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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 작가의 서재

가스토리 1부 - 흑월

무료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라이트노벨

완결

TheZXCV
작품등록일 :
2020.02.23 12:50
최근연재일 :
2021.02.21 23:55
연재수 :
75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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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2
추천수 :
23
글자수 :
647,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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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9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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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4쪽

유망주들 (完)

DUMMY

{제 2왕녀 다이아, 실적 문제로 위기에 처하다}



만약 여기에 적힌 문구가 맞다면 하얀색 로브로 얼굴을 가린 저 소녀는 왕녀라는 뜻이 된다.


비록 자애로운 미소가 지금 상황에서는 보이지 않는다고 해도, 사진 속의 왕녀와 같은 푸른색 머리카락이 조금씩 튀어나와 있는 것으로 보아 사실이겠지.


(그래서 스톤은 그때 물러날 수밖에 없었군. 이미 한 나라의 왕녀를 상대로 폭력을 시도한 셈이나 마찬가지니까.)


비록 다이아가 정체를 감췄다고는 하나, 과연 그 변명이 통할지는 미지수에 가깝다. 사실 그 자리에서 곧장 처형당해도 할 말이 없을 지경이니까.


"이봐, 설마 이대로 아무 말도 하지 않을 셈이냐? 미안하지만 나는 참을성이 없다고. 생각할 시간을 길게 주진 않을 거야."

"크윽···."


하지만 어째서 저 녀석은 저리 말할 수 있는 거지?

분명 다이아의 정체를 알고 있을 텐데도 계속 강압적으로 몰아붙인다니. 평범한 사고방식으로는 절대 할 수 없는 행동.


그렇다면 설마, 재-현은 그녀가 왕녀라는 사실을 인지했음에도 저런 위험한 협박을 하고 있다는 건가.


(제정신이 아닌 녀석이라는 건 일단 확실하네.)


"명확한 답을 내놓지 못하는군. 그게 아니면 내가 너무 과대평가했던 건가? 분명 좋은 핏줄을 타고난 인재였을 텐데?"

"그 이상은 말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그렇지 않으면···."

"아직도 허세가 통하지 않는 상대라는 걸 모르는 거냐? 내가 움직이지 않는 이상, 지금의 너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그제야 잡고 있던 팔을 놓아줬다.

결국 다이아는 자력으론 재-현을 떨쳐낼 수 없었다. 결과적으로 철저하게 패배한 셈이나 다름없는 결과.


본인도 그 사실을 인지하고 있는지, 주먹을 꽉 쥐고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자존심이 강한 만큼 참기 힘든 상황이겠지.


"뭐야, 너 설마 이대로 상황을 끝내버릴 생각이냐?"

"....."


그럼에도 재-현을 상대로 뭔가 시도하려는 낌새조차 보이지 않는다는 건, 그만큼 자신의 정체가 밝혀지는 게 두려워서일까.


(오히려 왕녀의 지위를 잘 이용하면 곧바로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아까 전에 스톤이 싸움을 멈췄던 것처럼.)


그게 아니라면 혹시 나와 같은 케이스일 수도.

만약 저런 상황에 빠진다고 해서 내가 정체를 밝힐 수 없듯이, 다이아 또한 그런 딜레마에 빠졌을 가능성이 있다.


"절대 그렇게 둘 수는 없지. 슬슬 얼굴을 보여줘야겠어."

"미리 말해둘게. 그딴 짓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마지막 경고라는 듯이 다이아가 눈썹을 찡그렸다.

당연하지만 재-현은 들은 척도 하지 않은 채, 그녀의 후드 쪽으로 손을 옮기고 있을 뿐.


-그 순간, 다이아의 발차기가 그의 얼굴 쪽으로 날아갔다.


아무런 징조도 없이 기습적으로 행한 공격.

저번에 봤을 때도 느낀 거지만 그녀의 동작은 전부 간결하면서도 묵직하다. 그 위력은 스톤조차 무시할 수 없을 정도.


