군에게서 풀려난 백성들의 입을 통해 양규장군과 김숙흥장군의 활약이 고려 전역에 퍼지고 있다네.

난 마침 근처를 지나다 애전 전투에 대해 듣고 고귀한 영웅들의 시신이나 거두어줄까 해서 온 것이고 자네와 이분들이 정말 큰일을 하신 걸세. 아미타불.”

“제가 얼마나 정신을 잃고 있었던 겁니까?”

“하루라네.”


정중히 합장하는 진광의 너머로 불에 타고 있는 고려군의 시신들이 보였다. 괴명성은 성치 않은 몸을 강제로 일으켰다. 깜짝 놀란 진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는 시신들이 있는 곳으로 절뚝거리며 걸어갔다.


“장군님... 장군님...”


괴명성은 뜨거운 줄도 모르고 이미 재가 되어버린 시신들을 살폈다. 검게 탄 뼈와 갑주만이사람의 흔적을 보여주고 있었다. 누가 누구인지 분간도 할 수 없게 고루 타버린 터라 양규와 김숙흥의 시신을 찾을 수조차 없었다.


검댕이 잔뜩 묻은 괴명성의 눈에서 눈물이 툭 떨어졌다. 불덩이를 만진 손보다 영혼이 더욱 뜨겁고 쓰렸다. 미친 사람처럼 잿더미를 헤집던 그는 두 동강난 양규의 검과 김숙흥의 부러진 창을 찾아낼 수 있었다.


“또... 나 혼자 살아남았구나.”


괴명성의 얼굴에 회한의 눈물이 흘렀다. 평로진에 이어 이번에도 자신만 살아남게 되었다. 사문에 분명히 사부님과 사형들이 있건만 혼자가 된 것 같은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




괴명성은 땅을 퍽퍽 파서 고려군의 시신을 태운 재와 뼈를 모아 묻었다. 그리고 양규의 검과 김숙흥의 창을 무덤 앞에 꽂았다. 깎은 나무에 자신의 피와 재를 섞어 양규와 김숙흥의 이름을 쓴 괴명성은 땅에 엎드려 오열했다. 가만히 괴명성을 지켜보던 진광은 그 옆에서 나직하게 염불을 하였다.


피 냄새와 탄내가 애전에 가득했다. 해가 몸을 낮추며 바람이 불어왔다. 목숨을 바쳐 나라와 백성을 지킨 고려군의 혼령이 하늘로 돌아갔다. 쑥밭이라는 뜻을 가진 애전(艾田)은 이 날의 슬픔으로 인해 슬픔이 전해진다는 의미의 애전(哀傳)으로 쓰이기도 하게 되었다. 이후 애전은 쑥조차 나지 않는 땅이 되었다고 한다.


“시주. 이제 어디로 갈 생각이오?”


괴명성이 어느 정도 슬픔을 가라앉힌 듯 보이자 진광이 물었다.


“사문으로 돌아갈까 합니다.”


처연한 목소리로 괴명성이 대답했다. 그는 이번 전쟁을 겪으며 자신의 부족함을 뼈저리게 느꼈다. 자신이 더 강했더라면 사람들을 구할 수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전쟁에서 맨손으로 싸우는 건 한계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

자신은 무림인이었지만 결국 복수를 하기 위해서는 전장에 서야만 했다. 야율부동검이 전쟁에 참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자면 풍혼문의 무공만으로는 부족했다. 복수를 위해 전장에 서려면 괴명성에게는 병장기를 다루는 무공이 꼭 필요했다. 그는 우선 풍혼문으로 돌아가 무공을 다듬고 그 후에 병장기를 다루는 무공을 배울 계획이었다. 군역의 경험이 있는 대사형의 도움을 받는다면 충분히 가능할 거라 여겨졌다.


“시주가 무공을 익힌 건 진작 눈치 채고 있었네만 사문이 어디인가?”

“낭림산에 있는 풍혼문입니다, 스님.”


그 앞에서 무공을 펼친 적도 없건만 자신이 무공을 익힌 사실을 아는 걸 보면 저 진광이라는 승려도 무공을 배운 게 틀림없었다. 괴명성이 새삼스러운 눈길로 상대를 바라보았다. 연장이라고는 보이지도 않는데 다비에 쓴 나무들을 마련한 걸 보니 일신의 무공이 대단할 게 분명했다.


진광의 몸 어디에도 무기가 보이지 않는 걸 보아 그도 역시 적수공권이 특기인 것 같았다. 내심 진광이 무기술을 알고 있으면 좋겠다 생각하던 괴명성이 아쉬음을 삼켰다.


