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이야기 제 1장 - EP1.낙화유수[落花流水] : (44)웃음의 의미(03)
“ …아니. 야, 준비하고 오라 했더니 그 꼴은 뭐야? ”
루위니스가 진심으로 기분이 나쁜 듯 인상을 찌푸리며 한 마디 툭 던졌다. 허리를 넘어서는 은발의 가발을 쓴 루위니스는 가볍게 하얀 민소매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시온은 양 갈래로 묶은 검은 색의 가발에 옅은 화장을 했고 루위니스와 맞추기라도 한 듯 하얀 민소매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 그리고 옷이 그게 뭐야? 나랑 쌍둥이 하고 싶어? ”
“ 머리는 줄리아가 해 준거야!! 옷도 네가 이거 입을 줄 내가 알았어? ”
“ 당장 갈아입고 와! ”
“ 싫어!! 너 나랑 같은 옷 입은 거 기분 나빠? ”
“ 당연한 거 아니야? ”
사이가 좋아졌나 싶더니 또 다시 말도 안 돼는 이유로 투닥 거리자 줄리아는 한숨을 내 쉴 뿐이었다. 줄리아는 검은 색 정장에 반팔 블라우스, 붉은 색 브로치로 간편하게 입었다. 목 뒤를 덮는 금발의 머리카락은 줄리아의 보랏빛 동공을 더 돋보이게 해주었다.
“ 메튜는 동행 안 하나요? 그보다 아까 원피스는 입지 않을 거라 하지 않았나요? ”
“ 이, 이건…바지가 안 보여서. 그리고 굳이 도서관에 메튜가 따라 올 필요는 없어. ”
“ 갈 겁니다. ”
줄리아의 물음에 루위니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대답한 그 순간, 계단을 뛰어 올라온 메튜가 미간을 좁히며 대꾸했다.
“ 이럴 때는 쉬어도 좋잖아? ”
“ 시온과 줄리아랑 함께 하시더니 마음이 조금 여유로워 지신 거 같아서 말씀 드리는데, 시온과 줄리아도 엄연히 현상금이 걸린 수배자입니다. 그래서 저렇게 여장 남장 하는 거고요. 루윈님은 더 말씀 드리지 않아도 충분하겠죠? ”
메튜의 단호한 태도에 루위니스는 입을 삐죽 거렸다.
“ 이럴 때 잠이라도 푹 자지 그래? 신경 써줘도 거절이야. ”
“ 메튜. 저랑 루윈이라면 시온님 하나쯤은 충분히 구하고도 남아요. 루윈의 호의를 받아 들여 보는 건 어때요? ”
문에 기대어 팔짱을 끼고 상황을 지켜보던 줄리아가 살짝 부드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하자 루위니스의 표정이 밝아졌다. 반대로 시온은 자신을 무시하는 발언에 약간 미간을 찌푸렸다.
“ 그래. 내 호의 거절하지 마. 안 그러면 나 좀 심난할 거 같아. ”
그리고는 곧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메튜에게 안겼다. 시온은 별로 그런 모습 보고 싶지 않다는 듯 혀를 찼고 메튜는 루위니스의 어리광에 어쩔 줄 몰라 했다. 메튜에게 조금씩 먹히는 것 같자 루위니스는 더 메튜를 꼬옥 안더니 얼굴을 들어 메튜를 바라보았다.
“ 아무 일 없을 거야. 오늘은 컨디션도 괜찮고! 루프랑 사이좋게 있어~알았지? 명령이야. ”
그리고는 싱긋 웃고는 시온과 줄리아에게 다가갔다. 메튜는 무어라 반박하고 싶어 했지만 루위니스의 단호한 태도에 결국 양보했다. 그렇게 나간 세 명은 준비 된 마차에 타고 곧 출발했다. 멀어지는 마차를 바라보는 메튜의 표정은 굉장히 불안하고 떨떠름해보였다.
마차가 저 언덕 너머로 사라지자 그제야 메튜가 한숨을 살짝 쉬며 뒤를 돌았다. 언제부터 와 있었는지 루프가 메튜를 바라보고 있었다.
“ 용케도 저 셋을 보내줬군. ”
“ 그렇게 보내고 싶지는 않았다. ”
“ 줄리아의 말대로 루윈과 줄리아라면 충분히 시온 하나쯤은 구하고도 남잖아. ”
메튜를 이해 못하겠는지 루프가 곧 등을 돌리며 말했다.
“ 너도 그렇게 생각하나? ”
메튜의 물음에 루프는 고개를 돌려 메튜를 바라보았다.