만약 저 공격을 정통으로 맞는다면 꽤나 큰 피해를 받겠지.

어디까지나 맞았다는 가정일 뿐이지만.


"이런, 말이 통하지 않으니 곧바로 공격인가. 거친 녀석이군."

"-!"


그러한 공격을 재-현은 오른손으로 가볍게 막아내었다.

분명 기습에 가까운 공격임에도 불구하고 아무렇지 않게 반응하다니. 엄청난 반응 속도를 보여주는군.


(역시 폭력에도 강한 녀석이었구나. 하긴, 위험한 도발을 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전투는 가능해야겠지.)


심지어 아파하는 기색도 보이지 않은 채로 손을 툭툭 털기만 할 뿐. 그 모습에 압도당했는지 다이아도 잠시 주춤거렸다.


"어떻게···. 그 공격을 막아낸 거야···?"

"꽤나 충격받은 걸 보니 나름대로 회심의 일격이었나?"


불쾌한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 재-현.

그러고는 갑작스레 돌진하여 그녀를 향해 오른손을 뻗었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내 차례겠지?"

"-뭐?!"



설마 공격한다고는 생각하지 못한 걸까. 저번과는 달리 제대로 반응하지 못하고 그의 접근을 허용해 버린다.


거칠게 날뛰던 스톤이라고 해도 그녀의 정체를 알고 나서는 공격을 중단했으니까. 그렇기에 공격할 거라 예상하지 못한 거군.


(근데 세상에는 미친 놈들이 꽤 많더라고.)


재-현의 손은 정확히 후드 쪽을 향해 뻗고 있었다.

목표는 여전히 다이아의 정체를 드러내게 만드는 것. 하지만 의도를 알고 있어도 피할 수 없을 정도까지 근접한 상황.


그렇게 손이 닿는가 싶었던 찰나, 중간에 재-현의 팔이 멈췄다.

어느새 두 사람 사이에 파고든 누군가가 그를 제지한 것이다.


(잠깐, 저 뒷모습은 아까도 본 적이 있는데···?)


"···뭐냐, 너는."

"분명 두 사람 모두 <그랜드 스쿨>의 지원자지? 아무리 그래도 폭력을 쓰는 건 좀 아닌 것 같아서."


그의 팔목을 잡은 건 밝은 연두색의 머리카락을 가진 소년.

우연의 일치인지 이번에도 다이아를 구해줬군. 가게에서의 행보를 생각해 보면 아마 그녀의 정체를 알고 있겠지.


(거기에 이 여관에 있는 것과 말하는 내용을 보아하니, 아마 저 소년도 <그랜드 스쿨>의 지원자인가.)


확실한 건 다이아와는 다르게 재-현을 상대로도 힘에서 밀리지 않는다. 적어도 그를 제지할 정도는 된다는 것.


"갑자기 튀어나와서 방해하다니, 죽고 싶은 거냐?"

"이름이 분명 재-현이었지? 비록 <그랜드 스쿨>의 지원자를 견제하기 위해서라고 해도, 그렇게까지 괴롭히는 건 좋지 않아."


그뿐만이 아니라 거칠게 살기를 내뿜는 그를 상대로 미소를 잃지 않는다. 오히려 여유롭게 이 상황을 이어나갈 뿐.


"큭큭, 그건 내가 알 바 아니지.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무슨 수단이든 이용할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여기서 더 날뛸 생각은 없잖아? 자칫하면 왕녀님의 호위한테 목이 날아갈 수도 있어."


그 말대로 재-현의 목에는 이미 칼날이 겨누어진 상황.

어느새 튀어나온 하얀색 후드를 뒤집어쓴 사람들이 그에게 검을 내밀고 있었다.


당연하겠지만 왕녀의 주위에는 항상 호위가 배치되어 있다.