“풍혼문이라면 맹 시주가 있는 곳이 아닌가? 허허. 아주 훌륭한 곳을 사문으로 두었군. 몇 년 전 맹 시주가 고려 전역을 돌아다니며 무공을 수련할 때는 정말 대단했지.”


대사형을 아는 체하자 괴명성이 깜짝 놀랐다. 대체 맹사형은 얼마나 대단하길래 풍혼문의 이름을 듣는 사람마다 그를 언급한단 말인가. 진광이라는 저 승려 또한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이 상하게 들었다.


“저의 대사형입니다. 저는 맹 대사형께 무공을 배웠습니다.”

“역시. 괴시주의 무공도 나이에 비해 상당하군. 군에 있었던 걸 보니 이번 거란의 침공 때문에 무병으로 차출되었던 게로군. 헌데 송 문주님의 아들 둘이 있을 텐데? 그들이 군역을 할 차례가 아니었나?”


뜻밖에도 진광은 풍혼문의 사정을 훤히 알고 있었다. 그의 지적에 괴명성은 얼굴이 붉어졌다, 괴명성은 어쩔 수 없이 자신이 거란군에게 복수하고자 몰래 사문을 빠져나와 군역을 지게 되었다는 사실을 털어놓았다.


“하하하하. 이거 정말 맹랑한 어린 시주로군. 빨리 사문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되겠네. 송 문주님과 맹 시주가 크게 걱정하고 있을 거야. 아마 곽주성이나 흥화진에서 서신을 보내 알렸겠지만 그래도 얼마나 노심초사하고 있겠나.

나와 함께 풍혼문으로 가세. 이 땡중이 여기까지 왔으니 송 문주님과 맹 시주에게 인사나 하고 가야겠네.”


제멋대로 결정한 진광이 껄껄 웃으며 움직였다. 그의 실행력에 휘말린 괴명성은 슬픔에 젖어있을 겨를도 없었다.


“뭐하는가? 낭림으로 돌아가지 않을 겐가? 곧 날이 어두워진다네. 서둘러야 애전을 벗어날 수 있을 걸세.”


성큼성큼 앞서 가던 진광이 뒤돌아보며 호통을 쳤다. 괴명성은 황망히 그의 뒤를 따랐다. 산 그림자가 짙어지며 골짜기에 눈이 채워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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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54화 - 뇌천대를 떠나다. 19.07.17 117 0 12쪽
53 53화 - 재도전 19.07.04 144 0 12쪽
52 52화 - 설죽화의 깨달음 19.07.03 130 0 12쪽
51 51화 - 인연 19.07.02 104 1 11쪽
50 50화 - 살수2 19.06.27 122 0 11쪽
49 49화 - 살수 1 19.06.26 123 0 12쪽
48 48화 - 설죽화2 19.06.25 144 0 11쪽
47 47화 - 설죽화 19.06.20 134 1 11쪽
46 46화 - 강민첨 19.06.19 135 1 12쪽
45 45화 - 뇌천대 19.06.18 164 2 12쪽
44 44화 - 노인의 정체, 그리고... 19.06.13 160 3 13쪽
43 43화 - 탈영병 괴명성 19.06.12 151 2 13쪽
42 42화 - 개경에서 19.06.11 158 1 12쪽
41 41화 - 이별 (2) 19.06.06 183 0 12쪽
40 40화 - 이별 (1) 19.06.05 167 0 12쪽
39 39화 - 심의원 19.06.04 166 0 13쪽
38 38화 - 월명회와의 혈투 (2) 19.05.30 180 1 11쪽
37 37화 - 월명회와의 혈투 (1) 19.05.29 179 0 12쪽
36 36화 - 다시 만난 은나운 +1 19.05.28 185 0 12쪽
35 35화 - 전쟁이 끝난 후 19.05.23 204 0 12쪽
34 34화 - 은랑의 최후 19.05.22 200 1 11쪽
33 33화 - 구리가라검의 비밀 19.05.21 183 0 11쪽
32 32화 - 멸문 19.05.16 182 0 12쪽
31 31화 - 낭림산의 무병들 19.05.15 177 0 11쪽
» 30화 - 진광과의 첫 만남 19.05.10 181 2 12쪽
29 29화 - 애전전투, 고려군의 의혼 (2) 19.05.09 180 0 12쪽
28 28화 - 애전전투, 고려군의 의혼 (1) 19.05.08 194 0 12쪽
27 27화 - 양규장군 19.05.07 177 1 14쪽
26 26화 - 곽주성 탈환 19.05.06 204 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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