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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하파의 서재입니다.

허균의 슬기로운 조선 혁명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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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하파 아카데미 작가
작품등록일 :
2024.08.14 13:14
최근연재일 :
2024.09.18 2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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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24.08.15 2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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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5화. 너, 너무 속이 안 좋아서

DUMMY

5화. 너, 너무 속이 안 좋아서




따그닥 따그닥.


허봉의 품에 안겨 고삐를 바짝 쥔 나는 슬쩍 뒤를 돌아봤다.

유정의 반질반질한 머리 위로 반사된 햇빛에 절로 눈이 감긴다.

아미타불. 이런 게 바로 부처님의 위광이란 건가.


‘사명대사(泗溟大師)를 여기서 만날 줄이야.’


유정의 또 다른 이름은 사명대사다.

임진왜란 당시 의병을 이끌고 왜적과 싸우고,

대일 강화 조약 등 공훈을 맺은 이 시대의 진정한 영웅.

그는 이달, 류성룡과 함께 허균의 세 스승 중 한 사람이었는데, 이게 다 허봉의 인적 네트워크의 힘이다.

세 사람 모두 허봉의 친우였으니까.

지금은 그저 거구의 승려일 뿐이지만, 그의 진가는 시간이 흐를수록 빛을 발할 터.


유정은 내 시선을 눈치챘는지 나를 보며 씩 웃어주었다.

나 역시 빙그레 웃으며 생각했다.


‘왜 그가 우리와 함께하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든든하네.’


한양까지 가는 길은 무척이나 고되고 험하다.

언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하지만 저렇게 기골이 장대한 자가 파티원으로 함께 하고 있으니 미치지 않고서야 우릴 건드릴 자는 없겠지.

실로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

나는 허봉에게 넌지시 물었다.


“형님.”

“듣고 있으니 말하거라.”

“스님하고는 어떻게 아는 사이세요?”

“유정 스님 말이냐? 오래전부터 알던 사이다. 과거 시험 준비를 하며 한양에서 함께 지냈지.”


역시 허봉. 인맥이 장난이 아니다.

말년에 율곡 이이를 탄핵했다가 역관광을 당하긴 했지만,

아무튼 그의 넓은 인맥은 내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앞으로도 요긴하게 써먹어야지.

그러냐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른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임금님께선 왜 저를 부르신 걸까요?”

“그게 말이지.”


허봉은 왜 선조가 나를 한양으로 소환하는지에 대해 설명했다.

강원도관찰사가 올린 장계가 조정에서 화제를 모으면서, 임금께서 직접 데려오라는 명을 내리셨다며 말이다.


“나도 처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땐 두 귀를 의심했단다. 여섯 살 아이가 사서삼경을 다 떼었다고? 심지어 그게 내 친동생이라고? 하하. 그런데 균아. 그게 진정 사실이냐? 가급적 빨리 데려오라는 명 때문에 사실을 확인할 겨를조차 없었구나.”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 치의 거짓 없는 사실이에요.”

“만약 그게 과장된 소문이라면 이건 임금을 기만한 중차대한 범죄다. 잘못하다가는 가문에 큰 위협으로 다가올지도 모를 일이지.”


허봉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묻자, 나는 방긋 웃으며 말했다.


“그럼 형님께서 직접 물어보세요. 뭐든지 답할 자신이 있으니까요.”

“그래?”


허봉은 잠시 고민하는 듯싶더니,


“자왈, 학이시습지 불역열호 유붕자원방래 불역낙호 인부지이불온 불역군자호(子曰,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人不知而不 不亦君子乎)라고 하셨단다. 이게 무슨 뜻이지?”


이건 뭐 쉬워도 너무 쉽네. 지체없이 답했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기쁘지 아니한가? 벗이 있어 먼 곳으로부터 찾아오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더라도 노여워하지 아니하면 또한 군자가 아니겠는가라고 하셨어요.”