아무리 그가 강하다고 해도 전문적으로 훈련받은 호위를 상대로는 일말의 승산도 없을 테지.


"확실히···. 이 정도의 수를 상대로 덤비는 건 어리석은 짓이지. 한 명이라면 몰라도 여섯 명은 너무 많아."

"무서운 분들한테 둘러싸여 있는데도 자신감이 넘치네."


재-현은 천천히 양손을 위로 올려 항복의 자세를 취하지만, 그러면서도 여전히 미소를 지우지 않는다.


(이미 자신의 목적을 달성했기 때문인 건가.)


만약 여기까지 생각했다면 범상치 않은 녀석인데.

그녀가 스스로 정체를 밝히지 않으므로 이번에는 호위를 등장시켜 간접적으로 증명하는 방법을 쓰다니.


"잠깐···! 지금 왕녀님이라고 하지 않았어?"

"혹시 저 푸른색 머리카락은···. 설마 다이아 님이신가?!"

"아니, 그런 분이 이곳에 있을 리가 없잖아···."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진 여관 내부.

그들의 말을 듣고 경악하는 학생이나 반신반의하며 상황을 지켜보는 학생까지. 제각기 다른 반응을 보인다.


물론 그 와중에도 평정심을 잃지 않고 관찰하는 쪽도 있으며, 오히려 이러한 상황을 흥미진진하게 바라보는 이들도 있다.


(여기까지 온 이상, 이제 정체를 숨기는 건 불가능하지.)


모두의 관심이 이쪽으로 쏠린 상황이니까.

다이아도 그 사실을 깨달은 듯, 한숨을 한번 푹 내쉬고는 얼굴을 가리던 하얀색 후드를 벗는다.


그러자 모습을 드러내는 푸른색의 머리카락.

신문에서도 봤던 아름다운 외모의 소녀가 여러 감정이 섞인 듯한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모두, 칼날을 거둬주세요. 이 장소에서 소란을 일으키는 건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가 가니까요."

"···알겠습니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단지 적을 배제하려는 행위였으나, 반대로 그렇기에 다이아의 정체가 모두에게 알려지고 말았다.


많은 이들의 시선을 받으면서도,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서서히 호위에게 둘러싸인 한 남학생을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이제 만족해? 그렇게까지 내 정체를 밝히고 싶었어?"

"오, 이렇게 직접 정체를 까발릴 줄은 몰랐는데···. 그건 그렇고, 설마 이런 곳에 왕녀님이 있었을 줄이야."


태연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는 재-현.

그런 여유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다이아는 차가운 표정으로 눈앞의 인물에게 적의를 표했다.


"아니, 진짜로 몰랐다고. 분명 내가 아는 녀석인 줄 알았는데."

"이제 와서 모르는 척을 하겠다? 미안하지만 네가 한 짓은 중범죄야. 여기에 있는 사람들이 전부 증인이라고."


한 나라의 왕녀를 상대로 폭력을 시도했다면, 그야말로 현장에서 잡혀가도 할 말이 없는 상황.


(게다가 호위가 곁에 있는 이상, 무력으로 저항하는 것도 불가능. 도주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겠지.)


"즉, 나를 잡아가겠다는 건가."

"그래. 칠각성이라는 과분한 호칭을 받고 그 명성에 취한 것 같은데, 너는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었어."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주변에 있던 호위들은 검을 치우고는 서서히 그에게 다가가기 시작한다.


설마 이런 식으로 허무하게 막이 내릴 줄이야.

아무리 칠각성이라는 거창한 칭호가 있어봤자 결국 한 명의 학생에 불과하다. 그 사실을 재-현은 망각한 것 같군.


"큭큭···. 졌다, 졌어. 완전히 내 패배야. 설마 이렇게까지 강경하게 나올 줄은 생각도 못했거든. 역시 너는 대단해."

"이번에는 또 무슨 말을 하려고? 혹시 저항할 셈이야?"