“ 내가 걱정하는 건 시온이 아니야. 셋 다 상대할 수 없는 적이 이럴 때 나타나기라도 한다면 어쩌려는 거지? 다들 요새 너무 안일하다는 생각이 안 드나? 너는. ”
그렇게 말하며 메튜는 루프를 지나쳐 먼저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약간 기분이 저조해보이는 메튜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메튜는 코웃음을 쳤다.
“ 저 셋은 발을 맞추며 신뢰감을 쌓을 필요가 있단다. ”
마차를 타고 저택과 가까운 마을로 20분 정도 타고 들어와 입구에서 내렸다. 먼저 내린 루위니스가 나중에 내리는 줄리아를 향해 손을 내밀자 줄리아는 그런 루위니스를 빤히 바라보다가 무시하고는 곧 내려왔다.
“ 사람들의 시선을 조금 더 의식하시죠? 그 행동은 제가 취해야 할 행동입니다. ”
“ 아, 맞다. ”
“ 그래서 우리 어디로 가? ”
광장을 구경하며 시온이 입을 열었다.
“ 저기 큰 건물 보여? 왕궁처럼 하늘색의 둥그런 지붕이 씌워진 건물. ”
“ 조금 걸어야 겠네요. ”
“ 응. ”
셋이서 오순도순 걸어가다가 구두가 불편하지 않는지 곧 시온이 발을 헛디뎌 휘청였다. 시온 옆에서 같이 발 맞추며 걸어가던 줄리아가 바로 팔을 뻗어 시온을 잡아 주어 다행이 시온은 넘어지지 않았지만 앞에서 걷던 루위니스를 밀어버리는 바람에 루위니스는 엎어지고 말았다. 쿵 소리와 함께 루위니스는 두 무릎이 아픈지 주저앉은 채 몸만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이들에게만 집중 되어 있어서 루위니스는 함부로 화를 낼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시온은 루위니스가 화낼까봐 두려운지 줄리아의 팔에 매달린 채 루위니스에게 다가가지도 못하고 바라보기만 했다.
“ 괜찮아? 이, 이디스! ”
지난 날 루위니스가 가르쳐 준 가명을 줄리아가 어색하게 불렀다. 그 때였다. 바로 옆 골목에서 계속 지켜보던 한 남성이 곧 다가와 루위니스 앞에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손을 내밀었다. 제대로 부딪혔는지 눈물이 찔끔 나던 루위니스가 고개를 갸웃 거리며 앞을 바라보았다.
시원한 연한 하늘색의 머리카락에 검은 눈동자를 가진 미성의 남자가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 이디스양? 실례가 아니라면 제가 일으켜 드려도 될까요? ”
“ ……아. ”
당황한 루위니스가 어쩔 줄 몰라 하다가 곧 조심스레 손을 내밀려는 순간, 줄리아가 시온의 팔을 놓고는 곧 다가와 루위니스 옆에 무릎 꿇고 앉아 부축을 도왔다.
뒤에서 바라보는 시온은 재미있는지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바라보았고, 줄리아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루위니스는 당황한 듯 했다.
“ 이디스. 앞으로 조심하세요. ”
“ 아…응. 미안. ”
그러나 자리에서 일어난 루위니스의 두 무릎은 이미 까져서 피가 제대로 흐르고 있었다. 루위니스의 상처에 시온은 굉장히 놀란 표정을 지었고 루위니스의 입술은 살짝 실룩 거렸다.
줄리아도 루위니스의 성격을 아는지라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 피가 많이 나는데 걸으실 수 있겠습니까? 이디스양! ”
남자가 걱정하며 루위니스를 챙기자 줄리아는 매서운 표정으로 남자를 바라보았다.
“ 이디스의 이름, 함부로 부르지 마십시오. 이래보아도 우리는 몬드 왕의 초대로 잠시 거하게 된 것이니 별 다른 소란을 일으키고 싶지는 않습니다. 물러가세요. ”
그리고는 루위니스의 손을 잡고 먼저 걸어갔다. 뒤에서 재미있는 표정으로 바라 본 시온은 곧 남자와 눈이 마주치자 어색하게 손으로 입을 가려 호호 웃으며 얼른 뒤 따라 갔다.
남자는 무언가 아쉬운지 세 사람의 뒷모습을 계속 바라보았다.