청산유수처럼 나온 답변.

허봉은 만면에 미소를 보이면서도 또다시 나를 시험했다.


“관관저구 재하지주 요조숙녀 군자호구(關關雎鳩 在河之洲 窈窕淑女 君子好逑). 이건 어디서 나왔으며 무슨 뜻이지?”

“시경의 관저편(關雎篇)에 나온 내용이네요. 저 멀리 들리는 저어새의 울음소리, 강의 섬에 있네······.”


내가 논어는 물론 시경에 나온 내용까지 빠짐없이 답하자 허봉은 날 내려다보며 큰 소리로 웃었다.


“하하. 뭐야? 삼경까지 다 외웠단 말이냐? 손곡에게 듣기로는 사서까지만 뗐다고 들었는데, 강원도관찰사가 올린 장계가 헛소문이 아니었구나! 대단하다. 대단해!”


이를 옆에서 지켜보던 유정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만족감을 표했다.


“어린아이가 대단하군. 과연 문장가로 이름 높은 허씨 집안의 아일세.”

“암. 이 일로 아버님의 어깨도 많이 뿌듯하시겠어. 나도 정진해서 어서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가야지 안 되겠군. 이러다간 동생에게도 추월당하겠는데? 하하.”


말씀 중에 실례지만, 형님.

저는 분명 형님을 추월해서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갈 겁니다.

제 목표는 영의정이니까요.

물론 이걸 지금 굳이 말할 필요는 없겠지.

입을 꾹 다물고는 고삐를 잡은 손에 잔뜩 힘을 준다.

이것 참. 떨어질까 봐 무서워 죽겠다.


#


말을 타고 있다고는 하지만, 여행길은 고됐다.


“형님. 잠시만 쉬었다 가요.”

“또?”

“너, 너무 속이 안 좋아서. 우욱······.”


걷는 것보단 낫다지만, 말이 편한 이동 수단은 결코 아니다.

온몸의 관절이 비명을 질러댄다.

게다가 내 몸은 이제 겨우 여섯 살.

만으로는 네 살배기에 불과하다.

말을 타고 대관령을 넘는 건 어린 내게 중노동이나 마찬가지였다.

허봉과 유정은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말을 세웠다.


“오늘은 이쯤에서 멈추는 게 좋겠군.”

“노숙을 하자는 말인가?”

“그러지 않으면 한양에 도착하기도 전에 병이 날 걸세.”

“이런. 한시라도 빨리 주상께 균이를 보여드리고 싶은데······.”


허봉은 아쉬워하면서도 무리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한 누이의 얼굴이 떠올랐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다음 마을까지는 거리가 머니 오늘은 꼼짝없이 노숙해야겠군.”

“나는 주변에 먹을 게 있는지 찾아볼 테니, 자네가 동생을 좀 보살피고 있게나.”


유정은 그 말을 끝으로 쏜살같이 몸을 날려 어디론가로 사라졌다.

허봉 또한 말에서 내려 주변을 정리했다.

반면, 탈진한 나는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놀란 돌이가 날 보살핀다.


“괜찮으십니까, 데련님!”


괜찮을 리가 있나. 죽겠다, 진짜.

허봉이 웃으며 묻는다.


“많이 힘들더냐?”

“후우. 네에. 정말 죽는 줄 알았어요.”

“하하. 고생 많았다. 그래도 앞으로 넘어야 할 길이 태산이다. 정신 단단히 차리는 게 좋을 게야.”


말을 타본 건 이번이 생전 처음이다.

무과의 시험 과목인 말 타고 활을 쏘는 건 도대체 어떻게 하는 걸까?

상상조차 가지 않는다.


‘한양에 도착하기 전에 내가 먼저 뻗을지도 모르겠군.’


나는 숨을 고르며 한양에 도착하면 임금에게 어떤 모습을 보이면 좋을지 고민했다.