"아니, 순수하게 감탄하는 것뿐이다. 그런 대단한 신분을 이용하면, 언제든지 경쟁자를 제거할 수 있다는 거잖아?"


그 말이 끝나자마자, 다이아는 눈썹을 찡그렸다.

듣는 사람을 불편하게 만드는 그의 말투는 자존심이 강한 그녀에게 있어서 매우 거슬리게 느껴질 테지.


"마치 내가 왕녀라는 입장을 악용했다는 것처럼 말하네?"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을 텐데. 이렇게 자신만만한 태도를 보일 수 있는 것도 주변에 호위가 있어서잖아? 실제로 지금까지 네가 스스로 해결한 사건이 뭐가 있는 거지?"


궁지에 몰린 것이 분명함에도 대담하게 웃는다.

오히려 그 말에 표정이 굳어가는 건 다이아 측이며, 재-현이 여유롭게 그녀를 몰아세우는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가게에서도 혼자서 해결하지는 못했으니까.)


"네가 보호를 받는 건 단지 신분이 왕녀라는 이유 때문이지. 하지만 과연 <그랜드 스쿨>에서도 그 방법이 통할까?"

"···고작 그런 궤변으로 여기서 빠져나가려는 속셈이야?"

"아니, 그저 조언을 하나 해주는 것뿐이지. 거기서는 권력을 제대로 이용할 수 없을 테니까. 일단 여기서 나를 배제하는 건 좋은 판단이다."


그 말을 끝으로 재-현은 입을 닫았다.

예상했던 바와 달리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는다. 그저 호위의 지시에 순응하여 행동할 뿐.


잡혀가고 있음에도 표정에 큰 변화는 없으며, 계속해서 아까의 여유 있는 태도를 유지하는 상태.

그에 반해 다이아는 멀리서도 알아챌 수 있을 정도로 동요한 기색을 보인다. 꽤 충격이 컸던 걸까.


(표정만 보면 대체 누가 잡혀가는 건지 모르겠군.)


"안색이 안 좋아 보여. 정말 괜찮은 거야?"

"···됐어. 저런 녀석한테 휘둘릴 생각은 없으니까."


지금껏 계속 상황을 관전하던 연두색 머리카락의 소년이 천천히 다이아를 향해 다가왔다.


그러고 보니 저 녀석은 계속 이상한 사건에 얽히는 것 같군. 공통점으로는 항상 다이아가 연관되어 있다는 것도 그렇고.


"아무리 칠각성이라고 해도 넘지 말아야 할 선은 있어. 재-현은 그걸 인지하지 못했고. 그게 저 녀석의 패인이야."


다이아는 잡혀가는 그를 노려보며 단언했다.

아마 왕녀로서의 입장이 있기에 이런 조치를 취했겠지. 물론 그것이 틀렸다고는 할 수 없다.



"그게 아니라···. 너는 상황을 이대로 끝내도 괜찮아?"

"-뭐?"



하지만 뒤에서 바라보던 학생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봤냐? 결국 말로 안 되니까 권력으로 제압하는 거?"

"아무리 왕녀님이어도···. 근데 그럴 거면 이곳에 왜 온 거지?"

"게다가 먼저 폭력을 쓴 것도 사실 다이아 왕녀 아니야···?"


소란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조금씩 들려오는 내용은 오로지 그녀와 관련된 이야기뿐.


(그것도 우호적인 내용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네.)


"뭐, 뭐야? 지금의 이 분위기는···."

"다른 곳이라면 몰라도 <그랜드 스쿨>에 한해서는 신분이 모든 걸 결정하지 않아. 오히려 객관적인 실력을 더 중요시하지."


거기서 다이아는 의도치 않게 권력을 내세웠다는 건가.

게다가 비율적으로 봤을 때, 이곳은 귀족보다 평민이 더 많은 상황이다. 그녀의 행동을 좋게 볼 수는 없겠지.