“ 줄리아, 너 박력 있더라~ ”
도서관 입구를 향해 계단을 오르며 시온이 놀리듯이 얘기했다. 줄리아가 뭐라 대꾸하기도 전에 여전히 줄리아의 손을 잡은 채 절뚝거리며 계단을 오르던 루위니스가 곧 미간을 찌푸렸다.
“ 너 진짜 가만 안 둔다. ”
“ 그건 실수였어. 그래도 멋진 남자의 호의도 받고 좋았잖아? ”
시온이 어색하게 웃으며 루위니스를 위로 아닌 위로를 해주었다. 그러나 그 위로는 오히려 루위니스의 심기를 더 불편하게 할 뿐이었다. 높은 계단을 올라가면서 줄리아는 자신을 사이에 두고 신경전을 벌이는 두 사람을 무시하다가 곧 으르렁 거리는 루위니스를 바라보았다. 줄리아가 자신을 빤히 쳐다보자 루위니스가 당황해하며 줄리아를 바라보았다.
“ 왜, 왜 그렇게 빤히 쳐다보는 거야? ”
“ 평소에도 예쁘다고는 생각했지만, 확실히 아름답네요. ”
줄리아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루위니스는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 시온은 자신이 얘기했을 때랑은 전혀 다른 반응이자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루위니스를 바라보았다.
“ 저는 몰두하고 싶은 일이 생기면 혼자 정신없이 몰두하는 버릇이 있어서, 괜히 루윈과 시온님 둘만 놔두었다가는 무슨 일이 생길지 몰라서 걱정되네요. ”
“ 난 왜? 사고는 항상 저 녀석이 쳤잖아. ”
곧 루위니스가 미간을 찌푸리며 시온을 바라보자 시온의 미간도 좁아졌다.
“ 아까만 해도 그 남자가 적극적으로 이디스의 호감을 사려고 하지 않았습니까? 도서관도 예외는 아니겠죠. 특히나 이렇게 큰 왕립 도서관이라면. ”
“ 걱정 하지 마. 나도 단호하게 나올 수 있으니까. 한, 두 번도 아니고. ”
그리고는 계단을 다 올라와서는 넓게 펼쳐진 정원을 바라보았다. 정원에는 띄엄띄엄 벤치들이 배치되어 있었고 사람이 없는 쪽으로 줄리아의 손을 여전히 잡은 채 걸어갔다. 시온은 손잡은 두 사람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 시온! 같이 가! ’
‘ 시온, 줄리아랑 손잡고 와. ’
‘ 알았어! 자, 줄리아! ’
그리고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그 때는 무엇이든 할 거 같았고, 무엇이 되든 언제나 함께라면 무서울 건 하나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잃은 것도, 변한 것도 너무나 많았다. 이따금씩 생각나는 나날들. 아니, 매일 매일 생각이 난다.
사실 처음에 줄리아보고 떠나라고 한 건 자신이었지만 정말 그녀가 떠나길 바랐을까?
“ 루윈? ”
“ 여자애가 두 다리에 피를 계속 흘린 채 다니면 별로 보기 안 좋을 거 같아서.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어쩔 수 없지. ”
그리고는 벤치에 앉더니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루위니스 주변으로 은은한 에메랄드빛이 보였다. 에메랄드빛이 점점 사라지면서 곧 루위니스의 두 다리에 난 상처도, 피도 사라졌다.
“ 아플 때도 도움 받으세요. 당신 걱정하는 사람이 둘이나 있는데. ”
“ 하지만 나를 낫게 해 준다는 건 이 아이들의 생명을 나눠 받는 거라서, 시들어버리는 거 웬만하면 보고 싶지 않아. 잘 먹히지도 않고. ”
루위니스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약간 축 쳐진 꽃들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그러다가 곧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았다. 다가오지 않은 채 무표정으로 자신과 줄리아를 바라보는 시온의 낯선 모습에 루위니스의 얼굴에 곧 웃음기가 사라졌다.
여전히 잡고 있는 줄리아의 손. 서로를 애틋하게 생각했던 줄리아와 시온. 줄리아를 지키기 위해 자신과 함께 했던 시온.
“ 어…. ”
당황한 루위니스가 무어라 말을 하고 싶어 입을 열었다. 곧 줄리아가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 여기 생각했던 것 보다 굉장히 크고 넓은 것 같아. 얼른 구경하자! ”
줄리아가 돌아보자 시온은 곧 평소와 같은 해맑은 웃음을 지었다.
“ 아, 그런데 부탁이 하나 있어. ”
도서관 회전 문 앞에서 루위니스가 다급하게 줄리아와 시온의 팔을 잡으며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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