‘사서삼경이야 이미 머릿속에 빠짐없이 저장되어 있으니 아무런 문제가 없다. 하지만 선조가 날 보자고 한 이유가 단순히 이걸 확인하기 위해서만은 아닌 것 같단 말이지.’


그는 늘 사람들의 숨은 뜻을 파악하려고 애썼다.

이순신을 갑작스레 체포했던 것도, 그가 자신에게 위협이 될까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조금이라도 불필요한 말을 했다가는, 내가 선조의 의심 대상이 될지도 모른다.


‘공보다는 과가 많은 왕이지. 이순신을 비롯하여 신하들에 대한 불신이 가득했고, 전쟁이 터지자 자기 혼자 살겠다고 명나라로 도주할 계획까지 세웠으니까. 공신 책봉 문제를 비롯한 줏대 없는 행보 또한 욕을 먹어도 싸다.’


그럼에도 정무 감각은 꽤 좋은 편이라 나름 신권을 억제하며 강력한 왕권을 확보한 왕이기도 했다.


‘전쟁 대비나 전후처리 과정도 그럭저럭 나쁘진 않았고.’


문제는 그의 성격이었다.

그는 의심이 많고, 자주 변덕스러운 모습을 보였다.

밉보였다가는 자신은 물론 가문에까지 불똥이 튈 가능성이 있다.

그렇게 되면 영의정을 목표로 하는 내 계획에 차질이 생길지도 모를 터.

그렇다고 너무 잘 보여도 문제다.


‘괜히 어렸을 적부터 찍히면 오성과 한음으로 유명한 이항복과 이덕형처럼 평생 노예처럼 부려 먹힐지도 모른다. 그건 절대 안 될 일이지.’


쉬고 싶으니 영의정 좀 그만하고 싶다고 날이면 날마다 사표를 던져도 조선시대 왕들은 이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넘겼다.

그야말로 왕의 노예.

이 말인즉, 그의 앞에서 지식을 드러내는 건 적당히 하는 게 좋을 거라는 뜻이다

사서삼경에 대한 해석은 하되 그 이상의 추가 견해는 덧붙이지 않는 게 현명할 터.

그래야 선조에게 어린 시절부터 찍혀 요주의 관리 인물에 추가되는 걸 막을 수 있을 것이다.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는 사골곰탕이 될 때까지 우려 먹힐지도 몰라.’


온몸에 닭살이 인다.

그것만큼은 절대 있어선 안 된다.

영의정도 좋지만, 그건 선조 때가 아니라 조금 더 나이가 든 뒤 광해군 때 달성할 업적이니까.


슬쩍 품 안에서 소학 책을 꺼내곤 이를 활짝 펼쳐 보였다.

그 모습을 보고 허봉이 또다시 웃음을 터트린다.


“하하. 미리 예습하는 것이더냐? 그런데 왜 사서삼경이 아닌 소학을 보는 게야?”

“기초가 튼튼하지 않으면, 아무리 더 많은 학문을 익히더라도 모래 위에 지은 성에 불과할 테니까요.”

“과연. 네 말이 맞다. 그래서 소학을 그렇게 열심히 보는 게로구나. 손때가 가득한 게 참으로 보기 좋은 모습이다.”


허봉은 고개를 끄덕이며 만족감을 표했다.

물론 내가 그런 목적으로 책을 펼친 건 아니다.

망령공과 이 사태에 관해 이야기를 나눌 필요가 있었으니까.

어찌나 급히 올라가야 한다고 서두르기에 아무런 대비 없이 몸만 훌쩍 떠난 상황이다.


그런데 허봉 앞에서 당당히 책을 펼치면 그가 눈치채지 않겠냐고?

괜찮다. 몇 번이나 다른 사람들을 대상으로 확인해 봤는데 이건 내 눈에만 보이는 현상이었으니까.

정확한 표현은 아니겠지만 나만의 상태창 비스름한 것이고 봐도 무방하다.