"아마 너도 어느 정도는 예상했겠지? 그러니까 정체를 숨기고 이곳에 온 거잖아. 설마 이 정도일 줄은 몰랐겠지만."

"그, 그래도···! 저 녀석이 먼저 잘못을 저지른 건 맞잖아?"

"물론 이 사건을 일으킨 건 재-현이지. 하지만 이 장소에 있는 모두는 네가 어떤 방법으로 이 사건을 해결할지 기대했어."


거기서 다이아가 보여준 행동은 아무런 전략도 없이, 그저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경쟁자를 제거하는 최악의 방식.

허나 그녀에게 있어선 단지 자신에게 폭력을 사용하려는 자를 배제하기 위한 합법적인 행위에 불과하다.


(아무래도 서로의 인식 자체가 달랐던 것 같군.)


"이제 알겠지? 재-현은 널 '권력을 악용하는 왕녀'라는 이미지로 만들고 싶었던 거야. 그래서 이 상황이 벌어진 거고."

"하지만···. 정작 그 방식을 택했던 저 녀석은 잡혀가고 있잖아? 오히려 더 손해만 보는 전략 아니야?"


다이아가 말하자 주변의 학생들도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확실히 대가가 크긴 하지. 지금처럼 잡혀간다면 결과적으로 <그랜드 스쿨>에 입학하는 건 실패하는 셈이니까.


(그렇다면···. 아직도 짓고 있는 저 미소가 단순한 허세라고?)


"뭐야, 왜 갑자기 고민하기 시작한 거지? 분명 나를 잡아가려는 게 아니었나? 역시 혼자서는 아무것도 결정할 수 없나 봐?"

"....."


현재 선택권은 다이아가 가진 상황.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현은 계속해서 그녀를 도발한다. 마치 할 수 있다면 해보라는 듯이.


(···단순한 블러핑? 그게 아니면 따로 속셈이 있는 건가?)


"일단 재-현이 어떤 의도로 이런 짓을 벌인 건지는 알 수 없어. 어쩌면 여기까지 예상하지 못했을 수도 있고."

"···너도 저 녀석이 왜 저러는지 모른다는 거구나."

"응, 그 말이 맞아. 그래도 하나 확실한 것은 여기서 명령할 수 있는 사람은 너밖에 없다는 거야."


호위는 왕녀인 다이아의 말에만 복종한다.

이 사실을 알기에 소년은 거기까지만 말하고는 침묵했다. 이제부터는 온전한 그녀의 선택이라는 뜻.


(만약 그대로 잡아간다면, 재-현의 의도대로 흘러가는 거겠지. 그렇다고 그냥 놔주는 것도 왕녀의 위상에 문제가 될 테고.)


어느 쪽이든 다이아에게 있어선 좋지 않은 전개일 터.

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이윽고 무거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걸음을 멈추세요."



조용하지만 그만큼 깊이가 있는 목소리.

여러 고민 끝에 낸 결론은 재-현의 무례한 짓을 용서하겠다는 의미와도 같았다. 물론 자의는 아니겠지만.


"다이아 님?! 정말 괜찮겠습니까? 이 남자는-"

"다시 한번 말합니다. 걸음을 멈추세요."


다이아의 단호한 대답을 듣고서야 그들은 걸음을 멈췄다.

어째서 이러한 판단을 내린 건지 의문이 들었겠지.


"그를 풀어주세요. 책임은 따로 묻지 않을 테니까."

"···알겠습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닌 다이아의 말이므로 결국 호위는 순순히 재-현을 풀어줄 수밖에 없었다.

정작 이러한 판단을 내린 장본인도 이게 맞는 건지 잘 모르겠다는 혼란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지만.


(이래봤자 저 녀석의 전략을 방어한 것밖에 되지 않아. 차라리 악명을 감수하더라도 잡아들이는 게 더 나았을 것 같은데.)