‘이봐요 망령공. 이게 대체 무슨 상황입니까?’


이번만은 특별히 내 마음을 읽는 걸 허락했다.

그가 쓴 글씨만 안 보일 뿐 소리 내어 말하는 건 모두의 귀에 잘 들릴 테니 말이다.

금세 책의 글씨가 변형된다.


<나도 모르는 일일세. 주상께서 부르시다니. 원래라면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네>


내 생각도 그렇다.

왕이 주변에 있는 어린 천재의 재능을 알아보고 특별히 주목하거나 발탁하는 경우는 있지만, 이렇게 왕궁으로 부르는 건 처음 듣는 일.


‘왕은 대체 무슨 생각인 걸까요?’

<나도 모른다. 하지만 조심하는 게 좋을 걸세. 그분은 의심이 많고, 예전에도 어린 천재를 지나치게 높이 평가하다가 그 재능을 두려워하게 된 일이 있었다네. 그의 호의가 언제든 경계로 바뀔 수 있음을 잊지 말게>


에휴. 별 도움이 안 되네.

책을 접고는 다시 품 안으로 집어넣는다.

바로 그 순간.


부스럭, 부스럭.


수풀 너머에서 무언가 거대한 존재가 서서히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바람이 멈추고, 새들도 날아가지 않는다.

이내, 나뭇잎이 흔들리며 웬 호랑이 한 마리가 튀어나왔다.

무슨 고양이 새끼 튀어나오듯 아무렇지도 않게 등장한 호랑이.


녀석의 눈은 칼날처럼 날카로웠고, 우리를 꿰뚫어 보듯 노려보았다.

가슴이 쿵쿵 울리며 숨조차 제대로 쉬어지지 않는다.

호랑이의 입이 벌어지며 드러난 날카로운 송곳니가 반짝 빛나는가 싶더니,

거친 숨을 내뱉으며 거침없는 포효를 내질렀다.


“어흥!!”


천지를 진동케 하는 강렬한 울음소리.

음메, 기죽어.

아직 한양에 도착하지도 않았는데 벌써 게임 오버인 것인가.

등 뒤로 식은땀이 주르륵 흐른다.


마, 망령공. 당신의 도술로 좀 어떻게 안 되겠소?

하지만 도저히 품 안에서 소학을 꺼낼 용기가 나지 않는다.

몸을 조금만 움찔거리기만 하면 곧장 날 향해 달려들 기세였으니까.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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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12화. 오오. 어쩜 이런 식감과 맛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6 24.08.22 1,938 57 12쪽
11 11화. 내 누이께 드릴 말씀이 있소 +4 24.08.21 1,968 58 12쪽
10 10화. 형씨는 뉘신데, 그런 말을 하는 거요? +4 24.08.20 2,003 54 12쪽
9 9화. 혹시 초당 두부에 대해 아세요? +5 24.08.19 2,011 58 13쪽
8 8화. 대체 뭘 할 생각이더냐. 어른들 앞에서 무엄한지고! +12 24.08.18 2,044 60 12쪽
7 7화. 우 우 풍문으로 들었소~ +5 24.08.17 2,079 60 14쪽
6 6화. 내가 사주를 좀 볼 줄 아는데 +8 24.08.16 2,138 59 12쪽
» 5화. 너, 너무 속이 안 좋아서 +7 24.08.15 2,162 55 12쪽
4 4화. 벌써 이 시대 사람이 다 되었구려 +7 24.08.15 2,257 60 14쪽
3 3화. 저랑 함께 이걸 만들어 보시렵니까? +4 24.08.14 2,393 68 12쪽
2 2화. 그것 이외에 추가 보상은 없나요? +8 24.08.14 2,832 65 15쪽
1 1화. 네가 정말 그렇게 자신만만하다면 어디 한 번 해보거라 +5 24.08.14 3,914 67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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