마음을 더 독하게 먹었다면 어쩌면 가능했을 이야기.

하지만 그녀는 이미 선택했고, 어디까지나 내 생각과 다른 결정을 했을 뿐이다. 확실한 정답이라는 건 없으니까.


결과적으로 재-현은 아무런 손해도 없이 부분적으로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뤘다. 아마 지금도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비웃을 준비를 하고 있을 게 분명···. 어라?


"···잘도 해줬군."


한층 더 날카로워진 눈빛. 위압감을 주는 묵직한 저음.

예상과는 다르게 그가 처음으로 드러낸 감정은 분노였다.


계속 여유 있는 태도를 유지하던 그가 이러한 반응을 보였다는 건, 다이아의 결정은 그가 원했던 선택이 아니라는 뜻.


(본래라면 그대로 잡혀가서 다이아에게 타격을 주는 것이 목적이었는데, 예상치 못한 변수 때문에 실패하게 된 건가.)


그리고 그 변수로 작용한 사람이라는 건-


"···정안섭, 감히 나를 방해했겠다."

"미안하지만 날 탓하지 말아줘. 선택한 건 그녀였으니까."


-계속 다이아를 도와줬던 저 연두색 머리카락의 소년이겠지.


정안섭이라 불린 그는 재-현의 분노에도 여유를 잃지 않았다. 저번부터 느낀 거지만 상당한 수준의 포커 페이스로군.


"그렇다고 해도 놀랐어. 이걸로 화낼 줄은 몰랐거든."

"자, 잠시만! 설마 저 녀석은 그대로 잡혀가려는 생각이었던 거야?! 그게 아니라면 이 상황에서 분노할 이유가 없잖아?"


그녀의 말에 주변 인물들도 웅성거리기 시작한다.


비록 완벽하게 다이아를 몰아세우는 것에는 실패했지만 어느 정도의 성과는 이룬 셈이니까. 잡혀가지 않은 지금이 그에게 있어서 가장 이상적인 상황일 텐데.


"그렇네. 평범하게 생각하면 그 말이 맞아. 하지만 재-현에게는 비장의 무기가 있던 모양이야."

"···이봐, 설마 여기서 그것을 입 밖으로 내뱉을 생각이냐?"


그의 말에 재-현이 처음으로 정색하는 표정을 짓는다.

다이아가 무슨 짓을 해도, 심지어 호위한테 잡혀가던 때에도 계속해서 여유를 유지하던 녀석이 미소를 잃다니.


대체 무슨 정보를 가지고 있길래 저런 반응인 걸까.

그다지 숨길 생각도 없는지 계속 말을 이어가는 정안섭.


"왜냐하면 칠각성은 무조건 <그랜드 스쿨>에 입학하게 되어 있거든. 설령 범죄 행위를 저질렀다고 해도 말이지."

"-!"


이 말에 여관에 있는 모두가 경악하는 반응을 보인다.

아무리 그래도 왕족과 연관된 사건인데, 어떠한 문제도 없이 <그랜드 스쿨>에 입학이 가능하다고?


(애초에 정안섭이 한 말은 사실일까? 일단 저 녀석의 반응을 보면 거짓말 같지는 않은데···.)


"추측건대 아마 재-현은 그대로 잡혀가서 너의 이미지를 완전히 망쳐놓을 생각이었을 거야. 그러고는 태연하게 학교에서 재회할 생각이었겠지."

"하,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저 녀석의 행동이 없던 일로 되는 건 아니잖아! 대체 저 녀석은 무슨 생각으로···."

"거기까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마 졸업과 동시에 죗값을 치를 생각 아니었을까? 그때까지 네가 용서하지 않는다면 말이지."


만약 이 추측이 맞다면 정말이지 터무니 없는 전략이군.

미래의 자신을 고려하지 않은, 말 그대로 도박과도 같은 수다.


가장 무서운 점은 이런 위험한 전략이 방해받았다는 사실에 분노하고 있다는 것. 아마 진심으로 행하려고 했던 거겠지.


"제법이네, 정안섭. 내 계략을 파악할 줄이야."


거기서부터 나는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이 녀석의 사고방식은 위험하다고.


"좋아, 오늘은 이 정도로 끝내지. 남은 시간은 많으니까."

"다시 여유를 되찾았네. 생각이 바뀌기라도 한 거야?"

"어차피 너랑은 다시 보게 될 테니까. 알면서 물어보는 거냐?"


재-현은 가만히 두 사람을 바라보더니, 이윽고 미소를 지었다.

서서히 앞으로 나아가는 발걸음에 주변의 호위들이 움찔거렸지만, 다행히도 그는 정안섭의 옆을 스쳐 지나갈 뿐이었다.


(저 녀석, 이미 여관의 분위기를 장악했군.)



"두고 보라고. 다음에는 직접 네 녀석을 노려주마."

"그건 무섭네. 너를 적으로 대하고 싶지는 않은데."



정안섭은 곤란해하는 표정을 지으며 웃는다.

그럼에도 눈빛은 절대 쉽게 물러나지 않겠다는 듯이 강렬하군. 분명한 건 저 남학생도 만만한 상대는 아니라는 것.


일방적인 선전포고를 마지막으로 재-현은 그 자리를 벗어났다.

남은 사람은 정체가 밝혀진 다이아와 곁에 머무른 정안섭뿐.


"휴, 어떻게든 상황을 넘길 수 있었네. 고생했어."

"....."


다이아는 그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는다.

무언가 고민하는 표정을 짓고 있다는 건, 아직도 자신의 판단에 의문을 가지고 있기 때문인 건가.


지금의 그녀와 얘기할 수 없다고 판단한 건지, 정안섭은 서서히 걸음을 옮겼다. 아마도 혼자 쉴 수 있도록 한 배려겠지.

그러나 노력이 무색하게 그를 제지하는 한 사람이 있었다.


"너, 아까 나한테 거짓말했지."

"···그게 무슨 말이야?"


갑작스럽게 들려온 차가운 목소리에 걸음을 멈춘다.


"분명 너는 재-현이 이런 짓을 벌이는 이유를 모른다고 했지. 그런데 아까는 그 녀석의 전략을 꿰뚫어 봤잖아."

"그건 갖고 있는 정보를 토대로 한 내 나름의 추측이었어."

"그래, 추측이라고···. 사실 중요한 건 그 부분이 아니야. 내가 궁금한 건 어째서 네가 그 정보를 알고 있었냐는 거지."


(이제야 알아차린 건가. 이미 주변 학생들은 알고 있던데.)


물론 나도 그들의 대화를 엿듣고 알게 된 거지만.

다이아가 말한 정보라는 건, 칠각성은 무조건 <그랜드 스쿨>에 입학한다는 부분이겠지. 설령 범죄 행위를 저질렀더라도.


사실 생각해 볼수록 말도 안 되는 규정이긴 하다. 기껏해야 일개 학교에 불과한 <그랜드 스쿨>이 감히 <유메니티>의 법률까지도 넘어선다는 말이니까.


(아마 왕족인 다이아의 입장에서는 더욱 마음에 걸렸겠지.)


"이건 단순히 네가 다른 사람보다 정보를 많이 모아서가 아니야. 여기는 <그랜드 스쿨>에 입학하기 위한 정보를 공유하는 장소. 그런데 어째서 주변 학생들이 네 말을 듣고 경악했을까?"

"···글쎄? 너는 어째서 그런 반응을 보였다고 생각해?"

"아무도 그 정보를 모르고 있었다는 거지. 그 유명한 칠각성에 관한 중요한 정보인데도. 그렇다면 남은 답은 하나야."


거기서 다이아는 한번 말을 멈추고, 서서히 진실을 들이댄다.


"정안섭, 너도 저 녀석과 마찬가지로 칠각성이었던 거잖아? 그렇기에 너희만이 알 수 있는 정보를 말할 수 있던 거지."

"아하···. 그게 너의 결론이구나."


그 말에 주변이 조용해지는 것이 느껴진다.

모두가 그녀의 결론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는 증거.


아마 칠각성의 존재를 알고 있을 다른 학생들과 다르게 나와 다이아는 아무런 정보가 없는 상태. 그렇기에 이번 추측은 순수한 그녀의 능력이라 볼 수 있다.


"대단하네. 이 짧은 시간 동안 거기까지 파악했던 거야? 아까 전의 선택도 그렇고, 굉장한 통찰력을 지녔구나."

"....."


정안섭은 상쾌한 표정을 하며 미소를 짓는다.

정작 다이아는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노려보고 있지만.


(재-현처럼 칠각성이라는 사실을 감춘 채로 접근했으니까. 아무것도 모르는 자신을 갖고 놀았다고 생각하는 건가.)


자존심이 강한 다이아는 남의 도움 따위는 받고 싶지 않은 모양이군. 그것도 같은 칠각성이라면 더욱이.


"아무래도 정식으로 소개하는 게 낫겠지? 너와는 제법 인연이 있었는데, 인사 한번 나눠본 적이 없잖아."

"···딱히 인사는 필요 없어. 알고 싶지도 않고."


도움을 받았음에도 이미 감정이 상했는지 쌀쌀맞게 대하는군.

그럼에도 그는 악수를 청하듯 다이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번에 <그랜드 스쿨>에 입학하는 정안섭이야. 잘 부탁해."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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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스토리 1부 - 흑월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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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뒤처리 (完) 20.07.25 145 0 25쪽
44 뒤처리 (1) 20.07.21 133 0 19쪽
43 결전의 밤 (完) 20.07.19 138 0 26쪽
42 결전의 밤 (5) +1 20.07.10 135 1 22쪽
41 결전의 밤 (4) 20.07.08 141 0 16쪽
40 결전의 밤 (3) 20.07.07 176 0 19쪽
39 결전의 밤 (2) 20.07.02 169 0 20쪽
38 결전의 밤 (1) 20.06.30 164 0 20쪽
37 최악의 재회 (完) 20.06.26 133 0 20쪽
36 최악의 재회 (2) 20.06.20 152 0 16쪽
35 최악의 재회 (1) 20.06.18 154 0 21쪽
34 광란의 입학시험 (完) 20.06.09 135 0 18쪽
33 광란의 입학시험 (5) +1 20.06.04 150 1 15쪽
32 광란의 입학시험 (4) 20.05.24 150 0 15쪽
31 광란의 입학시험 (3) 20.05.17 163 0 15쪽
30 광란의 입학시험 (2) 20.05.13 172 0 17쪽
29 광란의 입학시험 (1) 20.05.08 183 0 16쪽
28 밑거름 (完) 20.05.03 171 0 17쪽
27 밑거름 (2) 20.04.28 186 0 16쪽
26 밑거름 (1) 20.04.25 200 0 14쪽
25 외전 1. 밤늦게 생긴 업무 20.04.23 182 0 9쪽
24 심리전 (完) 20.04.21 172 1 19쪽
23 심리전 (1) 20.04.18 193 0 15쪽
22 흔들리는 신뢰 (完) 20.04.16 171 0 16쪽
21 흔들리는 신뢰 (2) 20.04.14 199 0 3쪽
20 흔들리는 신뢰 (1) 20.04.11 291 0 21쪽
» 유망주들 (完) 20.04.09 329 0 24쪽
18 유망주들 (1) 20.04.07 428 0 20쪽
17 나쁜 징조 (完) 20.04.04 563 0 26쪽
16 나쁜 징조 (2) 20.04.02 448 0 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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